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사회민주주의의 명예회복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자리한 국가들을 그 상징적 성공모델로 한 ‘사회민주주의’는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좌파와 우파 모두로부터 폄하되어왔습니다. 좌파로부터는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배신하고 자본과의 타협을 통해 탄생한 ‘개량주의 체제’로서 자본주의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아왔으며, 우파로부터는 ‘복지병’과 ‘비대한 공공부문으로 인한 비효율의 상징’이라는 모함에 가까운 비판을 받아 온 것이죠. 그러나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과 신자유주의의 광풍, 그리고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신자유주의의 위기라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혁명적 사회주의와 자유주의가 모두 한계를 드러내자, ‘구체제’ 취급을 받던 ‘복지국가’는 대안 체제로서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최근의 경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주의’라는 복지국가를 떠받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사회주의보다는 자본주의 쪽에 조금 더 가까운 타협점’ 정도인 것 같습니다. 사회민주주의를 하나의 구체적 지향과 이상을 가진 체계로 보기보다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이상 사이에서 나타난 ‘어중간한 중도’로 보는 입장이 지배적이라는 이야기죠. 사회민주주의를 이렇게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여러 요소를 짜깁기한, 그러면서도 자본주의적인 것이 더 중심이 되는 것으로 보는 시각으로 인해 좌파에서는 여전히 ‘개량주의’의 시각을 거두지 못하고 있고, 우파에서는 때로는 비효율의 상징으로 몰아붙이다가도 20세기를 자유주의의 승리로 선언할 때는 사회민주주의를 슬며시 자유주의의 변형으로 위치시키기도 합니다.

  이 책, ‘정치가 우선한다(The Primacy of Politics)’의 저자인 셰리 버먼은 이런 경향이 잘못되었음을 단호하게 주장합니다. 그녀는 사회민주주의가 ‘정치의 우선성’과 ‘공동체주의에 대한 믿음’이라는 분명한 이념적 지향을 가지고 있으며,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 모두에 대한 대안 이데올로기로서 양차대전 이후 70년대까지의 번영을 이끈 사상이자, 신자유주의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현재와 미래에도 여전히 기능할 20세기 사회사상사의 진정한 승리자라고 선언합니다. 그 말대로라면 가히 ‘사회민주주의의 명예회복’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그녀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사회민주주의 이데올로기의 형성과 발전을 정치사와 지성사를 포괄하여 역사적으로 조망합니다. 이 리뷰에서는 저자의 역사적 조망을 간략히 살펴보고,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들을 현재적 과제에 비추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조망

 저자의 이야기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심각한 불평등과 공동체의 뿌리 뽑힘, 개인의 원자화라는 폐해를 낳은 끝에 대안 이데올로기로서의 마르크스주의가 등장하고, 다시 19세기 말 마르크스주의조차 위기에 놓인 시점에서 시작합니다. 저자는 당시 엥겔스와 카우츠키가 주도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교리’는 역사적 유물론과 계급투쟁이었다고 말합니다. 역사적 유물론과 계급투쟁론은 자본주의는 그 내적 모순으로 인해 계급 간 대립을 격화시킴으로써 필연적으로 붕괴하게 되며, 이는 사회주의로의 필연적인 이행으로 이어진다는 결정론적인 내용입니다. 문제는 마르크스의 예언(이와 같은 경제 결정론은 마르크스의 것이 아니며 엥겔스와 카우츠키가 마르크스주의를 지나치게 도식화 한 나머지 초래된 것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저의 식견이 짧아 뭐라 할 수는 없지만, 아무리 엥겔스와 카우츠키에 의해 단순화가 되었다고는 해도 ‘경제적 토대가 결정적’이라는 생각 자체는 역시 마르크스로부터 기원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한 평가가 아닐까 합니다.)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19세기 후반의 불황을 겪고 난 후 자본주의는 호황 국면에 들어섰고, 적어도 상당 기간 동안은 붕괴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이죠. 이렇게 되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기모순에 봉착하게 됩니다. 당시의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전술한 바와 같이 ‘경제적 토대에 의한 필연적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제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 이행기를 대비해서 노동자들을 조직화하고 교육하는 것 외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혁명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할만한 어떤 지침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경제 결정론적 관점 외에도 마르크스주의의 국가론 - 국가는 지배 계급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일 뿐이라는 - 은 정치 자체에 대한 부정적 정향을 나타냈고, 결국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은 정당이면서도 정치활동에는 나서지 않아야 하는 모순된 입장에 처하게 됩니다. 만약 단기간 내에 자본주의가 붕괴되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시작된다면 이런 것들은 큰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일이 그렇게 진행되지 않게 되면서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 균열이 발생합니다. 바로 수정주의의 등장입니다.

 수정주의의 출발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베른슈타인입니다. (물론 저자는 장 조레스, 프란체스코 메를리노, 필리포 투라티, 오토 바우어 등의 이야기를 폭넓게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수정주의의 시조 격인 베른슈타인의 이야기만 간략하게 짚고 넘어 가겠습니다.) 그는 사회주의는 순전히 유물론적인 기반에서 오지 않으며,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통한 개혁으로 사회주의 이행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역사적 유물론에 대한 공식적 포기를 요구한 것이죠. 또한 그는 민주주의(좀 더 정확하게는 의회주의)의 실현은 사회주의로 가기 위한 중요한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라고 제시하며, 마르크스의 또 다른 예언인 프롤레타리아화(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라 중간계급은 사라지고 소수의 자본가를 제외한 계급들은 프롤레타리아가 된다는 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사회민주당은 득표를 위해 다양한 계급을 포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또 다른 중요한 교리인 계급투쟁론마저 저버린 것입니다. 대신 베른슈타인은 ‘정치의 우선성’과 ‘계급교차적 협력’을 내세웁니다. 자유주의 정치의 소중한 성과인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이용하여 사회의 전반적 피지배계급의 대표자로서 사회민주당이 적극적으로 의회에서 활동함으로써 ‘개혁을 통한 사회주의 이행’이 가능하다는 비전을 제시한 것입니다.

 저자는 베른슈타인과 흐름을 같이한 수정주의자들을 ‘민주주의적 수정주의’라 분류하는 한 편 이들과는 또 다른 수정주의의 흐름을 제시합니다. 바로 후에 파시즘을 낳게 되는 ‘혁명적 수정주의’입니다.(저자는 레닌의 볼셰비즘 또한 혁명적 엘리트의 지도를 통한 사회주의 이행을 제시하여 경제결정론을 부정하였다는 점을 들어 그 또한 수정주의의 한 흐름으로 분류합니다. 사실 이는 좀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수정주의를 ‘혁명을 포기하고 개혁을 추구하는 흐름’으로 보는 일반적인 입장에서 보면 볼셰비즘은 수정주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자의 경우 ‘경제결정론에 입각한 사회주의 이행’을 따르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정통과 수정주의를 나누고 있기 때문에 이 같은 분류가 전적으로 부당하다고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혁명적 수정주의는 조르주 소렐로부터 출발합니다. 소렐은 마르크스주의의 결정론적 세계관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는 베른슈타인과 관점을 같이합니다. 하지만 소렐은 베른슈타인보다 인간의 의지를 더 강조하는 주의주의(主意主義)적 입장을 취했으며, 보다 더 중요하게는 프랑스의 자코뱅주의적 전통을 이어받아 (민주주의적 방법이 아닌) 폭력적 직접행동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사상은 좌우 양극단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 좌측에는 아나코 생디칼리슴이 있었고, 우측에는 파시즘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저자가 파시즘과 나치즘을 다룬 방식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글의 저자인 셰리 버먼의 경우 파시즘이나 민족적 사회주의(나치즘)의 정책이 완전고용, 재정확장,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선성을 강조했다(즉, 국가가 자본가에 대한 우위에서 서서 경제 계획을 수행했다)는 측면에서 ‘민주주의’라는 절차적 요소와 인종주의적인 요소를 제외하고 보면, 사회 민주주의와 파시즘이 매우 유사하다고 말합니다. 정책 뿐 아니라 기원에 있어서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민주적이냐 혁명적이냐의 차이는 있어도 ‘수정주의’라는 공통의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욱 유사하다는 것이죠. 결국 저자는 이를 통해 ‘민주주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또한 이 책이 다룬 내용이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가 ‘민주주의’의 절대적 중요성이라고 생각하기에 상당부분 저자의 논지에 동감합니다. (민주주의의 절대적 중요성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하지만 파시즘/나치즘과 사회 민주주의 사이에는 저자가 다룬 것보다 더 큰 차이가 있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칼 폴라니는 ‘파시즘의 본질’이라는 논문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양립 불가능성을 지적하며 이의 해결 방안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민주주의를 경제 영역에까지 확장시키는 것.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사회에 경제생활만을 남겨놓는 것. 폴라니가 지목한 두 번째 경우가 바로 파시즘으로 그는 파시즘은 경제적 자유주의의 마지막 안전판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민주주의를 말살함으로써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경제를 국가가 보호하고 육성하는 방식으로 나갔다는 것이죠. 물론 저자 또한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만, 저의 짧은 소견으로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양립 불가능성’에 대해 저자는 폴라니와 같은 정도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2차 대전 후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러했듯이) 자본주의에 ‘어느 정도’의 규제만 가한다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양립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저자가 책 말미에 (이른바 ‘구조개혁좌파’라 할 수 있는) 70년대의 이탈리아 공산당이나 프랑스 사회당/공산당 연립정부를 ‘마르크스주의의 유산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즉, 지체된) 것으로 언급하는 데에서도 드러납니다. 이는 결국 사회민주주의를 완결된 체제로 보느냐, 경제적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간단계로 보느냐의 문제이며, 이 중 어느 쪽 입장을 취하는가에 따라 파시즘 및 민족적 사회주의와의 차이에 대한 시각도 달라질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이 글 말미에 다시 언급할 예정이니 일단 이 정도만 언급하고 저자의 논의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로마에서의 무솔리니와 히틀러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수정주의의 대립 문제는 1차 대전을 겪고 난 후 더욱 심각해집니다. 기존의 사적 유물론과 정치의 우선성의 대립, 계급투쟁론과 계급 교차적 협력의 대립은 몇 가지 현실적 상황의 변화로 더욱 심각해집니다. 우선 전쟁을 통해 나타난 민족주의의 등장은 사회주의 정당의 ‘국민정당화’에 대한 문제로 심화되어 기존의 계급투쟁론에 대한 도전을 더욱 거세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극에 달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인민의 반감은 선거를 통해 표출되어 많은 나라에서 마르크스주의 정당은 지배적 정당의 위치에 올라섭니다. 각국의 주요 정당의 위치에 올라선 마르크스주의 정당은 책임 있는 정치행위를 요구받게 되는데, 이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정치행위에 대한 부정적 입장과 충돌하게 되고 역사적 유물론에 대한 정치의 우선성의 도전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의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은 기존의 교조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이게 되고, 이로 인해 사회주의 정당들은 심각한 분열을 겪습니다. 이처럼 마르크스주의가 인민의 자본주의에 대한 실망을 해결해주지 못하는 틈을 비집고 나타난 것이 파시즘과 나치즘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파시즘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는 복합적이지만, 어쨌든 파시즘은 당시에 치솟던 민족주의적 요구와 기존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거부, 그리고 실업이나 빈곤과 같은 현실적 과제의 해결이라는 당시 인민의 요구들을 마르크스주의자들보다 더 빠르고 명확하게 자신의 것으로 하며 폭넓은 지지를 얻습니다. 물론 인권과 민주주의의 말살, 그리고 인종주의라는 요소들로 인해 처음 내세운 것과 달리 파시즘과 나치즘은 지독히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체제로 귀결되고 말았습니다만 그건 나중의 일입니다.

 일찍이 민주주의적 수정주의가 결실을 맺었던 스웨덴이라는 하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에서 민주주의적 수정주의의 결실은 2차 대전을 겪은 후에 이루어집니다. 저자는 양차대전과 그 사이의 대공황을 겪으며 통제되지 않은 시장의 위험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서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루어졌으며, 한편으로 파시즘과 나치즘이라는 전체주의를 겪으며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의 중요성 또한 유럽인들에게 중요한 교훈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케인스주의와 복지국가입니다. 케인스주의 경제정책은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선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사회에서 독립된 경제’가 아닌 ‘사회 안에 묻어 들어간 경제’가 구현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복지국가는 사회 구성원간의 연대성을 강조함으로써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하의 원자화된 개인들의 이익사회(gesellschaft)가 아닌 공동체적 헌신에 기초한 공동사회(gemeinschaft)로의 이행을 보여줍니다. 저자는 비록 적지 않은 나라에서 케인스주의와 복지국가는 우파 정당에 의해 수행되기도 했고, 이로 인해 이것이 자유주의의 변형인 것처럼 오해되기도 하지만, 이는 명백히 민주주의적 수정주의의 주장을 이어받은 사회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20세기 사상사의 최후의 승자는 사회 민주주의라고 말합니다.

                                       1930년대 스웨덴 사민당의 선거포스터

첫 번째 교훈. 도그마(Dogma)에 빠지지 마라.

