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배의 재구성

저자
브루스 액커만 지음
출판사
나눔의집 | 2010-02-05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기본소득 급여 VS 사회적 지분 급여!미국 예일대학교 법학전문대...
가격비교



1) 좌파가 파라다이스적인 정책을 제시해 주지 못한다면 장기적인 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다. 젊은 사람들이 투표를 하지 않는다면 부시, 르펜, 베를루스코니가 '권력'을 얻을 것이기 때문에 이들이 투표를 해야 한다고 온건좌파들이 선전하는 것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 온건좌파 정치인들은 현재의 지배적인 경제주의적 정설로의 실용적 조정이 결코 앞을 향해 전진해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을 조만간 깨닫는 게 좋을 것이다.


2) 현재 상황에도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게 될 때를 예상해 봐도, 시간은 젊은이들에게 가장 부족한 자산이다....(중략)... 이렇게 시간이 부족한 이유는 소비와 경쟁의 앞력이 전자적으로 연결된 개인주의호ㅏ된 자본주의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잠시 한숨을 돌린다는 것은 낙오될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고, 그로인해 최신의 기계들을 지나쳐 버리게 되고, 새롭게 바뀐 일들을 수행할 능력을 가진 사람들로 대체외게 된다.


3) 진보적인 정책과 비전은 잠정적인 지지자들의 박탈과 분노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다루어야 한다. 그래서 그 정책과 비전은 가장 희소하고 가치있는 동시에 가장 불공평하게 분배된 자산의 재분배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중략)... 21세기 들어 젊은층과 '중간계급' 노동자에게 부족한 핵심적인 자산은 시간과 보장성이다. 이제 진보주의는 시간과 보장성이 가장 부족할 것 같은 사람들의 분노를 다루어야 한다.


4) 격동하는 역사 속에서 진보적 비전은 과도하게 소유한 사람들에게서 소유한 것이 거의 없어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로 희소한 자원을 재분배하는 것이었다. 어떠한 진보적인 아젠다도 핵심적인 희소자원의 재분배 전략을 제시하지 못했을 때는 대중을 동원할 수 없었다.


5) 리얼 유토피아의 잠재적인 활력자이며 분노한 세대들은 시간과 보장성이 부족하고 환경적 고통을 절감한다. 반면에 수적으로 증가하는 노인세대들은 충분한 여가시간을 가지고 있으면서 젊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가장 큰 분노의 원인, 즉 '시간의 질적' 부족에 대하여 이타적인 관심만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상화에서 사회적 연대는 생각하기 힘들 것이다. 새로운 사회적 연대를 위한 해법을 찾아야 한다.


- 가이 스탠딩, 'CIG, COAG, COG : 논쟁에 대한 비평' 중


단 한 편의 글에서 이렇게 금과옥조와 같은 말들이 마구 튀어나오다니 당혹스러울 정도다. 물론 주로 영미/유럽을 두고 하는 말이니 우리와 완전히 같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글이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는 함의는 꼭 한 번 읽어봐야 할 것.


특히 1번은 '부시, 르펜, 베를루스코니' 대신 '이명박근혜'를 넣으면 바로 우리 상황이고, 5번에서 이야기하는 새로운 사회적(세대간) 연대의 문제도 지난 선거를 거친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크다. '시간'이라는 자원의 문제를 지적한 것도 귀담아 들을만하고...


'진보'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은 글. 

//

기금고갈의 공포마케팅

Posted at 2013. 1. 29. 09:56// Posted in 시사

며칠 전에 누나랑 저녁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국민연금 이야기가 나왔다. 큰누나가 전업주부가 되기 전 약 100개월간 국민연금을 냈는데 어쩌면 좋으냐고(국민연금수급자가 되는 최소조건이 기여기간 120개월을 채우는 것). 나는 임의가입해서 120개월을 채우라고 했고, 누나는 (남편 사망 시) 유족연금과 본인의 노령연금이 중복지급되지 않는 문제를 이야기했고, 나는 다시 국민연금의 급여 적절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남편 건강 잘 챙기면서 임의가입하는게 낫지 않겠냐고 했다.

그 와중에 오간 이야기 중에 예의 '기금고갈' 이야기도 나왔는데, 이 '기금고갈의 공포' 마케팅이 새삼 꽤 많이 퍼져있음을 느꼈다. 물론, 일단 적립방식으로 출발한 우리 국민연금의 기금고갈이 바람직한 일은 아니겠지만 공포에 사로잡힐 일은 아니다. 기금이 없어도 부과식(현재의 생산연령이 낸 보험료를 현재의 수급자에게 지급하는 방식)으로 지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처럼 기금 쌓아놓고 연금 지급하는 나라, 몇 안된다. 대부분 부과식으로 하지.

자꾸만 기금고갈 이야기가 나오는 데는 두 가지 의도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보험료를 올리거나 급여를 낮추기 위한 사전 밑밥. 다른 하나는 국민연금에 대한 신뢰성을 흔들어 사적 연금의 공간을 넓히려는 떡밥. 전자는 그래도 (저출산 고령화를 맞이하여 연금보험료율 조정 필요는 있을 수 있으니) 봐줄만한데 후자는 진짜 경계해야 한다. 상식적으로 대부분의 보험회사는 국가보다 부도날 확률이 높다(대한민국이 이제 그 정도는 된다). 따라서 부과방식의 지급까지 고려할 때, 국민연금은 대단히 안전한 연금이다. 실질적으로 가장 안전한 연금이라고 봐야지. 물론 소득대체율이 40%까지 조정된 것을 고려하면, 급여수준의 문제는 있긴 하겠지만.



