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사회민주주의의 명예회복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자리한 국가들을 그 상징적 성공모델로 한 ‘사회민주주의’는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좌파와 우파 모두로부터 폄하되어왔습니다. 좌파로부터는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배신하고 자본과의 타협을 통해 탄생한 ‘개량주의 체제’로서 자본주의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아왔으며, 우파로부터는 ‘복지병’과 ‘비대한 공공부문으로 인한 비효율의 상징’이라는 모함에 가까운 비판을 받아 온 것이죠. 그러나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과 신자유주의의 광풍, 그리고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신자유주의의 위기라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혁명적 사회주의와 자유주의가 모두 한계를 드러내자, ‘구체제’ 취급을 받던 ‘복지국가’는 대안 체제로서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최근의 경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주의’라는 복지국가를 떠받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사회주의보다는 자본주의 쪽에 조금 더 가까운 타협점’ 정도인 것 같습니다. 사회민주주의를 하나의 구체적 지향과 이상을 가진 체계로 보기보다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이상 사이에서 나타난 ‘어중간한 중도’로 보는 입장이 지배적이라는 이야기죠. 사회민주주의를 이렇게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여러 요소를 짜깁기한, 그러면서도 자본주의적인 것이 더 중심이 되는 것으로 보는 시각으로 인해 좌파에서는 여전히 ‘개량주의’의 시각을 거두지 못하고 있고, 우파에서는 때로는 비효율의 상징으로 몰아붙이다가도 20세기를 자유주의의 승리로 선언할 때는 사회민주주의를 슬며시 자유주의의 변형으로 위치시키기도 합니다.

  이 책, ‘정치가 우선한다(The Primacy of Politics)’의 저자인 셰리 버먼은 이런 경향이 잘못되었음을 단호하게 주장합니다. 그녀는 사회민주주의가 ‘정치의 우선성’과 ‘공동체주의에 대한 믿음’이라는 분명한 이념적 지향을 가지고 있으며,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 모두에 대한 대안 이데올로기로서 양차대전 이후 70년대까지의 번영을 이끈 사상이자, 신자유주의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현재와 미래에도 여전히 기능할 20세기 사회사상사의 진정한 승리자라고 선언합니다. 그 말대로라면 가히 ‘사회민주주의의 명예회복’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그녀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사회민주주의 이데올로기의 형성과 발전을 정치사와 지성사를 포괄하여 역사적으로 조망합니다. 이 리뷰에서는 저자의 역사적 조망을 간략히 살펴보고,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들을 현재적 과제에 비추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조망

 저자의 이야기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심각한 불평등과 공동체의 뿌리 뽑힘, 개인의 원자화라는 폐해를 낳은 끝에 대안 이데올로기로서의 마르크스주의가 등장하고, 다시 19세기 말 마르크스주의조차 위기에 놓인 시점에서 시작합니다. 저자는 당시 엥겔스와 카우츠키가 주도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교리’는 역사적 유물론과 계급투쟁이었다고 말합니다. 역사적 유물론과 계급투쟁론은 자본주의는 그 내적 모순으로 인해 계급 간 대립을 격화시킴으로써 필연적으로 붕괴하게 되며, 이는 사회주의로의 필연적인 이행으로 이어진다는 결정론적인 내용입니다. 문제는 마르크스의 예언(이와 같은 경제 결정론은 마르크스의 것이 아니며 엥겔스와 카우츠키가 마르크스주의를 지나치게 도식화 한 나머지 초래된 것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저의 식견이 짧아 뭐라 할 수는 없지만, 아무리 엥겔스와 카우츠키에 의해 단순화가 되었다고는 해도 ‘경제적 토대가 결정적’이라는 생각 자체는 역시 마르크스로부터 기원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한 평가가 아닐까 합니다.)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19세기 후반의 불황을 겪고 난 후 자본주의는 호황 국면에 들어섰고, 적어도 상당 기간 동안은 붕괴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이죠. 이렇게 되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기모순에 봉착하게 됩니다. 당시의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전술한 바와 같이 ‘경제적 토대에 의한 필연적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제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 이행기를 대비해서 노동자들을 조직화하고 교육하는 것 외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혁명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할만한 어떤 지침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경제 결정론적 관점 외에도 마르크스주의의 국가론 - 국가는 지배 계급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일 뿐이라는 - 은 정치 자체에 대한 부정적 정향을 나타냈고, 결국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은 정당이면서도 정치활동에는 나서지 않아야 하는 모순된 입장에 처하게 됩니다. 만약 단기간 내에 자본주의가 붕괴되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시작된다면 이런 것들은 큰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일이 그렇게 진행되지 않게 되면서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 균열이 발생합니다. 바로 수정주의의 등장입니다.

 수정주의의 출발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베른슈타인입니다. (물론 저자는 장 조레스, 프란체스코 메를리노, 필리포 투라티, 오토 바우어 등의 이야기를 폭넓게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수정주의의 시조 격인 베른슈타인의 이야기만 간략하게 짚고 넘어 가겠습니다.) 그는 사회주의는 순전히 유물론적인 기반에서 오지 않으며,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통한 개혁으로 사회주의 이행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역사적 유물론에 대한 공식적 포기를 요구한 것이죠. 또한 그는 민주주의(좀 더 정확하게는 의회주의)의 실현은 사회주의로 가기 위한 중요한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라고 제시하며, 마르크스의 또 다른 예언인 프롤레타리아화(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라 중간계급은 사라지고 소수의 자본가를 제외한 계급들은 프롤레타리아가 된다는 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사회민주당은 득표를 위해 다양한 계급을 포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또 다른 중요한 교리인 계급투쟁론마저 저버린 것입니다. 대신 베른슈타인은 ‘정치의 우선성’과 ‘계급교차적 협력’을 내세웁니다. 자유주의 정치의 소중한 성과인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이용하여 사회의 전반적 피지배계급의 대표자로서 사회민주당이 적극적으로 의회에서 활동함으로써 ‘개혁을 통한 사회주의 이행’이 가능하다는 비전을 제시한 것입니다.

