무상보육 vs. 무상급식 논란 쟁점정리

Posted at 2014. 11. 25. 15:19// Posted in 시사

1) 문제의 발생원인?

- 2011년 누리과정 확대 결정 시 전 정부에서 영유아보육법 및 유아교육법 시행령에 누리과정 예산을 지방교육재정교부금에서 지원한다는 조항을 삽입함. 원래 보육관련 예산은 유치원(교육부)과 어린이집(복지부)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양자에 대한 예산을 모두 교육청에서 부담하는 것으로 바뀐 것임.

- 당시에도 기재부와 교육부 간 협의가 있었을 뿐 지방교육청과 협의하지 않음.

- 이러면 어떻게 하냐는 지적에 대해서는 앞으로 세수 확대로 인해 지방교육재정교부금(내국세의 20.27% + 교육세 전액)이 매조 3조원 가량 늘어날 것이므로 예산 문제는 없다고 함(교육부).

- 그러나 실제로 교부금은 2013년에 1.6조 늘었을 뿐, 2014년에는 거의 제자리, 2015년에는 1.35조 감소

- 누리과정은 2012년 5세를 시작으로 2013년부터 3~5세로 확대되었으며, 시도교육청의 예산부담은 2012년 5세, 2014년 4~5세, 2015년 3~5세 전액으로 점차 확대됨. 누리과정 전체 예산은 연간 4조원 정도이며, 이 중 원래 교육청 부담이 아니었던 어린이집이 2.1조

- 2015년 교육재정 교부금은 39조. 따라서 누리과정 전체 예산이 10%를 조금 넘으며, 어린이집이 5%를 넘는 상황


2) 정부의 입장?

- 정부는 법(정확하게는 시행령)에 누리과정 예산은 지방교육재정교부금에서 조달하게 되어 있으며, 교부금이 지급되고 있으니 문제 없다는 입장. 그러면서 엉뚱하게 (이 건과 관계가 없는) 무상급식 예산은 법적 근거가 없으니 이걸로 메우라는 식임.

- 사실 시행령에서 누리과정 예산을 교육교부금에서 조달하게 한 것 자체를 법적 다툼의 여지가 있음. 법에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임이라고 명기한 것은 시행령이 위반한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없지 않음.

- 시행령을 있는데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위의 발생원인에서 본 것처럼, 문제의 본질은 그동안 교육청의 사업이 아니었던(그리고 엄밀히 말해 어린이집 같은 경우 교육청의 사업일 근거가 없는) 것을 교육청으로 넘기면서 교육청 예산 증액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이 원인임. 정부의 '교부금이 늘어난다'는 예상이 전혀 틀렸음이 밝혀졌으면, 이에 대한 대안을 내놓아야 하는데 이미 법(시행령)에 박혀 있으니 배째라는 입장임.


3) 대통령 공약?

- 대통령 후보 시절 공약집에 "3~5세 누리과정 지원비용 증액"을 공약으로 명기.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독립성을 고려할 때 이는 당연히 중앙정부에서 지원을 증액하겠다는 입장으로 봐야 함. 그러나 증액하지 않음.

- 2013년 5월 공약가계부를 제시할 때도 "누리과정에 6조5000억 원을 투입해 영유아 보육료 지원대상을 2017년까지 138만 명으로 확대한다"고 중앙정부의 증액을 약속

- 지금은 대통령은 그냥 조용히 계시는 중.


4) 무상보육 vs. 무상급식?

- 무상보육과 무상급식은 다른 정책. 이 둘을 연계할 이유가 없음. 이것을 연계하는 것은 억지임.

- 어느 정책이 더 필요하고 중요한가는 가치판단 문제라고 보고 논의에서 배제한다면, 교육청 사업과 더 관련있는 것은 무상급식. 적어도 어린이집의 누리과정 지원보다는 무상급식이 분명히 교육청 사업과 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

- 무상보육은 법적 근거가 있고 급식은 없다는데 급식도 지방조례 등으로 규정되어 있음. 이것을 근거없다고 하는 것은 지방자치제에 대한 현 정부의 낙후된 인식의 반영임.

- 두 정책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를 따지고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은 필요한 작업일 수 있음. 그러나 이런 논의없이 중앙정부 사업이자 대통령 공약을 지방교육청으로 떠넘기고 너네 정책의 예산을 빼서 여기에 써라고 말하고 있는 상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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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에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칼럼'으로 실린 글.