이번 기초노령연금 도입과 관련해서 이루어진 논쟁만해도 그렇다. 보편적인 연금 성격의 기초노령연금은 일반조세에서 충당함이 옳은가, 사회보장기여금에서 충당함이 옳은가는 따져볼만한 문제지만, 여기에 붙은 '국민연금은 낸 만큼 가져가는 제도'(이건 국민연금의 소득재분배성을 무시)라든가 '국민연금 기금고갈 시기가 앞당겨진다'(이건 기금고갈 공포 마케팅에 근거)라는 논의들은 시작부터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사실 이번 인수위의 국민연금기금 충당설은 그것이 공약일 때는 전혀 논의되지 않다가 당선 후에 튀어나왔다는 점에서 내용을 떠나 절차적으로 잘못된 것이 맞다).

기금고갈 자체가 아무 문제없는 당연한 일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여기에 대해 지나친 공포를 심어주는 것은 그 의도가 의심스럽다는 말이다. 오히려 국민연금 기금 관련해서 논의가 필요한 부분은 이미 300조 이상 적립된 적립금을 어떻게 사용할까의 문제가 아닐까. 지금 모피아의 쌈짓돈이 되어 주가나 환률 떠받치기용 '도시락 폭탄'으로 쓰이는 것보다는 사회적 투자(예를 들면 청년연대은행 같은데 대부한다든가)에 사용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와 같은 문제 말이다. 설사 지금처럼 주식투자 위주로 쓰인다고 하더라도 어떤 기준에 미달하는 - 노동착취가 심하다든가, 환경기준을 위반한다든가 - 기업에는 투자하지 않는 것을 투자규정으로 삼는 것도 논의할만하다.


정리하자.

1) 자꾸 기금고갈 기금고갈하는데, 이거 공포 마케팅의 냄새가 난다.

2) 기금고갈론과 무관하게 국민연금은 안전하다. 어떤 사적연금보다.

3) 기초노령연금 이야기를 하면서 (입장이 무엇이든) 연금기금고갈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4) 국민연금 기금 관련하여 중요한 부분은 오히려 이미 300조 이상 쌓인 국민연금기금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잘 투자하고 사용할까일 수 있다.

'시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민주당(1)  (0) 2013.04.23
차베스  (0) 2013.03.07
삼성 이재용씨 아들의 국제중 사회적 배려 입학  (0) 2013.01.22
죽음들 앞에서.  (0) 2012.12.25
어떤 회사  (0) 2012.12.21
//

한겨레 기사링크 클릭

이재용씨 아들의 사회적 배려 전형 국제중 입학 관련, 제도상 문제가 없다는 사람도 있고, 욕을 하는 사람(나 같은)도 있고 해서... 잠시 정리해봤다.

우선 팩트를 정리해보자. 국제중학교에는 '사회적 배려 전형'이라는 것이 있다. 국제중 사배자 전형 대상자는 ‘경제적 배려 대상자’와 ‘비경제적 배려 대상자’로 나누어지며, 전자에는  기초생활 수급자, 한부모 가족 보호대상자(저소득), 차상위계층 등이 후자에는 한부모 가정 자녀, 소년소녀 가장, 조손가정 자녀, 북한이탈주민 자녀, 환경미화원의 자녀, 다자녀 가정 자녀 등이 포함된다. 삼성 이재용 부회장의 아들은 2009년 이 부회장의 이혼으로 ‘비경제적 배려 대상자’인 한부모 가정 자녀에 해당돼 사회적 배려 전형에 지원했다.

자, 그럼 이 팩트를 중심으로 한 번 살펴보자.

일단 사회적 배려 전형 중 비경제적 배려 대상자는 대상의 소득/재산과 무관한 조건을 보는 것이며, 따라서 이재용씨의 아들이라도 제도적으로 결격 사유는 없다. 적어도 제도와 절차에 관한 한 문제가 없다는 삼성측의 주장이 맞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 기사를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뱉은 욕설에 대해서는 사과하는 게 옳다. 내키지 않아도. 물론 그쪽에선 내가 사과하든 말든 관심도 없고 애초에 욕했는지 어쨌는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제도에는 '합목적성'이라는 것이 있다. 즉, 그 제도의 규정이 어떻더라도 운영자체가 그 제도를 수립한 목적에 맞에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배려 전형'의 목적은 무엇일까? 이는 그 이름에서 쉽게 알 수 있는 것처럼 사회적으로 배려가 필요한, 즉 배려가 없을 경우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모종의 손해를 볼 수 있는 대상자에 대한 '배려'를 하는 것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국제중학교가 일종의 '엘리트 교육'이라고 할 때 여기에 특례 입학을 시키는 것은 교육에 있어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일게다. 미국의 affirmative action처럼 일반적으로 성적 등에 의해서만 선발할 경우 국제중이라는 '엘리트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게 별도의 Quota를 배정함으로써 기회의 평등을 보완하고 해당 교육기관 내 학생들의 다양성을 얻는 것이 아마 그 목적이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과연 이재용씨의 아들이 여기에 맞는 사람인지는 의문이다. 누구도 그 사람이 '일반적인 경우에서 교육기회의 평등에서 손해를 볼'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삼성전자 측 관계자 말대로 “이혼한 부모의 자녀는 정서적으로 배려를 받아야 할 대상”일 것이다. 그러나 그 정서적 배려가 왜 엘리트 교육기관에의 특례입학인지는 납득이 잘 가지 않는다. 엘리트 교육기관에의 특례 입학이 '학생의 정서'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기회의 평등'을 위한 것인가? 전자라면 일반적인 공교육을 받는 학생은 '정서적으로 문제가 생긴다는' 이야기인가?