 그 기원이 마르크스에 있건 엥겔스와 카우츠키에 있건 간에 19세기 말~20세기 초의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이 ‘경제결정론’이라는 도그마에 빠졌던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사실 자본주의는 그 내적 모순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붕괴하게 되며, 그 다음 세상의 주인공은 지금 핍박받고 있는 프롤레타리아라는 명제는 마르크스주의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파산을 앞두고 가장 강력한 대항 이데올로기가 되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지금의 세상이 너무나 비참하고 힘겨울 때 누군가가 ‘걱정하지 마, 반드시 압제자들을 물리치고 네가 승리하게 될 거야.’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과학적 근거’를 가진 것이라고 여겨진다면 누구에게라도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는 그렇게 등장하여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력한 도전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세상은 마르크스가 예측한 것과 다르게 움직였고, 마르크스주의를 강력하게 만든 바로 그 강점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되었습니다. 이는 마르크스를 탓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설사 잘못된 예언이 온전히 마르크스의 몫이라고 가정해도 말이죠. 사상가는 예언자가 아닙니다. 사상가는 자신이 속한 시대에 발을 딛고 그 시대의 환경 속에서 그 시대까지의 지적 성과를 기반으로 새로운 시대를 조망하고 대안을 내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새로운 시대에 대한 예측이 완벽하게 실행되지 않더라도, 그들의 현실 분석과 미래에 대한 대안은 충분히 많은 교훈을 줄 수 있고 더 나은 시대를 설계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본주의가 스스로 붕괴하지 않았다고는 해도, 자본주의의 원리가 가진 근본적인 모순과 그로 인한 계급 문제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양상을 그릴 것인지를 이야기한 마르크스의 시도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바뀐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선대의 사상을 그대로 고집한 후대에게 있습니다. 그들은 시대의 변화를 스스로 체험하고 분석할 수 있는 상황에 있었음에도 선대의 사상을 마치 예언인양 받아들이고 고집했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알맞게 사상과 실천은 바뀌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한 것이죠. 이런 것이 바로 도그마(dogma)에 빠진 상황입니다. 종교적 영역이라면 몰라도 정치적·사회적 영역의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은 절대 도그마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사회는 항상 변하기 마련이며, 제아무리 뛰어난 사상가라도 그 변화를 완전히 예측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정치적·사회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원칙을 가지되 늘 사회의 변화에 조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공통적으로 가졌던 ‘경제결정론’의 도그마는 힘겨운 과정을 거쳐 극복되었습니다. 비록 ‘신자유주의’의 열풍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악몽을 떠올리게 했지만 역사를 완전히 되돌릴 수는 없었고, 복지국가는 약화되었을지언정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경제를 사회와 정치로부터 떼어 낸 채 운영한다는 원리가 지독한 유토피아에 불과하다는 역사의 교훈이 아직은 남아 있었던 까닭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경제에 관한 도그마가 이것뿐인 것은 아닙니다. 경제와 관련해서는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도그마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경제성장’의 도그마입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파시즘과 사회민주주의를 포함한 모든 이데올로기들이 공유했던 경제적 원칙은 ‘경제성장은 이롭다.’는 것이었습니다. 산업화의 진전과 경제의 ‘발전’, 그리고 그로 인한 생산과 소비의 증대는 20세기의 어떤 주류 사상도 거부하지 않았던 ‘공리’였습니다. 특히 이 책의 저자인 셰리 버먼이 20세기 사회사상의 진정한 승리자로 상찬해 마지않는 사회 민주주의와 그 결과물로서의 케인스주의 복지국가는 포드주의로 상징되는 대량생산과 포디즘 체제 하 노동자들의 소득 증대로 인한 대량 소비를 근간으로 한 ‘대중사회’가 그 본질이었습니다. 생산의 지속적인 증대는 노동자들의 고소득의 근간이 되었으며, 그 고소득 노동자들의 소비는 생산증대를 뒷받침할 유효수요를 창출했습니다. 또한 고소득 노동자들로부터의 조세는 복지재정의 근간이 되었으며, 완전고용에 가까운 상황은 복지수혜자를 전통적인 빈곤층 - 노인, 장애인 등 - 으로 제한함으로써 재정적 부담을 완화했습니다. 이 모든 체제의 근간에는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 좀 더 직설적인 표현을 쓰자면 ‘생산과 소비의 지속적인 증대’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왔다가 다시 저물고 있는 지금에도 주류 이데올로기에서는 어느 쪽도 ‘경제성장’이라는 전제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주로 생태주의 진영으로부터 나오는 ‘경제성장’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일축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경제성장’은 ‘경제결정론’보다 더 강력하게 지속되고 있는 도그마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지구 환경의 문제는 '경제성장'이라는 도그마가 초래한 재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그리고 이 경우에는 특히 우리를 둘러싼 자연환경은 우리의 생각의 변화보다 더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많은 생태주의자들이 지적하는 산업발전의 부정적 부산물들, 즉 기후변화나 피크오일, 생태계파괴와 같은 문제들은 이미 지구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봉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멜서스의 ‘인구론’이 그랬던 것처럼, 생태주의자들의 경고 또한 인간의 ‘진보’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현실속의 기술 발전의 정도로 봐서는(보다 더 중요하게는 인간들이 기술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봐서는) 과연 그럴까 싶긴 하지만 설사 그런 논의의 적실성을 어느정도 인정한다고 해도,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은 현재 수준 이상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만약 남반구의 나라들이 북반구의 나라들만큼 산업을 ‘발전’시킨다면, 그 때는 정말 지구가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될 것입니다. (로스엔젤레스의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을 세계 전역으로 확산시킬 경우 지구가 다섯 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나, 세계 모든 가족이 자동차를 한 대씩 가진다면 석유는 수개월밖에 지탱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상황에서 경제성장의 도그마를 그대로 가지고 미래를 설계한다면, 그 미래가 과연 지속가능할까요? 어쩌면 현 시대에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가치는 '자유로운 시장‘이나 ’복지국가‘가 아니라 생태주의일지도 모릅니다. 설사 생태주의자들의 주장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경제성장이 도전받지 않는 도그마로 존재하는 상황은 위험하다는 것을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실패에서 읽어내는 것이야말로 역사적 교훈을 현재화하는 지혜일 것입니다.

 

두 번째 교훈. 민주주의가 우선한다.

 제가 이 책을 읽으며 느낀 두 번째의 중요한 교훈을 바로 ‘민주주의의 우선성’입니다. 파시즘과 사민주의의 차이의 대부분이 민주주의라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가장 중요한 차이 중 하나였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19~20세기를 거치며 형성된 체제 중 어쨌든 ‘민주주의적인’ 제도를 정착시킨 체제는 불완전할지언정 그럭저럭 생존해온 반면, 그렇지 못한 체제는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몰락했습니다. 나치즘과 파시즘,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이 그 좋은 예입니다. ‘이슬람 사회주의’라는 슬로건으로 서구 기업의 착취와 전근대적 왕정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등장했던 ‘혁명가’, 카다피는 최초의 ‘좋은 뜻’은 간데없이 최악의 독재자가 되어 결국 인민에 의해 축출되었으며, 우리에게 더 가까운 예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해방 직후 친일파 청산과 토지 재분배라는 시대적 과제를 대한민국보다 더 잘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세계 유일의 3대 세습 국가(남쪽에는 3대 세습 재벌이 있긴 합니다만)가 되어 ‘인민은 굶고 있는데 지배층은 권력 유지에만 골몰하고 있는’ 비참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민주주의의 유무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도한 일반화이겠습니다만, 민주적 제도가 없는 나라가 시대의 변화에 더 적응하지 못하며 권력 중심부로부터의 부패에 더 취약한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때문에, 바로 위에 도그마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만, 만약 사회의 운영원리로서 단 한 가지 ‘절대 흔들리지 말아야 할 원칙’이 있다면 저는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의 원칙을 말함에 있어 정말로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행하는 것입니다. 사실 위에 ‘민주주의가 없었던’ 체제로 예를 들었던 사회들도 민주집중제라든가 하는 식으로 스스로의 ‘민주주의’를 추진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작동되는 민주주의였냐고 질문해본다면 아마 상식을 가진 현대인의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더 추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일까요?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라고 하면 보통·평등·직접·비밀의 원칙에 근거한 선거, 의회, 복수의 정당 등을 떠올립니다. 이것들은 모두 오랜 세월을 거치며 형성된 ‘민주주의를 운영하기 위한 장치들’입니다. 민주주의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죠. 그런데 이런 제도들이 대부분 갖춰진 지금의 우리나라 정치는 ‘민주주의적’인가요?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민주주의를 정의해야 합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는 학자마다 여러 가지로 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민주주의는 민중(Demos)에 의한 지배(Kratos)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수의 선택받은 이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민중이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지금 우리의 현실을 어떨까요? 2011년 전세계를 뒤흔들었던 말이 바로 1%에 대한 99%의 반격입니다. 민주주의의 원리가 관철되고 있다면 말도 안되는 소리죠. ‘반격’이라는 것은 이전까지 열위에 있었음을 내포한 표현인데 99%의 사람들이 1%에 의해 열위에 있다면 우리가 떠들어온 ‘민주주의’는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이런 문제가 발생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대의 민주주의 체제의 한계라든가 관료주의의 문제도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부분은 참여 민주주의적 요소의 도입 - 주민소환이라든가, 주민참여예산제 같은 - 이나 정당의 정책역량 강화를 통해 선출된 권력의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대한 통제 강화 같은 대안이 있을 수 있겠지요. 이런 문제들을 깊이 있게 다룰 수 있으면 좋겠지만, 여기서는 다른 이야기를 조금 하고 넘어갈까 합니다. 바로 앞서 언급한 폴라니의 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충돌의 문제입니다.

      '김진표 아웃' 같은 것으로 간단히 경제민주화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물론 아웃은 필요하긴 하다.

 최근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상당히 넓은 스펙트럼에서 쓰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넓은 스펙트럼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지점은 ‘재벌이 법 위에 군림하는’ 상황을 바꿔야 한다는 것인 듯합니다. 그런데 사실 엄밀히 따지면 이건 ‘민주주의’라기보다는 ‘제대로 된 자유주의’의 영역에 속합니다. 공정한 경쟁의 보장이라든가, 법치주의의 원칙을 분명히 하는 것은 서구에서는 19세기 고전적 자유주의 시대의 과제였습니다. 이는 사실 민주주의의 문제라기보다는 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전제조건 같은 것들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을 ‘경제 민주화’라고 부르는 것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지체된 경제 자유화의 회복’이라고 하면 더 적합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경제 민주주의는 경제 영역에서 민중에 의한 지배를 확립해나가는 데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독일 같은 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는 노조의 경영참여 제도화는 우리의 현실에서 좋은 출발점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더 나간다면 협동조합처럼 민주적 원리에 의해 운영되는 생산/소비 조직이 경제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 또한 경제 민주주의의 중요한 요소일 수 있을 것입니다. 공공이 운영하는 - 달리 말하면 국유화된 - 기업을 늘림으로써 사적 기업의 전횡을 견제하는 문제는 좀 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입니다. ‘국가’라는 기관을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냐는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국과 같이 선출되지 않은 관료의 힘이 강한 나라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현 시점에서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할 때 초국적 자본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라는 주제는 매우 중요하고도 어렵습니다. 어찌 보면 케인지언 복지국가가 실패한 원인 중 하나는 일국적 케인즈주의가 초국적 자본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결국 ‘경제 민주화’는 나라 안에서 뿐 아니라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공통의 노력이 필요한 과제입니다. 최소한 지역적 차원의 다국적 공조가 필요한데, 현재 남미에서 시도되고 있는 ALBA(Alternativa Bolivariana para América Latina y el Caribe)와 같은 경우가 하나의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폴라니는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본질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원리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민주주의를 폐기하거나 자본주의를 민주화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완벽한 자본가의 통치 기구로서의 국가’를 만들거나 ‘경제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거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셰리 버먼은 이와 같은 ‘자본주의의 민주화’의 과제가 케인지언 복지국가에 의해 훌륭하게 수행되었다는 의견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진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좀 더 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가 우선해야 한다.’는 역사의 교훈을 현재화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영역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할 것입니다.

