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사회민주주의의 명예회복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자리한 국가들을 그 상징적 성공모델로 한 ‘사회민주주의’는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좌파와 우파 모두로부터 폄하되어왔습니다. 좌파로부터는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배신하고 자본과의 타협을 통해 탄생한 ‘개량주의 체제’로서 자본주의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아왔으며, 우파로부터는 ‘복지병’과 ‘비대한 공공부문으로 인한 비효율의 상징’이라는 모함에 가까운 비판을 받아 온 것이죠. 그러나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과 신자유주의의 광풍, 그리고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신자유주의의 위기라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혁명적 사회주의와 자유주의가 모두 한계를 드러내자, ‘구체제’ 취급을 받던 ‘복지국가’는 대안 체제로서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최근의 경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주의’라는 복지국가를 떠받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사회주의보다는 자본주의 쪽에 조금 더 가까운 타협점’ 정도인 것 같습니다. 사회민주주의를 하나의 구체적 지향과 이상을 가진 체계로 보기보다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이상 사이에서 나타난 ‘어중간한 중도’로 보는 입장이 지배적이라는 이야기죠. 사회민주주의를 이렇게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여러 요소를 짜깁기한, 그러면서도 자본주의적인 것이 더 중심이 되는 것으로 보는 시각으로 인해 좌파에서는 여전히 ‘개량주의’의 시각을 거두지 못하고 있고, 우파에서는 때로는 비효율의 상징으로 몰아붙이다가도 20세기를 자유주의의 승리로 선언할 때는 사회민주주의를 슬며시 자유주의의 변형으로 위치시키기도 합니다.

  이 책, ‘정치가 우선한다(The Primacy of Politics)’의 저자인 셰리 버먼은 이런 경향이 잘못되었음을 단호하게 주장합니다. 그녀는 사회민주주의가 ‘정치의 우선성’과 ‘공동체주의에 대한 믿음’이라는 분명한 이념적 지향을 가지고 있으며,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 모두에 대한 대안 이데올로기로서 양차대전 이후 70년대까지의 번영을 이끈 사상이자, 신자유주의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현재와 미래에도 여전히 기능할 20세기 사회사상사의 진정한 승리자라고 선언합니다. 그 말대로라면 가히 ‘사회민주주의의 명예회복’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그녀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사회민주주의 이데올로기의 형성과 발전을 정치사와 지성사를 포괄하여 역사적으로 조망합니다. 이 리뷰에서는 저자의 역사적 조망을 간략히 살펴보고,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들을 현재적 과제에 비추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조망

 저자의 이야기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심각한 불평등과 공동체의 뿌리 뽑힘, 개인의 원자화라는 폐해를 낳은 끝에 대안 이데올로기로서의 마르크스주의가 등장하고, 다시 19세기 말 마르크스주의조차 위기에 놓인 시점에서 시작합니다. 저자는 당시 엥겔스와 카우츠키가 주도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교리’는 역사적 유물론과 계급투쟁이었다고 말합니다. 역사적 유물론과 계급투쟁론은 자본주의는 그 내적 모순으로 인해 계급 간 대립을 격화시킴으로써 필연적으로 붕괴하게 되며, 이는 사회주의로의 필연적인 이행으로 이어진다는 결정론적인 내용입니다. 문제는 마르크스의 예언(이와 같은 경제 결정론은 마르크스의 것이 아니며 엥겔스와 카우츠키가 마르크스주의를 지나치게 도식화 한 나머지 초래된 것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저의 식견이 짧아 뭐라 할 수는 없지만, 아무리 엥겔스와 카우츠키에 의해 단순화가 되었다고는 해도 ‘경제적 토대가 결정적’이라는 생각 자체는 역시 마르크스로부터 기원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한 평가가 아닐까 합니다.)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19세기 후반의 불황을 겪고 난 후 자본주의는 호황 국면에 들어섰고, 적어도 상당 기간 동안은 붕괴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이죠. 이렇게 되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기모순에 봉착하게 됩니다. 당시의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전술한 바와 같이 ‘경제적 토대에 의한 필연적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제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 이행기를 대비해서 노동자들을 조직화하고 교육하는 것 외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혁명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할만한 어떤 지침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경제 결정론적 관점 외에도 마르크스주의의 국가론 - 국가는 지배 계급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일 뿐이라는 - 은 정치 자체에 대한 부정적 정향을 나타냈고, 결국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은 정당이면서도 정치활동에는 나서지 않아야 하는 모순된 입장에 처하게 됩니다. 만약 단기간 내에 자본주의가 붕괴되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시작된다면 이런 것들은 큰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일이 그렇게 진행되지 않게 되면서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 균열이 발생합니다. 바로 수정주의의 등장입니다.

