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꼼수, 비키니, 그리고 사과

Posted at 2012. 2. 7. 16:12// Posted in 시사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다. 출근준비를 완료하고 아침을 먹던 아내의 옷에 큰 아이가 케첩을 바르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자체는 별 일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 후에 보인 아이의 태도였다. 엄마에게 가볍게 사과하고 넘어가면 될 실수였는데 아이는 마치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딴소리를 하기 시작했고, 나와 애 엄마의 "OO아, 실수를 했으면 사과를 해야지."라는 말에 대해 특유의 '못 들은 척하기' 신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결국 약간 화가 난 내가 우호적이지 못한 이야기들을 아이에게 했고, '항복'을 받은 건 아니지만 '사과 비슷한' 멘트를 받는 것으로 상황은 마무리.(이녀석 자존심이 강해서 절대 '항복'하는 법이 없다. 나도 굳이 그걸 받을 생각은 없기도 하고) 그 뒤에 좀 더 부드러운 어투로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공유하는 '치유의 시간'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실 문제 삼는 게 우스울 정도로 아무 것도 아닌 아이의 실수였지만 두 가지 측면에서 이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첫번째는 사과의 타이밍을 알려줘야 한다는 것. 작은 실수나 잘못을 했을 때 거기에 대해 바로 사과한다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지만, 그 순간을 놓치게 되면 상대방도 기분 나빠지고 자신도 더 이상 더 사과하기가 어렵게 된다는 것을 아이가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두번째는 내 입장에서 이 아이는 앞으로 꽤 오랜 시간을 나와 함께 살아야 할 '가족'이라는 것. 길에서 부딫히고 인사도 없지 지나가는 사람이야 '뭐 저런 X가 다 있어?'하고 지나치면 그만이겠지만,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그래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가족이야 그럴 수 없지 않는가.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되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은 어느 정도 수준까지 문제삼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인터넷 용어로, '다 애정이 있어서 까는 거야.'라는 말처럼.

  갑자기 아이와 있었던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바로 저 일이 있은 직후에 신문을 보다가 <나꼼수>와 비키니 사진, 그리고 성희롱과 사과에 대한 이야기를 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글에서 논의하는 내용이나 상황이 위에 언급한 나와 아이, 그리고 아이 엄마 사이에 있었던 일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여겨졌다. (기사 내용은 아래 링크를 참조)
 

[경향시평]자아비판 강요하는 진보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2062104555&code=990000 
 


  <나꼼수>와 비키니 수영복 응원, 그리고 거기에서 출발한 논란에 대한 팩트를 더듬는 과정은 생략하자. 이미 너무 유명해져버린 이야기니까. 사실 개인적으로 어떤 사안에 대해 발언하거나 이야기할 때 가장 조심하는 부분이 '성'과 관련된 부분이다. 남성인 나로서는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양성평등과 거리가 먼 한국사회에서 피해자쪽보다는 가해자쪽에 가깝게 있으며, 나 또한 가부장적/성차별적 사회에서 그 사회의 제도와 문화를 내면화하며 자란지라 내가 하는 발언이나 행동이 문제가 있다는 것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때문이다. 두번째가 핵심인데, 대학시절에나 직장생활을 하면서나 '전혀 그럴 의도가 없는' 사람이 '아무 생각없이' 하는 발언이 성적 대상화나 고정적 성역할에 대한 편견 같은 것들에 기초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일이 많았고, 심지어 나 자신도 마찬가지임을 더러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에서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기준보다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런 기준에서 볼 때 나꼼수 팀의 발언은 경솔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들의 발언 수위는 '보통의 한국 남자들이 악의없이 이야기하는 수준'보다도 낮은 정도였고, 그런 측면에서 '진보적인' 남성들조차 '나꼼수가 그간 해온 일을 생각해봐라. 이만한 일로 이렇게 트집을 잡는 것은 보수 언론에게 먹이감을 주는 것밖에 안된다.'는 주장을 하는 이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의견에 동감할 수 있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억압은 그 억압이 제도화되어 있을 때 억압하는 자 뿐 아니라 억압받는 자에게도 당연시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소수에 의한 다수의 억압'(자본가-노동자의 관계 같은)이 아닌 '다수에 의한 소수의 억압'일 경우에 더욱 그렇다. 성과 관련된 억압 - 즉 여성에 대한 남성의 억압이나 동성애자에 대한 이성애자의 억압 같은 - 은 그처럼 '내면화된 억압'의 대표적인 경우이며, 그렇기 때문에 '진보적임'을 자처하는 이라면 이에 대해 더욱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꼼수 팀의 발언이 한국 사회 남성의 - 심지어 상당수 여성의 - 일반적인 기준에서 큰 문제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고 해도, '진보'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쉽사리 은폐되는 억압에 대한 고발'이라는 차원에서 이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큰 일을 해온 나꼼수가 저지른 악의 없는 작은 실수'라 하는 이들도 많지만, 이런 주장은 그들의 그들의 실수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진정성 있게 사과할 때나 가능하다. 그렇지 않을 때 '악의없는 실수'는 '악의스러운 잘못'이 될 수 있다. 