  

나가며. 사회민주주의의 현재와 미래

 글을 맺으며 이 책에 나온 저자의 중요한 주장들과 그 주장들에 대한 저의 부족하나마 간략한 견해를 덧붙여볼까 합니다. 우선 저자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 즉, ‘사회민주주의야말로 20세기 사회사상사의 진정한 승리자’라는 주장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합니다. 어쨌든 19~20세기를 거치며 나온 여러 사회사상 중 사회민주주의에 기반한 사회가 가장 번영했고 성공적이었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검증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영미권을 제외한 유럽 대부분 지역을 ‘사회민주주의’라는 하나의 틀로 묶을 만큼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많은 공통점을 찾을 수 있긴 하지만, 이를테면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과 대륙 유럽 국가들의 차이가 대륙 유럽 국가들과 영국(미국은 꽤 차이가 커 보이니 논외로 하겠습니다.) 과 같은 국가와의 차이에 비해 그렇게 좁았다고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좀 더 중요하게는 저는 사실 사회민주주의는 ‘과도기적 체제’였다고(혹은 그랬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사회민주주의가 폴라니가 제시한 방법대로 정치의 힘으로 경제의 영역에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체제였다고 한다면 현실속의 사회민주주의가 균형점을 이루었던 지점은 너무나 불충분한 민주화였습니다. 불가역적인 수준까지 경제 영역에 민주주의를 심지 못했기 때문에 전 세계적 정치경제 환경의 변화 시기에 이루어진 ‘신자유주의의 역습’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스웨덴의 임노동자 기금 시도나, 셰리 버먼이 마르크스주의의 구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지체된 현상쯤으로 취급했던 프랑스 사회당-공산당의 ‘공동강령’ 같은 것들이 좀 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면, 지구촌 몇몇 국가에서나마 사회민주주의를 통한 경제 영역의 민주화는 후퇴할 수 없는 수준까지 전진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끝으로 “사람들이 함께 노력하면 어떤 장애물이라도 극복해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기반을 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사회민주주의가 20세기에 큰 성공을 거두었듯, 21세기에도 “그 형태는 다를지 모르나 성격은 다르지 않은” 정치 이데올로기를 통해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저자의 마지막 주장에 대해서는 전적인 공감을 표하고 싶습니다. 경제든 뭐든 ‘결정지어져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인간의 힘을 통해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어떤 사족도 달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근래에 꽤 여러 편의 책 리뷰를 작성한 바 있는데, 이번 리뷰는 그 어느 때보다 제 의견을 많이 넣었고(물론 저의 무지 탓으로 많은 다른 글에서 본 내용들을 활용하긴 했습니다만), 저자에게 많이 반항(?)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전문성이나 깊이 있는 지식도 갖지 못한 제가 감히 셰리버먼과 같은 학자의 책에 너무 많은 토를 단 것 같아 낯 뜨겁긴 합니다만, 무식한 자라도 용감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또 민주주의의 장점인 듯합니다. 어찌 되었든 부족한 제가 있는 힘을 다해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해준 이 책과 저자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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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관해서는,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단적인 이론을 받아들여야 한다. 즉 인간의 동기는 '물질적'인 것과 '관념적'인 것으로 나뉘는데, 일상생활이 조직되는 동기는 '물질적' 동기라는 것이다. 공리주의적 자유주의나 통속적 마르크스주의 모두 이러한 관점을 선호했다. 사회에 관해서는, 인간의 경우와 비슷한 다음과 같은 학설이 나왔다. 사회 제도는 경제 체제에 따라 '결정'된다. 이 견해는 자유주의자들보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훨씬 더 인기가 있다. 물론, 시장 경제 아래서는 두 가지 주장이 다 맞다. 하지만 오직 시장경제 체제에서만 그러하다. 이러한 관점을 과거에 적용하게 되면 시대착오적 입장만 나오게 될 뿐이고 미래에 적용하게 되면 편견만 나오게 된다."
  - 칼 폴라니,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p25

"아리스토텔레스가 옳았다. 인간은 경제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이다. 물질적 소유를 획득하는 과정에서도 인간이 노리는 것은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사회적 선의, 사회적 지위, 사회적 자산 등이다. 인간은 그러한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자신의 소유물의 가치를 평가한다. 인간을 움직이는 동기는 보통 우리가 사회적 인정을 얻기 위한 노력과 연결 짓는 혼합적 성격을 띤다. 인간의 생산에 들이는 수고는 사회적 인정을 얻으려는 노력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인간의 경제는 일반적으로 사회적 관계 속에 묻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사회의 모습이 정반대로 사회가 경제 체제에 묻어 들어간 형태로 변한 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사태이다."
  - 칼 폴라니,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p31

"경제 결정론을 모든 인간 사회에 적용하려는 노력은 망상이나 다름없다. 사회 인류학의 연구에 의해, 사용하는 생산 도구가 사실상 동일하다 해도 그 생산 도구들에 조응하는 제도는 다수라는 것이 밝혀졌다. 시장이라는 제도가 인간적 유대를 멧돌에 갈아 셀렌산으로 부식시킨 듯한 특징 없는 획일성으로 몰아넣기 전에는 제도를 낳는 인간의 창조성이 결코 멈춘 적 없었다."
  - 칼 폴라니,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p41

"자유 방임 철학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이미 지나가버린 산업 문명의 시대에 끝났다. 그것은 인간을 가난하게 만든 대신 사회를 부유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는 생활의 충만함을 인간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비록 기술적으로는 효율성이 덜한 사회가 되더라도 말이다."
  - 칼 폴라니,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p43

"노동 시장, 토지 시장, 화폐 시장이 시장 경제에 '필수적'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인간과 자연이라는 사회의 실체와 경제 조직이 보호받지 못한 채 그 '악마의 멧돌'에 노출된다면, 어떤 사회도 무지막지한 상품 허구의 경제 체제가 몰고 올 결과를 한순간도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 칼 폴라니,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p63

"하지만 산업 생산이 복잡해질수록 공급을 보장해야 할 산업 요소들의 종류도 늘어났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요소는 노동, 토지, 화폐였다. 상업 사회에서 이 세 요소의 공급을 조직하는 방법은 단 하나, 즉 구매를 통해 얻는 것 뿐이다. 따라서 이 세 가지는 시장에서의 판매를 위해 조직되어야만 했다. 즉, 상품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시장 메커니즘을 노동, 토지, 화폐라는 산업 요소들에까지 확장하게 된 것은 상업 사회에 공장제를 들여오면서 나타난 불가피한 현상이다."
  - 칼 폴라니,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p65

"19세기 사회사는 이중적 운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진짜 상품에 대해서는 시장적인 조직 방식을 확장해나가는 과정이, 허구적 상품들에 대해서는 그것을 제한하는 과정이 나란히 나타났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시장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시장에 나오는 재화의 양은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일련의 법령과 정책의 연결망이 노동, 토지, 화폐에 관한 시장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만든 강력한 제도들로 통합되었다."
  - 칼 폴라니,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p67

"어떤 집단을 성공으로 이끄는 것은 그들 자신의 이해관계가 지닌 힘 때문이 아니다. 사실 성공의 비밀은 그 집단이 얼마나 다른 집단들의 이익을 - 자신들의 이익에 포괄시킴으로써 - 대표해내느냐에 달려 있다. 실제로 어떤 집단이 그러한 포괄을 이루고자 한다면 자신들이 지도하기를 열망하는 더 폭넓은 집단의 이익에 자신들의 이익을 갖다 맞춰야 할 것이다. 사회의 대다수는 양대 계급 간의 싸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아무런 '이해'도 갖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이는 더욱 쉬워진다. 사회의 성격이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에 소규모 중산 계급이나 농민들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가장 결정적으로 관심을 갖는 사실으 사회가 그 둘 중의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만약 노동 계급이 사회주의를 향한 길에 앞장서고 현실적으로 다른 계급들을 지도하기 위해 자신의 이익을 조화시켜 나간다면 그들은 노동 계급을 따를 것이다."
  - 칼 폴라니,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p80

"중앙 계획화된 경제 방식의 가장 뚜렷한 결함은, 노동 계급 운동의 구체적 현실과 그 운동이 체현하고 있는 역사적 임무를 조화시키지 못한다는 점과 관계 있다. 관치 경제 이론가들은 노동 조합, 산업 결사체, 협동 조합, 사회주의적 지방 자치 단체들이 사회주의 경제에 기여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간과하고 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장치들은 경제에 대한 '내적 조망'의 기관들로서 사회주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 칼 폴라니,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p110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무엇보다도 먼저 대외 정책의 문제이다. 금본위제의 실패에서 보았든이, 사적 기업이라는 경제 운영 방법이 파산했던 곳도 바로 이 대외 정책의 영역이며, 사적 기업이라는 방법에 집착한 나머지 현실적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는 곳도 대회 정책의 영역이다.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단순한 하나의 신조에 바탕을 두고 있다. 대외적인 구매와 판매, 대부와 차입 그리고 외환 거래가 벌어지는 단위는 개인들로서, 마치 그들 모두가 같은 나라의 국민인 것처럼 상정하는 것이다. '대외 경제'는 이로써 사적 개인들 간의 문제가 되고 시장 메커니즘음 만국의 대외 경제를 저절로 '균형에 이르게' 해주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힘을 갖는 것으로 신뢰받는다. 이러한 유토피아적인 관념은 현실에서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으며, 실제로 무너지고 말았다."
  - 칼 폴라니,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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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주의 (이상헌 저 / 책세상)

Posted at 2012. 3. 5. 00:34// Posted in 공부
"생태주의는 그 안에 대립하는 첨예한 이데올로기 투쟁을 담고 있으며, 자연의 한계와 관련된 지배 담론을 관철하려는 헤게모니 전략, 그리고 대안적인 생태 사회를 형성하려는 다양한 실천들도 아우르고 있다."
  - 이상헌, '생태주의' p21

"자연의 한계에 대한 인식은 생태주의를 환경주의와 구별 짓는 핵심 요소이다. 1972년 로마클럽에서 발간한 보고서 (성장의 한계>의 결론은 생태주의의 출발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자연을 이용하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고, 바로 이 지점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 구조 변혁의 출발점을 제공한다.' 이것이 보고서의 결론인데, 이러한 발상이 바로 생태주의의 정치적 지향점이다. 기존의 공업주의적 수단을 통해서 환경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으며, 공업주의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환경주의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 이상헌, '생태주의' p35

"더 많은 공업화, 더 많은 자원의 활용, 더 많은 개발, 더 많은 상품의 생산과 소비로 인한 경제 성장, 이러한 과정들의 부산물인 폐기물과 환경 오염의 증가가 인류의 진보를 증거하는 징표가 된 것이다. 이것은 자유주의, 보수주의,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 파시즘 등 거의 모든 현대의 정치 이데올로기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각 이데올로기의 차이에 민감한, 특히 이런한 차이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으로 들리겠지만, 정치정 이념 지형에 상관없이 좌파든 우파든 모두 자연 지배에 근거한 공업화와 개발 지향적인 진보의 개념을 공유하고 있었다."
  - 이상헌, '생태주의' p57

"크로포트킨은 속류 다윈주의자들이 다윈의 진화론을 왜곡해서, 생존을 놓고 벌이는 투쟁만이 동물이나 인간 사회의 자연적 법칙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비판한다. 그는 동물이나 인간의 진화에는 상호 투쟁도 있지만, 상호 부조와 상호 지지의 법칙 역시 존재하며, 종의 유지와 진화에는 상호 투쟁보다 상호 부조가 더 적절했다는 것을 생물학적 근거를 들어 제시했다. 다윈은 최대한 협력을 잘하는 구성원들이 많은 공동체일수록 더 번창하고 더 많은 자손을 부양한다고 주장했다. 즉, 다윈 역시 적응을 위해서는 공동체 차원의 상호 부조가 더 유리한 전략입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 이상헌, '생태주의' p76

"일회용 포장, 폐기 처분된 기계와 금속, 쓰레기와 함께 태워버린 종이, 깨져서 수리 불가능한 도구, 노동 재해를 입은 사람들과 교통사고 피해자들이 필요로 한 보철구 및 의료소비스 등으로 인한 생산 증가 등, 그 모든 생산과 구매의 증가는 국가적인 부의 증가로 잡힌다..... 물건들이 깨지고 닳고 구식이 되고 폐기되는 속도가 빠를수록 국민 총생산은 증대할 것이고, 국가 회계상으로는 우리가 더 부유한 것으로 나타난다."
  - 앙드레 고르, '에콜로지카' 중 / 이상헌, '생태주의' p116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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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국내도서>사회과학
저자 : 더글러스 러미스 / 김종철,최성현역
출판 : 녹색평론사 201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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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복지국가'를 공부하면서 내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의문 중 하나는 바로, '복지국가는 지속가능할까?'이다. 복지국가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라 할 '스웨덴 모델'을 다룬 책을 보다가 '생산부문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것이 스웨덴 복지국가를 지탱하는 데 있어서도 관건이라는 내용을 얼핏 본 이후 생긴 의문인데, 물론 지금의 내 수준에서 이 질문에 대한 어떠한 답도 내릴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어쨌든 그런 의문을 품고 있다 보니 생태, 평화 같은 과거에 (분배, 평등 같은 주제에 비해) 많은 관심을 갖지 않았던 영역에 대한 관심을 확장하게 되었는 데 그런 중에 '녹색평론'을 구독하게 되었고 이 책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아주 쉽다. 아주 평이하게 쓴 수상록 같은 느낌이라고 하면 될까? 게다가 얇기까지 한 관계로 페이지가 아주 쉽게 넘어간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메세지는 결코 간단치 않다. 저자는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는 평화나 공존과 같은 보편적인 가치이고 이는 좌우의 문제가 아닌 '상식'의 문제라고 말하지만, 이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식'에 전면적으로 도전하는 내용인 까닭에 그 어떤 좌파보다 불온하고 근본적이다.

읽는 과정은 간단한데, 읽은 후 생각하는 과정은 심오한 책이라고 소개한다면 적당할까. 기차간에서 오가며 읽었는데, 한 번 쯤은 차분하게 더 읽어야 할 책이 아닐까 싶다. 

끝으로 책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한 인용구 하나.