 수정주의의 출발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베른슈타인입니다. (물론 저자는 장 조레스, 프란체스코 메를리노, 필리포 투라티, 오토 바우어 등의 이야기를 폭넓게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수정주의의 시조 격인 베른슈타인의 이야기만 간략하게 짚고 넘어 가겠습니다.) 그는 사회주의는 순전히 유물론적인 기반에서 오지 않으며,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통한 개혁으로 사회주의 이행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역사적 유물론에 대한 공식적 포기를 요구한 것이죠. 또한 그는 민주주의(좀 더 정확하게는 의회주의)의 실현은 사회주의로 가기 위한 중요한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라고 제시하며, 마르크스의 또 다른 예언인 프롤레타리아화(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라 중간계급은 사라지고 소수의 자본가를 제외한 계급들은 프롤레타리아가 된다는 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사회민주당은 득표를 위해 다양한 계급을 포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또 다른 중요한 교리인 계급투쟁론마저 저버린 것입니다. 대신 베른슈타인은 ‘정치의 우선성’과 ‘계급교차적 협력’을 내세웁니다. 자유주의 정치의 소중한 성과인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이용하여 사회의 전반적 피지배계급의 대표자로서 사회민주당이 적극적으로 의회에서 활동함으로써 ‘개혁을 통한 사회주의 이행’이 가능하다는 비전을 제시한 것입니다.