 저자는 베른슈타인과 흐름을 같이한 수정주의자들을 ‘민주주의적 수정주의’라 분류하는 한 편 이들과는 또 다른 수정주의의 흐름을 제시합니다. 바로 후에 파시즘을 낳게 되는 ‘혁명적 수정주의’입니다.(저자는 레닌의 볼셰비즘 또한 혁명적 엘리트의 지도를 통한 사회주의 이행을 제시하여 경제결정론을 부정하였다는 점을 들어 그 또한 수정주의의 한 흐름으로 분류합니다. 사실 이는 좀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수정주의를 ‘혁명을 포기하고 개혁을 추구하는 흐름’으로 보는 일반적인 입장에서 보면 볼셰비즘은 수정주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자의 경우 ‘경제결정론에 입각한 사회주의 이행’을 따르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정통과 수정주의를 나누고 있기 때문에 이 같은 분류가 전적으로 부당하다고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혁명적 수정주의는 조르주 소렐로부터 출발합니다. 소렐은 마르크스주의의 결정론적 세계관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는 베른슈타인과 관점을 같이합니다. 하지만 소렐은 베른슈타인보다 인간의 의지를 더 강조하는 주의주의(主意主義)적 입장을 취했으며, 보다 더 중요하게는 프랑스의 자코뱅주의적 전통을 이어받아 (민주주의적 방법이 아닌) 폭력적 직접행동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사상은 좌우 양극단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 좌측에는 아나코 생디칼리슴이 있었고, 우측에는 파시즘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저자가 파시즘과 나치즘을 다룬 방식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글의 저자인 셰리 버먼의 경우 파시즘이나 민족적 사회주의(나치즘)의 정책이 완전고용, 재정확장,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선성을 강조했다(즉, 국가가 자본가에 대한 우위에서 서서 경제 계획을 수행했다)는 측면에서 ‘민주주의’라는 절차적 요소와 인종주의적인 요소를 제외하고 보면, 사회 민주주의와 파시즘이 매우 유사하다고 말합니다. 정책 뿐 아니라 기원에 있어서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민주적이냐 혁명적이냐의 차이는 있어도 ‘수정주의’라는 공통의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욱 유사하다는 것이죠. 결국 저자는 이를 통해 ‘민주주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또한 이 책이 다룬 내용이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가 ‘민주주의’의 절대적 중요성이라고 생각하기에 상당부분 저자의 논지에 동감합니다. (민주주의의 절대적 중요성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하지만 파시즘/나치즘과 사회 민주주의 사이에는 저자가 다룬 것보다 더 큰 차이가 있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칼 폴라니는 ‘파시즘의 본질’이라는 논문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양립 불가능성을 지적하며 이의 해결 방안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민주주의를 경제 영역에까지 확장시키는 것.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사회에 경제생활만을 남겨놓는 것. 폴라니가 지목한 두 번째 경우가 바로 파시즘으로 그는 파시즘은 경제적 자유주의의 마지막 안전판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민주주의를 말살함으로써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경제를 국가가 보호하고 육성하는 방식으로 나갔다는 것이죠. 물론 저자 또한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만, 저의 짧은 소견으로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양립 불가능성’에 대해 저자는 폴라니와 같은 정도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2차 대전 후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러했듯이) 자본주의에 ‘어느 정도’의 규제만 가한다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양립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저자가 책 말미에 (이른바 ‘구조개혁좌파’라 할 수 있는) 70년대의 이탈리아 공산당이나 프랑스 사회당/공산당 연립정부를 ‘마르크스주의의 유산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즉, 지체된) 것으로 언급하는 데에서도 드러납니다. 이는 결국 사회민주주의를 완결된 체제로 보느냐, 경제적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간단계로 보느냐의 문제이며, 이 중 어느 쪽 입장을 취하는가에 따라 파시즘 및 민족적 사회주의와의 차이에 대한 시각도 달라질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이 글 말미에 다시 언급할 예정이니 일단 이 정도만 언급하고 저자의 논의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로마에서의 무솔리니와 히틀러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수정주의의 대립 문제는 1차 대전을 겪고 난 후 더욱 심각해집니다. 기존의 사적 유물론과 정치의 우선성의 대립, 계급투쟁론과 계급 교차적 협력의 대립은 몇 가지 현실적 상황의 변화로 더욱 심각해집니다. 우선 전쟁을 통해 나타난 민족주의의 등장은 사회주의 정당의 ‘국민정당화’에 대한 문제로 심화되어 기존의 계급투쟁론에 대한 도전을 더욱 거세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극에 달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인민의 반감은 선거를 통해 표출되어 많은 나라에서 마르크스주의 정당은 지배적 정당의 위치에 올라섭니다. 각국의 주요 정당의 위치에 올라선 마르크스주의 정당은 책임 있는 정치행위를 요구받게 되는데, 이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정치행위에 대한 부정적 입장과 충돌하게 되고 역사적 유물론에 대한 정치의 우선성의 도전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의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은 기존의 교조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이게 되고, 이로 인해 사회주의 정당들은 심각한 분열을 겪습니다. 이처럼 마르크스주의가 인민의 자본주의에 대한 실망을 해결해주지 못하는 틈을 비집고 나타난 것이 파시즘과 나치즘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파시즘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는 복합적이지만, 어쨌든 파시즘은 당시에 치솟던 민족주의적 요구와 기존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거부, 그리고 실업이나 빈곤과 같은 현실적 과제의 해결이라는 당시 인민의 요구들을 마르크스주의자들보다 더 빠르고 명확하게 자신의 것으로 하며 폭넓은 지지를 얻습니다. 물론 인권과 민주주의의 말살, 그리고 인종주의라는 요소들로 인해 처음 내세운 것과 달리 파시즘과 나치즘은 지독히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체제로 귀결되고 말았습니다만 그건 나중의 일입니다.

 일찍이 민주주의적 수정주의가 결실을 맺었던 스웨덴이라는 하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에서 민주주의적 수정주의의 결실은 2차 대전을 겪은 후에 이루어집니다. 저자는 양차대전과 그 사이의 대공황을 겪으며 통제되지 않은 시장의 위험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서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루어졌으며, 한편으로 파시즘과 나치즘이라는 전체주의를 겪으며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의 중요성 또한 유럽인들에게 중요한 교훈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케인스주의와 복지국가입니다. 케인스주의 경제정책은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선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사회에서 독립된 경제’가 아닌 ‘사회 안에 묻어 들어간 경제’가 구현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복지국가는 사회 구성원간의 연대성을 강조함으로써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하의 원자화된 개인들의 이익사회(gesellschaft)가 아닌 공동체적 헌신에 기초한 공동사회(gemeinschaft)로의 이행을 보여줍니다. 저자는 비록 적지 않은 나라에서 케인스주의와 복지국가는 우파 정당에 의해 수행되기도 했고, 이로 인해 이것이 자유주의의 변형인 것처럼 오해되기도 하지만, 이는 명백히 민주주의적 수정주의의 주장을 이어받은 사회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20세기 사상사의 최후의 승자는 사회 민주주의라고 말합니다.

                                       1930년대 스웨덴 사민당의 선거포스터

첫 번째 교훈. 도그마(Dogma)에 빠지지 마라.