"백년전의 세계에서는 자급자족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지구 위에 상당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1933년의 백과사전에 쓰여있는대로, 좀처럼 "착취하기 어렵습니다". 현실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착취하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 빈곤을 세번째와 네번째 형태, 즉 착취하기 쉬운 형태로 전환시킨 것이 경제발전의 정체입니다. 세번째란 인간을 노동자로 만드는 것, 네번째는 인간을 소비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노동자나 소비자로 만드는 것이 경제발전입니다." (9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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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되려고 하면 원칙적으로 두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돈을 모으는 방법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위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습니다. 부자란 일종의 사회적인 관계, 곧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가리키는 언어입니다.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이전보다 돈을 많이 가지게 된다고 해도 사회는 풍요로워지지 않습니다. 경제용어로 말하면 그것은 단순한 인플레이션입니다."
  - C. 더글라스러미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p86

"백년전의 세계에서는 자급자족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지구 위에 상당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1933년의 백과사전에 쓰여있는대로, 좀처럼 "착취하기 어렵습니다". 현실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착취하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 빈곤을 세번째와 네번째 형태, 즉 착취하기 쉬운 형태로 전환시킨 것이 경제발전의 정체입니다. 세번째란 인간을 노동자로 만드는 것, 네번째는 인간을 소비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노동자나 소비자로 만드는 것이 경제발전입니다."
  - C. 더글라스러미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p92

"정의란 정치용업입니다. 빈부의 차이는 경제활동으로 고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빈부의 차이를 고치려고 한다면 정치활동, 즉 의논하고 정책을 결정하여, 그것을 없앨 수 있는 사회나 경제 구조로 바꾸지 않으면 안됩니다."
  - C. 더글라스러미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p93

"어떻게 하든지 매년 경제성장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시스템이면 '진짜 필요한 물건'만을 생산할 수가 없습니다. 필요없는 물건을 생산하여, 그것을 광고로 어떻게든 팔아가지 않으면 성장은 계속되지 않습니다."
  - C. 더글라스러미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p110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은 사회에 여가, 자유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가가 없으면 민주주의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의논을 하고, 합의를 하고, 정치에 참가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한 틈이 없으면 정치는 불가능합니다. 여가에 사람은 정치 외에도 문화를 만들고, 예술을 만들고, 철학을 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습니다. 정치적으로 말하면, 그러한 근무시간 이외의 시간이 있어야 비로소 사람들이 모여서 자유로운 공공영역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 그러한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 C. 더글라스러미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p137

"경제제도를 민주화하는 과정의 첫걸음은, 경제적인 결정이라고 말해지는 정책결정의 대부분이 실은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 결정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 C. 더글라스러미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p146

"20세기, 특히 20세기 후반에는 제2장과 3장에서 소개했듯이 정치·경제론이 세계적인 패권을 잡고, '상식'이 됐습니다. '정당한 폭력'을 독점하는 나라를 만들고, 안전과 질서를 보장받습니다. 그리고 국가를 단위로 경쟁하면서 산업혁명으로부터 시작된 경제 시스템을 세계 구석구석까지 넓혀가고 있습니다. 이 과정을 1945년까지는 '제국주의'라 불렀고, 1946년경부터는 '경제발전'이라 불렀고, 현재는 '글로벌라이제이션', 즉 세계화라 부르고 있습니다."
  - C. 더글라스러미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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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자들은 늘 '대중사회와 민주정치의 평등주의적 위협'이 가하는 공포에 시달리며 살아왔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무식하고 가난한 대중에 의한 전제정치와 '계급입법'으로 귀결된 것이었다. 한편, 마르크스는 부르주아들이 민주주의가 실제로 작동하게 (그리고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도록) 놔두리라고 믿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종언을 불러올 것이라 생각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2

"20세기 초반을 거치면서 실제 현실 속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을 기존의 시장과 국가, 사회의 관계를 극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정치적 권력에 의해 조절되고 제한되며 사회적 필요에 종속되는 자본주의가 창조되었음을 의미했다. 이는 자유주의자들이 오랫동안 옹호해온 것(시장과 개인의 최대한의 자유)과도,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실현되길 바랐던 것(자본주의 철폐)과도 거리가 먼 것이었다. '역사의 종언론'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20세기의 승리자는 자유주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회민주주의였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2~13

"전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기본적 생계가 "인간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 자체의 도덕적 권리"에 의해 보장될 수 있었던 반면,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아사의 위협('굶주림이라는 경제적 채찍')이 사회적 제도들의 필요물이자, 심지어 바람직한 일부분으로 자리 잡았고 게임의 법칙이 이끄는 궁극적 유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5

"공동사회의 사람들은 모든 분열적 요인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반면, 이익사회의 사람들은 여러 통합적 요인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분열되어 있다."
  - 페르디난트 퇴니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6에서 재인용

"자유주의와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경제 중심주의와 수동성을 거부하면서, 그리고 파시즘과 민족사회주의의 폭력성을 회피하면서, 사회민주주의는 정치의 우선성과 공동체주의에 대한 믿음(경제적 힘이 아닌 정치적 힘이 역사의 동력이 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확신, 그리고 사회의 '욕구'와 '행복'은 보호되고 배양되어야 한다는 확신) 위에 세워졌으며, 사회주의의 비마르크스주의적 비전을 나타냈다. 그것은 20세기에 가장 성공적인 이데올로기이자 운동이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8

"사회민주주의는, 적어도 출발 자체가, 그 핵심에 정치의 우선성과 공동체주의에 대한 특유의 믿음을 가진,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 둘 모두에 대한 뚜렷한 대안인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의 진정한 성격을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는 그것이 탄생한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21

"이데올로기들이 이론과 실천의 연결지점에 존재한다는 것, 즉 한 발은 추상적인 사상의 영역에, 또 다른 한 발은 일상적인 정치적 현실에 디디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이데올로기는 자신의 옹호자들에게 현실에 대한 만족스러운 설명과 그에 따른 실천 방안에 대한 안내자 역할이라는 두 가지를 모두 제공하면서 이론과 현실 각각의 영역을 부드럽게 연결시켜 줄 수 있을 때 가장 큰 영향력을 갖는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23

"달리 말해 1945년 이후 사람들은 국가를 사회의 보호자로 인식하기 새작했으며, 경제적 우선순위는 종종 사회적 우선순위보다 뒷자리로 밀려났다. 그 결과 오랫동안 공존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던 것들, 즉 잘 작동하는 자본주의체제와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적 안정성 사이에 조화가 이루어졌다. 이 새로운 체제의 기초가 전통적 자유주의나 마르크스주의 교리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만한 근거는 거의 없었다. 새로운 체제가 정말도 닮았던 것은 1920년대부터 1940년대에 걸쳐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옹호했던, 그리고 (그보다는 덜하지만) 파시스트들과 민족사회주의자들이 옹호했던 원칙과 정책이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35

"사회민주주의는 정치의 우선성과 공동체주의 위에 세워졌으며, 비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고유한 이데올로기와 운동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그것은 20세기의 가장 성공적이었던 이데올로기와 운동으로서 인식되어야 한다. 그것의 원칙과 정책들은 유럽 역사상 가장 번성하고 조화로웠던 시기를 지탱했던 것이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36

"사회주의 운동을 위해 마르크스의 사상을 단순화하고 대중화하는 과정에서 엥겔스와 카우츠키는 그의 사상 가운데 결정론적이고 과학적인 부분을 강조(혹은 과장)했으며, 역사에서 경제적 힘의 우선성, 그리고 계급투쟁의 불가피성에 기반하고 있는 하나의 교리를 창조해 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42

"요컨대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들에게 역사가 그들의 편이라는 확신과, 역사를 전진시켜야 한다는 과제를 부여받은 집단이라는 정체성을 제공해,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어둡고 우울한 시기를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을 주였으며, 이후 투쟁을 위해 신생 사회주의 운동이 단합되고 강화될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48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작동시킨 힘들 없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인류의 의식적인 노력과 자유, 정의에 대한 갈망이 없다면, 또한 자본주의가 제공한 기회를 현실로 전화하려는 에너지를 통해 고무되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을 것."
  - 장 조레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57

"사회주의를 향해 가는 점진적이고 정치적인 경로에 대한 이런 믿음으로 베른슈타인은 민주주의를 '수단인 동시에 목적'으로 바라보았다. "그것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의 무기이자 이후 사회주의가 실현될 형태"라는 것이었다. 민주주의는 사회주의자들에게, "심층적이면서 단계적인 개혁을 피 흘리지 않고 실시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를 제공한다. 보통선거권과 의회 활동은 계급투쟁의 정점이자 가장 포괄적인 형태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합법적 영역 안에서 치러지는 영구적이고 유기적인 혁명이며, 근대 문명에 상응하는 문화적 발전 수준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단순히 사회주의가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로 하는 최상의 도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계급 차별의 부재, 평등, 자유와 같은 사회주의의 가장 중요한 이상들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70

"따라서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자들에게 그들이 펼치는 주장의 기반을 프롤레타리아의 독자성과 계급투쟁의 불가피성에만 두지 말고, 오히려 "공통적 인간성과 사회적 상호 의존의 인식"에 두라고 촉구했다. 베른슈타인은 당시의 사회 갈등 밑에는, 사회주의자들이 인식해야 하고 또 보호하겠다고 약속해야 하는 근본적인 공ㅇ통 이익과 선이 존재한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사회주의를 대다수 시민에게 좀 더 나은 삶에 대한 비전을 제공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하는, 근본적으로 협력적이며 공동체적인 노력의 일환으로서 제시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72

"요컨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동안 베른슈타인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교의를 폭넓게 비판했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역사 유물론과 계급투쟁을 정치의 우선성과 계급교차적 협력에 대한 신념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신념이란 자신들의 이상과 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비전으로 고무된 개인들이 함께 단결할 수 있으며, 자기 주변 세계의 모습을 점차적으로 바꿔 나가기 위해 민주국가의 권력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72

"갑작스러운 기적이 세상을 바꿔 놓을 신비의 날이 오기만을 기다릴 것인가, 혹은 매일매일 개혁에 개혁을 거듭하며 끈기 있고 완고한 노력으로 한 걸음씩 진보를 이루어 낼 것인가, 이 두 가지 방법 중 우리는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 알렉산드르 밀랑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82에서 재인용

"사회주의는 한 계급에 대한 다른 계급의 승리가 아닌, 특수 이익에 대한 일반 이익의 승리를 나타내야 한다."
  - 프란체스코 메를리노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84에서 재인용

"이로 인해 이탈리아의 사회주의 운동은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 상황에 처했다. 즉 사회주의자들이 '다른 사회주의자들을 자신의 가장 큰 적'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은 사회주의 운동의 정치적 효력을 심각히 제한하는 것이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88

"조레스도 이와(베른슈타인과) 비슷한 입장을 취했는데, 그는 사회주의자들이 "애국심을 파괴하려 할 것이 아니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베른슈타인과 유사하게 '진정한 애국심'을 옹호했다. 그것은 다른 민족들 또한 '똑같이 귀중한 인류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존중하는 동시에, 자민족이 지닌 특별한 가치와 유산을 인식하고 찬미하는 것이었다. 그런 '진정한 애국심'은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와 국제주의 사이에서 어떤 모순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며, 사회주의자들이 우익 민족주의의 파괴적 경향에 대항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00

"바우어와 레너는 민족주의가 역사 속에서 강력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고, 민족 정체성을 무시할 수 없는 '근본적이고 파괴할 수 없는 요인'으로 보게 되었다. 그들은 민족주의를 부수적 현상이라거나 지배계급의 도구라고 보는 관점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민족주의가 사회주의로의 이행과 함께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정통파의 주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들은 바로 그 정반대의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본주의로 인한 사회적 갈들과 배제를 제거함으로써 사회주의는 사실상 민족주의적 의식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01

"민주적 수정주의자들은 민주적 수단을 통해 근본적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대중의 능력을 믿었던 반면, 레닌의 수정주의는 사회주의가 혁명적 엘리트의 정치적·군사적 노력을 통해 강제될 수 있다는 견해로 역사 유물론을 대체했다. 레닌은 만약 대중을 그대로 놔둔다면 그들은 사회주의를 위해 성공적으로 싸울 의지도 능력도 발전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대신 '혁명 의식'과 조직을 획득하는 것이 혁면 정당의, 특히 그 지도자들의 과제라고 여겼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06

"일부 우파들이 일종의 비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를 주창하고 있던 것과 동시에, 일부 좌파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주의의 혁명적 잠재력에 대해 긍정적 반응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중략) ... 민주주의적 수정주의자들과는 달리 이들은 자유주의와 그것이 대표하는 모든 것에 대해 오직 혐오감만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자유주의와 그것이 대표하는 모든 것에 대해 오직 혐오감만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베른슈타인의 민주적 경로를 거부했고, 사회주의는 오직 '현존하는 사물의 질서를 파괴하는 활기찬 전투'를 통해서만 출현할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수정주의는 '혁명적'이라고 불렸다.... (중략) ... 이런 저런 이유로 세기말은 '민족적' 사회주의의 탄생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그것의 모델과 산파 역할을 모두 해낸 이가 바로 조르주 소렐이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08

"그(조르주 소렐)에게 19세기 부르주아 자유주의는 그 자체로 유럽의 현대적 불안과 사회적 질병의 원천니었다. 그리고 그는 민주주의를 경멸했는데 언젠가는 반드시 그것이 사회주의자들로부터 혁명적 열정을 강탈해 갈 것이라고 믿었다.... (중략) ... 소렐은 이 파국을 불러오기 위해서는 지속적이고 아마도 '폭력적인' 투쟁이 필요할 것이라고 믿었다. 우선 그는 그런 투쟁에 반드시 필요한 혁명적 열정은 마르크스주의의 도독적 근원을 다시 강조해 불러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점점 환명을 느꼈고, 급진적 행동에 동기를 부여할만한 것을 찾아 다른 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는 마침내 신화가 지닌 동기부여의 능력을 찾아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14