한겨레 기사에서 인용한 것처럼 교육학 전문가는 이 전형방식에 경제적/비경제적 구분이 생긴것은 애당처 경제적 배려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제도 개선 과정에서 경제적 배려 대상자는 증빙조건을 강화하고 선발 할당량을 부여했다. 동시에, 자사고·국제중의 사배자 전형 미달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시교육청이 부유층 자녀들이 섞여들 수 있도록 기준을 완화해 준 점도 있다. 재벌가 자녀의 사배자 전형 이용은 이 허점을 이용한 것인데, 이는 제도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리하자. 

1) 이재용씨 아들의 국제중 사회적 배려 전형 입학에 규정상 문제는 없다.

2) 그러나 제도의 합목적성에 맞지 않는다.

3) 따라서 학교측이 제도의 합목적성을 고려했다면(사회적 배려자 전형이 미달이 아니었던 한은) 지원을 했더라도  
    탈락시켰어야 한다. 물론 현실은 그 반대로 행동했을 확률이 매우 매우 매우 높다.

4) 지원한 측도 적어도 한국사회의 소위 지도층 인사로써 이런 편법은 자제했어야 맞다.

5) 물론 삼성에 이런 걸 기대하는 건 무리다. 법도 안지키는데 양심까지 바라면 쓰나. 있는 법만이라도 잘 지키길
    바라야지.

6) 궁극적으로는,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 제도를 유용하기 쉽게 만들어놓고 행위자가 양심껏 행동하길 바라는 건
    적어도 현재의 대한민국에는 무리다.


'시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차베스  (0) 2013.03.07
기금고갈의 공포마케팅  (0) 2013.01.29
죽음들 앞에서.  (0) 2012.12.25
어떤 회사  (0) 2012.12.21
前 자유기업원장이라는 사람의 장하준 비판  (0) 2012.05.09
//

죽음들 앞에서.

Posted at 2012. 12. 25. 22:27// Posted in 시사

추운 겨울이다. 너무 추운 겨울이다. 너무 추워서 춥다는 말 한마디 뱉어내기 힘든 겨울이다.

선거 결과를 보고 나도 절망감을 느꼈었다. 화도 나고, 억울하기도 했고, 누군가가 밉다는 생각도 했고, 요즘 흔히 쓰는 말로 '멘붕'을 겪었다. 하지만 그 이틀 후 회사의 손해배상소송에 시달리던 한 생명이 속절없이 지는 걸 보고 입을 다물었다.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힘내라는 말고, 죽지 말자는 말도, 참고 5년 견뎌보자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도 절실했다. 절실했다고 생각했다. 또 5년 지난 5년처럼 살 수는 없는거 아니냐고 생각했다. 그랬다. 절실한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내 목숨이 백척간두에 서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나에게,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거나 더 나은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선거 결과는 차갑게 말하면 '언짢음'이었을 것이다. 구리디 구린 꼴을 5년 더 봐야 한다는 것. 역사가 후퇴하는 꼴을 5년 더 봐야 한다는 것. 종종 내가 주변인에게 뱉은 '국적이 쪽팔린다.'는, 딱 그런 정도의 감정.

하지만 아니었다. 당장 그 결과에 목숨이 걸려 있다는, 그런 처절함은 아니었다. 따뜻한 방구석에 앉아 욕설을 내뱉을지언정, 차가운 밤공기에 몸을 던질 그런 처절한 절망감은 아니었다. 그래서 감히 아무 말도 뱉을 수가 없었다. 분노의 말도, 어설픈 힐링의 말도, 다짐의 말도....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그분들의 절실함을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었고, 공감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참으로 참담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한 것 없는 내가, 그 힘든 손 한 번 잡아드린적 없는 내가, 희망버스에 몸 한 번 실어보지 않은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감히 힘을 내라. 함께 가자. 용기를 내라. 절망하지 마라. 그런 말, 어찌 감히 내가 입에 담을 수 있으랴. 어찌 감히 내가 떠들 수 있으랴. 

그리고 세 목숨이 더 갔다. 더더욱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물론 그 모든 것이 선거 결과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의 자살률은, 김영삼 때도, 김대중 때도, 노무현 때도, 이명박 때도 쭉 올랐다. 멈추지 않고 계속 올랐다. 그러니 누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자살률이 달랐을 것이다. 그리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노조에 대한 손해배상소송이 급격히 늘어난 것은 이른바 '민주정부' 10년 동안이었고. 양극화가 심각해진 것도, 한진중공업 노조에서 처음 누군가 목숨을 끊었던 것도... 모두 그랬다. 하지만 지난 5년, 그 최악의 5년을 겪으며, 야당들의 약속을 들으며, 노동현장을 방문한 굵직한 야당 인사들을 보며, 그래도 정권이 바뀌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 통합을 말하던 당선자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네 개의 목숨이 지는 동안 아무 논평도, 아무 행동도 나오지 않는다. 기자와의 비공식적인 대화에서 그쪽 인사가 한 말은 고작 "여기서 편을 들어주면 임기 내내 끌려다닌다."는 말이었단다. 허. 세살 먹은 아이 달래는 중인가보다.