 저자는 베른슈타인과 흐름을 같이한 수정주의자들을 ‘민주주의적 수정주의’라 분류하는 한 편 이들과는 또 다른 수정주의의 흐름을 제시합니다. 바로 후에 파시즘을 낳게 되는 ‘혁명적 수정주의’입니다.(저자는 레닌의 볼셰비즘 또한 혁명적 엘리트의 지도를 통한 사회주의 이행을 제시하여 경제결정론을 부정하였다는 점을 들어 그 또한 수정주의의 한 흐름으로 분류합니다. 사실 이는 좀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수정주의를 ‘혁명을 포기하고 개혁을 추구하는 흐름’으로 보는 일반적인 입장에서 보면 볼셰비즘은 수정주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자의 경우 ‘경제결정론에 입각한 사회주의 이행’을 따르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정통과 수정주의를 나누고 있기 때문에 이 같은 분류가 전적으로 부당하다고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혁명적 수정주의는 조르주 소렐로부터 출발합니다. 소렐은 마르크스주의의 결정론적 세계관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는 베른슈타인과 관점을 같이합니다. 하지만 소렐은 베른슈타인보다 인간의 의지를 더 강조하는 주의주의(主意主義)적 입장을 취했으며, 보다 더 중요하게는 프랑스의 자코뱅주의적 전통을 이어받아 (민주주의적 방법이 아닌) 폭력적 직접행동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사상은 좌우 양극단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 좌측에는 아나코 생디칼리슴이 있었고, 우측에는 파시즘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저자가 파시즘과 나치즘을 다룬 방식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글의 저자인 셰리 버먼의 경우 파시즘이나 민족적 사회주의(나치즘)의 정책이 완전고용, 재정확장,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선성을 강조했다(즉, 국가가 자본가에 대한 우위에서 서서 경제 계획을 수행했다)는 측면에서 ‘민주주의’라는 절차적 요소와 인종주의적인 요소를 제외하고 보면, 사회 민주주의와 파시즘이 매우 유사하다고 말합니다. 정책 뿐 아니라 기원에 있어서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민주적이냐 혁명적이냐의 차이는 있어도 ‘수정주의’라는 공통의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욱 유사하다는 것이죠. 결국 저자는 이를 통해 ‘민주주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또한 이 책이 다룬 내용이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가 ‘민주주의’의 절대적 중요성이라고 생각하기에 상당부분 저자의 논지에 동감합니다. (민주주의의 절대적 중요성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하지만 파시즘/나치즘과 사회 민주주의 사이에는 저자가 다룬 것보다 더 큰 차이가 있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칼 폴라니는 ‘파시즘의 본질’이라는 논문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양립 불가능성을 지적하며 이의 해결 방안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민주주의를 경제 영역에까지 확장시키는 것.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사회에 경제생활만을 남겨놓는 것. 폴라니가 지목한 두 번째 경우가 바로 파시즘으로 그는 파시즘은 경제적 자유주의의 마지막 안전판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민주주의를 말살함으로써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경제를 국가가 보호하고 육성하는 방식으로 나갔다는 것이죠. 물론 저자 또한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만, 저의 짧은 소견으로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양립 불가능성’에 대해 저자는 폴라니와 같은 정도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2차 대전 후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러했듯이) 자본주의에 ‘어느 정도’의 규제만 가한다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양립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저자가 책 말미에 (이른바 ‘구조개혁좌파’라 할 수 있는) 70년대의 이탈리아 공산당이나 프랑스 사회당/공산당 연립정부를 ‘마르크스주의의 유산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즉, 지체된) 것으로 언급하는 데에서도 드러납니다. 이는 결국 사회민주주의를 완결된 체제로 보느냐, 경제적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간단계로 보느냐의 문제이며, 이 중 어느 쪽 입장을 취하는가에 따라 파시즘 및 민족적 사회주의와의 차이에 대한 시각도 달라질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이 글 말미에 다시 언급할 예정이니 일단 이 정도만 언급하고 저자의 논의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로마에서의 무솔리니와 히틀러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수정주의의 대립 문제는 1차 대전을 겪고 난 후 더욱 심각해집니다. 기존의 사적 유물론과 정치의 우선성의 대립, 계급투쟁론과 계급 교차적 협력의 대립은 몇 가지 현실적 상황의 변화로 더욱 심각해집니다. 우선 전쟁을 통해 나타난 민족주의의 등장은 사회주의 정당의 ‘국민정당화’에 대한 문제로 심화되어 기존의 계급투쟁론에 대한 도전을 더욱 거세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극에 달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인민의 반감은 선거를 통해 표출되어 많은 나라에서 마르크스주의 정당은 지배적 정당의 위치에 올라섭니다. 각국의 주요 정당의 위치에 올라선 마르크스주의 정당은 책임 있는 정치행위를 요구받게 되는데, 이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정치행위에 대한 부정적 입장과 충돌하게 되고 역사적 유물론에 대한 정치의 우선성의 도전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의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은 기존의 교조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이게 되고, 이로 인해 사회주의 정당들은 심각한 분열을 겪습니다. 이처럼 마르크스주의가 인민의 자본주의에 대한 실망을 해결해주지 못하는 틈을 비집고 나타난 것이 파시즘과 나치즘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파시즘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는 복합적이지만, 어쨌든 파시즘은 당시에 치솟던 민족주의적 요구와 기존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거부, 그리고 실업이나 빈곤과 같은 현실적 과제의 해결이라는 당시 인민의 요구들을 마르크스주의자들보다 더 빠르고 명확하게 자신의 것으로 하며 폭넓은 지지를 얻습니다. 물론 인권과 민주주의의 말살, 그리고 인종주의라는 요소들로 인해 처음 내세운 것과 달리 파시즘과 나치즘은 지독히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체제로 귀결되고 말았습니다만 그건 나중의 일입니다.

 일찍이 민주주의적 수정주의가 결실을 맺었던 스웨덴이라는 하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에서 민주주의적 수정주의의 결실은 2차 대전을 겪은 후에 이루어집니다. 저자는 양차대전과 그 사이의 대공황을 겪으며 통제되지 않은 시장의 위험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서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루어졌으며, 한편으로 파시즘과 나치즘이라는 전체주의를 겪으며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의 중요성 또한 유럽인들에게 중요한 교훈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케인스주의와 복지국가입니다. 케인스주의 경제정책은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선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사회에서 독립된 경제’가 아닌 ‘사회 안에 묻어 들어간 경제’가 구현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복지국가는 사회 구성원간의 연대성을 강조함으로써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하의 원자화된 개인들의 이익사회(gesellschaft)가 아닌 공동체적 헌신에 기초한 공동사회(gemeinschaft)로의 이행을 보여줍니다. 저자는 비록 적지 않은 나라에서 케인스주의와 복지국가는 우파 정당에 의해 수행되기도 했고, 이로 인해 이것이 자유주의의 변형인 것처럼 오해되기도 하지만, 이는 명백히 민주주의적 수정주의의 주장을 이어받은 사회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20세기 사상사의 최후의 승자는 사회 민주주의라고 말합니다.