"사실 그(조르주 소렐)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지배 질서가 프롤레타리아들을 '길들이고' 노동운동을 탈급진화하는 데 성공했다고 믿었다. 이런 관찰 결과 소렐은, 민주적 수정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에 대한 배타적 관심을 포기하게 되었다. 하지만 노동계급 중심 전략을 포기한 민주적 수정주의자들이 계급 교차적 협력과 타협의 가능성을 강조하게 된 반면, 소렐은 활성화된 대중 민족주의의 혁명적 가능성을 받아들이면서 좌파와 우파 각각의 반민주 세력들을 결합하도록 부추기게 되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15

"점점 더 많은 혁명적 좌파와 민족주의적 우파들이 서로의 운동 간에 중요한 유사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전자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그 제도들, 그리고 그 지지자들에게서 환멸을 느끼고는 민족주의가 갖는 동원과 혁명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후자는 리소르지멘토 이후 체제의 실패와 전통적 부르주아 정당들의 무능력에 환멸을 느끼고는 생디칼리슴과 혁명적 수정주의의 자유의지론적이며 혁명적인 정신, 그리고 이탈리아 노동자들에게 민족주의의 호소력을 넓힐 수 있는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소렐의 사상은 이 집단들이 공통의 기반을 발견할 수 있는 하나의 교리를 제공해 발생 단계에 있던 이런 연합의 성장을 더욱 촉진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26

"이탈리아나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세기말 점점 그 수가 증가하고 있던 독일의 민족주의자들은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를 부르짖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에는 반대하지만 자본주의에 가혹할 정도로 비판적이었으며, 근대사회를 오렴시킨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또한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우파 인물들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종합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일부 좌파들 또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33

"독일이 타락한 근본적인 원인은 근대성 그 자체, 즉 전통적 사회와 전통적 믿음을 파괴한 새롭고 폭력적인 힘들의 복합체 때문이다. 하지만 좀 더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유대인들 때문이다."
  - 율리우스 랑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39에서 재인용

"그(베르너 좀바르트)는 경제학이 정치적·사회적 요인들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는 공동사회의 필요에 봉사하고, 공적 이익은 사적 이익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와 그의 통료들은 이 목표가 자본주의를 파괴하지 않고도, 그저 자본주의를 통제하고 극단적이고 '유대인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면 달성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41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자들의 성공이 젊은 시절의 아돌프 히틀러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는 사실은 반박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루에거는 히틀러와는 결정적인 면에서 달랐다. 그는 법의 지배를 일반적으로 존중했고, 그의 '미끼로서의 유대인'은 '주로 정치적 행위' 차원에 국한되었을 뿐, 광기에 찬 인종주의적 사고를 반영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루에거가 만들어 낸 민족주의, 사회주의, 포퓰리즘의 혼합체는 미래 세대가 그 위에서 가장 끔찍한 결과를 만들어 낼 하나의 모델을 제공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46

"전간기가 끝나 갈 무렵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이론적으로는 고갈되었으며 정치적으로는 부적절하기에 완전히 새로운 좌파적 비전을 수용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굳게 확신했다. 그 새로운 비전은 정통 교리를 수리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한 세대 전 수정주의의 선구자들이 제시했던 주제들, 즉 계급 교차적 협력의 중요성과 정치의 우선성에 관심을 돌렸다. 이제 그들은 근본적 새 출발을 알리는 이런 원칙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었고, 분명하고 생생한 정책 의제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 의제들은 공동체주의적·민족주의적 호소와 '국민정당' 전략, 그리고 자본주의를 통제하거나 변화시키는 도구로서 국가를 이용하고자 하는 의지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그 결과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단절했으며, 사회민주주의라고 부를 만한 이념이 출현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49

"우리는 자유의지론을 거부한다. 아나키즘적인 것이든 개혁주의적인 것이든 간에 말이다. 우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역사를 해석할 뿐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또한 우리는 사건과 사물의 논리에 따라 적절한 시기에 행동을 취한다."
  - 자친토 메노티 세라티(이탈리아 사회당)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57에서 재인용

"사회주의는 그 근본적 의미와 결과로 판단할 때, 현실에서 실행되고 있는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온 자유를 의미한다. 사회주의는 이렇게 말한다. 양심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에 대한 추상적 인식은, 비록 그것이 정치 이론의 발전에 결정적 계기가 되더라도, 출생과 환경에 따라 도덕적·물질적으로 궁핍한 삶을 강요당하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이 그 의미를 인식하거나 활용할 가능성을 갖지 못한다면 별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최소한의 경제적 자율성이 인정되거나 보호되지 않을 때, 절박한 물질적 궁핍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핼 때, 개인에게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 카를로 로셀리(이탈리아 사회당)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65에서 재인용

"『노동의 계획』의 변화 전략에 관해 강조할 만한 점을 여러가지다. 첫번째는 그것이 "(국가가) 소유권보다 통제력을 손에 넣는 것이 더욱 종요하다"는 신념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더는 (인기없고 비현실적이며 비민주적인) 국유화와 재산 몰수를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국가는 덜 직접적이고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경제 발전을 이끌 수 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이와 관련된 것으로, 『노동의 계획』이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의 파괴에 관한 오랜 수사적 주장으로부터 분리시켰다는 점이다. 드8 망은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우리의 투쟁은 자본주의 전체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형태의 초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것이다. 또한 프롤레타리아나 비프롤레타리아 할 것 없이 모든 노동계급의 공동의 적인 자본주의 체제의 일부 경향득, 즉 독점 자본주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금융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것이다." 따라서 활기 넘치는 사적 부문은 드 망의 사회주의적 미래 속에 계속 존재할 것이다. 사실 그는 생산성과 부의 지속적인 증가를 보장하기 위해 사적 부문이 "확대되고 강화되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81

"수정주의적 좌파와 민족주의적·사회주의적 우파 사이의 현저한 유사점들을 떠올린다면 데아와 드 망 같은 인물들의 정치적 전향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상식에 반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보았듯이 둘 다 대체적으로 정치의 우선성과 일종의 공동체주의를 지지했고, 이제 비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가 필요하다는 점에 동의했다.... (중략) ... 전간기 동안 사회주의자·파시스트·민족사회주의자들은 극단적 자유 시장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를 피하면서 경제적으로 '제3의 길'을 옹호했다. 국가가 자본주의를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통제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 '국민', '민족', '공동선'에 호소했다. 또한 계급 교차 연합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고, 진정한 '국민정당'으로서의 지위를 추구했다. 하지만 그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했다. 그것은 파시즘과 나치즘 아래서는 이런 프로그램들을 위한 대가로 민주주의의 파괴, 시민적 자유와 인권의 방기가 동반되어야 했다는 점이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90

"요컨데 파시즘은 자신의 경쟁자들과 차별화된 주장, 강령, 지지 기반을 가진 근대적 대중 정당으로 변신을 완료한 것이다. 좌파와 우파 어느 쪽에도 쉽게 들어맞지 않는 수사와 정책은 현재의 자유주의적 체제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거나 그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거의 모든 집단에게 기대감을 제공했다. 파시스트들은 '볼셰비즘'에 대한 최대의 적수이자, 사유재산에 대한 최고의 보호자를 자임했다. 그러면서도 재산소유의 '사회적 의무'를 강조했고, 집단적 선을 역설했으며, 부재지주들과 '착취적' 자본가들을 비난했다. 자유주의적 지배 질서와 자본주의의 '과잉'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사유재산에 대한 헌신과 모든 이탈리아 국민을 대표한다는 주장과 연계시킬 수 있었던 능력은 파시즘을 이탈리아 최초의 진정한 '국민정당'으로 만들어 주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196

"한 파시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국가의 총체적인 경제적 이익보다 상위에 있는 그 어떤 경제적 이익도 존재할 수 없다. 국가의 통제와 규제 아래 들어오지 않는 그 어떤 개인적·경제적 자기 결정권도 존재할 수 없다. 국가가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민족의 여러 계급들 간의 그 어떤 관계도 용납되지 않는다." 이런 주장 가운데 그 어느 것도 파시스트들이 자본주의나 사유재산을 거부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200

"한편 앞 장에서 말했던 것처럼 사민등은 팔짱을 낀 채 사실상 사태를 수수방관했다. 계급 교차적 협력 전략을 거부했던 사민당은 독일 농민들과 중간계급들의 커져 가는 절망감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이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전간기 경제정책과 관련하여 실행 가능한 '사회주의적' 전략을 내놓는 데 실패함으로써 (그리고 WTB 계획 같은, 대공황에 대한 비정통적 해결책을 거부함으로써) 사민당은 고장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절실히 원하던 유권자들 앞에 내놓을 만한 것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이런 공백 속으로 파고들어 온 것이 나치당이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212

"나치당 경제 강령의 근본적인 사상은 매우 명쾌하다. 즉 권위의 사상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노력으로 획득한 재산을 스스로 소유하길 바란다. 하지만 제3제국은 항상 그 재산의 소유자를 통제할 권리를 보유할 것이다."
  - 아돌프 히틀러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217에서 재인용

"나치는 전례 없는 폭력과 야만성을 보여 준 정부를 만들고 운영했을 뿐 아니라, 독일의 국가-사회-경제 사이의 관계를 근본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해 냈다. 가장 명백한 것은 그들이 경제 분야에서 자유방임적 자유주의와 소련식 공산주의 모두를 거부하며 '진정한 혁명'을 일구었다는 사실이다. 그 대신 나치 체제는 정치의 우선성, 즉 국가와 그 지도자가 경제를 포함한 삶의 모든 영역에 간섭할 권리를 갖는다는 주장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치는 그 주장을 정말로 실행에 옮겼다. 사회경제적 행위자들에게 지배력을 행사하고 수많은 간접적인 조치들을 통해 경제 발전의 방향을 지시함으로써 말이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221

"히틀러가 독일 민중으로부터 진정한 지지를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대다수 독일인들이 민족사회주의를 무엇보다도 향상된 삶과 민족적 자부심, 그리고 공동체적 정서와 관련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지, 그것의 인종주의와 폭력, 폭정을 지지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221

"파시스트와 민족사회주의자들이 옹호했던 여러 결정적인 '혁신들'('국민정당' 개념과 자본주의를 통제하되 파괴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경제 질서 같은 것들)은 유럽 전후 체제의 중심적인 특징이 되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226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스웨덴 정치체제의 민주화는 수단으로서뿐만 아니라 하나의 목적으로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유럽 다른 지역의 사회주의 정당들과는 달리 사민당은 민주주의를 '부르주아적' 체제로 매도하는 경향으로부터 일찍이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대신 민주주의는 사회주의 정당의 정체성과 목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로 여겨졌다. 즉 사회주의가 도래하는 날 그것이 취할 형태가 바로 민주주의라는 것이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232

"(스웨덴) 사민당은 사회주의가 경제적 발전으로부터 출현할 것이라는 정통 교리의 주장을, 사회주의자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를 재구성하기 위해 정치적 권력을 사용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확신으로 바꿔 놓았다. 그것이야말로 전형적인 민주적 수정주의의 방식이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234

"계급투쟁은 육체 노동자 집단을 넘어서는 좀 더 포괄적인 연대로 향한 문을 닫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의 목표를 계급투쟁을 통해 우리 민족 전체에 걸친 연대에 도달하고, 또 그것을 통해 모든 인간을 포함하는 연대에 도달하는 것이다."
  - 얄마르 브란팅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235에서 재인용

"대공황이 스웨덴을 덮쳤을 때 사민당은 이미 국민의 가정이라는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었고,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약자들', '억압당한 사람들', 그리고 좀 더 일반적으로는 '국민'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당의 열망을 강조하는 전략에 헌신하고 있었는데, 이는 적어도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파시즘 운동과 민족사회주의 운동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했던 자작농들과 소작농들의 공포를 완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와 더불어 사민당은 점점 더 계급보다는 국미닝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주장을 조잭해 나갔으며, 진정한 '국민정당'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분명히 드러냈다. 이는 공동체주의적·민족주의적 호소에 대한 우파의 독점을 더욱 약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248~249

"그 어떤 나라도 국제수지를 위해 심각한 실업이나 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지 않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리하여 국제수지는 이제 한 나라의 정책적 목표일 뿐, 국제적 조건들에 의해 강요될 수는 없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266

"성숙한 복지국가의 발전과 함께 정부는 자본주의 이전 시대에 가족과 지역공동체가 해왔던 일, 즉 자력으로 생계를 꾸리기 어려운 이들을 돌보는 일을 대규모이자 비인격적 방식으로 담당했다. 따라서 복지국가는 자유주의적 '이익사회'와의 중요한 결별을, 그리고 좀 더 공동체주의적인 '공동사회'를 향한 진보를 나타냈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269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민주주의적 원리와 정책은 전 유럽에 걸쳐 폭넓게 받아들여졌으며 유럽이 자랑하는 전후 안정의 토대가 되었다. 특히 정치의 우선성과 공동체주의는 자본주의의 가혹한 영향으로부터 개인과 공동체를 보호하는 정책들로, 그리고 사회적 연대와 안정에 대한 새로운 강조로 이어졌다. 달리 말해 전후 질서는 20세기 초반에 걸쳐 국가-시장-사회 간에 존재해 왔던 관계를 크게 변화시켰던 것이다. 이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바라 왔던 것(자본주의 철폐)과는 물론, 자유주의자들이 오랫동안 옹호해 왔던 것(시장과 개인적 자유를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규제하는 것)과도 거리가 먼 것이었다.... (중략)... 이 체제를 근본적으로 사회민주주의적인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또한 사회주의를 고유의 색깔을 지닌 이데올로기이자 독자적인 운동으로 봐야 할 뿐만 아니라, 20세기의 가장 성공적인 이데올로기이자 운동으로 봐야 한다. 그것의 원리와 정책은 유럽 역사상 가장 번영하고 조화로웠던 시기를 뒷받침했다. 이제껏 공존할 수 없다고 여겨 온 것들, 즉 잘 작동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적 안정을 조화시킴으로써 말이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299

"사민주의 운동의 오랜 특징이, 성장을 이끌어 내기 위해 시장을 이용하면서 그것이 초래하는 부수적 피해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를 이용하고자 하는 욕구, 그리고 개별 구성원들이나 특수 이익에 봉사하기보다는 전체 공동체를 대표해 진심으로 노력하고자 하는 의지였다는 사실 말이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316

"자본주의가 변화하는 만큼, 그것을 관리하기 위한 사회민주주의의 접근 방식도 변화해야 한다. 특히 민족구가(사회민주주의자들이 자본주의를 관리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의존해 왔던 도구)가 자율성과 통제력을 상실한 정도에 비례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제 국제적 영역으로 관심을 돌려야 한다."
  -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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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의 탄생
국내도서>사회과학
저자 : 장석준
출판 : 책세상 2011.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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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가 저물아가는 시점에서 다음 시대를 준비할 때, 그 시대의 등장이 애초에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살펴보는 것은 의미깊다. 인간이 미래를 조망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방법 중 하나가 '역사로부터의 교훈'이기 때문이다.