 그 기원이 마르크스에 있건 엥겔스와 카우츠키에 있건 간에 19세기 말~20세기 초의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이 ‘경제결정론’이라는 도그마에 빠졌던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사실 자본주의는 그 내적 모순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붕괴하게 되며, 그 다음 세상의 주인공은 지금 핍박받고 있는 프롤레타리아라는 명제는 마르크스주의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파산을 앞두고 가장 강력한 대항 이데올로기가 되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지금의 세상이 너무나 비참하고 힘겨울 때 누군가가 ‘걱정하지 마, 반드시 압제자들을 물리치고 네가 승리하게 될 거야.’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과학적 근거’를 가진 것이라고 여겨진다면 누구에게라도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는 그렇게 등장하여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력한 도전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세상은 마르크스가 예측한 것과 다르게 움직였고, 마르크스주의를 강력하게 만든 바로 그 강점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되었습니다. 이는 마르크스를 탓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설사 잘못된 예언이 온전히 마르크스의 몫이라고 가정해도 말이죠. 사상가는 예언자가 아닙니다. 사상가는 자신이 속한 시대에 발을 딛고 그 시대의 환경 속에서 그 시대까지의 지적 성과를 기반으로 새로운 시대를 조망하고 대안을 내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새로운 시대에 대한 예측이 완벽하게 실행되지 않더라도, 그들의 현실 분석과 미래에 대한 대안은 충분히 많은 교훈을 줄 수 있고 더 나은 시대를 설계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본주의가 스스로 붕괴하지 않았다고는 해도, 자본주의의 원리가 가진 근본적인 모순과 그로 인한 계급 문제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양상을 그릴 것인지를 이야기한 마르크스의 시도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바뀐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선대의 사상을 그대로 고집한 후대에게 있습니다. 그들은 시대의 변화를 스스로 체험하고 분석할 수 있는 상황에 있었음에도 선대의 사상을 마치 예언인양 받아들이고 고집했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알맞게 사상과 실천은 바뀌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한 것이죠. 이런 것이 바로 도그마(dogma)에 빠진 상황입니다. 종교적 영역이라면 몰라도 정치적·사회적 영역의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은 절대 도그마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사회는 항상 변하기 마련이며, 제아무리 뛰어난 사상가라도 그 변화를 완전히 예측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정치적·사회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원칙을 가지되 늘 사회의 변화에 조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공통적으로 가졌던 ‘경제결정론’의 도그마는 힘겨운 과정을 거쳐 극복되었습니다. 비록 ‘신자유주의’의 열풍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악몽을 떠올리게 했지만 역사를 완전히 되돌릴 수는 없었고, 복지국가는 약화되었을지언정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경제를 사회와 정치로부터 떼어 낸 채 운영한다는 원리가 지독한 유토피아에 불과하다는 역사의 교훈이 아직은 남아 있었던 까닭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경제에 관한 도그마가 이것뿐인 것은 아닙니다. 경제와 관련해서는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도그마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경제성장’의 도그마입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파시즘과 사회민주주의를 포함한 모든 이데올로기들이 공유했던 경제적 원칙은 ‘경제성장은 이롭다.’는 것이었습니다. 산업화의 진전과 경제의 ‘발전’, 그리고 그로 인한 생산과 소비의 증대는 20세기의 어떤 주류 사상도 거부하지 않았던 ‘공리’였습니다. 특히 이 책의 저자인 셰리 버먼이 20세기 사회사상의 진정한 승리자로 상찬해 마지않는 사회 민주주의와 그 결과물로서의 케인스주의 복지국가는 포드주의로 상징되는 대량생산과 포디즘 체제 하 노동자들의 소득 증대로 인한 대량 소비를 근간으로 한 ‘대중사회’가 그 본질이었습니다. 생산의 지속적인 증대는 노동자들의 고소득의 근간이 되었으며, 그 고소득 노동자들의 소비는 생산증대를 뒷받침할 유효수요를 창출했습니다. 또한 고소득 노동자들로부터의 조세는 복지재정의 근간이 되었으며, 완전고용에 가까운 상황은 복지수혜자를 전통적인 빈곤층 - 노인, 장애인 등 - 으로 제한함으로써 재정적 부담을 완화했습니다. 이 모든 체제의 근간에는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 좀 더 직설적인 표현을 쓰자면 ‘생산과 소비의 지속적인 증대’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왔다가 다시 저물고 있는 지금에도 주류 이데올로기에서는 어느 쪽도 ‘경제성장’이라는 전제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주로 생태주의 진영으로부터 나오는 ‘경제성장’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일축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경제성장’은 ‘경제결정론’보다 더 강력하게 지속되고 있는 도그마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지구 환경의 문제는 '경제성장'이라는 도그마가 초래한 재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그리고 이 경우에는 특히 우리를 둘러싼 자연환경은 우리의 생각의 변화보다 더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많은 생태주의자들이 지적하는 산업발전의 부정적 부산물들, 즉 기후변화나 피크오일, 생태계파괴와 같은 문제들은 이미 지구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봉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멜서스의 ‘인구론’이 그랬던 것처럼, 생태주의자들의 경고 또한 인간의 ‘진보’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현실속의 기술 발전의 정도로 봐서는(보다 더 중요하게는 인간들이 기술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봐서는) 과연 그럴까 싶긴 하지만 설사 그런 논의의 적실성을 어느정도 인정한다고 해도,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은 현재 수준 이상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만약 남반구의 나라들이 북반구의 나라들만큼 산업을 ‘발전’시킨다면, 그 때는 정말 지구가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될 것입니다. (로스엔젤레스의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을 세계 전역으로 확산시킬 경우 지구가 다섯 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나, 세계 모든 가족이 자동차를 한 대씩 가진다면 석유는 수개월밖에 지탱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상황에서 경제성장의 도그마를 그대로 가지고 미래를 설계한다면, 그 미래가 과연 지속가능할까요? 어쩌면 현 시대에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가치는 '자유로운 시장‘이나 ’복지국가‘가 아니라 생태주의일지도 모릅니다. 설사 생태주의자들의 주장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경제성장이 도전받지 않는 도그마로 존재하는 상황은 위험하다는 것을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실패에서 읽어내는 것이야말로 역사적 교훈을 현재화하는 지혜일 것입니다.

 

두 번째 교훈. 민주주의가 우선한다.