                                       1930년대 스웨덴 사민당의 선거포스터

첫 번째 교훈. 도그마(Dogma)에 빠지지 마라.

 그 기원이 마르크스에 있건 엥겔스와 카우츠키에 있건 간에 19세기 말~20세기 초의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이 ‘경제결정론’이라는 도그마에 빠졌던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사실 자본주의는 그 내적 모순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붕괴하게 되며, 그 다음 세상의 주인공은 지금 핍박받고 있는 프롤레타리아라는 명제는 마르크스주의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파산을 앞두고 가장 강력한 대항 이데올로기가 되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지금의 세상이 너무나 비참하고 힘겨울 때 누군가가 ‘걱정하지 마, 반드시 압제자들을 물리치고 네가 승리하게 될 거야.’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과학적 근거’를 가진 것이라고 여겨진다면 누구에게라도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는 그렇게 등장하여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력한 도전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세상은 마르크스가 예측한 것과 다르게 움직였고, 마르크스주의를 강력하게 만든 바로 그 강점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되었습니다. 이는 마르크스를 탓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설사 잘못된 예언이 온전히 마르크스의 몫이라고 가정해도 말이죠. 사상가는 예언자가 아닙니다. 사상가는 자신이 속한 시대에 발을 딛고 그 시대의 환경 속에서 그 시대까지의 지적 성과를 기반으로 새로운 시대를 조망하고 대안을 내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새로운 시대에 대한 예측이 완벽하게 실행되지 않더라도, 그들의 현실 분석과 미래에 대한 대안은 충분히 많은 교훈을 줄 수 있고 더 나은 시대를 설계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본주의가 스스로 붕괴하지 않았다고는 해도, 자본주의의 원리가 가진 근본적인 모순과 그로 인한 계급 문제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양상을 그릴 것인지를 이야기한 마르크스의 시도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바뀐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선대의 사상을 그대로 고집한 후대에게 있습니다. 그들은 시대의 변화를 스스로 체험하고 분석할 수 있는 상황에 있었음에도 선대의 사상을 마치 예언인양 받아들이고 고집했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알맞게 사상과 실천은 바뀌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한 것이죠. 이런 것이 바로 도그마(dogma)에 빠진 상황입니다. 종교적 영역이라면 몰라도 정치적·사회적 영역의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은 절대 도그마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사회는 항상 변하기 마련이며, 제아무리 뛰어난 사상가라도 그 변화를 완전히 예측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정치적·사회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원칙을 가지되 늘 사회의 변화에 조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공통적으로 가졌던 ‘경제결정론’의 도그마는 힘겨운 과정을 거쳐 극복되었습니다. 비록 ‘신자유주의’의 열풍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악몽을 떠올리게 했지만 역사를 완전히 되돌릴 수는 없었고, 복지국가는 약화되었을지언정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경제를 사회와 정치로부터 떼어 낸 채 운영한다는 원리가 지독한 유토피아에 불과하다는 역사의 교훈이 아직은 남아 있었던 까닭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경제에 관한 도그마가 이것뿐인 것은 아닙니다. 경제와 관련해서는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도그마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경제성장’의 도그마입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파시즘과 사회민주주의를 포함한 모든 이데올로기들이 공유했던 경제적 원칙은 ‘경제성장은 이롭다.’는 것이었습니다. 산업화의 진전과 경제의 ‘발전’, 그리고 그로 인한 생산과 소비의 증대는 20세기의 어떤 주류 사상도 거부하지 않았던 ‘공리’였습니다. 특히 이 책의 저자인 셰리 버먼이 20세기 사회사상의 진정한 승리자로 상찬해 마지않는 사회 민주주의와 그 결과물로서의 케인스주의 복지국가는 포드주의로 상징되는 대량생산과 포디즘 체제 하 노동자들의 소득 증대로 인한 대량 소비를 근간으로 한 ‘대중사회’가 그 본질이었습니다. 생산의 지속적인 증대는 노동자들의 고소득의 근간이 되었으며, 그 고소득 노동자들의 소비는 생산증대를 뒷받침할 유효수요를 창출했습니다. 또한 고소득 노동자들로부터의 조세는 복지재정의 근간이 되었으며, 완전고용에 가까운 상황은 복지수혜자를 전통적인 빈곤층 - 노인, 장애인 등 - 으로 제한함으로써 재정적 부담을 완화했습니다. 이 모든 체제의 근간에는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 좀 더 직설적인 표현을 쓰자면 ‘생산과 소비의 지속적인 증대’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왔다가 다시 저물고 있는 지금에도 주류 이데올로기에서는 어느 쪽도 ‘경제성장’이라는 전제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주로 생태주의 진영으로부터 나오는 ‘경제성장’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일축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경제성장’은 ‘경제결정론’보다 더 강력하게 지속되고 있는 도그마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지구 환경의 문제는 '경제성장'이라는 도그마가 초래한 재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그리고 이 경우에는 특히 우리를 둘러싼 자연환경은 우리의 생각의 변화보다 더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많은 생태주의자들이 지적하는 산업발전의 부정적 부산물들, 즉 기후변화나 피크오일, 생태계파괴와 같은 문제들은 이미 지구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봉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멜서스의 ‘인구론’이 그랬던 것처럼, 생태주의자들의 경고 또한 인간의 ‘진보’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현실속의 기술 발전의 정도로 봐서는(보다 더 중요하게는 인간들이 기술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봐서는) 과연 그럴까 싶긴 하지만 설사 그런 논의의 적실성을 어느정도 인정한다고 해도,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은 현재 수준 이상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만약 남반구의 나라들이 북반구의 나라들만큼 산업을 ‘발전’시킨다면, 그 때는 정말 지구가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될 것입니다. (로스엔젤레스의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을 세계 전역으로 확산시킬 경우 지구가 다섯 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나, 세계 모든 가족이 자동차를 한 대씩 가진다면 석유는 수개월밖에 지탱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상황에서 경제성장의 도그마를 그대로 가지고 미래를 설계한다면, 그 미래가 과연 지속가능할까요? 어쩌면 현 시대에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가치는 '자유로운 시장‘이나 ’복지국가‘가 아니라 생태주의일지도 모릅니다. 설사 생태주의자들의 주장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경제성장이 도전받지 않는 도그마로 존재하는 상황은 위험하다는 것을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실패에서 읽어내는 것이야말로 역사적 교훈을 현재화하는 지혜일 것입니다.