이 글을 낸 바로 그 날, 예상대로 부양의무제를 약간 완화하는 수준에서 여야간 합의가 이루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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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생활보장법 개정이 눈앞에 다가왔다. 지난해 5월 제출된 새누리당 유재중 의원안을 기초로 국회에서 지난 11월 10일에 이어 17일에도 법안심사소위가 열린다.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는 이미 정부안이 제2, 제3의 세 모녀 죽음을 막을 수 없는 반쪽짜리 방안임을 지적한 바 있다. 정작 가장 본질적이고 시급한 문제인 수급자 선정기준을 내버려두고 급여체계 개편에만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 박근혜표 기초생활보장법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아직도 기회가 남아 있다. 다행히 법안심사소위에서 부양의무제가 핵심 쟁점으로 부각되어 있다. 비록 정부안이 급여체계 개편 위주의 내용일지라도 부양의무제만이라도 제대로 개선된다면 큰 진전이다. 많은 시민단체가 지적해온 것처럼 부양의무제는 빈곤의 사각지대를 만들어내는 핵심적인 요인이기 때문이다.


턱없이 미흡한 부양의무제 완화 방안


정부가 제시한 법안은 개별급여로의 급여체계 개편 외에 부양의무자의 소득기준을 완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내용을 잠깐 살펴보자. 현재 부양의무제는 부양의무자의 소득이 본인가구와 수급자 가구의 최저생계비를 합산한 값의 130%(4인 가구 기준 290만 원)를 넘으면 '부양의무 있음'으로 판정하여 수급권을 박탈한다(취약계층은 185%. 4인 가구 기준 413만 원). 또한 부양의무자 가구 최저생계비의 130%(4인 가구 기준 212만 원)가 넘는 소득이 있을 경우는 '부양의무 미약'으로 판정하여 일정액의 부양비를 수급자의 소득으로 평가한다(이를 간주 부양비라고 하는데, 부양의무자가 아들이라면 기준소득 초과액의 30%를 간주부양비로 인정한다. 예를 들어, 아들의 소득이 312만 원이라면 기준금액 212만 원을 넘는 100만원의 30%인 30만 원을 -실제 부양이 이루어지는지와 무관하게- 수급자가 부양받는 것으로 간주한다). 


정부의 개정안은 이 소득 기준을 높임으로써 부양의무제를 완화한다. '부양의무 있음'의 기준은 중위소득에 수급자 가구 최저생계비를 더한 금액으로 하고(4인 가구 464만 원), '부양의무 미약'의 기준은 부양의무자 가구 최저생계비의 185%(4인 가구 302만 원)로 조정한다. 이 경우 연간 9100억 원의 예산이 추가 투입되어 약 12만 명을 추가 보호할 수 있다. 여기에 지난 10일에 있었던 법안심사 소위에서는 야당의 추가적 완화 요구에 정부는 2000억 원을 추가로 투입하여 3만 명 정도를 더 보호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정부의 개정안은 충분한 것일까?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우리 사회에서 실제로 빈곤함에도 사각지대에 방치된 비수급 빈곤층의 규모는 400만 명이다. 이 중 부양의무제로 인해 소득인정액이 최저생계비 미만임에도 기초생활보장을 받지 못하는 사람만 117만 명이다. 정부안은 이들 중 최대 15만 명을 추가로 보호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법 개정 이후에도 100만 명이 넘는 빈곤층이 부양의무제로 인해 사각지대에 남게 된다. 이 정도의 기준 완화로 부양의무제로 인한 사각지대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 정부 추계에 이미 드러나 있다.


부양의무제가 만들어낸 빈곤의 현실


새정치민주연합 김용익 의원이 보건복지개발원에서 받은 '기초생활보장제 부양의무자 특성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12년 기초수급 신청을 했다가 탈락한 4815가구 중 소득인정액이 최저생계비보다 높은 가구는 0.89%에 불과했다. 탈락 이유는 대부분 부양의무제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들 탈락 가구 부양의무자의 46%인 2212가구는 자신의 소득도 최저생계비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엄격한 부양의무 기준으로 인해 부양능력이 있다고 판정받았지만, 사실상 부양능력이 있다고 보기 어려운 경우이다.


그렇다면 이들 비수급 빈곤층의 삶은 어떠한가?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 13일 발표한 실태 조사 결과에 드러난 이들의 삶은 참담하다. 우선 비수급 빈곤층의 월평균 소득은 약 51만 9000원으로 1인 가구의 최저생계비나 수급자 생계급여보다 낮다. 돈이 없어서 병원에 가지 못한다는 사람이 37%(수급자 22%), 이가 아파도 치과에 가지 못하는 사람이 47%(수급자 31%), 돈이 없어 끼니를 거른 사람이 20%(수급자 11%), 돈이 없어 난방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37%(수급자 25%)다. 비수급 빈곤층의 삶은 수급 빈곤층의 삶보다 더 열악하다.