 제가 이 책을 읽으며 느낀 두 번째의 중요한 교훈을 바로 ‘민주주의의 우선성’입니다. 파시즘과 사민주의의 차이의 대부분이 민주주의라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가장 중요한 차이 중 하나였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19~20세기를 거치며 형성된 체제 중 어쨌든 ‘민주주의적인’ 제도를 정착시킨 체제는 불완전할지언정 그럭저럭 생존해온 반면, 그렇지 못한 체제는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몰락했습니다. 나치즘과 파시즘,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이 그 좋은 예입니다. ‘이슬람 사회주의’라는 슬로건으로 서구 기업의 착취와 전근대적 왕정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등장했던 ‘혁명가’, 카다피는 최초의 ‘좋은 뜻’은 간데없이 최악의 독재자가 되어 결국 인민에 의해 축출되었으며, 우리에게 더 가까운 예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해방 직후 친일파 청산과 토지 재분배라는 시대적 과제를 대한민국보다 더 잘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세계 유일의 3대 세습 국가(남쪽에는 3대 세습 재벌이 있긴 합니다만)가 되어 ‘인민은 굶고 있는데 지배층은 권력 유지에만 골몰하고 있는’ 비참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민주주의의 유무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도한 일반화이겠습니다만, 민주적 제도가 없는 나라가 시대의 변화에 더 적응하지 못하며 권력 중심부로부터의 부패에 더 취약한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때문에, 바로 위에 도그마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만, 만약 사회의 운영원리로서 단 한 가지 ‘절대 흔들리지 말아야 할 원칙’이 있다면 저는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의 원칙을 말함에 있어 정말로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행하는 것입니다. 사실 위에 ‘민주주의가 없었던’ 체제로 예를 들었던 사회들도 민주집중제라든가 하는 식으로 스스로의 ‘민주주의’를 추진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작동되는 민주주의였냐고 질문해본다면 아마 상식을 가진 현대인의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더 추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일까요?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라고 하면 보통·평등·직접·비밀의 원칙에 근거한 선거, 의회, 복수의 정당 등을 떠올립니다. 이것들은 모두 오랜 세월을 거치며 형성된 ‘민주주의를 운영하기 위한 장치들’입니다. 민주주의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죠. 그런데 이런 제도들이 대부분 갖춰진 지금의 우리나라 정치는 ‘민주주의적’인가요?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민주주의를 정의해야 합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는 학자마다 여러 가지로 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민주주의는 민중(Demos)에 의한 지배(Kratos)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수의 선택받은 이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민중이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지금 우리의 현실을 어떨까요? 2011년 전세계를 뒤흔들었던 말이 바로 1%에 대한 99%의 반격입니다. 민주주의의 원리가 관철되고 있다면 말도 안되는 소리죠. ‘반격’이라는 것은 이전까지 열위에 있었음을 내포한 표현인데 99%의 사람들이 1%에 의해 열위에 있다면 우리가 떠들어온 ‘민주주의’는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이런 문제가 발생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대의 민주주의 체제의 한계라든가 관료주의의 문제도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부분은 참여 민주주의적 요소의 도입 - 주민소환이라든가, 주민참여예산제 같은 - 이나 정당의 정책역량 강화를 통해 선출된 권력의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대한 통제 강화 같은 대안이 있을 수 있겠지요. 이런 문제들을 깊이 있게 다룰 수 있으면 좋겠지만, 여기서는 다른 이야기를 조금 하고 넘어갈까 합니다. 바로 앞서 언급한 폴라니의 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충돌의 문제입니다.

      '김진표 아웃' 같은 것으로 간단히 경제민주화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물론 아웃은 필요하긴 하다.

 최근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상당히 넓은 스펙트럼에서 쓰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넓은 스펙트럼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지점은 ‘재벌이 법 위에 군림하는’ 상황을 바꿔야 한다는 것인 듯합니다. 그런데 사실 엄밀히 따지면 이건 ‘민주주의’라기보다는 ‘제대로 된 자유주의’의 영역에 속합니다. 공정한 경쟁의 보장이라든가, 법치주의의 원칙을 분명히 하는 것은 서구에서는 19세기 고전적 자유주의 시대의 과제였습니다. 이는 사실 민주주의의 문제라기보다는 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전제조건 같은 것들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을 ‘경제 민주화’라고 부르는 것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지체된 경제 자유화의 회복’이라고 하면 더 적합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경제 민주주의는 경제 영역에서 민중에 의한 지배를 확립해나가는 데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독일 같은 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는 노조의 경영참여 제도화는 우리의 현실에서 좋은 출발점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더 나간다면 협동조합처럼 민주적 원리에 의해 운영되는 생산/소비 조직이 경제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 또한 경제 민주주의의 중요한 요소일 수 있을 것입니다. 공공이 운영하는 - 달리 말하면 국유화된 - 기업을 늘림으로써 사적 기업의 전횡을 견제하는 문제는 좀 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입니다. ‘국가’라는 기관을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냐는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국과 같이 선출되지 않은 관료의 힘이 강한 나라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현 시점에서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할 때 초국적 자본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라는 주제는 매우 중요하고도 어렵습니다. 어찌 보면 케인지언 복지국가가 실패한 원인 중 하나는 일국적 케인즈주의가 초국적 자본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결국 ‘경제 민주화’는 나라 안에서 뿐 아니라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공통의 노력이 필요한 과제입니다. 최소한 지역적 차원의 다국적 공조가 필요한데, 현재 남미에서 시도되고 있는 ALBA(Alternativa Bolivariana para América Latina y el Caribe)와 같은 경우가 하나의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폴라니는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본질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원리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민주주의를 폐기하거나 자본주의를 민주화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완벽한 자본가의 통치 기구로서의 국가’를 만들거나 ‘경제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거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셰리 버먼은 이와 같은 ‘자본주의의 민주화’의 과제가 케인지언 복지국가에 의해 훌륭하게 수행되었다는 의견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진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좀 더 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가 우선해야 한다.’는 역사의 교훈을 현재화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영역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할 것입니다.

  