이 책 '신자유주의의 탄생'은 신자유주의의 몰락 내지는 최소한 위기의 시대에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등장했는가를 이야기한다. 신자유주의의 등장 시점에 '좌파'들은 무엇을 했던가, 신자유주의는 과연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는가, 신자유주의의 위기에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이 책이 상세하게 보여주는 '구조개혁 좌파'의 사례들, 칠레 아옌데 정부, 영국 노동장 정부, 프랑스 미테랑 정부의 예들은 케인지언 복지국가의 좌절 앞에서 좌파 정치세력들은 어떤 것을 준비하였으며, 어떻게 실패하였는지, 그리고 남은 교훈인지를 잘 보여준다. 물론 현 시대의 과제, 특히 한국이라는 지구적 자본주의의 뒤틀린 변종 주변국의 과제를 이런 예들이 보여줄 수는 없지만, 지구적 보편성은 한국적 특수성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기에 이 책이 알려주는 교훈은 소중하다.

자신이 '좌빨'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니 최소한 조중동의 기준으로볼 때 '좌빨'에 해당하는 사람이라면 한 벌 읽어볼만한 책. 사회와 역사를 다룬 책이지만, 무협지 보듯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순식간에 완독했다. 올해 읽은 12권의 책 중 손꼽을만한 재미+가치를 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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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의 사상과 이론
국내도서>전공도서/대학교재
저자 : 라메쉬미쉬라 / 남찬섭역
출판 : 한울아카데미 2011.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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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지국가를 보는 시각을 다루는 책으로 내가 최근에 읽은 미쉬라의 <<복지국가의 사상과 이론>>은 복지국가에 대한 여러 관점을 중립적 시각에서 다룬 후 현실에서의 복지국가는 어떤 모습인지를 더듬어보는 책이었다.(
2012/02/14 - [감상] - 복지국가의 사상과 이론 (라메쉬 미쉬라 저 / 남찬섭 역 / 한울아카데미) 참조
) 그 책이 다룬 관점들은 복지행정학 관점, 기술결정론(수렴론) 관점, 기능주의 관점,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관점이었는데, 저자는 마르크스주의 관점을 다루며 마르크스주의적 접근은 체계론적 분석집단행위적 분석을 결합할 수 있다는 것이 (기능주의와 비교할 때) 장점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집단행위적 시각을 포기하고 기능주의적(, 체계론적) 분석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며 아쉬움을 표현한다. 오늘 소개할 이안 고프의 이 책, <<복지국가의 정치경제학>>미쉬라의 아쉬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의 대답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물론 고프의 시각이 마르크스주의자 일반의 시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실제로 고프는 이윤율 저하 경향성의 법칙이라든가 공황 분석과 같은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관점을 결하고 있다는 부분에서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며, 이에 대해 역자는 고프가 신리카도주의적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역자후기 참조.) 고프는 마르크스주의 시각에서 미쉬라가 아쉬워한 두 부분을 모두 충분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이 조망하는 복지국가의 키워드를 하나만 꼽으라면 모순혹은 양면성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복지국가의 두 얼굴


마르크스주의 시각에서 복지국가를 바라보며 저자는 복지국가가 양면성을 가진 체계임을 강조한다. 복지국가는 사회복지를 향상시키고 시장의 횡포에 대항하는측면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인간을 억압/규제하고 자본주의 경제의 요구에 적응시키는측면도 가지고 있다. 사실 자본주의를 소위 시장 만능주의라고 하는 체제로 파악할 때 시장 질서에 따른 분배가 아닌 다른 방식의 분배(사회복지를 통한 분배, 부분적으로나마 욕구에 따른 분배)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모순인데,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자체로부터 기인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마르크스가 가치법칙이라고 말한 비정한 시장력의 힘으로 모든 개인이 규율 되는 체제인데, 이 안에서 개개의 노동자는 시장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하나의 상품이 되며, 지배계급은 마치 자본을 축적하도록 강요된 것처럼 탐욕스럽게 자본의 확장을 위해 움직인다. 당연히 자본주의에서는 재화나 서비스의 분배 과정 또한 이와 같은 시장 질서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인간을 시장의 힘에만 맡겨두게 되면 자본주의 자체의 지속성이 담보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노령, 산재, 실업, 가족의 붕괴와 같은 자본주의 산업사회가 초래한 위험들은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상품인 노동력을 재생산하는데 심각한 장애가 된다. 따라서 사회는 어느 정도가 되었든 시장질서에서 벗어난 욕구에 따른분배 방식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이것이 제도화 된 것이 복지국가이다. 결국 자본주의는 그 자신의 유지를 위해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체제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 설명은 하나의 중요한 요소를 결하고 있다. 바로 복지국가의 형성에서 계급갈등의 역할이 그것이다. 이 부분은 뒤에 살펴보도록 하자.) 그러나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적인 것자본주의적이지 않은 것은 충돌하게 마련이다. 다시 말하면, 복지국가가 성장하면 할수록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위협하게 된다는 말이다.

 

복지국가의 기원 계급갈등과 체제의 요구

복지국가가 자본주의를 어떻게 위협하게 되는 지를 다루기에 앞서서 복지국가라는 체제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위의 설명에서 배제되었던 계급갈등의 역할에서 출발하자. 자본주의는 그 체제의 특성상 자본의 이해와 대립되는 이해를 가진 계급 즉 노동 계급을 대량으로 발생시키게 된다. 노동자 계급은 대규모 공정이라는 일관작업의 환경 하에서 집합적 성격을 갖는 노동을 통해 조직화 역량을 갖추어 나가게 되며, ‘착취라는 자본주의의 본질로 인해 숙명적으로 자본가와의 계급대립을 발생시키게 된다. 더구나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중요한 특성, 즉 선거에 기반한 민주주의라는 특성은 (물론 이 또한 공짜로 주어진 것은 아니다. 보편적인 선거권 확립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자유주의 좌파 세력과 연대하여 싸웠는지는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대의제 구조 내에 노동자의 대표를 등장시키기까지 한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노동 계급을 자본주의 체제 내로 포섭하지 않으면 혁명이라는 – 1789년 프랑스 혁명 후 자코뱅 독재를 목격한 이래 모든 부르주아에게는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공포인 파국을 가져오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노동계급을 자본주의 체계 내로 포섭해야 하는데, 바로 이 포섭의 방법이 바로 복지국가이다. 어떤 경우는 노동 계급의 압력에 의해 또 어떤 경우는 예상되는 노동 계급의 압력을 사전에 약화시키기 위해 사회정책을 도입하는 식의 다양성은 있지만, 어쨌든 노동 계급의 계급투쟁에 대한 대응이라는 것은 대부분 국가에서 복지국가를 향한 움직임이 시작된 중요한 원인이다.

       복지국가는 분명 '부분적으로는' 조직화된 노동운동으로 인한 계급투쟁의 성과이다.

그러나 복지국가가 순수하게 조직화된 노동운동의 성과물인 것만은 아니다. 개별 자본가들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는 안돼!’라고 외친 한국의 한 자본가를 기억하라. 그 자본가의 눈에 흙이 들어간 지 오래지만 그 독점자본의 사업장에는 아직도 노조가 제대로 없다.) 자본가 전체의 이익을 생각할 때는 노동조합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인정과 복지정책의 어느 정도의 시행은 필수적이다. 이는 비단 복지라는 탈출구가 없다면 혁명을 불러올 수 있다는 공포 때문만은 아니다. 자유방임주의가 득세하던 19세기 영국의 공장 현실은 비참함 그 이상이었다. 생산비를 절감하기 위한 자본가들의 노력은 생존선 이하의 임금을 받으며 하루 12시간이 넘는 노동에 시달리는 아동들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었고, 이는 자본주의의 가장 중대한 투입요소인 노동의 재생산을 방해하는 지경에 이르러 자본가 전반의 이익 기반을 훼손할 정도가 되었다. , 개별 자본가의 이익이 무제한 관철되도록 놔두었을 때 전체 자본가의 이익기반은 파괴되고 결국 이는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을 위태롭게 하는 결과를 낳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공장법과 같은 최소한의 개입는 노동운동이 없더라도 자본주의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결국 미쉬라의 말처럼 계급갈등체계특성은 모두 자유방임주의국가를 복지국가로 이끄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까지 복지국가로 움직일 것인가?’를 놓고 자본과 노동은 또 한 번 힘겨루기를 해야만 하겠지만.

 

국가 자본의 이익 실현과 상대적 자율성

이 설명에서 개별 자본가의 이익이 아닌 전체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구가 바로 국가이다. 사실 국가는 자본주의의 형성에서부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수십 년간 신자유주의의 세례를 받은 결과 우리는 흔히 시장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이고 규제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하지만 사실 시장경제의 출발은 조금도 자연스럽지 않았다. 시장경제는 이른바 고전경제학의 투입요소인 토지, 노동, 자본이 시장에서 제한 없이 거래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이전의 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그 때의 사람들은 수많은 공유지를 가지고 집산적 생산을 하고 있었으며, 공동체는 개개인에 대한 일정한 자유의 제약보호기능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었다. (바람직한 경우를 보여주는 예는 아니지만, 중세의 농노제를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농노제 하에서 농노는 거주이전의 자유를 비롯한 갖가지 자유를 제한 받고 있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 어떤 이유로 인해서든 생존에 위협을 받게 되었을 때 영주로부터 최소한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장치들은 모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현에 장애일 뿐이었고 따라서 해체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역할을 수행한 것이 국가 , 정치권력이었다. 자본주의는 자연스럽게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이전 사회를 권력의 힘으로 폭력적으로 해체하며 등장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유를 가질 수 있었다. 비록 못 가진 사람에게 그 자유는 단지 굶을 자유일 뿐이었지만. 그리고 그 자유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거래에 의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형성의 중요한 근간이 된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일단 형성되게 되면 착취가 경제체제 내에서 자동적으로 실현된다는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잉여가치의 수탈은 의식적인 강제 없이도 시장기구의 힘으로 자연스럽게이루어진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경제정치로부터 분리하고, ‘사적인 것공적인 것과는 다른 것으로 취급하게 되는 상태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분리된정치는 분리된 국가구조’,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 국가가 된다. 물론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주어진다. 만약 국가가 이 범주를 넘으려고 할 때 자본은 보다 유망한 자본축적의 중심지로 이동하게 되고, 이는 (적어도 단기적인, 그러나 심각한) 경제적 난관으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에 국가는 (혁명을 일으키는 상황이 아닌 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범위 내에서 움직인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지구적차원의 체제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구조적 속박이며, 국가의 자율성이 상대적인 이유이다.

그렇다면 상대적 자율성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위에서 설명한대로 국가는 상대적 자율성을 갖기 때문에 개별 자본의 단기적 이익이 아닌 전체 자본의 중/장기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 , 아무리 유력 자본가가 내 눈이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돼!’라고 외치더라도 노조의 존재가 자본주의 전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면 노조를 허용하는 정책이나 제도를 시행할 수 있는 것이 국가가 가진 상대적 자율성인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은 본질적으로 한계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피지배 계급에게 국가는 일정한 속박 내에서나마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들을 개선할 수 있는 중요한 가능성이 되며, 그 결과가 바로 지난 세기 자본주의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복지국가이다.

 

복지국가는 어떻게 위협이 되는가?

