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국가의 정치경제학 (이안 고프 저 / 김연명, 이승욱 역 / 한울 아카데미)
Posted at 2012. 2. 21. 00:22// Posted in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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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를 보는 시각을 다루는 책으로 내가 최근에 읽은 미쉬라의 <<복지국가의 사상과 이론>>은 복지국가에 대한 여러 관점을 중립적 시각에서 다룬 후 현실에서의 복지국가는 어떤 모습인지를 더듬어보는 책이었다.(
2012/02/14 - [감상] - 복지국가의 사상과 이론 (라메쉬 미쉬라 저 / 남찬섭 역 / 한울아카데미) 참조) 그 책이 다룬 관점들은 복지행정학 관점, 기술결정론(수렴론) 관점, 기능주의 관점,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관점이었는데, 저자는 마르크스주의 관점을 다루며 마르크스주의적 접근은 ‘체계론적 분석’과 ‘집단행위적 분석’을 결합할 수 있다는 것이 (기능주의와 비교할 때) 장점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집단행위적 시각을 포기하고 기능주의적(즉, 체계론적) 분석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며 아쉬움을 표현한다. 오늘 소개할 이안 고프의 이 책, <<복지국가의 정치경제학>>은 ‘미쉬라의 아쉬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의 대답’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물론 고프의 시각이 마르크스주의자 일반의 시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실제로 고프는 ‘이윤율 저하 경향성의 법칙’이라든가 ‘공황 분석’과 같은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관점을 결하고 있다는 부분에서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며, 이에 대해 역자는 고프가 ‘신리카도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역자후기 참조.) 고프는 마르크스주의 시각에서 미쉬라가 아쉬워한 두 부분을 모두 충분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이 조망하는 복지국가의 키워드를 하나만 꼽으라면 ‘모순’ 혹은 ‘양면성’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복지국가의 두 얼굴
복지국가의 기원 – 계급갈등과 체제의 요구
복지국가가 자본주의를 어떻게 위협하게 되는 지를 다루기에 앞서서
복지국가라는 체제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위의 설명에서 배제되었던 계급갈등의
역할에서 출발하자. 자본주의는 그 체제의 특성상 자본의 이해와 대립되는 이해를 가진 계급 – 즉 노동 계급을 대량으로 발생시키게 된다. 노동자 계급은 대규모
공정이라는 일관작업의 환경 하에서 집합적 성격을 갖는 노동을 통해 조직화 역량을 갖추어 나가게 되며, ‘착취’라는 자본주의의 본질로 인해 숙명적으로 자본가와의 계급대립을 발생시키게 된다.
더구나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중요한 특성, 즉 선거에 기반한 민주주의라는 특성은 (물론 이 또한 공짜로 주어진 것은 아니다. 보편적인 선거권 확립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자유주의 좌파 세력과 연대하여 싸웠는지는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대의제
구조 내에 노동자의 대표를 등장시키기까지 한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노동 계급을 자본주의 체제 내로
포섭하지 않으면 ‘혁명’이라는 – 1789년 프랑스 혁명 후 자코뱅 독재를 목격한 이래 모든 부르주아에게는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공포인 – 파국을 가져오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노동계급을 자본주의 체계 내로 포섭해야 하는데, 바로 이 ‘포섭의
방법’이 바로 복지국가이다. 어떤 경우는 노동 계급의 압력에
의해 또 어떤 경우는 예상되는 노동 계급의 압력을 사전에 약화시키기 위해 사회정책을 도입하는 식의 다양성은 있지만, 어쨌든 노동 계급의 계급투쟁에 대한 대응이라는 것은 대부분 국가에서 복지국가를 향한 움직임이 시작된 중요한
원인이다.
그러나 복지국가가 순수하게 조직화된 노동운동의 성과물인 것만은 아니다. 개별 자본가들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는 안돼!’라고 외친 한국의 한 자본가를 기억하라. 그 자본가의 눈에 흙이 들어간 지 오래지만 그 독점자본의 사업장에는 아직도 노조가 제대로 없다.) 자본가 전체의 이익을 생각할 때는 노동조합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인정과 복지정책의 어느 정도의 시행은 필수적이다. 이는 비단 복지라는 탈출구가 없다면 혁명을 불러올 수 있다는 공포 때문만은 아니다. 자유방임주의가 득세하던 19세기 영국의 공장 현실은 비참함 그 이상이었다. 생산비를 절감하기 위한 자본가들의 노력은 생존선 이하의 임금을 받으며 하루 12시간이 넘는 노동에 시달리는 아동들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었고, 이는 자본주의의 가장 중대한 투입요소인 ‘노동’의 재생산을 방해하는 지경에 이르러 자본가 전반의 이익 기반을 훼손할 정도가 되었다. 즉, 개별 자본가의 이익이 무제한 관철되도록 놔두었을 때 전체 자본가의 이익기반은 파괴되고 결국 이는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을 위태롭게 하는 결과를 낳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공장법’과 같은 최소한의 ‘개입’는 노동운동이 없더라도 자본주의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결국 미쉬라의 말처럼 ‘계급갈등’과 ‘체계특성’은 모두 자유방임주의국가를 복지국가로 이끄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까지 복지국가로 움직일 것인가?’를 놓고 자본과 노동은 또 한 번 힘겨루기를 해야만 하겠지만.