 

두 번째 교훈. 민주주의가 우선한다.

 제가 이 책을 읽으며 느낀 두 번째의 중요한 교훈을 바로 ‘민주주의의 우선성’입니다. 파시즘과 사민주의의 차이의 대부분이 민주주의라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가장 중요한 차이 중 하나였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19~20세기를 거치며 형성된 체제 중 어쨌든 ‘민주주의적인’ 제도를 정착시킨 체제는 불완전할지언정 그럭저럭 생존해온 반면, 그렇지 못한 체제는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몰락했습니다. 나치즘과 파시즘,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이 그 좋은 예입니다. ‘이슬람 사회주의’라는 슬로건으로 서구 기업의 착취와 전근대적 왕정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등장했던 ‘혁명가’, 카다피는 최초의 ‘좋은 뜻’은 간데없이 최악의 독재자가 되어 결국 인민에 의해 축출되었으며, 우리에게 더 가까운 예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해방 직후 친일파 청산과 토지 재분배라는 시대적 과제를 대한민국보다 더 잘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세계 유일의 3대 세습 국가(남쪽에는 3대 세습 재벌이 있긴 합니다만)가 되어 ‘인민은 굶고 있는데 지배층은 권력 유지에만 골몰하고 있는’ 비참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민주주의의 유무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도한 일반화이겠습니다만, 민주적 제도가 없는 나라가 시대의 변화에 더 적응하지 못하며 권력 중심부로부터의 부패에 더 취약한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때문에, 바로 위에 도그마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만, 만약 사회의 운영원리로서 단 한 가지 ‘절대 흔들리지 말아야 할 원칙’이 있다면 저는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의 원칙을 말함에 있어 정말로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행하는 것입니다. 사실 위에 ‘민주주의가 없었던’ 체제로 예를 들었던 사회들도 민주집중제라든가 하는 식으로 스스로의 ‘민주주의’를 추진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작동되는 민주주의였냐고 질문해본다면 아마 상식을 가진 현대인의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더 추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일까요?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라고 하면 보통·평등·직접·비밀의 원칙에 근거한 선거, 의회, 복수의 정당 등을 떠올립니다. 이것들은 모두 오랜 세월을 거치며 형성된 ‘민주주의를 운영하기 위한 장치들’입니다. 민주주의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죠. 그런데 이런 제도들이 대부분 갖춰진 지금의 우리나라 정치는 ‘민주주의적’인가요?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민주주의를 정의해야 합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는 학자마다 여러 가지로 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민주주의는 민중(Demos)에 의한 지배(Kratos)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수의 선택받은 이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민중이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지금 우리의 현실을 어떨까요? 2011년 전세계를 뒤흔들었던 말이 바로 1%에 대한 99%의 반격입니다. 민주주의의 원리가 관철되고 있다면 말도 안되는 소리죠. ‘반격’이라는 것은 이전까지 열위에 있었음을 내포한 표현인데 99%의 사람들이 1%에 의해 열위에 있다면 우리가 떠들어온 ‘민주주의’는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이런 문제가 발생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대의 민주주의 체제의 한계라든가 관료주의의 문제도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부분은 참여 민주주의적 요소의 도입 - 주민소환이라든가, 주민참여예산제 같은 - 이나 정당의 정책역량 강화를 통해 선출된 권력의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대한 통제 강화 같은 대안이 있을 수 있겠지요. 이런 문제들을 깊이 있게 다룰 수 있으면 좋겠지만, 여기서는 다른 이야기를 조금 하고 넘어갈까 합니다. 바로 앞서 언급한 폴라니의 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충돌의 문제입니다.