화가 난다. 정말 화가 많이 난다. 하지만, 나에게 화낼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분들께 찾아가 손 한 번 잡아드리지 못한 내가, 화낼 자격이 있는지 정말 모르겠다. 그래서 부끄럽다. 너무 부끄럽다. 나의 분노도, 슬픔도, 다짐도, 그 모든게 다 부끄럽다.

정말 춥다. 정말 너무 추운 계절이다. 그래서 뭐라도 해야 하는, 그런 계절이다.

//

어떤 회사

Posted at 2012. 12. 21. 21:53// Posted in 시사

그러니까 말이야, 지금 갑자기 우리 나라 기업계에 어떤 회사 하나가 갑툭튀했다고 쳐. 그리고 아주 노동집약적인, 그런 사업을 하는거야. 예전에야 신발, 섬유 뭐 이런거였을 것이고 요즘에는 서비스업 쪽이겠지. 암튼 중요한 건 고정자본보다 노동력이 더 중요한 산업이라는 거지.

근데 갑자기 삼성이 미쳤는지, 이 회사에 돈을 막 퍼줘. 알고보니까 이 회사가 골목상권에서 서비스업을 하는데, 만약에 이 회사가 철수를 하면 이 자리에 외국계 거대기업이 들어온다거나 뭐 이런 이유로 삼성이 막 돈을 퍼줘.

게다가 이 회사 사장놈이 싸이코라 직원들 시급을 한 천원쯤 주는거야. 그리고 하루에 한 16시간쯤 일을 시키는 거지. 화장실도 못가게 하고, 일하다 다쳐도 병원도 안보내주고. 월급 적다 그럼 막 패버리고 짤라버려. 근데 신기한 건 이 회사 직원들은 미친듯이 성실한 사람들이라 그 와중에도 죽어라 일을 한다. 그러니까 당연히 사업이 잘 돼. 당연한 거 아냐? 돈은 삼성이 대주고, 인건비 안나가고, 직원들은 죽어라 일하고. 노동집약적 산업이니까.

그리고 나서 이 사장은 돈 좀 벌었다고 기계를 막 사. 진짜 막 사. 미친듯이. 산 기계 또 사고 또 사서, 어려운 말로 '중복투자'를 막 해. 그래서 회사가 망하기 직전까지 가고, 그 상태에서 이 사장은 갑자기 죽었어. 뭐 이유는 잘 모르겠고.

그리고 시간이 많이 지났어. 나중에 듣자기 그 사장 죽고 나서 한 7년쯤 지나서, 대기업들끼리 플라자 호텔에서 합의를 했는데, 그 합의가 이 회사에서 산 물건은 막 싼 걸로 봐주기로 했데. 그래서 결국 그 기계 막 사놓은 게 나중에는 후루꾸로 좀 먹혔다더군.

------------------------------------------------------------------------------------------------

근데 이런 상황에서 그 회사가 돈 번건, 사장님이 존나 훌륭해서야? 
아니면 시급 천원받고 하루에 열여섯시간 일한 근로자가 부지런해서야?

난 아무래도 그 사장이 좋은 놈인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떤 사람들은 그 사장을 존나 막 떠받든데. 웃기는 건 그 사람들 대부분은 하루에 열여섯시간 시급 천원받고 쳐 맞아가면서 일한 직원 자식들이란 거

//

뚜벅뚜벅

Posted at 2012. 12. 19. 23:43// Posted in 기타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들여다봤지만, 비율차이는 미세하게 줄어들어도 표차는 줄어들지 않는다. 그렇게 끝나나보다.

진심으로 술이라도 진탕 마시고 싶은데, 난 술을 마실 수가 없다. 과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건강상의 이유로 이젠 예전처럼 취하도록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취하도록 술을 마실 수 없다. 지금 이 순간도. 앞으로의 5년도.

그러니까 바로 지금처럼 괴로워도 눈을 똑바로 뜨고 맑은 정신으로 앞을 봐야 한다. 그리고 맑은 정신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뚜벅뚜벅, 앞으로의 5년을 살아가야 한다.

앞으로의 5년. 아마도 공부를 하고 있는 가능성이 가장 크겠지만, 맑은 정신으로, 두 눈 똑바로 뜨고 살아가겠다. 투사의 마음가짐을 가슴 속 깊이 품고, 웃으며 살아가겠다.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PC  (0) 2013.02.26
보관을 위한 포스팅  (0) 2013.02.17
마르크스  (0) 2012.01.13
단상(2) : 민주당  (0) 2011.12.14
단상(1) : 자유  (0) 2011.12.09
//

날아라 노동 (은수미 저 / 부·키)