국가 –
자본의 이익 실현과 상대적 자율성
이 설명에서 ‘개별 자본가의 이익’이 아닌 ‘전체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구가 바로 국가이다. 사실 국가는 자본주의의 형성에서부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수십 년간 신자유주의의 세례를 받은 결과 우리는 흔히 ‘시장’은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이고 ‘규제’는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하지만 사실 시장경제의 출발은 조금도 자연스럽지 않았다. 시장경제는 이른바 고전경제학의 ‘투입요소’인 토지, 노동, 자본이 시장에서 제한 없이 거래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이전의 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그 때의 사람들은 수많은 공유지를 가지고 집산적 생산을 하고 있었으며, 공동체는 개개인에 대한 일정한 ‘자유의 제약’과 ‘보호’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었다. (바람직한 경우를 보여주는 예는 아니지만, 중세의 ‘농노제’를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농노제 하에서 농노는 거주이전의 자유를 비롯한 갖가지 자유를 제한 받고 있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 어떤 이유로 인해서든 생존에 위협을 받게 되었을 때 영주로부터 최소한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장치들은 모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현에 장애일 뿐이었고 따라서 해체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역할을 수행한 것이 국가 – 즉, 정치권력이었다. 자본주의는 자연스럽게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이전 사회를 권력의 힘으로 폭력적으로 해체하며 등장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유’를 가질 수 있었다. 비록 못 가진 사람에게 그 자유는 단지 ‘굶을 자유’일 뿐이었지만. 그리고 그 ‘자유’는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거래’에 의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형성의 중요한 근간이 된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일단 형성되게 되면 착취가 경제체제 내에서 자동적으로 실현된다는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잉여가치의 수탈은 의식적인 강제 없이도 시장기구의 힘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경제’를 ‘정치’로부터 분리하고, ‘사적인 것’이 ‘공적인 것’과는 다른 것으로 취급하게 되는 상태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분리된’ 정치는 ‘분리된 국가구조’, 즉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 국가’가 된다. 물론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주어진다. 만약 국가가 이 범주를 넘으려고 할 때 자본은 보다 유망한 자본축적의 중심지로 이동하게 되고, 이는 (적어도 단기적인, 그러나 심각한) 경제적 난관으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에 국가는 (혁명을 일으키는 상황이 아닌 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범위 내에서 움직인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지구적’ 차원의 체제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구조적 속박’이며, 국가의 자율성이 ‘상대적’인 이유이다.
그렇다면 ‘상대적 자율성’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위에서 설명한대로 국가는 ‘상대적 자율성’을 갖기 때문에 개별 자본의 단기적 이익이 아닌 전체 자본의 중/장기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 즉, 아무리 유력 자본가가 ‘내 눈이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돼!’라고 외치더라도 노조의 존재가 자본주의 전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면 노조를 허용하는 정책이나 제도를 시행할 수 있는 것이 ‘국가’가 가진 ‘상대적 자율성’인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은 본질적으로 한계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피지배 계급에게 국가는 일정한 속박 내에서나마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들을 개선할 수 있는 중요한 가능성이 되며, 그 결과가 바로 지난 세기 자본주의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복지국가이다.
복지국가는 어떻게 위협이 되는가?