자본주의와 복지국가가 어떻게 결합되는가에 비하면, 복지국가가 어떻게 자본주의의 위협이 되는가(다시 말하면, ‘복지국가의 위기는 어떻게 도래하는가?)에 대한 저자의 논의는 빈약하다. 논의가 타당성이 약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양적으로 빈약하다는 말이다. 오히려 저자는 위기의 진짜 원인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보다는 사회지출의 증가를 70년대 경제위기의 진정한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이 왜 불완전한가?’에 대한 논의에 더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다. 저자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이른바 복지국가가 생산성 저하를 초래한다.’는 주장은 이렇다. 경제에는 시장부문비시장부문이 있는데 시장부문은 시장판매를 위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모든 경제적 활동으로 이루어지며, 비시장부문은 그 외의 것들, , 국방, NHS (국가 건강 서비스, 이 장에서의 모든 논의는 영국을 예로 들어 이루어지고 있다.) 등 주로 국가/공공 부문의 활동들로 구성된다. 이 중 국가 전체의 소비재, 투자재, 수출재 등의 수요총량을 공급하는 것은 시장부문이며, 따라서 시장부문이야말로 경제에서 유일하게 생산적인부문이다. 따라서 비시장부문에서 일하는 비생산적 노동자들의 소득은 생산적 부문이 생산한 시장부문생산물의 구입을 위해서만 지출될 수 있다. 그 결과로 비생산적부문의 국가고용 증대는 시장부문 산출의 몫을 축소시킴과 동시에 시장부문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킨다. 또한 국가지출의 증대는 시장부문에 대한 조세부담의 증대를 의미하며, 이는 결국 시장부문의 이윤에 의해 부담된다. 결국 복지국가가 초래한 국가와 공공부문의 확대는 ① (생산적인) 시장부문으로 가야 할 노동력을 (비생산적인) 비시장부문으로 돌리고, ② 시장부문의 산출부담을 증가시키며, ③ 조세부담으로 시장부문의 이윤을 축소시키는 3중의 부담을 시장부문에 전가하는 방식으로 산업기반을 약화시키고, 저성장과 무역적자의 원인이 된다.

    복지국가에 조종을 울린 '철의 여인' 마가렛 데처. 메릴스트립의 싱크로율이 후덜덜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의 파국을 이야기하는 이 시기에 왜 하필 그녀가 영화화된 걸까? 

저자는 복지국가를 저성장의 원인으로 몰아세우는 이런 주장이 타당하지 않음을 여러 각도에서 논증한다. 첫째, 비시장부문의 활동이 생산하는 사회적 임금집합적 소비는 그 자체가 생산적이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노동력을 재생산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를 공급하게 됨으로써 시장부문에서 시장임금으로 지급되어야 할 비용을 감소시키므로 비시장부문의 모든 활동이 시장부분의 이윤을 감소시키는 형태를 결과한다는 분석은 옳지 않다. 둘째, 예를 들어 NHS와 같은 필수 서비스가 국가에서 운영될 경우 민간에서 운영되는 것과 달리 소비자가 NHS에 지급할 비용에는 이윤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는 소비자의 후생을 증진시키거나, (만약 시장임금이 이와 같은 부분을 반영하여 낮아지거나 덜 상승하는 식으로 반응할 경우) 시장부문의 이윤을 증가시키게 된다. 이는 시장부문에서 NHS를 공급했을 때의 이윤과 같으므로 이윤의 총량은 같지만 (NHS를 공급하는 자본가가 없기 때문에 사회의 전체 자본가 수가 감소함으로써) 이윤율을 오히려 더 높아지는 결과가 된다. 셋째, 국가가 공급하는 사회서비스는 재생산적인 것 (예를 들면 교육, 보건 같은)비생산적인 것 (주로 사회통제를 담당하는 서비스, 예를 들면 군대, 경찰과 같은)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중 재생산적인 것은 장기적으로 시장부분의 생산 증대에 기여하게 되며, 따라서 이 부분의 비중을 높일수록 사회서비스는 그 자체로 생산적일 수 있다.

그렇다면 저자가 생각하는 1970년대 복지국가의 위기의 본질은 무엇일까? 저자는 복지국가의 위기는 전후 계속되어온 장기호황자체에서 싹튼 것이라고 말한다. , 전후의 경제적 호황은 산업예비군을 고갈시켜 노동운동의 힘을 강화시켰고 강력해진 노동운동은 임금을 상승시켜 인플레이션 압력을 증가시켰다. 한 편으로 유럽과 일본의 선진국가들은 미국의 기술수준을 따라잡음으로써 미국 자본의 경쟁을 증대시켰고, 이는 미국 자본의 이윤압박을 증가시켜 미국의 헤게모니 하의 국제질서라는 기존의 국제적 축적체제를 뒤흔들었다. 한편으로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국가지출은 증대했는데 이에 대한 재원조달시도는 다시금 인플레이션 압박을 증가시키게 된다. 결국 불황에 대처하는 국가지출확대라는 케인즈주의 경제학의 대응책은 인플레이션이라는 암초를 만나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었고 이것이 위기의 본질이다. , ‘복지국가는 위기의 한 측면일 뿐이지 이것이 위기의 중요한 원인도, 결과도 아니라는 것이다.

 

나가며. 복지국가의 미래는?

이와 같이 복지국가의 본질과 기원, 그리고 위기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고찰을 마친 저자는 위기에 봉착한 복지국가의 미래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저자는 후기에서 복지국가는 자본주의의 피조물임과 동시에 자본주의 속의 사회주의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한 번 복지국가의 양면성이다.) 그리고 복지정책이 가진 긍정적인 측면들을 보호하고 확대함과 동시에 복지정책의 부정적 측면들은 노출시켜 척결해야 한다는 (공자님 말씀 같은) 교훈을 던지며 글을 마무리한다. ‘복지자본주의에서 복지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바란다는, (‘어떻게가 빠져 있기에) 다소 갑작스러운 문장을 끝으로. 결국 복지국가의 과거와 현재를 일관성 있게 조망한 저자로서도 복지국가의 미래는 말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이 책이 쓰여진 시점부터 20여 년을 더 살아온 나로서는 당시의 저자가 몰랐던 복지국가의 미래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다. 70년대를 거치며 복지국가는 저자가 애써 증명하려 했던 바와는 달리 경제위기의 주범이자 비효율의 상징으로 몰렸고, 그 결과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좌파조차 (기존의 복지국가와 자유방임주의 사이의) 3의 길을 외치며 사실상 신자유주의의 조타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되었다. 사실 70년대의 위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다. 저자도 지적한 것처럼 노동운동의 강화와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 압박은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국가의 비대함과 그로 인한 비효율은 신자유주의 진영에서 주장한 것과는 달리 정말 위기의 원인이었는지 잘 밝혀지지 않은 것 같다. 한편 신자유주의 진영에서는 은폐했으며, 저자도 (적어도 이 책에서는) 다루지 않은 위기의 또 하나의 측면이었던 자본의 독점자본화는, 위기의 원인으로 주목 받지 않았던 덕분에 그 후 이십년동안 신자유주의의 시대를 거치며 더욱 증폭되어 오늘날 또 다른 위기의 원인이 되고 있다. (1970년대 인플레이션 압박은 노동의 임금상승도 있지만, 독점자본화에 따라 가격의 결정이 시장이 아닌 자본에 의해 이루어짐으로써 생산비 상승이나 임금인상이 이윤을 잠식하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가격의 상승으로 이어졌다는 측면도 있다. 또한 산업기반 약화의 원인은 신자유주의의 주장대로 국가의 비대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업자본이 덩치를 키우며 초국적 금융자본화된 것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복지국가는 무엇인가? 지난 30년 간 지구적 자본주의를 운영한 신자유주의가 실패했으니 이제 다시 복지국가로 돌아가면 되는 것일까? 30년 전의 경제위기를 몰고왔던 원인들은 해결되었는가? 복지 자본주의의 전성기를 열었던 지속적인 생산의 증대는 과연 돌아올 수 있는 것일까?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으로의 이행이라는 산업 조건의 변화는 어떠한가? 인구구조의 변화와 환경의 파괴, 그리고 석유의 고갈이라는 잠재적 위협들은 복지국가와 어떻게 어울릴 수 있을까? 2008년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건제한 초국적 금융자본은 과연 복지국가로의 회귀를 용인할까?

이안 고프 같은 이도 복지국가의 미래를 조망하지 못했는데 내가 이런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을 리 없다. 다만 한 가지만 이야기하고 싶다. 70년대 케인즈주의 복지국가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 마땅히 이에 대한 대안은 시대적 변화를 담은 새로운 비전이었어야 했다. 하지만 선택된 비전은 고전적 자유방임주의의 재판일 뿐인 신자유주의였고, 결국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낳았을 뿐이었다. 또 다른 위기에 봉착한 지금, 어떤 이유에서든 30년 전 폐기되었던 체제를 다시 들고 나오는 것인(물론 적어도 복지국가의 30년의 신자유주의의 30년 같은 야만의 세월은 아니었으니 좀 나을 수는 있어도) 그리 현명한 대안이 아닐지도 모른다. 고프의 말처럼 복지국가의 긍정적 측면을 담되, 새로운 시대의 질서가 될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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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국민 국가가 생활 세계와 지구 질서 사이에서 이 두 층위를 매개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데 주목했다. 국민국가는, 1848년 혁명 당시 프랑스 노동자들이 보여준 것처럼, 생활 세계로부터 출발한 좌파정치가 도전해볼 만한 현실적 목표로 다가왔다. 만약 노동자 세력이 국민국가를 장악한다면, 아마도 이것은 진정한 전 지구적 변혁을 향한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국민 국가가 자본주의 지구 질서의 극복 과정에서 중간 기착지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27

"노동 계급의 즉각적 요구를 경제적 구조 개혁 제안(국유화, 농지개혁 등)과 함께 발전시키고 이 둘을 결합해야 한다. 우리의 경제적 구조 개혁안은 자본주의적 계획에 맞서는 전반적인 경제 발전 계획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이것은 틀림없이 사회주의 계획은 아닐 것이다. 아직 그 조건이 결여돼 있기 대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회주의로의 전진을 위한 새로운 투쟁 형식이자 수단임에 분명하다."
  - 팔레이로 톨리아티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51에서 재인용

"구조 개혁은 현재의 권력관계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은 채 현 체제를 합리화해줄 뿐인 그런 개혁을 말하는 게 아니다. 또한 이것은 (자본주의적) 국가에 체제를 강화할 권한을 위임하는 것도 아니다. 구조 개혁의 뜻은 개혁을 요구하는 주체들 스스로 수행하고 통제하는 개혁이라는 것이다. 농엽 분야에서든, 대학에서든, 소유관계에서든, 지역에서든, 행정 영역에서든, 경제 영역에서든, 그 어디서든 구조 개혁은 항상 새로운 민주적 권력의 중심들을 만들어내야만한다."
  - 앙드레 고르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61에서 재인용

"미국 정부와 초국적 자본은 이렇게 철저히 지구적 맥락에서 인민연합 정부를 바라봤다. 칠레 내의 모든 움직임은 지구 질서의 유지 및 변동과 직결된 것이었다. 전선은 처음부터 지구적이었다. 하지만 위에서 이미 지적한 것처럼 이러한 지구적 전투는 칠레 내의 국가 기구 및 시민 사회라는 무대를 통해서만 가시화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지구적 맥락과 국민 국가의 정치적 결정 사이의 상호 작용이 작동했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93

"우리는 거대한 초국적 기업들과 주권 국가들 사이의 대격돌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후자의 근본적인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결정들은 집단적 이해를 대변하는 어떠한 의회나 기구로부터도 자신들의 행위의 총체적 결과와 관련해 책임을 지거나 규제받지 않으며 어떤 단일 국가에도 의존하지 않는 세계조직들에 의해 간섭받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세계의 전반적인 정치 구조가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 살바도르 아옌데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106에서 재인용

"문제는 인민연합 정부가 민중 권력 운동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데 있다. 인민연합 정부는 산업 코르돈이나 자치 지도부를 사회주의로 가는 민주적, 평화적 길의 역동적인 토대로 발전시킬 구체적 전만을 갖고 있지 못했다.... (중략)... 인민연합은 과도하게 국민 국가 수준의 정치에만 역량을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생활 세계 수준의 정치와 국민 국가 수준의 정치 사이의 직접적인 결합은 제대로 실험해보지도 못했다. 어쩌면 이것이 우파의 강점에 맞설 좌파의 강점이 될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114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이 직접 칠레를 방문해 이 전례 없는 실험을 격려했다. 프리드먼은 피노체트와 서신을 교환하며 독재자의 가정 교사 행세를 했다. 통화주의자들은 군부 파시스트가 짓밟아놓은 폐허 위에서 사용료도 내지 않고 칠레 사회를 실험실로 삼은 것이다. 실제 효과도 있었다. 인플레이션이 진정되었다. 통화주의의 효험이 입증된 듯 싶었다. 덕분에 통화주의를 몇몇 광신도의 학성레서 케인스주의를 대신할 현실 대안으로 위상이 높아졌다. 1980년대에 칠레는 바로 이 처방 때문에 다시금 심각한 경제 위기에 빠지게 되지만 말이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116~117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로 마련된 미결정의 무대 위에서 새로운 체제의 토대를 놓으려는 전략들이 상연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상황을 주도한 것은 이전 체제를 미련 없이 던져버린 장본인, 즉 미국 정부였다. 닉슨 정부는 새로 등장한 달러 본위제의 이점(발권 이익)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미국의 금융 세력에게 기회를 줬다. 미국 민간 은행들이 자유롭게 국제 금융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규제의 족쇄들을 풀기 시작했다. 이 금융 기관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국제금융시장은 급속히 모습을 갖춰갔다. 피터 고완이 '달러-월스트리트 체제'라고 이름 붙이 포스트-브레턴우즈 체제의 두 축이 마련된 것이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126~126