Posted at 2012. 11. 15. 00:43// Posted in 감상

노동의 말

아마도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인 것 같다. 그 날은 마침 5월 1일이었고, 아버지와 무슨 대화 끝에 내가 '오늘이 노동자의 날'이라는 말을 했을 때, 아버지는 내 말을 멈추고 '노동자의 날이 아니고 근로자의 날'이라고 정정해주셨다. 그게 무슨 차이냐고 여쭤보니 '일을 부지런히(勤) 하는 사람의 날'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 때는 그러려니 했다. 어쨌든 무언가를 부지런히 한다는 것은 중요한 가치라고 배우면서 살았으니까. 하지만 이 작은 사건이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것을 보면, 무언가 위화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조금 더 나이가 들고 나서, 왜 아버지가 굳이 '부지런히'를 강조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왜 '부지런히'라는 규범적인 표현이 노동자에게만 부여되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자본가 혹은 사용자라는 말에는 어떤 규범적인 의미도 들어있지 않은데 말이다. (사실 이 책의 저자는 '노동' 혹은 '근로'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그다지 문제삼지 않는다. 그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근로자라는 표현은 현재의 한국의 법령에서 사용하고 있는 공식적인 용어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개인적으로는 노동자에게만 어떤 규범이 강요되는 것 같아 근로라는 말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이 책이 상당히 구체적인 현실문제로부터 출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자가 오랫동안 노동문제에 천착해왔다는 것, 특히 한국노동연구원에서 일하는 동안 많은 노동자들을 직접 만나며 '발로 뛰는 연구'를 해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의외로 '노동'과 관련된 '말'과 노동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같은 다소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처음엔 의외였지만, 이내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노동'이라는 가치중립적인(규범적인 의미가 들어있지 않다는 점에서) 표현에 대해 편견을 갖는다. '노동'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 사람은 어쩐지 과격한 것 같고, 수많은 노동자(실질적 사용종속관계에 있으며, 노동의 댓가로 임금을 받고 있는 자)들이 스스로 노동자로 불리기를 원치 않으며, 노동권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정치적으로 좌편향된 것으로 취급받기 일수다. '노동'이라는 말이 제자리를 잃어버리면서 우리의 인식 속에서 노동은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고, 그것은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노동이 처한 자리의 원인 중 하나일 수도 있다. 너무 지나친 단순화라고? 하지만 이렇게 '말'의 위치로 인해 '인식'이 바뀌고, 그 '인식'으로 인해 '현실적 상황'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그람시의 '자의적 이데올로기' 개념이나, 상징적상호작용이론가들의 '낙인' 개념을 통해 사회과학적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무심코 노동자와 나를 분리시키고 노동자인 자신을 부정하거나, 혹은 미래에 나나 내 자식들이 노동자가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것을 부정할 때, 사용자 중심의 사회가 구성한 헤게모니는 점점 강화되게 되고, 지난 수십년간 지속되어 온 노동권의 소외와 그 결과로서의 사회양극화는 계속될 것이기에 '말'과 그 말로 인한 '인식'의 문제에서부터 출발한 이 책의 논의는 절대로 추상적이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외면하기 쉬운 우리 자신의 문제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담고 있다. 나의 말과 인식이 바뀌는 것이 현실을 바꾸는 출발점임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의 현실

그렇다고 이 책이 언어와 개념의 문제만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운동가로, 연구자로, 이제는 국회의원으로 노동문제를 다루어온 전문가답게 현재 우리 사회의 노동이 처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비정규직, 최저임금, 근로빈곤이라는 우리 사회의 노동의 현실문제를 통계와 인터뷰를 넘나들며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저임금과 실직과 근로빈곤이 어떻게 악순환의 고리를 이루는지, 그 속에서 부족한 사회안전망이나 고용보호, 최저임금과 같은 제도의 문제가 이를 어떻게 강화하는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결과로 나타난 비정규·불안정 노동이 어떻게 인간성을 왜곡하는지를 많지 않은 분량의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사실 후기산업사회의 특징적인 단면이자, 신자유주의의 상징적 결과로서의 비정규직을 비롯한 불안정노동은 이 책에서도 이야기하는 것처럼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며 오히려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그 문제가 한국에서 더욱 심각한 것은 한국사회의 노동을 둘러싼 여러 법규나 제도가 노동을 보호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은 과거의 빈곤 - 주로 노령, 장애, 실업, 질병, 사고 등의 결과로 인한 노동력 상실로 인한 빈곤 -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 보호장치 - 사회보험이나 공공부조와 같은 - 가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노동시장 양극화, 고용 불안정, 가족해체와 같은 새로운 사회적 위험에 직면하여, 이중적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러나 한국의 제도들은 이와 같은 중첩적 문제에 대응하기는커녕 해고를 더욱 자유롭게, 노동에 대한 보호는 더욱 약하게, 경제적 효율성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는 변화를 지난 십여년 간 지속해왔고 그 결과로 지금의 한국 사회의 노동은 벼랑 끝에 서 있다. 저자가 비정규직의 문제를 이토록 절실하게 다룬 까닭도 이처럼 보편적 위험으로서의 비정규직 문제가 우리 사회의 특수성과 만나 더욱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문제의 또 다른 심각성은 비정규직이 그 특성상 단결하기 어려운 노동자라는 데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그 고용의 문제로 인해 정규직보다 사용자의 눈치를 더 보게 되고, 때로는 누가 사용자인지 규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고용관계의 사슬에 놓여 있으며, 많은 수의 불안정 노동자들은 싸울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고 할 정도로 위축되고 취약해져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과거의 전형적인 정규직 공장노동자와 달리 근무 장소나 기간이 일정치 않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단결하기 어려운 환경을 제공하고 있으며, 정규직 위주의 노동조합이 비정규직과는 미묘한 입장 차이를 보인다는 것도 사용자나 국가와의 관계 뿐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와의 관계에서 오는 문제를 더하게 되는 원인이 되고 있다. 물론 기륭전자 노조의 싸움처럼 의미 있는 비정규직 노동운동의 성과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비정규직의 노조조직율이나 노동운동 성과가 문제의 심각성 대비 적은 것에는 이와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특수성이 자리하고 있다(저자가 지적한 ‘창구단일화’나 사용자의 교섭거부에 대한 관리 문제와 같은 제도적 불리함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이렇게 볼 때 2012년 한국의 노동문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바로 ‘비정규직’이다. 수 년째 계속되는 비정규직 노동에 대한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리의 내일을 여는 핵심적인 과제가 될 것이다.