나가며. 사회민주주의의 현재와 미래

 글을 맺으며 이 책에 나온 저자의 중요한 주장들과 그 주장들에 대한 저의 부족하나마 간략한 견해를 덧붙여볼까 합니다. 우선 저자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 즉, ‘사회민주주의야말로 20세기 사회사상사의 진정한 승리자’라는 주장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합니다. 어쨌든 19~20세기를 거치며 나온 여러 사회사상 중 사회민주주의에 기반한 사회가 가장 번영했고 성공적이었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검증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영미권을 제외한 유럽 대부분 지역을 ‘사회민주주의’라는 하나의 틀로 묶을 만큼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많은 공통점을 찾을 수 있긴 하지만, 이를테면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과 대륙 유럽 국가들의 차이가 대륙 유럽 국가들과 영국(미국은 꽤 차이가 커 보이니 논외로 하겠습니다.) 과 같은 국가와의 차이에 비해 그렇게 좁았다고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좀 더 중요하게는 저는 사실 사회민주주의는 ‘과도기적 체제’였다고(혹은 그랬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사회민주주의가 폴라니가 제시한 방법대로 정치의 힘으로 경제의 영역에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체제였다고 한다면 현실속의 사회민주주의가 균형점을 이루었던 지점은 너무나 불충분한 민주화였습니다. 불가역적인 수준까지 경제 영역에 민주주의를 심지 못했기 때문에 전 세계적 정치경제 환경의 변화 시기에 이루어진 ‘신자유주의의 역습’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스웨덴의 임노동자 기금 시도나, 셰리 버먼이 마르크스주의의 구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지체된 현상쯤으로 취급했던 프랑스 사회당-공산당의 ‘공동강령’ 같은 것들이 좀 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면, 지구촌 몇몇 국가에서나마 사회민주주의를 통한 경제 영역의 민주화는 후퇴할 수 없는 수준까지 전진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끝으로 “사람들이 함께 노력하면 어떤 장애물이라도 극복해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기반을 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사회민주주의가 20세기에 큰 성공을 거두었듯, 21세기에도 “그 형태는 다를지 모르나 성격은 다르지 않은” 정치 이데올로기를 통해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저자의 마지막 주장에 대해서는 전적인 공감을 표하고 싶습니다. 경제든 뭐든 ‘결정지어져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인간의 힘을 통해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어떤 사족도 달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근래에 꽤 여러 편의 책 리뷰를 작성한 바 있는데, 이번 리뷰는 그 어느 때보다 제 의견을 많이 넣었고(물론 저의 무지 탓으로 많은 다른 글에서 본 내용들을 활용하긴 했습니다만), 저자에게 많이 반항(?)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전문성이나 깊이 있는 지식도 갖지 못한 제가 감히 셰리버먼과 같은 학자의 책에 너무 많은 토를 단 것 같아 낯 뜨겁긴 합니다만, 무식한 자라도 용감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또 민주주의의 장점인 듯합니다. 어찌 되었든 부족한 제가 있는 힘을 다해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해준 이 책과 저자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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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자들은 늘 '대중사회와 민주정치의 평등주의적 위협'이 가하는 공포에 시달리며 살아왔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무식하고 가난한 대중에 의한 전제정치와 '계급입법'으로 귀결된 것이었다. 한편, 마르크스는 부르주아들이 민주주의가 실제로 작동하게 (그리고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도록) 놔두리라고 믿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종언을 불러올 것이라 생각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2

"20세기 초반을 거치면서 실제 현실 속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을 기존의 시장과 국가, 사회의 관계를 극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정치적 권력에 의해 조절되고 제한되며 사회적 필요에 종속되는 자본주의가 창조되었음을 의미했다. 이는 자유주의자들이 오랫동안 옹호해온 것(시장과 개인의 최대한의 자유)과도,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실현되길 바랐던 것(자본주의 철폐)과도 거리가 먼 것이었다. '역사의 종언론'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20세기의 승리자는 자유주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회민주주의였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2~13

"전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기본적 생계가 "인간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 자체의 도덕적 권리"에 의해 보장될 수 있었던 반면,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아사의 위협('굶주림이라는 경제적 채찍')이 사회적 제도들의 필요물이자, 심지어 바람직한 일부분으로 자리 잡았고 게임의 법칙이 이끄는 궁극적 유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5

"공동사회의 사람들은 모든 분열적 요인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반면, 이익사회의 사람들은 여러 통합적 요인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분열되어 있다."
  - 페르디난트 퇴니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6에서 재인용

"자유주의와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경제 중심주의와 수동성을 거부하면서, 그리고 파시즘과 민족사회주의의 폭력성을 회피하면서, 사회민주주의는 정치의 우선성과 공동체주의에 대한 믿음(경제적 힘이 아닌 정치적 힘이 역사의 동력이 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확신, 그리고 사회의 '욕구'와 '행복'은 보호되고 배양되어야 한다는 확신) 위에 세워졌으며, 사회주의의 비마르크스주의적 비전을 나타냈다. 그것은 20세기에 가장 성공적인 이데올로기이자 운동이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8

"사회민주주의는, 적어도 출발 자체가, 그 핵심에 정치의 우선성과 공동체주의에 대한 특유의 믿음을 가진,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 둘 모두에 대한 뚜렷한 대안인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의 진정한 성격을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는 그것이 탄생한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21

"이데올로기들이 이론과 실천의 연결지점에 존재한다는 것, 즉 한 발은 추상적인 사상의 영역에, 또 다른 한 발은 일상적인 정치적 현실에 디디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이데올로기는 자신의 옹호자들에게 현실에 대한 만족스러운 설명과 그에 따른 실천 방안에 대한 안내자 역할이라는 두 가지를 모두 제공하면서 이론과 현실 각각의 영역을 부드럽게 연결시켜 줄 수 있을 때 가장 큰 영향력을 갖는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23

"달리 말해 1945년 이후 사람들은 국가를 사회의 보호자로 인식하기 새작했으며, 경제적 우선순위는 종종 사회적 우선순위보다 뒷자리로 밀려났다. 그 결과 오랫동안 공존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던 것들, 즉 잘 작동하는 자본주의체제와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적 안정성 사이에 조화가 이루어졌다. 이 새로운 체제의 기초가 전통적 자유주의나 마르크스주의 교리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만한 근거는 거의 없었다. 새로운 체제가 정말도 닮았던 것은 1920년대부터 1940년대에 걸쳐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옹호했던, 그리고 (그보다는 덜하지만) 파시스트들과 민족사회주의자들이 옹호했던 원칙과 정책이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35

"사회민주주의는 정치의 우선성과 공동체주의 위에 세워졌으며, 비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고유한 이데올로기와 운동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그것은 20세기의 가장 성공적이었던 이데올로기와 운동으로서 인식되어야 한다. 그것의 원칙과 정책들은 유럽 역사상 가장 번성하고 조화로웠던 시기를 지탱했던 것이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36

"사회주의 운동을 위해 마르크스의 사상을 단순화하고 대중화하는 과정에서 엥겔스와 카우츠키는 그의 사상 가운데 결정론적이고 과학적인 부분을 강조(혹은 과장)했으며, 역사에서 경제적 힘의 우선성, 그리고 계급투쟁의 불가피성에 기반하고 있는 하나의 교리를 창조해 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42

"요컨대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들에게 역사가 그들의 편이라는 확신과, 역사를 전진시켜야 한다는 과제를 부여받은 집단이라는 정체성을 제공해,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어둡고 우울한 시기를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을 주였으며, 이후 투쟁을 위해 신생 사회주의 운동이 단합되고 강화될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48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작동시킨 힘들 없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인류의 의식적인 노력과 자유, 정의에 대한 갈망이 없다면, 또한 자본주의가 제공한 기회를 현실로 전화하려는 에너지를 통해 고무되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을 것."
  - 장 조레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57

"사회주의를 향해 가는 점진적이고 정치적인 경로에 대한 이런 믿음으로 베른슈타인은 민주주의를 '수단인 동시에 목적'으로 바라보았다. "그것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의 무기이자 이후 사회주의가 실현될 형태"라는 것이었다. 민주주의는 사회주의자들에게, "심층적이면서 단계적인 개혁을 피 흘리지 않고 실시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를 제공한다. 보통선거권과 의회 활동은 계급투쟁의 정점이자 가장 포괄적인 형태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합법적 영역 안에서 치러지는 영구적이고 유기적인 혁명이며, 근대 문명에 상응하는 문화적 발전 수준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단순히 사회주의가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로 하는 최상의 도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계급 차별의 부재, 평등, 자유와 같은 사회주의의 가장 중요한 이상들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70