"홀랜드는 국민-대중 경제 시대를 연 케인즈주의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부터 되짚었다. 케인스주의는 고전 경제학이 제시한 자유 경쟁 실서, 즉 '미시micro'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거시macro' 경제라는 새 지평을 열었다.... (중략)... 문제는 국민-대중 경제의 전성기 동안 바로 이 미시/거시 지평으로 환원되지 않는 또 다른 경제 행위자들과 이들의 질서가 출현했다는 데 있다. 홀랜드는 이 새 지평을 '중간meso' 경제라고 규정했다. 미시 경제의 주행위지가 중소 규모 기업이고 거시 경제의 주역이 국민 국가라면, 중간 경제란 곧 독점 대기업의 세계였다.... (중략) ... 거대 자본은 세계 시장으로 활동 무대를 확장했다. 즉, 초국적 자본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해외 이전을 통해 국민 국가의 조세 징수를 피하고 규제로부터 벗어났다. 생산망을 전 세계로 확장한 초국적 기업들이 해외 사업 부문으로 이전하는 자본의 규모가 국가 전체 수출 규모에 맞먹을 정도로 커졌다. 또한 이들은 국제 금융 활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142

"하지만 산업부의 실무는 고위 관료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벤 장관이 지시한 업무를 전반적으로 해태했다. 첫째 이유는 노동당 정부가 단명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장관이 몇 달 안에 다시 바뀔지 모르는데, 굳이 열심히 따를 것까지는 없다는 분위기였다. 둘째 이유는 보다 근본적인 것이었다. 대부분의 고위 관료들이 벤 장관의 산업 정책 비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중략) ... 관료들은 이미 계급 세력 관계에 대한 판단을 바탕으로 국가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선 안 되는 일의 경계선을 그어놓고 있었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154

"칼레츠키의 예언대로, 1970년대 초가 되면 자본주의 중심부에서 노동조합의 역량이 전에 없이 성장한다. 하지만 이것과 동시에 진행된 또 다른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1970년대 상황을 이해하려면 둘을 함께 봐야 한다. 그것은 홀랜드 등 AES 주창자들이 지적한 거대 자본의 성장이었다. 거대 독점 자본이 초국적 자본이 되고 다시 금융화하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자본 권력이 전무후무하게 확대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 역시 국민-대중 경제의 전성기가 낳은 산물이었다. 상당 기간의 완전 고용 상태가 노동조합의 힘을 증대시킨 것처럼, 장기 호황은 자본의 힘을 강화시켰다. 사실 노동 조함 역량의 강화는 자본 권력의 성장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둘은 여전히 비대칭적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동시에 성장했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165~166

"물가 상승의 책임은 특정 사회 세력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인건비 상승을 압박하는 노동자의 힘에 거대 자본이 가격 결정력이라는 더 큰 힘으로 맞섰고, 전통적인 경기 조절 정책에 몰두하던 국가가 통화 공급을 계속 늘려서 이 상호 상승 작용에 날개를 달아줬다. 결국 모든 힘들이 물가를 위로 밀어 올렸다. 인플레이션의 밑바탕에는 서로 대립하는 세력들 사이의 상호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166

"승리의 제1공신은 금융 시장 행위자들, 즉 화폐 자본의 대변자들이었다. 북반구의 오래된 국민 국가를 상대로 이들이 벌인 활약은 정말 눈부셨다. 국제 금융 시장이 한 번 들썩이면 국민 국가 하나쯤은 쉽게 농락할 수 있다는 게 처음으로 만천하에 드러났다.... (중략) ... 시티나 월스트리트의 큰손들이 지구적 권력 서열의 꼭대기로 진입했다. 화폐 자본이 초국적 자본의 세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확보한 것이다.... (중략) ... 이제 시장이 모든 사회적 평가 및 결정 과정에서 다른 조직이나 세력에 대해 우위를 확보해나가게 되었다. 시장의 '신뢰'가 사라지면 어떤 조직이나 세력도 존립 근거를 상실하고 마는 세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204

"신우파는 국민 국가의 정치를 재구성하려 했다. 이들은 국민 국가가 최소한의 민주적 토대(가령 선거를 통한 집권)를 유지하면서도 배타적으로 '시장'과 호응하게 만들려 했다. 국민 국가를 화폐 자본이 주도하는 새로운 지구 질서 안에 끼워 넣으려 한 것이다.... (중략) ... 신우파는 완전 고용과 복지 확대 대신 보편적 금융 시장을 새로운 경제생활의 중심으로 제시했다. 누구나 능력껏 금융 투자에 참여해 수익을 얻는 사회로 나아가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1976년 IMF 위기를 통해 확보한 자본 진영의 승리를 전면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였다. 이제 '시장'의 지배력이 인민들의 생활 세계로까지 뻗어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212

"한마디로 볼커 전환은 통화 가치 안정을 위해서는 다른 어떠한 경제적 고려 사항도 희생시킬 수 있다는 새로운 전 지구적 규범을 확립했다. 돈의 가치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면 실업의 증가도, 실질 임금의 하락도 어쩔 수 없는 게 돼버렸다. 이 새로운 정언 명령의 이면에 자리한 것은 바로 화폐 자본의 이해였다. 즉, 이제 화폐 자본이 새로운 지구 질서의 최정상 권력임이 만방에 선포된 것이다. 사회의 다른 모둔 구성 요소들은 화폐 자본의 이해에 맞춰 철저히 재평되어야만 했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221

"과거와 달리 일국 차원의 확장 정책은 국민-대중 경제의 활성화로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인플레이션이나 국제 수지 적자, 환률 불안 같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원인이 되었다. 문제는 지구 질서와 일국적 케인스주의 사이의 어긋남에 있었다. 지구 질서의 어떤 측면들이 일국적 확장 정책을 또 다른 경제적 재앙으로 되돌려주기 시작했다. 좌파는 과거에 케인스주의 정책 수단들이 국민-대중 경제의 토대 역할을 했던 것 자체가 특정한 지구 질서를 전제한 것이었음을 칠레, 영국 그리고 프랑스 등의 잇단 패배를 통해 뒤늦게 학습했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249

"우리는 구래의 자본 수유쥬들로부터 그들이 소유에 기초해 행사해오던 권력을 탈취할 필요가 있다. 모든 경험은 [사적 소유에 대한] 영향력 행사와 통제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소유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나는 마르크스와 비그포르스를 상기시키고자 한다. 소유를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사회를 근저에서부터 바꿀 수 없다. 내 확고한 의견으로는 기능 사회주의만으로는 철저한 사회 변화를 가져오기 어렵다."
  - 메이드네르 / 신정완, '임노동자기금 논쟁과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281에서 재재인용

"홀은 영국 좌파가 오랫동안 '사회'주의를 '국가'주의와 혼동했다고 비판했다. 케인스주의든 좀 더 급진적인 대안이든 국가 기구에 만사를 맡기는 식이었다. 그래서 대웆은 '사회주의'라고 하면 관료주의를 떠올리게 되었다. 대처 정부는 이러한 좌파의 약점을 활용했다. '국가'로부터 자유를 되찾기 위해 '시장'을 선택하자고 선동했고, 이 선동이 먹혀들었다. 홀의 결론은 이제 국가가 아니라 시민 사회의 다양한 세력들이 사회 변혁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300

"도시 사회주의의 행진은 이것으로 중단되었다. 하지만 GLC(런던 광역 의회)와 다른 좌파 지방 정부들의 경험은 구조 개혁 좌파에게 값진 교훈을 남겼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정치의 또 다른 층위에 눈길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생활 세계의 정치였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304

"미국의 새로운 축적 전략에 따라 화폐 자본이 주도하는 전 지구적 시장 위계 체계가 꼴을 갖춰갔다. 북반구의 자본 시장을 정점으로 해 지구 곳곳의 자본들이 위계적으로 편제되어갔다. 각국 경제는 이 새로운 지구 질서에 끼워 맞춰지기 시작했다. 초국적인 어떤 힘, 이른바 '시장'이 여러 나라의 경제 현실을 압도적으로 규정하게 되었다. 더 이상 '국민' 경제를 이야기하기 힘들다는 분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구 경제 질서가 국민 국가들의 세계와 어긋나게 된 것이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328

"신자유주의 지구 질서에서 국민 국가의 통치 노선으로는 대처 식의 우파 정부보다 이러한 '제3의 길' 노선이 적합했다. 실제도 대처-메이저 보수당 정부는 대중의 정치적 불만을 끊임없이 고조시키기만 했다. 1992년 미국에 클린턴 민주당 정부가 들어선 이래 북반구 여러 나라의 좌우 세력은 대체로 '제3의 길'로 수렴되었다. 이것이 이후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전성기에 표준적인 통치 방식이 되었다. 한국의 김대중-노무현 정권도 이 커다란 흐름의 일부였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333

"오늘날 이 '사회'는 자본-임노동 관계나 국가 관료 기구의 거대 체계로부터 자율성부터 되찾아야 한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 자체를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 점에서 여성주의와 생태주의는 기존 사회주의 운동에 부족했던 새로운 각성을 불러 일으켰다. 따라서 '급진적' 구조개혁론의 대표자인 고르가 생태사회주의의 열렬한 주창자가 된 것인 필연적인 일이었다. 말년에 그는 임금에 의존하는 생활 양식에서 벗어나는 것과 함께, 다양한 공동체 실험들을 통해 도시의 삶 자체를 바꾸는 것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제시했다. 그는 이렇게 도시인의 일상 자체를 새롭에 구성하는 과정이 우리가 잊고 있던 또 다른 층위의 '정치'라고 보았다. 우리의 용어를 사용한다면 이것은 곧 '생활 세계의 정치'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343

"그러나 라틴 아메이카의 실험이 미래 탈자본주의 구조 개혁 노선의 필수적 과제를 미리 보여주고 있다는 것만을 분명하다. 그것은 일국 차원을 넘어서는 지구 질서 수준의 정치 무대를 스스로 새롭게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라틴 아메리가 좌파 정치 세력들이 지금 한 지역에서 벌이는 실험들을 앞으로 구조 개혁 좌파는 다른 지역에서도 그리고 지역의 틀을 넘어서는 차원에서도 끊임없이 시도해야 할 것이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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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와 복지정책 - 역사와 이슈 (테마한국사회복지1)
국내도서>사회과학
저자 : 이영환
출판 : 나눔의집 2004.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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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사회보장"이라는 책이나 "한국의 가난 - 오래된 빈곤, 새로운 과제"와 같은 책들, 그리고 복지국가 소사이어티에서 낸 책 두 권 정도, 여기에 최근에 읽은 '한국 복지국가 성격논쟁2"를 통해 한국의 복지와 관련된 문제들을 어느 정도 접하긴 했는데, 어디에선가 이 책에 대한 추천을 본 기억이 있어 오래전에 사놨다가 이번에 미쉬라와 고프의 책을 잇달아 보며, (동시에 두 가지 책을 보는 근래 생긴 습관으로 인해) 이 책을 한 챕터씩 읽어 어제 마쳤다.

  제목처럼 한국사회와 복지정책에 대해 역사적 측면과 몇 가지 이슈를 다룬 내용이었고, 각 챕터는 각기 다른 시기에 저자가 쓴 논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저자의 논문 모음집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책들을 통해 비교적 접해본 이슈임과 동시에 이론적이기보다는 현실적인 논의라 (한국 복지국가 성격논쟁 같은 책에 비하면) 비교적 평이하게 읽어갈 수 있었다. 이 책의 집필을 목적으로 새로 쓰여진 책이 아닌지라 2005년에 발간된 책임에도 오래된 논문은 96년에 쓰여진 것이 있을 정도라 '같은 문제를 현재적 시각에서 보면 어떻게 봐야 할까?'를 생각하게 되는 아쉬움을 있었지만, 여전히 이 분야에 대한 '공부'가 절실한 나에게는 또 한 권의 소중한 양식이 되어준 책이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저자의 '글투',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단어나 표현의 선택'이었는데 보통의 논문이라면 좀 더 가치중립적인 성격의 표현를 사용할만한 부분에서 거리낌없이 자신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표현을 사용하는 듯한 부분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런 느낌을 갖고 나서 다시 어떤 단어들이 있는지 훑어보니 막상 그런 단어가 딱 눈에 띄지는 않는다! 아마도 단어보다는 규범적인 성격이 있는 문장에서 단정적인 어미를 사용한다든가, 역사적 논란이 있는 사건에 대해 단언하는 부분이라든가 이런 것들이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좋게 느껴졌는데, 논문이라는 것이 어차피 어떤 주장을 하는 것이라면 단정적인 표현들이 좀 더 매력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덜 아카데믹하게 느껴질 수는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오랜만에 '편안하게'(아무래도 이론적인 논의가 아닌 현실에 대한 논의니만큼) 읽은 '불편한'(다루는 내용이 즐거운 내용은 아니니까) 책이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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