노동의 미래

그렇다면 노동의 문제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불안정 노동에 대비한 실업부조 제도의 확립, 비정규직의 사용제한과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의 확보, 최저임금의 상승, 좋은 일자리 창출 등 해야 할 일은 무수히 많다. 현재의 사용자 위주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제도와 문화는 하나의 강건한 고리를 형성하고 있기에 어느 지점에서부터 그 고리를 깨어 나가야 할 지를 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다면 가장 핵심적이고도 중요한 지점이 어디일까?

저자는 이 대목에서 다시 노동조합을 강조한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단결하고, 그래서 사용자 위주의 사회 속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비로소 노동이 소외된 사회에서 노동이 인정받는 사회로의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 민주주의가 시민이 힘을 가지고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있을 때 가능하듯, 경제적 민주주의는 노동자가 힘을 가지고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있을 때 가능하다는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이를 위해 노동조합법 개정, 노동조합 조직률의 제고, 노조의 경영참여와 사회참여, 기업단위를 넘어선 다양한 노동조합활동, 사회안전망 활동을 강조한다. 나는 이 중에 특히 저자도 언급한 바 있는 노동조합과 사회운동이 결합된 - 예를 들면 청년유니온과 같은 - 형태의 새로운 노동운동을 강조하고자 한다.

앞서서도 언급한 것처럼 비정규직을 비롯한 불안정 노동자들은 많은 경우 정규직 노동자와 같이 사업장 단위에서 단결하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으며, 싸울 준비를 갖추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취약한 상태인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의 노동조합은 기업별 노조는 물론이고 산업별 노조의 형태일지라도 소규모의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불안정 노동자들을 모두 포괄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따라서 이들의 단결을 위해서는 세대, 직종, 지역, 성별과 같은 새로운 단위로 구성된 다양한 유니온들이 병존하면서 그 유니온들이 느슨하게 연대하는 형태를 가질 필요가 있다. 현존하는 청년유니온이나 일본의 다양한 유니온들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조직화’의 노력을 통해 개별적이지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불안정 노동자들의 힘이 모일 때 누구나 말하지만 누구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경제 민주화’가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저자가 글의 마지막을 닫는 말은 ‘노동으로 시작하지만 노동을 지양해야 한다.’는 철학적 숙제이다. 책 전체를 걸쳐 노동권의 확립, 노동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지만, 경제적 문제해결의 수단으로서의 노동이 인간을 속박할 수 있음을 들어 노동의 해방 다음의 숙제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일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말이되, 어디서부터 어떻게 실천해야 할 지 갈피를 잡기 힘든 말이기도 하다. 더구나 노동의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장되지 못한 한국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저자의 지적에 공감하기에 저자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내비친 마르크스의 말로 글을 맺는다.

노동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는, 혹은 그 자신이 노동자인, 혹은 언젠가 노동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모두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오늘은 이 일을, 내일은 저 일을, 즉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를 한다. 저녁에는 소를 몰며, 저녁을 먹은 후에는 비평도 해본다. 그러면서 사냥꾼도 아니고, 어부도 아니고, 목동도 아니고, 비평가도 되지 않는다.“

- 칼 마르크스, 『독일이데올로기』 中

//

부끄러움

Posted at 2012. 11. 8. 23:44// Posted in 성찰

언제나 내 삶은 너무나 평온한 것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고난'이라든가 '절망'을 경험한 적이 없다. 딱 한 번 진심으로,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날까?'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지만, 결국 그마저 1~2일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노력없이 얻은 것이 내 잘못없이 잃은 것보다 훨씬 많다.'는 결론으로 돌아갔다.

물론, 당연히 이건 참으로 운이 좋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고, 마땅히 감사하고 기뻐할 일이지만 한 편으로 고난과 절망을 통해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성장을 얻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지금 나의 부족하기 짝이 없는 사람됨의 일부는 그 때문이지 않을까.

고난과 절망이 없는 내 삶에서 그 자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내 생각에 그것은 '부끄러움'인 것 같다. 부분적으로는 고난과 절망이 없는 삶을 살아왔고, 그리 살아가고 있으며, (어쩌면 정당하지 못할 수도 있는) 그 평온함을 스스로 버리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불러오는 감정으로서의 '부끄러움'은, 다른 어떤 단어들보다 나와 내 삶을 잘 설명해줄 수 있는 단어인 것 같다.

고난이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것처럼, 부끄러움이 내일의 나를 오늘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쨌든 스스로의 삶의 평온함을 버릴만큼 자신이 훌륭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부끄러움을 자양분삼아 삶을 진전시켜나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성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끄러운 2013년  (0) 2013.12.31
노수석  (0) 2012.03.30
교문  (0) 2012.03.19
퇴사의 이유  (3) 2011.03.24
正生加笑  (0) 2011.02.24
//

前 자유기업원장이라는 사람의 장하준 비판

Posted at 2012. 5. 9. 00:25// Posted in 시사

자유주의 경제학자의 장하준 비판이라는데, 읽다보니 왜곡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관점이 달라서 그런가? 라고 생각하고 다시 한 번 읽어봤지만 나로서는 아무리 납득해보려고 노력해도 이건 말이 안된다 싶다.

기사링크::신자유주의는 악이 아니다(한겨레21)

1. 발전국가 시절의 한국과 현재의 중국이 (일종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경제발전했다는 주장

- 한국에 대해 이 분은 '수출 중심 전략'(남미의 ISI와 대비되는)이니까 당시로서는 신자유주의라는데, 한국의 경제발전은 GATT체제의 비관세장벽에 대한 느슨한 제약을 기반으로 수출증대 & 수입차단 방식을 사용했다. 이게 신자유주의라면 애덤스미스가 그렇게 비판한 중상주의도 신자유주의다.