비수급 빈곤층 중 20%가 최근 1년간 경제적 문제로 자살 충동을 느낀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전체 국민(9%)의 두 배가 넘는다. 송파 세 모녀의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부양의무제로 인해 수급권을 박탈당하거나 자녀에게 부담이 될 것을 걱정해 목숨을 끊는 사례는 매년 발생한다. 부양의무제가 빈곤한 이들에게 경제적 어려움을 초래할 뿐 아니라 목숨까지 앗아가고 있는 것이다.


부양의무제가 만들어낸 부양의 사각지대


부양의무제는 제도 규정상으로는 부양의무를 가진 사람이 있고(1촌의 직계혈족 및 그 배우자), 그 사람이 부양능력이 있으며, 실제 부양이 이루어지는 경우에 적용된다. 이론적으로는 실제로 부양이 이루어질 때에만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부양의무자가 실제로 부양을 하지 않음에도 급여를 삭감하거나 수급권을 박탈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의신청 절차가 있지만 가족 간의 반목을 불사해야 할 뿐 아니라 소명해서 입증할 책임도 수급자에게 있다. 이의신청 기간 동안에는 여전히 급여가 지급되지 않는 것도 문제다.


수급자 선정 과정의 행정 절차의 문제도 크다. 수급 신청 단계에서부터 부양의무자의 소득과 재산 자료 같은 많은 공적 자료를 제출해야 하는데 이는 노인이나 장애인 같은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가족관계가 단절됐거나 실질적으로 부양이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의 경우에는 소명서나 관계단절 사유서 같은 자료까지 제출해야 한다. 현장조사가 부실하게 이루어지거나 수급자에게 무리한 증명을 요구하는 일도 빈발한다. 일선 사회복지공무원의 과중한 업무 부담이라는 복지 전달체계 문제도 있고, 부정수급 색출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는 문제도 크다. 최근 이슈화된 지방재정 부족 문제는 이와 같은 과정에서 부당하게 탈락하는 경우가 나올 개연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


이 때문에 부양의무제는 '실질적 부양'이 아니라 '잠재적 부양 가능성'을 기준으로 적용된다는 비판을 받는다. 수급권자가 부양받을 가능성을 과대평가하고 이를 수급자 선정에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적 부양이 공적 부양에 우선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적용함으로써 실제로는 사적 부양도 공적 부양도 받지 못하는 빈곤의 사각지대가 생겨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은 정부가 제시한 부양의무자의 소득기준 완화로는 해결할 수 없다. 


부양의무제는 정말 폐지할 수 없는가?


이런 와중에도 정부는 부양의무제를 폐지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가장 큰 이유는 예산 문제다. 정부 추산에 따르면 부양의무제를 폐지하고 117만 명을 추가로 보호하는 데 필요한 예산이 연 7조 원에 이른다. 2014년 기초생활보장제도 예산이 약 8.8조 원이니까 상당한 금액이기는 하다(중앙정부 예산 기준).


하지만 이 금액은 우리 나라 GDP의 1%를 조금 넘는 정도다.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아니며, 이 금액 때문에 빈곤층의 헌법적 권리를 보장할 수 없다는 말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인간다운 생활이 헌법이 규정한 권리이고, 우리나라의 낮은 조세부담률을 감안하면 적극적 증세를 통해서 보장해야 할 일이다.


또 다른 사유로 제시하는 것이 도덕적 해이 가능성이다. 부양의무제가 없으면 비싼 주택을 가진 사람이 이를 자식에게 상속하고 기초생활보장급여를 받는 것 같은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이는 행정적 조치를 통한 관리가 가능하다. 예를 들어 기초연금법은 유사한 사례를 막기 위해 2011년 7월 이후 증여 또는 처분한 재산을 일정 기준에 따라 신청자의 재산에 포함하고 있다. 이것이 적절한 조치인지를 떠나서 관리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기초생활보장제도와 같은 자산조사제도는 어느 나라에서나 낙인(stigma)으로 인해 수급대상자에 비해 실제 수급 받는 사람이 더 적다. 이런 상황에서 편법까지 써가며 부정수급을 하는 경우가 100만 명의 비수급 빈곤층을 양산하는 문제보다 더 크게 고려되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도덕적 해이의 문제는 보완책을 찾아야 할 일이지, 부양의무제를 존속시킬 근거가 될 수 없다.


사적 부양 우선 원칙?


부양의무제의 존치 필요성에 대한 또 다른 근거가 민법상 부양의무다. 민법에 사적 부양의 의무가 규정되어 있으니, 기초생활보장법도 이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사적 부양 우선원칙은 수급자 선정기준이 아니라도 급여기준에 이미 반영되어 있다.