자본주의와 복지국가가 어떻게 결합되는가에 비하면, 복지국가가 어떻게 자본주의의 위협이 되는가(다시 말하면, ‘복지국가의 위기’는 어떻게 도래하는가?)에 대한 저자의 논의는 빈약하다. 논의가 타당성이 약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양적으로 빈약하다는 말이다. 오히려 저자는 ‘위기의
진짜 원인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보다는 ‘사회지출의
증가를 70년대 경제위기의 진정한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이 왜 불완전한가?’에 대한 논의에 더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다. 저자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이른바 ‘복지국가가 생산성 저하를 초래한다.’는 주장은 이렇다. 경제에는 ‘시장부문’과 ‘비시장부문’이 있는데
시장부문은 시장판매를 위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모든 경제적 활동으로 이루어지며, 비시장부문은 그
외의 것들, 즉, 국방,
NHS (국가 건강 서비스, 이 장에서의 모든 논의는 영국을 예로 들어 이루어지고 있다.) 등 주로 국가/공공 부문의 활동들로 구성된다. 이 중 국가 전체의 소비재, 투자재, 수출재 등의 수요총량을 공급하는 것은 ‘시장부문’이며, 따라서 시장부문이야말로 경제에서 유일하게 ‘생산적인’ 부문이다. 따라서
비시장부문에서 일하는 ‘비생산적 노동자들’의 소득은 생산적
부문이 생산한 시장부문생산물의 구입을 위해서만 지출될 수 있다. 그 결과로 비생산적부문의 국가고용 증대는
시장부문 산출의 몫을 축소시킴과 동시에 시장부문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킨다. 또한 국가지출의 증대는 시장부문에
대한 조세부담의 증대를 의미하며, 이는 결국 시장부문의 이윤에 의해 부담된다. 결국 복지국가가 초래한 국가와 공공부문의 확대는 ① (생산적인) 시장부문으로 가야 할 노동력을 (비생산적인) 비시장부문으로 돌리고, ② 시장부문의 산출부담을 증가시키며, ③ 조세부담으로 시장부문의 이윤을 축소시키는 3중의 부담을 시장부문에
전가하는 방식으로 산업기반을 약화시키고, 저성장과 무역적자의 원인이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의 파국을 이야기하는 이 시기에 왜 하필 그녀가 영화화된 걸까?
저자는 복지국가를 저성장의 원인으로 몰아세우는 이런 주장이 타당하지
않음을 여러 각도에서 논증한다. 첫째, 비시장부문의 활동이
생산하는 ‘사회적 임금’과 ‘집합적 소비’는 그 자체가 생산적이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노동력을 재생산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를 공급하게 됨으로써 시장부문에서 시장임금으로 지급되어야 할 비용을 감소시키므로 비시장부문의 모든 활동이 시장부분의 이윤을 감소시키는
형태를 결과한다는 분석은 옳지 않다. 둘째, 예를 들어 NHS와 같은 필수 서비스가 국가에서 운영될 경우 민간에서 운영되는 것과 달리 소비자가 NHS에 지급할 비용에는 ‘이윤’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는 소비자의 후생을 증진시키거나, (만약
시장임금이 이와 같은 부분을 반영하여 낮아지거나 덜 상승하는 식으로 반응할 경우) 시장부문의 이윤을
증가시키게 된다. 이는 시장부문에서 NHS를 공급했을 때의
이윤과 같으므로 이윤의 총량은 같지만 (NHS를 공급하는 ‘자본가’가 없기 때문에 사회의 전체 자본가 수가 감소함으로써) 이윤율을 오히려
더 높아지는 결과가 된다. 셋째, 국가가 공급하는 사회서비스는
‘재생산적’인 것 (예를
들면 교육, 보건 같은)과 ‘비생산적’인 것 (주로
사회통제를 담당하는 서비스, 예를 들면 군대, 경찰과 같은)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중 재생산적인 것은 장기적으로 시장부분의 생산 증대에 기여하게 되며, 따라서 이 부분의 비중을 높일수록 사회서비스는 그 자체로 ‘생산적’일 수 있다.
그렇다면 저자가 생각하는 1970년대
‘복지국가의 위기’의 본질은 무엇일까? 저자는 복지국가의 위기는 전후 계속되어온 ‘장기호황’ 자체에서 싹튼 것이라고 말한다. 즉, 전후의 경제적 호황은 산업예비군을 고갈시켜 노동운동의 힘을 강화시켰고 강력해진 노동운동은 임금을 상승시켜 인플레이션
압력을 증가시켰다. 한 편으로 유럽과 일본의 선진국가들은 미국의 기술수준을 따라잡음으로써 미국 자본의
경쟁을 증대시켰고, 이는 미국 자본의 이윤압박을 증가시켜 ‘미국의
헤게모니 하의 국제질서’라는 기존의 국제적 축적체제를 뒤흔들었다. 한편으로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국가지출은 증대했는데 이에 대한 재원조달시도는 다시금 인플레이션 압박을 증가시키게 된다. 결국
‘불황’에 대처하는 ‘국가지출확대’라는 케인즈주의 경제학의 대응책은 ‘인플레이션’이라는 암초를 만나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었고 이것이 위기의 본질이다. 즉, ‘복지국가’는 위기의 한 측면일 뿐이지 이것이 위기의 중요한 원인도, 결과도 아니라는 것이다.