"따라서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자들에게 그들이 펼치는 주장의 기반을 프롤레타리아의 독자성과 계급투쟁의 불가피성에만 두지 말고, 오히려 "공통적 인간성과 사회적 상호 의존의 인식"에 두라고 촉구했다. 베른슈타인은 당시의 사회 갈등 밑에는, 사회주의자들이 인식해야 하고 또 보호하겠다고 약속해야 하는 근본적인 공ㅇ통 이익과 선이 존재한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사회주의를 대다수 시민에게 좀 더 나은 삶에 대한 비전을 제공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하는, 근본적으로 협력적이며 공동체적인 노력의 일환으로서 제시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72

"요컨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동안 베른슈타인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교의를 폭넓게 비판했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역사 유물론과 계급투쟁을 정치의 우선성과 계급교차적 협력에 대한 신념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신념이란 자신들의 이상과 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비전으로 고무된 개인들이 함께 단결할 수 있으며, 자기 주변 세계의 모습을 점차적으로 바꿔 나가기 위해 민주국가의 권력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72

"갑작스러운 기적이 세상을 바꿔 놓을 신비의 날이 오기만을 기다릴 것인가, 혹은 매일매일 개혁에 개혁을 거듭하며 끈기 있고 완고한 노력으로 한 걸음씩 진보를 이루어 낼 것인가, 이 두 가지 방법 중 우리는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 알렉산드르 밀랑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82에서 재인용

"사회주의는 한 계급에 대한 다른 계급의 승리가 아닌, 특수 이익에 대한 일반 이익의 승리를 나타내야 한다."
  - 프란체스코 메를리노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84에서 재인용

"이로 인해 이탈리아의 사회주의 운동은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 상황에 처했다. 즉 사회주의자들이 '다른 사회주의자들을 자신의 가장 큰 적'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은 사회주의 운동의 정치적 효력을 심각히 제한하는 것이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88

"조레스도 이와(베른슈타인과) 비슷한 입장을 취했는데, 그는 사회주의자들이 "애국심을 파괴하려 할 것이 아니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베른슈타인과 유사하게 '진정한 애국심'을 옹호했다. 그것은 다른 민족들 또한 '똑같이 귀중한 인류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존중하는 동시에, 자민족이 지닌 특별한 가치와 유산을 인식하고 찬미하는 것이었다. 그런 '진정한 애국심'은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와 국제주의 사이에서 어떤 모순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며, 사회주의자들이 우익 민족주의의 파괴적 경향에 대항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00

"바우어와 레너는 민족주의가 역사 속에서 강력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고, 민족 정체성을 무시할 수 없는 '근본적이고 파괴할 수 없는 요인'으로 보게 되었다. 그들은 민족주의를 부수적 현상이라거나 지배계급의 도구라고 보는 관점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민족주의가 사회주의로의 이행과 함께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정통파의 주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들은 바로 그 정반대의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본주의로 인한 사회적 갈들과 배제를 제거함으로써 사회주의는 사실상 민족주의적 의식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01

"민주적 수정주의자들은 민주적 수단을 통해 근본적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대중의 능력을 믿었던 반면, 레닌의 수정주의는 사회주의가 혁명적 엘리트의 정치적·군사적 노력을 통해 강제될 수 있다는 견해로 역사 유물론을 대체했다. 레닌은 만약 대중을 그대로 놔둔다면 그들은 사회주의를 위해 성공적으로 싸울 의지도 능력도 발전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대신 '혁명 의식'과 조직을 획득하는 것이 혁면 정당의, 특히 그 지도자들의 과제라고 여겼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06

"일부 우파들이 일종의 비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를 주창하고 있던 것과 동시에, 일부 좌파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주의의 혁명적 잠재력에 대해 긍정적 반응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중략) ... 민주주의적 수정주의자들과는 달리 이들은 자유주의와 그것이 대표하는 모든 것에 대해 오직 혐오감만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자유주의와 그것이 대표하는 모든 것에 대해 오직 혐오감만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베른슈타인의 민주적 경로를 거부했고, 사회주의는 오직 '현존하는 사물의 질서를 파괴하는 활기찬 전투'를 통해서만 출현할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수정주의는 '혁명적'이라고 불렸다.... (중략) ... 이런 저런 이유로 세기말은 '민족적' 사회주의의 탄생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그것의 모델과 산파 역할을 모두 해낸 이가 바로 조르주 소렐이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08

"그(조르주 소렐)에게 19세기 부르주아 자유주의는 그 자체로 유럽의 현대적 불안과 사회적 질병의 원천니었다. 그리고 그는 민주주의를 경멸했는데 언젠가는 반드시 그것이 사회주의자들로부터 혁명적 열정을 강탈해 갈 것이라고 믿었다.... (중략) ... 소렐은 이 파국을 불러오기 위해서는 지속적이고 아마도 '폭력적인' 투쟁이 필요할 것이라고 믿었다. 우선 그는 그런 투쟁에 반드시 필요한 혁명적 열정은 마르크스주의의 도독적 근원을 다시 강조해 불러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점점 환명을 느꼈고, 급진적 행동에 동기를 부여할만한 것을 찾아 다른 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는 마침내 신화가 지닌 동기부여의 능력을 찾아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14

"사실 그(조르주 소렐)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지배 질서가 프롤레타리아들을 '길들이고' 노동운동을 탈급진화하는 데 성공했다고 믿었다. 이런 관찰 결과 소렐은, 민주적 수정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에 대한 배타적 관심을 포기하게 되었다. 하지만 노동계급 중심 전략을 포기한 민주적 수정주의자들이 계급 교차적 협력과 타협의 가능성을 강조하게 된 반면, 소렐은 활성화된 대중 민족주의의 혁명적 가능성을 받아들이면서 좌파와 우파 각각의 반민주 세력들을 결합하도록 부추기게 되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15

"점점 더 많은 혁명적 좌파와 민족주의적 우파들이 서로의 운동 간에 중요한 유사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전자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그 제도들, 그리고 그 지지자들에게서 환멸을 느끼고는 민족주의가 갖는 동원과 혁명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후자는 리소르지멘토 이후 체제의 실패와 전통적 부르주아 정당들의 무능력에 환멸을 느끼고는 생디칼리슴과 혁명적 수정주의의 자유의지론적이며 혁명적인 정신, 그리고 이탈리아 노동자들에게 민족주의의 호소력을 넓힐 수 있는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소렐의 사상은 이 집단들이 공통의 기반을 발견할 수 있는 하나의 교리를 제공해 발생 단계에 있던 이런 연합의 성장을 더욱 촉진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26