      '김진표 아웃' 같은 것으로 간단히 경제민주화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물론 아웃은 필요하긴 하다.

 최근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상당히 넓은 스펙트럼에서 쓰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넓은 스펙트럼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지점은 ‘재벌이 법 위에 군림하는’ 상황을 바꿔야 한다는 것인 듯합니다. 그런데 사실 엄밀히 따지면 이건 ‘민주주의’라기보다는 ‘제대로 된 자유주의’의 영역에 속합니다. 공정한 경쟁의 보장이라든가, 법치주의의 원칙을 분명히 하는 것은 서구에서는 19세기 고전적 자유주의 시대의 과제였습니다. 이는 사실 민주주의의 문제라기보다는 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전제조건 같은 것들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을 ‘경제 민주화’라고 부르는 것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지체된 경제 자유화의 회복’이라고 하면 더 적합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경제 민주주의는 경제 영역에서 민중에 의한 지배를 확립해나가는 데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독일 같은 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는 노조의 경영참여 제도화는 우리의 현실에서 좋은 출발점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더 나간다면 협동조합처럼 민주적 원리에 의해 운영되는 생산/소비 조직이 경제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 또한 경제 민주주의의 중요한 요소일 수 있을 것입니다. 공공이 운영하는 - 달리 말하면 국유화된 - 기업을 늘림으로써 사적 기업의 전횡을 견제하는 문제는 좀 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입니다. ‘국가’라는 기관을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냐는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국과 같이 선출되지 않은 관료의 힘이 강한 나라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현 시점에서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할 때 초국적 자본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라는 주제는 매우 중요하고도 어렵습니다. 어찌 보면 케인지언 복지국가가 실패한 원인 중 하나는 일국적 케인즈주의가 초국적 자본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결국 ‘경제 민주화’는 나라 안에서 뿐 아니라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공통의 노력이 필요한 과제입니다. 최소한 지역적 차원의 다국적 공조가 필요한데, 현재 남미에서 시도되고 있는 ALBA(Alternativa Bolivariana para América Latina y el Caribe)와 같은 경우가 하나의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폴라니는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본질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원리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민주주의를 폐기하거나 자본주의를 민주화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완벽한 자본가의 통치 기구로서의 국가’를 만들거나 ‘경제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거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셰리 버먼은 이와 같은 ‘자본주의의 민주화’의 과제가 케인지언 복지국가에 의해 훌륭하게 수행되었다는 의견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진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좀 더 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가 우선해야 한다.’는 역사의 교훈을 현재화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영역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할 것입니다.

  