나가며. 복지국가의 미래는?
이와 같이
복지국가의 본질과 기원, 그리고 위기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고찰을 마친 저자는 위기에 봉착한 복지국가의
미래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저자는 후기에서 복지국가는 ‘자본주의의
피조물’임과 동시에 ‘자본주의 속의 사회주의’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한 번 복지국가의 양면성이다.) 그리고 복지정책이 가진 긍정적인 측면들을 보호하고 확대함과 동시에 복지정책의 부정적 측면들은 노출시켜 척결해야
한다는 (공자님 말씀 같은) 교훈을 던지며 글을 마무리한다. ‘복지자본주의에서 복지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바란다는, (‘어떻게’가 빠져 있기에) 다소
갑작스러운 문장을 끝으로. 결국 복지국가의 과거와 현재를 일관성 있게 조망한 저자로서도 ‘복지국가의 미래’는 말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이 책이
쓰여진 시점부터 20여 년을 더 살아온 나로서는 당시의 저자가 몰랐던 복지국가의 미래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다. 70년대를 거치며 복지국가는 저자가 애써 증명하려 했던 바와는 달리 ‘경제위기의 주범’이자 ‘비효율의
상징’으로 몰렸고, 그 결과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좌파’ 조차 (기존의 복지국가와
자유방임주의 사이의) 제3의 길을 외치며 사실상 신자유주의의
조타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되었다. 사실 70년대의 위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다. 저자도 지적한 것처럼 노동운동의 강화와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 압박은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국가의 비대함’과 그로 인한 ‘비효율’은 신자유주의 진영에서 주장한 것과는 달리 정말 위기의 원인이었는지
잘 밝혀지지 않은 것 같다. 한편 신자유주의 진영에서는 은폐했으며, 저자도 (적어도 이 책에서는) 다루지 않은 위기의 또 하나의 측면이었던 자본의
독점자본화는, 위기의 원인으로 주목 받지 않았던 덕분에 그 후 이십년동안 신자유주의의 시대를 거치며
더욱 증폭되어 오늘날 또 다른 위기의 원인이 되고 있다. (1970년대 인플레이션 압박은 노동의 임금상승도
있지만, 독점자본화에 따라 가격의 결정이 시장이 아닌 자본에 의해 이루어짐으로써 생산비 상승이나 임금인상이
이윤을 잠식하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가격의 상승으로 이어졌다는 측면도 있다. 또한 ‘산업기반 약화’의 원인은 신자유주의의 주장대로 ‘국가의 비대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업자본이 덩치를 키우며 ‘초국적 금융자본화’된 것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복지국가’는 무엇인가? 지난 30년 간 지구적 자본주의를 운영한 신자유주의가 실패했으니
이제 다시 복지국가로 돌아가면 되는 것일까? 30년 전의 경제위기를 몰고왔던 원인들은 해결되었는가? 복지 자본주의의 전성기를 열었던 지속적인 생산의 증대는 과연 돌아올 수 있는 것일까?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으로의 이행이라는 산업 조건의 변화는 어떠한가? 인구구조의
변화와 환경의 파괴, 그리고 석유의 고갈이라는 잠재적 위협들은 복지국가와 어떻게 어울릴 수 있을까? 2008년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건제한 초국적 금융자본은 과연 복지국가로의 회귀를 용인할까?
이안 고프
같은 이도 ‘복지국가의 미래’를 조망하지 못했는데 내가 이런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을 리 없다. 다만 한 가지만 이야기하고 싶다.
70년대 케인즈주의 복지국가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 마땅히 이에 대한 대안은 시대적 변화를
담은 새로운 비전이었어야 했다. 하지만 선택된 비전은 고전적 자유방임주의의 재판일 뿐인 신자유주의였고, 결국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낳았을 뿐이었다. 또 다른 위기에 봉착한
지금, 어떤 이유에서든 30년 전 폐기되었던 체제를 다시
들고 나오는 것인(물론 적어도 복지국가의 30년의 신자유주의의 30년 같은 ‘야만의 세월’은
아니었으니 좀 나을 수는 있어도) 그리 현명한 대안이 아닐지도 모른다.
고프의 말처럼 복지국가의 긍정적 측면을 담되, 새로운 시대의 질서가 될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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