"이탈리아나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세기말 점점 그 수가 증가하고 있던 독일의 민족주의자들은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를 부르짖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에는 반대하지만 자본주의에 가혹할 정도로 비판적이었으며, 근대사회를 오렴시킨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또한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우파 인물들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종합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일부 좌파들 또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33

"독일이 타락한 근본적인 원인은 근대성 그 자체, 즉 전통적 사회와 전통적 믿음을 파괴한 새롭고 폭력적인 힘들의 복합체 때문이다. 하지만 좀 더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유대인들 때문이다."
  - 율리우스 랑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39에서 재인용

"그(베르너 좀바르트)는 경제학이 정치적·사회적 요인들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는 공동사회의 필요에 봉사하고, 공적 이익은 사적 이익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와 그의 통료들은 이 목표가 자본주의를 파괴하지 않고도, 그저 자본주의를 통제하고 극단적이고 '유대인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면 달성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41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자들의 성공이 젊은 시절의 아돌프 히틀러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는 사실은 반박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루에거는 히틀러와는 결정적인 면에서 달랐다. 그는 법의 지배를 일반적으로 존중했고, 그의 '미끼로서의 유대인'은 '주로 정치적 행위' 차원에 국한되었을 뿐, 광기에 찬 인종주의적 사고를 반영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루에거가 만들어 낸 민족주의, 사회주의, 포퓰리즘의 혼합체는 미래 세대가 그 위에서 가장 끔찍한 결과를 만들어 낼 하나의 모델을 제공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46

"전간기가 끝나 갈 무렵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이론적으로는 고갈되었으며 정치적으로는 부적절하기에 완전히 새로운 좌파적 비전을 수용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굳게 확신했다. 그 새로운 비전은 정통 교리를 수리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한 세대 전 수정주의의 선구자들이 제시했던 주제들, 즉 계급 교차적 협력의 중요성과 정치의 우선성에 관심을 돌렸다. 이제 그들은 근본적 새 출발을 알리는 이런 원칙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었고, 분명하고 생생한 정책 의제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 의제들은 공동체주의적·민족주의적 호소와 '국민정당' 전략, 그리고 자본주의를 통제하거나 변화시키는 도구로서 국가를 이용하고자 하는 의지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그 결과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단절했으며, 사회민주주의라고 부를 만한 이념이 출현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49

"우리는 자유의지론을 거부한다. 아나키즘적인 것이든 개혁주의적인 것이든 간에 말이다. 우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역사를 해석할 뿐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또한 우리는 사건과 사물의 논리에 따라 적절한 시기에 행동을 취한다."
  - 자친토 메노티 세라티(이탈리아 사회당)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57에서 재인용

"사회주의는 그 근본적 의미와 결과로 판단할 때, 현실에서 실행되고 있는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온 자유를 의미한다. 사회주의는 이렇게 말한다. 양심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에 대한 추상적 인식은, 비록 그것이 정치 이론의 발전에 결정적 계기가 되더라도, 출생과 환경에 따라 도덕적·물질적으로 궁핍한 삶을 강요당하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이 그 의미를 인식하거나 활용할 가능성을 갖지 못한다면 별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최소한의 경제적 자율성이 인정되거나 보호되지 않을 때, 절박한 물질적 궁핍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핼 때, 개인에게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 카를로 로셀리(이탈리아 사회당)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65에서 재인용

"『노동의 계획』의 변화 전략에 관해 강조할 만한 점을 여러가지다. 첫번째는 그것이 "(국가가) 소유권보다 통제력을 손에 넣는 것이 더욱 종요하다"는 신념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더는 (인기없고 비현실적이며 비민주적인) 국유화와 재산 몰수를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국가는 덜 직접적이고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경제 발전을 이끌 수 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이와 관련된 것으로, 『노동의 계획』이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의 파괴에 관한 오랜 수사적 주장으로부터 분리시켰다는 점이다. 드8 망은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우리의 투쟁은 자본주의 전체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형태의 초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것이다. 또한 프롤레타리아나 비프롤레타리아 할 것 없이 모든 노동계급의 공동의 적인 자본주의 체제의 일부 경향득, 즉 독점 자본주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금융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것이다." 따라서 활기 넘치는 사적 부문은 드 망의 사회주의적 미래 속에 계속 존재할 것이다. 사실 그는 생산성과 부의 지속적인 증가를 보장하기 위해 사적 부문이 "확대되고 강화되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81

"수정주의적 좌파와 민족주의적·사회주의적 우파 사이의 현저한 유사점들을 떠올린다면 데아와 드 망 같은 인물들의 정치적 전향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상식에 반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보았듯이 둘 다 대체적으로 정치의 우선성과 일종의 공동체주의를 지지했고, 이제 비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가 필요하다는 점에 동의했다.... (중략) ... 전간기 동안 사회주의자·파시스트·민족사회주의자들은 극단적 자유 시장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를 피하면서 경제적으로 '제3의 길'을 옹호했다. 국가가 자본주의를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통제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 '국민', '민족', '공동선'에 호소했다. 또한 계급 교차 연합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고, 진정한 '국민정당'으로서의 지위를 추구했다. 하지만 그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했다. 그것은 파시즘과 나치즘 아래서는 이런 프로그램들을 위한 대가로 민주주의의 파괴, 시민적 자유와 인권의 방기가 동반되어야 했다는 점이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90

"요컨데 파시즘은 자신의 경쟁자들과 차별화된 주장, 강령, 지지 기반을 가진 근대적 대중 정당으로 변신을 완료한 것이다. 좌파와 우파 어느 쪽에도 쉽게 들어맞지 않는 수사와 정책은 현재의 자유주의적 체제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거나 그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거의 모든 집단에게 기대감을 제공했다. 파시스트들은 '볼셰비즘'에 대한 최대의 적수이자, 사유재산에 대한 최고의 보호자를 자임했다. 그러면서도 재산소유의 '사회적 의무'를 강조했고, 집단적 선을 역설했으며, 부재지주들과 '착취적' 자본가들을 비난했다. 자유주의적 지배 질서와 자본주의의 '과잉'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사유재산에 대한 헌신과 모든 이탈리아 국민을 대표한다는 주장과 연계시킬 수 있었던 능력은 파시즘을 이탈리아 최초의 진정한 '국민정당'으로 만들어 주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96

"한 파시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국가의 총체적인 경제적 이익보다 상위에 있는 그 어떤 경제적 이익도 존재할 수 없다. 국가의 통제와 규제 아래 들어오지 않는 그 어떤 개인적·경제적 자기 결정권도 존재할 수 없다. 국가가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민족의 여러 계급들 간의 그 어떤 관계도 용납되지 않는다." 이런 주장 가운데 그 어느 것도 파시스트들이 자본주의나 사유재산을 거부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200