민법상 부양의무는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1차적 부양의무는 '생활 유지를 위한 부양'으로 부부사이와 친자, 특히 부모와 미성년 자녀 사이의 부양의무를 말한다. 이는 그야말로 빵 한쪽도 나누어 먹어야 하는 관계다. 2차적 부양의무는 '생활 부조를 위한 부양'이다. 이는 자기 생활에 여유가 있을 경우 친족의 최소한의 생활을 지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두 가지 부양의무는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소득 및 급여 기준에 이미 반영되어 있다. 기초생활보장제도는 보장의 단위가 가구이다. 배우자나 생계를 같이 하는 30세 미만 미혼자녀의 경우, 동거하지 않더라도 하나의 가구로 취급한다. 따라서 1차적 부양의무는 이와 같은 기준만으로도 대부분이 포괄된다. 서구의 경우 개인을 기준으로 소득을 파악하여 공공부조를 주는 국가가 많음을 고려하면, 가구단위 소득산정은 이미 민법의 '사적 부양 우선원칙'을 내재하고 있다.


여기에 소득평가액 산정 시 정기적으로 지원받는 사적 이전소득을 수급자의 소득으로 판정한다. 한 가구로 계산되지 않은 가족이나 친척간의 사적 부양의 경우 수급자의 소득으로 산정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족이나 친척으로부터 실질적으로 부양을 받는 경우 수급자의 소득이 높아지고, 급여액이 줄거나 수급에서 탈락한다. 부양의무제가 없어도 실제로 부양이 이루어진 경우는 이미 제도에 반영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수급자 선정기준에 부양의무제를 다시 두는 것은 “실질적으로 부양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부양의 가능성이 있다면 국가가 책임지지 않겠다”라는 선언과 같다.


사실 사적 부양 우선의 원칙은 그 자체로도 논란이 많다. 가족 간에 사적인 의무가 반드시 국가의 공적인 책임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부양의식에 대한 최근의 연구들은 대부분 과거 대비 사적인 부양 책임에 인식이 낮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렇게 논란의 여지가 많은 원칙을 인정하더라도 부양의무제가 수급자 선정기준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가구단위 소득 산정 방식과 사적 이전소득을 수급자의 소득으로 보는 것에 이미 이 원칙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양의무제, 폐지가 답이다


정부와 정치권의 논의는 부양의무제를 '어느 수준까지 완화할 것인가'를 두고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에 투입할 재원이 9100억 원이다, 2000억 원이다 예산을 놓고 논란이다. 하지만 부양의무제 완화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설사 소득기준이 완화된다고 하더라도 부양의무로 인한 사각지대의 대부분은 계속될 것이다. 실제 부양받지 못하는 사람을 부양받는 것으로 강변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기 위해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부양받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빈곤한 이들의 상처는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양의무제는 폐지가 유일한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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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에 관한 단상

Posted at 2014. 11. 24. 10:31// Posted in 기타

정치학이야 학부에서 수박 겉핥기로 주워들은게 전부고 그나마도 십몇년에서 이십년 전 이야기라 기억도 안나니까 아무런 전문적 근거는 없지만,


민주주의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완전하고, 항상 가장 좋은 대안을 낼 수 있고, 언제나 내가 옳고 니가 틀리다면 무슨 토론이 필요하고 투표가 필요하고 '가장 효율적인 의사결정'을 저해할 수많은 절차가 필요하겠는가. 그냥 실행만 효율적으로 하면 끝이지. 절대선과 절대악이 있는 세상이라면 무슨 놈의 민주주의야. 악마를 타도하고 지상낙원을 건설하면 그 뿐이지.


이 이야기를 뒤집으면 나보다 많이 배우고 존경받고 힘있고 돈많은 사람이라고 해도 틀릴 수 있다는 것도 되고, 아무리 형편없고 이상하고 편협해보이는 이야기에도 일말의 진실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된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인간이고 따라서 우리 모두는 옳을 수 있으며, 우리 모두는 틀릴 수 있다. 여기에서 민주주의가 시작된다는 말이다.


우리 모두 불완전하니까 입장을 갖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 불완전하니까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끼리 토론하고 논의하는 지극히 '비효율적인' 작업을 함께 하자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조금 더 나은 방안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더 좋은 방안이 나오지 않더라도 서로를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끝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에이 씨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은 실컷 했네'라고 생각할 수는 있지 않을까.


그래서 논의의 '규칙'이 중요하고, 그래서 민주주의에서 '과정'이 중요하고, '절차'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설사 당장의 어떤 사안에서는 그 규칙과 과정과 절차를 무시한 것이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지 몰라도, 계속해서 그렇 수는 없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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