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권주의와 오만함

Posted at 2011. 8. 21. 22:45// Posted in 시사
2011년 8월 21일 현재 나의 페친은 180명이다. 그 대부분은 오프라인의 인간관계가 온라인으로 넘어온 케이스지만 일부는 페이스북에서만 알고 있는 사람(즉, 오프라인에서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도 있다. 그 대부분은 오프라인에서 내가 찾아가거나 초대받아 가입한 모임의 구성원들이며, 그 중에는 일정한 정치적 지향을 가진 이들이 구성한 모임도 있다. 물론 내가 성향상 '복지포퓰리즘추방국민운동본부' (요즘 언론에 종종 나와서 한 번 들먹여 본다.) 같은 모임에 가입할 리 없으니, 그 모임의 '일정한 정치적 지향'은 (일반적인 한국사회의 정치 이데올로기 구분 방식을 기준으로) 진보이거나 최소한 자유주의적인 성향이다.

오늘 그렇게 페친을 맺고 있는 분들 중 한 분의 포스팅에서 (적어도 내게는) 매우 충격적인 문구를 봤다. 직접 인용하자면 이렇다. "...(전략)...작년 선거의 재판이 되는 것을 서울시민과 국민이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노회찬류의 행보는 저부터서 더 이상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글 전체의 내용은 오세훈 시장은 주민투표의 정족수 미달로 물러나게 될 것이며, 이 자리에 범야권 후보가 당선되게 되면 그 자체의 의미는 물론, 향후 총선과 대선에서도 범야권 통합의 훌륭한 촉매제가 될 것이다...라는 내용이었지만, 이 글에서 내게 충격을 준 부분은 위에 직접 인용한 부분이다.

우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은 이것이다. 언제부터 공당의 지방자치단체장 후보가 선거를 마지막까지 완주하는 것이 'ooo류의 행보'로 (부정적 뉘앙스를 가득 담고) 표현되어야 하는 일이 되었으며, 언제부터 '용납' 또는 '용서'를 받아야 하는 행위가 되었는가? 저 글을 쓰신 분은 국민으로부터 무슨 엄청난 자격을 부여받았기에 자신의정치적 권리를 행사한 후보자를 '용서하고 말고'한다는 것인가?

만약 당시 서울시장 선거에서 범야권이 단일후보에 합의했고, 그 단일후보로 한명숙 전 총리가 선출되었는데, 노회찬 전 대표가 이에 불복하여 출마하기라도 했다면 이는 비판받을 수 있는 일이고, 생각하기에 따라 '용납' 혹은 '용서' 같은 단어가 언급될 수도 있을 지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 진보신당은 민주당과 후보단일화에 합의한 바 없으며, 공당으로서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선거를 완주했다. 누가, 무슨 근거로 그의 완주를 비난할 수 있는가? 당선 가능성도 없는데 왜 완주했냐고? 언제부터 민주국가의 선거가 당선 가능성 1, 2위 후보만 출마해야 하는 선거가 되었는가?

물론 그 분의 포스팅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당시 서울시장 선거에서 한명숙 후보와 오세훈 후보의 표차는 약 3만표 수준이었고, 노회찬 후보의 득표수는 약 14만표였으니 노회찬 후보가 완주하지 않았더라면 정치적 성향상 노회찬 후보의 표 중 상당수는 한명숙 후보에게 갔을 가능성이 크고 그랬다면 오세훈의 '세빛둥둥섬'이라든가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 같은 눈꼴사나운 짓거리는 보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어찌 본다면 노회찬 후보의 완주는 전략적인 견지에서 패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를 교훈삼아 만약 서울시장 선거를 다시 하게 된다면 단일후보로 나설 수 있도록 하자는 이야기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범주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방선거에서의 후보단일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일방적으로 노회찬과 진보신당의 탓으로, 나아가 한명숙의 낙선을 노회찬의 탓으로 모는 것은 패권주의적이다 못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류의) 파시즘의 냄새까지 난다. 만약 민주당(혹은 참여당, 혹은 이전의 열린우리당)과 그 지지자들이 진정성 있게 정당 간의 통합 내지는 선거연합을 모색하고 싶다면 이런 식으로 단일화 실패의 책임을 상대적 약자인 진보정당의 책임으로 모는 태도는 반드시 버려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패권주의 적이고 오만한 자세야말로 합당 또는 단일화가 실패할 수 있는 첫번째 이유이기 때문이다.

덧붙여 혹시 '김대중/노무현 정부로의 회귀'가 한국사회의 최대 과제이며, 이를 위해 반 한나라당 진영은 일치 단결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렇게 이야기한 것이라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물론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들은 누군가의 표현을 빌자면 '정조 이래 최초로 집권한 비 보수세력'으로서 개인적으로 존경할 만한 분들임을 물론 정치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 분들임은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분들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 현재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문제들이 잉태된 것도 사실이다. 현재 많은 이들의 관심을 불러들이고 있는 김진숙은 이명박 정권 하에서 크레인에 올랐지만, 그에 앞서 크레인에 올라 목을 매달았던 김주익은 노무현 정권하에서 목을 매달았다. 이명박 정권 하에서 위장도급이 인정되어 직접고용 가능성이 열린 KTX 여승무원의 문제가 발발한 것도 노무현 정권 하에서 생긴 일이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역량의 한계든, 진보성의 한계든, 혹은 다른 어떤 문제든 간에 그 정권 하에서 빈부차는 극심해지고 비정규직은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정리해고는 난무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현재 반 한나라당/반 이명박 전선의 중요성을 인정하더라도 그 안에는 김대중/노무현 너머를 고민하는 정치세력이 살아있어야 하며, 이를 전제로 한 연합이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난 개인적으로 현재 민노당 일각의 진보신당과의 통합에 미지근하고 참여당과의 통합에 적극적인 움직임에 대해 매우 실망하고 있다.)

나도 금번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통해 오세훈 서울시장이 물러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 자리에 야권단일후보가 나서 당선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도 내년 총선에서 범야권의 선거연대가 이루어져 한나라당이 소수당으로 전락하기를 희망하며, 나도 정권교체를 희망한다. 하지만 정말로 이를 희망한다면 민주당은 패권주의를, 그리고 그 지지자들은 오만함을 우선 내려놓아야 한다. 거기서 모든 것이 출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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