"한편 앞 장에서 말했던 것처럼 사민등은 팔짱을 낀 채 사실상 사태를 수수방관했다. 계급 교차적 협력 전략을 거부했던 사민당은 독일 농민들과 중간계급들의 커져 가는 절망감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이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전간기 경제정책과 관련하여 실행 가능한 '사회주의적' 전략을 내놓는 데 실패함으로써 (그리고 WTB 계획 같은, 대공황에 대한 비정통적 해결책을 거부함으로써) 사민당은 고장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절실히 원하던 유권자들 앞에 내놓을 만한 것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이런 공백 속으로 파고들어 온 것이 나치당이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212

"나치당 경제 강령의 근본적인 사상은 매우 명쾌하다. 즉 권위의 사상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노력으로 획득한 재산을 스스로 소유하길 바란다. 하지만 제3제국은 항상 그 재산의 소유자를 통제할 권리를 보유할 것이다."
  - 아돌프 히틀러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217에서 재인용

"나치는 전례 없는 폭력과 야만성을 보여 준 정부를 만들고 운영했을 뿐 아니라, 독일의 국가-사회-경제 사이의 관계를 근본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해 냈다. 가장 명백한 것은 그들이 경제 분야에서 자유방임적 자유주의와 소련식 공산주의 모두를 거부하며 '진정한 혁명'을 일구었다는 사실이다. 그 대신 나치 체제는 정치의 우선성, 즉 국가와 그 지도자가 경제를 포함한 삶의 모든 영역에 간섭할 권리를 갖는다는 주장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치는 그 주장을 정말로 실행에 옮겼다. 사회경제적 행위자들에게 지배력을 행사하고 수많은 간접적인 조치들을 통해 경제 발전의 방향을 지시함으로써 말이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221

"히틀러가 독일 민중으로부터 진정한 지지를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대다수 독일인들이 민족사회주의를 무엇보다도 향상된 삶과 민족적 자부심, 그리고 공동체적 정서와 관련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지, 그것의 인종주의와 폭력, 폭정을 지지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221

"파시스트와 민족사회주의자들이 옹호했던 여러 결정적인 '혁신들'('국민정당' 개념과 자본주의를 통제하되 파괴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경제 질서 같은 것들)은 유럽 전후 체제의 중심적인 특징이 되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226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스웨덴 정치체제의 민주화는 수단으로서뿐만 아니라 하나의 목적으로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유럽 다른 지역의 사회주의 정당들과는 달리 사민당은 민주주의를 '부르주아적' 체제로 매도하는 경향으로부터 일찍이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대신 민주주의는 사회주의 정당의 정체성과 목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로 여겨졌다. 즉 사회주의가 도래하는 날 그것이 취할 형태가 바로 민주주의라는 것이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232

"(스웨덴) 사민당은 사회주의가 경제적 발전으로부터 출현할 것이라는 정통 교리의 주장을, 사회주의자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를 재구성하기 위해 정치적 권력을 사용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확신으로 바꿔 놓았다. 그것이야말로 전형적인 민주적 수정주의의 방식이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234

"계급투쟁은 육체 노동자 집단을 넘어서는 좀 더 포괄적인 연대로 향한 문을 닫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의 목표를 계급투쟁을 통해 우리 민족 전체에 걸친 연대에 도달하고, 또 그것을 통해 모든 인간을 포함하는 연대에 도달하는 것이다."
  - 얄마르 브란팅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235에서 재인용

"대공황이 스웨덴을 덮쳤을 때 사민당은 이미 국민의 가정이라는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었고,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약자들', '억압당한 사람들', 그리고 좀 더 일반적으로는 '국민'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당의 열망을 강조하는 전략에 헌신하고 있었는데, 이는 적어도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파시즘 운동과 민족사회주의 운동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했던 자작농들과 소작농들의 공포를 완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와 더불어 사민당은 점점 더 계급보다는 국미닝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주장을 조잭해 나갔으며, 진정한 '국민정당'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분명히 드러냈다. 이는 공동체주의적·민족주의적 호소에 대한 우파의 독점을 더욱 약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248~249

"그 어떤 나라도 국제수지를 위해 심각한 실업이나 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지 않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리하여 국제수지는 이제 한 나라의 정책적 목표일 뿐, 국제적 조건들에 의해 강요될 수는 없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266

"성숙한 복지국가의 발전과 함께 정부는 자본주의 이전 시대에 가족과 지역공동체가 해왔던 일, 즉 자력으로 생계를 꾸리기 어려운 이들을 돌보는 일을 대규모이자 비인격적 방식으로 담당했다. 따라서 복지국가는 자유주의적 '이익사회'와의 중요한 결별을, 그리고 좀 더 공동체주의적인 '공동사회'를 향한 진보를 나타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269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민주주의적 원리와 정책은 전 유럽에 걸쳐 폭넓게 받아들여졌으며 유럽이 자랑하는 전후 안정의 토대가 되었다. 특히 정치의 우선성과 공동체주의는 자본주의의 가혹한 영향으로부터 개인과 공동체를 보호하는 정책들로, 그리고 사회적 연대와 안정에 대한 새로운 강조로 이어졌다. 달리 말해 전후 질서는 20세기 초반에 걸쳐 국가-시장-사회 간에 존재해 왔던 관계를 크게 변화시켰던 것이다. 이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바라 왔던 것(자본주의 철폐)과는 물론, 자유주의자들이 오랫동안 옹호해 왔던 것(시장과 개인적 자유를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규제하는 것)과도 거리가 먼 것이었다.... (중략)... 이 체제를 근본적으로 사회민주주의적인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또한 사회주의를 고유의 색깔을 지닌 이데올로기이자 독자적인 운동으로 봐야 할 뿐만 아니라, 20세기의 가장 성공적인 이데올로기이자 운동으로 봐야 한다. 그것의 원리와 정책은 유럽 역사상 가장 번영하고 조화로웠던 시기를 뒷받침했다. 이제껏 공존할 수 없다고 여겨 온 것들, 즉 잘 작동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적 안정을 조화시킴으로써 말이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299

"사민주의 운동의 오랜 특징이, 성장을 이끌어 내기 위해 시장을 이용하면서 그것이 초래하는 부수적 피해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를 이용하고자 하는 욕구, 그리고 개별 구성원들이나 특수 이익에 봉사하기보다는 전체 공동체를 대표해 진심으로 노력하고자 하는 의지였다는 사실 말이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316

"자본주의가 변화하는 만큼, 그것을 관리하기 위한 사회민주주의의 접근 방식도 변화해야 한다. 특히 민족구가(사회민주주의자들이 자본주의를 관리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의존해 왔던 도구)가 자율성과 통제력을 상실한 정도에 비례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제 국제적 영역으로 관심을 돌려야 한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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