나가며. 사회민주주의의 현재와 미래

 글을 맺으며 이 책에 나온 저자의 중요한 주장들과 그 주장들에 대한 저의 부족하나마 간략한 견해를 덧붙여볼까 합니다. 우선 저자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 즉, ‘사회민주주의야말로 20세기 사회사상사의 진정한 승리자’라는 주장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합니다. 어쨌든 19~20세기를 거치며 나온 여러 사회사상 중 사회민주주의에 기반한 사회가 가장 번영했고 성공적이었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검증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영미권을 제외한 유럽 대부분 지역을 ‘사회민주주의’라는 하나의 틀로 묶을 만큼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많은 공통점을 찾을 수 있긴 하지만, 이를테면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과 대륙 유럽 국가들의 차이가 대륙 유럽 국가들과 영국(미국은 꽤 차이가 커 보이니 논외로 하겠습니다.) 과 같은 국가와의 차이에 비해 그렇게 좁았다고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좀 더 중요하게는 저는 사실 사회민주주의는 ‘과도기적 체제’였다고(혹은 그랬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사회민주주의가 폴라니가 제시한 방법대로 정치의 힘으로 경제의 영역에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체제였다고 한다면 현실속의 사회민주주의가 균형점을 이루었던 지점은 너무나 불충분한 민주화였습니다. 불가역적인 수준까지 경제 영역에 민주주의를 심지 못했기 때문에 전 세계적 정치경제 환경의 변화 시기에 이루어진 ‘신자유주의의 역습’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스웨덴의 임노동자 기금 시도나, 셰리 버먼이 마르크스주의의 구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지체된 현상쯤으로 취급했던 프랑스 사회당-공산당의 ‘공동강령’ 같은 것들이 좀 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면, 지구촌 몇몇 국가에서나마 사회민주주의를 통한 경제 영역의 민주화는 후퇴할 수 없는 수준까지 전진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끝으로 “사람들이 함께 노력하면 어떤 장애물이라도 극복해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기반을 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사회민주주의가 20세기에 큰 성공을 거두었듯, 21세기에도 “그 형태는 다를지 모르나 성격은 다르지 않은” 정치 이데올로기를 통해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저자의 마지막 주장에 대해서는 전적인 공감을 표하고 싶습니다. 경제든 뭐든 ‘결정지어져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인간의 힘을 통해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어떤 사족도 달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근래에 꽤 여러 편의 책 리뷰를 작성한 바 있는데, 이번 리뷰는 그 어느 때보다 제 의견을 많이 넣었고(물론 저의 무지 탓으로 많은 다른 글에서 본 내용들을 활용하긴 했습니다만), 저자에게 많이 반항(?)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전문성이나 깊이 있는 지식도 갖지 못한 제가 감히 셰리버먼과 같은 학자의 책에 너무 많은 토를 단 것 같아 낯 뜨겁긴 합니다만, 무식한 자라도 용감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또 민주주의의 장점인 듯합니다. 어찌 되었든 부족한 제가 있는 힘을 다해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해준 이 책과 저자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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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관해서는,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단적인 이론을 받아들여야 한다. 즉 인간의 동기는 '물질적'인 것과 '관념적'인 것으로 나뉘는데, 일상생활이 조직되는 동기는 '물질적' 동기라는 것이다. 공리주의적 자유주의나 통속적 마르크스주의 모두 이러한 관점을 선호했다. 사회에 관해서는, 인간의 경우와 비슷한 다음과 같은 학설이 나왔다. 사회 제도는 경제 체제에 따라 '결정'된다. 이 견해는 자유주의자들보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훨씬 더 인기가 있다. 물론, 시장 경제 아래서는 두 가지 주장이 다 맞다. 하지만 오직 시장경제 체제에서만 그러하다. 이러한 관점을 과거에 적용하게 되면 시대착오적 입장만 나오게 될 뿐이고 미래에 적용하게 되면 편견만 나오게 된다."
  - 칼 폴라니,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p25

"아리스토텔레스가 옳았다. 인간은 경제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이다. 물질적 소유를 획득하는 과정에서도 인간이 노리는 것은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사회적 선의, 사회적 지위, 사회적 자산 등이다. 인간은 그러한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자신의 소유물의 가치를 평가한다. 인간을 움직이는 동기는 보통 우리가 사회적 인정을 얻기 위한 노력과 연결 짓는 혼합적 성격을 띤다. 인간의 생산에 들이는 수고는 사회적 인정을 얻으려는 노력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인간의 경제는 일반적으로 사회적 관계 속에 묻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사회의 모습이 정반대로 사회가 경제 체제에 묻어 들어간 형태로 변한 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사태이다."
  - 칼 폴라니,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p31

"경제 결정론을 모든 인간 사회에 적용하려는 노력은 망상이나 다름없다. 사회 인류학의 연구에 의해, 사용하는 생산 도구가 사실상 동일하다 해도 그 생산 도구들에 조응하는 제도는 다수라는 것이 밝혀졌다. 시장이라는 제도가 인간적 유대를 멧돌에 갈아 셀렌산으로 부식시킨 듯한 특징 없는 획일성으로 몰아넣기 전에는 제도를 낳는 인간의 창조성이 결코 멈춘 적 없었다."
  - 칼 폴라니,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p41