- 중국이 개방해서 성공했으니 신자유주의라는데, 물론 폐쇄에서 개방으로 일정부분 나간 건 사실이지만 경제의 중심이 공기업에 있고, 환률조작국 소리를 매번 듣는 나라가 신자유주의라니 어리둥절하다.

- 종합적으로 이 양반은 '대원군식 쇄국' 아니면 다 신자유주의라는 식이다. 그렇게 따지면 케인지언 경제정책도 신자유주의고, 장하준 교수의 주장도 신자유주의다. 그러면 논쟁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니, 이건 자기모순이다.


2. 최근 세계 경제위기는 미국 부동산 버블 탓이고, 이는 신자유주의를 '안해서' 생겼다.

- 부동산 버블이 왜 생겼나? 은행의 채권 금융화에 따른 무분별한 레버리지 추구와 그 와중에 위험도가 높은 주택채권을 증권화한 것이 터진 탓이다. 이는 금융규제 완화에 따른 금융회사의 탐욕과 단기수익추구(주주이익 극대화를 목표로 한)에 근거한 바 크며, 이런 요인들은 대단히 '신자유주의적'이다.

- 부동산 버블이 커지고 있을 때 줄곧 부동산 버블의 위험을 폄하하고 시장은 완전하므로 걱정할 것 없다고 한 이들이 바로 앨런 그린스펀이나 월스트리트를 장악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자들이었다.

- 거품이 신자유주의를 안해서 생겼다고? 아무리 신자유주의자라도 이건 좀 심한 왜곡 아닌가...


3. 복지가 경제에 해롭다는 것은 성장론자나 복지론자가 모두 합의한 것이다.

- 이런 합의가 언제 있었는지 듣도 보도 못했다. 내가 아는 '복지론자'들은 장기적인 시각에서의 인적자원투자, Anti-Cycling Effect, 빈곤예방을 통한 사회안정 유지 등의 이유로 복지가 경제에 이롭거나 최소한 해롭지 않다고 주장한다.

- 물론 그런 복지론자의 주장이 옳은지 아닌지는 논의할 만한 거리다. 하지만 복지가 경제에 해롭다는 '합의'가 있었다는 말은 어느 복지론자와 귀하가 합의하셨는지는 몰라도 왜곡이다.


전 자유기업원장이 쓴 글이라니 이 분의 당파성은 짐작가능하지만 이 분이 이야기하는 '팩트'에 대한 왜곡이 너무 심하다  싶어 읽으며 짜증이 났다. 물론 나도 당파적이니까 내 이야기가 객관적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 분의 이야기는 정도가 너무 지나쳐서 의도적인 왜곡이 아니라면 심각한 무식으로 보일 정도다.


여기까지.

'시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음들 앞에서.  (0) 2012.12.25
어떤 회사  (0) 2012.12.21
선거에 관한 두 가지 단상  (0) 2012.04.04
경선 조작  (0) 2012.03.20
나꼼수, 비키니, 그리고 사과  (0) 2012.02.07
//



  '쿠바'라는 국가명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체로 공산주의, 독재정권, 통제/폐쇄사회, 야구,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생각보다 좋은 관광지, 체게바라의 나라(실제로 체는 아르헨티나인이지만) 정도의 이미지들이지 않을까? 특히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남한사회의 특성상 쿠바라는 나라에서 북한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을 것이고, 북한이 대다수의 남한 사람에게 인식된 상태를 고려할 때 긍정적인 이미지보다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이 더 많을 것 같다. 이 책 '몰락 선진국 쿠바가 옳았다'는 그런 쿠바에 대한 이미지를 일정하게 깰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일본인 농업전문가이며 노무현 대통령의 애독서 중 하나였다는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역시 쿠바에 대한 책이다)을 저술하기도 한 작가가 수차례 쿠바를 방문한 경험을 토대로 쓴 이 책은 쿠바라는 나라를 비교적 균형 잡힌 시선에서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쿠바를 보는 시선이 균형을 상실하고 있기에, 저자의 시각이 다소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90년대까지만 해도 대학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던 '북한 바로알기' 운동을 보며 불편함을 느낀 적이 있던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그때와 비슷한 느낌을 떠올렸을 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쿠바는 1959년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주도한 혁명을 통해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혁명정부를 수립하고, 자본주의의 총본산인 미국의 코앞에 자리한 작은 사회주의 국가로써 (마치 북한처럼) 미국의 지독한 경제적·군사적 봉쇄 속에서도 현재까지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여러모로 북한과 겹치는 역사적 상황 탓에 우리가 막연히 가진 쿠바에 대한 이미지는 정치적 통제, 경제적 궁핍, 문화적 획일성과 같은 것일 테지만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쿠바의 모습은 좀 다르다. 쿠바는 여느 소규모 공산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80년대까지 소련의 원조에 상당부분 의존한 체제를 가지고 있다가 소련의 원조가 끊어지며 석유를 비롯한 자원의 지독한 결핍과 그로 인한 경제위기 속에서 대안체제를 고심해야 했는데, 그 결과물에 저자의 전작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에서 다루어진 것과 같은 생태주의적 자급 농업체제였다. 그리고 그런 노력이 일정한 성공을 거둔 결과 지구환경의 측면에서 지속가능한 최소한의 기준을 만족하면서 동시에 의료, 교육 등 인간개발지표를 충족시키는, 두 가지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책은 주로 쿠바의 주택, 농업, 재해방지, 문화의 측면들을 다루고 있는데, 소련의 붕괴와 미국의 경제봉쇄로 인해 강요된 측면은 있지만 어느 분야에서나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하고(즉, 연료소비를 최소화하고), 주민의 참여를 최대화할 수 있는 방향을 찾으려는 노력을 정책의 근본으로 삼고 있는 것은 인상적이다. 경제성장만을 절대선으로 여기고 더 많은 생산과 더 많은 소비를 최대의 미덕으로 알고 있는 우리의 현실과는 정 반대의 모습이기에 더욱.