                     '경솔함'은 일정정도 <나꼼수>의 캐릭터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들을 지지했던
                        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경솔함은, 애청자의 한 사람드로서 아쉬운 모습이다


  더구나 위에 링크한 기사처럼 '사과를 강요하는' 이들에 대한 비판은 도저히 공감하기가 힘들다. 글쓴 이는 나꼼수의 태도가 불쾌했다면 이를 비판하거나, 비난하거나, 보이콧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사과를 강요하는 것'은 '사상검증, 자아비판, 자기검열'이라고 말한다. 그랬을 것이다. 만약 그 발언의 주인공이 <나꼼수>가 아니고 새누리당의 어느 국회의원이었거나, 현 집권 세력의 누구였거나, 조중동의 누구였다면, 굳이 사과를 집요하게 요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보'를 고민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그들은 어차피 '우리와 함께 갈'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두의 이야기에 빗대자면 그들은 '길에서 부딫히고 지나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글쓴이의 말대로 굳이 사과를 요구할 필요가 없다. 욕이나 한 번 해주면 되지. 하지만 <나꼼수>는 다르다. 가족만큼은 아닐 지 몰라도 함께 가고 싶고, 지지하고 싶고, 어깨를 걸고 같이 싸우고 싶은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과를 요구하는 것이다. 사과를 받고, 그래서 찜찜한 마음을 털어버리고 전처럼 다시 껄껄 웃으며 그들의 방송을 듣고, 잘못된 세상을 향해 함께 주먹을 쳐들도 싶어서 그러는 것이지 그들의 양심의 자유를 침범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글쓴 이는 진보진영 일부의 '사과를 강요하는 태도'가 '자기검열을 촉발시켜 이제까지 진보가 이루어놓은 성취를 퇴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한참 주소를 잘못 찾았다. 오히려 이번 사태에서 '생물학적 완성도'를 가지고 '진보의 치어리더' 역할을 한 건데 뭐가 문제냐고 한 측이야말로 사회 변혁의 주체인 여성을 객체화하고 대상화함으로써 우리 사회 진보의 수준을 낮춘게 아닌가 싶다.

  정리하자.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남성들의 성의식 수준에 비추어볼 때 <나꼼수>의 발언이 아주 큰 잘못이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물론 이 판단 또한 '남성'의 한사람인 나의 판단이기에 불완전하다.) 그렇기 때문에 적절한 '타이밍'에 사과를 하고 넘어갔다면, 그 발언으로 인해 기분나빴을 사람들도 이해하고 찝찝한 마음 없이 다시 함께 즐겁게 어깨걸고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싶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굳이 사과를 요구한 것이다. 양심의 자유를 부정해서가 아니다. 물론 <나꼼수>는 사과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자신들의 발언이 잘못이 아니라고 여겨서든, 혹은 사과의 타이밍을 놓친 이들의 '존심'에서든 사과하지 않을 자유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들이 그 자유를 행사함으로써 같이 '진보'를 이야기하던 사람들의 일부는 더 이상 편안한 마음으로 그들의 방송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이 처럼부터 '그런 속좁은 진보'는 내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할 말은 없지만, <나꼼수>를 즐겨 듣던 애청자의 한 사람이자, 모든 종류의 억압으로부터의 인간해방을 바라는 한 사람으로서는 이런 상황과 이 상황을 만든 나꼼수 팀의 경솔함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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