"자유 방임 철학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이미 지나가버린 산업 문명의 시대에 끝났다. 그것은 인간을 가난하게 만든 대신 사회를 부유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는 생활의 충만함을 인간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비록 기술적으로는 효율성이 덜한 사회가 되더라도 말이다."
  - 칼 폴라니,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p43

"노동 시장, 토지 시장, 화폐 시장이 시장 경제에 '필수적'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인간과 자연이라는 사회의 실체와 경제 조직이 보호받지 못한 채 그 '악마의 멧돌'에 노출된다면, 어떤 사회도 무지막지한 상품 허구의 경제 체제가 몰고 올 결과를 한순간도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 칼 폴라니,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p63

"하지만 산업 생산이 복잡해질수록 공급을 보장해야 할 산업 요소들의 종류도 늘어났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요소는 노동, 토지, 화폐였다. 상업 사회에서 이 세 요소의 공급을 조직하는 방법은 단 하나, 즉 구매를 통해 얻는 것 뿐이다. 따라서 이 세 가지는 시장에서의 판매를 위해 조직되어야만 했다. 즉, 상품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시장 메커니즘을 노동, 토지, 화폐라는 산업 요소들에까지 확장하게 된 것은 상업 사회에 공장제를 들여오면서 나타난 불가피한 현상이다."
  - 칼 폴라니,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p65

"19세기 사회사는 이중적 운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진짜 상품에 대해서는 시장적인 조직 방식을 확장해나가는 과정이, 허구적 상품들에 대해서는 그것을 제한하는 과정이 나란히 나타났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시장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시장에 나오는 재화의 양은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일련의 법령과 정책의 연결망이 노동, 토지, 화폐에 관한 시장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만든 강력한 제도들로 통합되었다."
  - 칼 폴라니,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p67

"어떤 집단을 성공으로 이끄는 것은 그들 자신의 이해관계가 지닌 힘 때문이 아니다. 사실 성공의 비밀은 그 집단이 얼마나 다른 집단들의 이익을 - 자신들의 이익에 포괄시킴으로써 - 대표해내느냐에 달려 있다. 실제로 어떤 집단이 그러한 포괄을 이루고자 한다면 자신들이 지도하기를 열망하는 더 폭넓은 집단의 이익에 자신들의 이익을 갖다 맞춰야 할 것이다. 사회의 대다수는 양대 계급 간의 싸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아무런 '이해'도 갖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이는 더욱 쉬워진다. 사회의 성격이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에 소규모 중산 계급이나 농민들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가장 결정적으로 관심을 갖는 사실으 사회가 그 둘 중의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만약 노동 계급이 사회주의를 향한 길에 앞장서고 현실적으로 다른 계급들을 지도하기 위해 자신의 이익을 조화시켜 나간다면 그들은 노동 계급을 따를 것이다."
  - 칼 폴라니,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p80

"중앙 계획화된 경제 방식의 가장 뚜렷한 결함은, 노동 계급 운동의 구체적 현실과 그 운동이 체현하고 있는 역사적 임무를 조화시키지 못한다는 점과 관계 있다. 관치 경제 이론가들은 노동 조합, 산업 결사체, 협동 조합, 사회주의적 지방 자치 단체들이 사회주의 경제에 기여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간과하고 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장치들은 경제에 대한 '내적 조망'의 기관들로서 사회주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 칼 폴라니,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p110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무엇보다도 먼저 대외 정책의 문제이다. 금본위제의 실패에서 보았든이, 사적 기업이라는 경제 운영 방법이 파산했던 곳도 바로 이 대외 정책의 영역이며, 사적 기업이라는 방법에 집착한 나머지 현실적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는 곳도 대회 정책의 영역이다.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단순한 하나의 신조에 바탕을 두고 있다. 대외적인 구매와 판매, 대부와 차입 그리고 외환 거래가 벌어지는 단위는 개인들로서, 마치 그들 모두가 같은 나라의 국민인 것처럼 상정하는 것이다. '대외 경제'는 이로써 사적 개인들 간의 문제가 되고 시장 메커니즘음 만국의 대외 경제를 저절로 '균형에 이르게' 해주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힘을 갖는 것으로 신뢰받는다. 이러한 유토피아적인 관념은 현실에서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으며, 실제로 무너지고 말았다."
  - 칼 폴라니,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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