                               아마도 쿠바와 관련한 가장 유명한 인물일 체게바라의 초상

  물론 그렇다고 쿠바가 무슨 지상낙원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쿠바라는 나라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이 왜곡된 측면이 있기에 그에 비하면 위의 성과들에 눈이 휘둥그레 해질 수도 있겠지만, 저자는 글 중간 중간에 쿠바사회가 가진 문제점들도 꾸준히 서술하고 있다.(그래서 ‘균형잡힌 시각’이라고 말한 것이다.) 예를 들면 공산주의 사회에서 의례히 존재할 것으로 예상되는 관료제의 폐해라든가 시장의 부재로 인한 자원 배분 최적화의 실패 등은 이 책 여기저기서 제시되는 문제이다. 또한 ‘표현의 자유’ 측면에서 -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의 전시회가 허가되지 않는다든가 하는 식의 - 통제사회의 성격을 일정부분 보이고 있는 것도 우리가 가진 공산주의에 대한 편견을 일정부분 만족시킨다. 특히 최근 가장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는 태환페소와 쿠바페소의 이중통화 문제로 태환페소를 구할 수 있는 쿠바인과 그렇지 못한 쿠바인 사이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문제는 공산주의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나쁜 쪽으로) 인상적이다. 전체적으로 ‘경제적 풍요’라는 측면에서 - 달리 말해 GDP와 같은 국가 경제를 양적으로 측정하는 지표에 있어서 - 어느 정도 발달된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는 것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쿠바의 그런 측면들을 들어 ‘예상대로 우리보다 열등한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쿠바의 GDP가 우리보다 훨씬 낫다고는 하지만 쿠바 사람들은 의료나(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쿠바의 의료수준은 매우 높다.) 교육과 같은 기본적인 서비스를 무상으로 누릴 수 있으며, 빈부 차이가 존재하고 점차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지만 낙후되고 초라한 집일망정 누구나 자신의 집을 가질 수 있다.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인터넷이나 예술작품을 통해 정부를 비판한다고 (전시회는 열지 못해도) 잡혀가는 일은 없다.(쥐그림 사건이나 박정근씨 사건과 비교해보라.)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피델 카스트로의 장기집권과 그에 이은 라울 카스트로의 집권이나 다당제 같은 대의기구가 발달하지 않은 것을 두고 쿠바는 ‘비민주적인 독재국가’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이 책에서 보여주는 것 같은 사회의 각 제도의 구축과 실행에서의 활발한 주민참여와 같은 쿠바의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는 우리 사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쿠바의 수도인 '생태도시' 아바나

  쿠바가 우리나라보다 경제적으로 낫다든가 정치적으로 더 민주주의적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편견과 달리 쿠바는 어떤 면에서 우리보다 더 나은 사회경제적 환경을 인민에게 제공하고 있으며, 우리에게는 없는 민주주의적 제도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환경이나 생태라는 가치에 있어서는 비단 우리 뿐 아니라 서구 어느 나라보다 앞선 측면이 있다. 편견을 버리고 바라볼 때 쿠바는 우리와 매우 대조적인 장단점을 가진 사회로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리 사회 말고도 이 책을 읽는 내내 떠올린 것이 북한이었다. 북한은 여러모로 쿠바와 유사한 환경을 가졌다. 북한도 쿠바처럼 작은 규모의 공산주의 체제 국가로서 소련의 지원을 받았었고, 소련붕괴 후 석유자원의 지원 중단과 미국의 강력한 봉쇄로 지독한 경제위기를 겪었다. 90년대에 북한이 자연재해에 시달리며 식량위기가 가중되었던 것처럼 쿠바도 허리케인으로 인한 자연재해 문제를 중요한 사회문제로 가지고 있다. 그런데 쿠바는 그 위기의 극복 과정에서 생태주의를 중심으로 한 나름의 지속가능한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는 반면에 북한의 경우 그런 이야기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물론 두 나라의 상황이 마냥 같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를테면 천연자원의 차이라든가 주변을 둘러싼 국가들의 차이와 같은 외적 요소로 인해 차이가 발생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힘들다. 또한 북한사회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쿠바가 그런 것처럼 우리의 편견보다는 훨씬 더 나은 부분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차이들 - 북한이 ‘핵’이라는 지속가능하지 않은 대표적인 물질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데 비해 쿠바는 지속가능한 개발을 중심가치로 내세우는 것, 북한이 인민의 기본적인 먹거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반면에 쿠바는 그런 부분에 있어 훨씬 나은 성과를 보이는 것과 같은 - 을 단지 외적인 환경의 차이 탓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 아닐까. 

  이 책을 읽는 동안 이렇게 쿠바라는 나라를 남북한과 비교해보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일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유익한 시간이었지만, 어떤 결론도 나오지 않는다. 그게 그리 쉬운 일일 리가 있을까. 훨씬 더 많은 고민과 공부가 필요하다. 그래도 결론 같은 건 내리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크겠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