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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우선한다 (셰리버먼 저 / 김유진 역 / 후마니타스)
Posted at 2012. 3. 7. 01:24// Posted in 감상들어가며. 사회민주주의의 명예회복
이 책, ‘정치가 우선한다(The Primacy of Politics)’의 저자인 셰리 버먼은 이런 경향이 잘못되었음을 단호하게 주장합니다. 그녀는 사회민주주의가 ‘정치의 우선성’과 ‘공동체주의에 대한 믿음’이라는 분명한 이념적 지향을 가지고 있으며,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 모두에 대한 대안 이데올로기로서 양차대전 이후 70년대까지의 번영을 이끈 사상이자, 신자유주의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현재와 미래에도 여전히 기능할 20세기 사회사상사의 진정한 승리자라고 선언합니다. 그 말대로라면 가히 ‘사회민주주의의 명예회복’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그녀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사회민주주의 이데올로기의 형성과 발전을 정치사와 지성사를 포괄하여 역사적으로 조망합니다. 이 리뷰에서는 저자의 역사적 조망을 간략히 살펴보고,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들을 현재적 과제에 비추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조망
저자의 이야기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심각한 불평등과 공동체의 뿌리 뽑힘, 개인의 원자화라는 폐해를 낳은 끝에 대안 이데올로기로서의 마르크스주의가 등장하고, 다시 19세기 말 마르크스주의조차 위기에 놓인 시점에서 시작합니다. 저자는 당시 엥겔스와 카우츠키가 주도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교리’는 역사적 유물론과 계급투쟁이었다고 말합니다. 역사적 유물론과 계급투쟁론은 자본주의는 그 내적 모순으로 인해 계급 간 대립을 격화시킴으로써 필연적으로 붕괴하게 되며, 이는 사회주의로의 필연적인 이행으로 이어진다는 결정론적인 내용입니다. 문제는 마르크스의 예언(이와 같은 경제 결정론은 마르크스의 것이 아니며 엥겔스와 카우츠키가 마르크스주의를 지나치게 도식화 한 나머지 초래된 것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저의 식견이 짧아 뭐라 할 수는 없지만, 아무리 엥겔스와 카우츠키에 의해 단순화가 되었다고는 해도 ‘경제적 토대가 결정적’이라는 생각 자체는 역시 마르크스로부터 기원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한 평가가 아닐까 합니다.)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19세기 후반의 불황을 겪고 난 후 자본주의는 호황 국면에 들어섰고, 적어도 상당 기간 동안은 붕괴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이죠. 이렇게 되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기모순에 봉착하게 됩니다. 당시의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전술한 바와 같이 ‘경제적 토대에 의한 필연적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제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 이행기를 대비해서 노동자들을 조직화하고 교육하는 것 외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혁명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할만한 어떤 지침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경제 결정론적 관점 외에도 마르크스주의의 국가론 - 국가는 지배 계급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일 뿐이라는 - 은 정치 자체에 대한 부정적 정향을 나타냈고, 결국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은 정당이면서도 정치활동에는 나서지 않아야 하는 모순된 입장에 처하게 됩니다. 만약 단기간 내에 자본주의가 붕괴되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시작된다면 이런 것들은 큰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일이 그렇게 진행되지 않게 되면서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 균열이 발생합니다. 바로 수정주의의 등장입니다.
저자는 베른슈타인과 흐름을 같이한 수정주의자들을 ‘민주주의적 수정주의’라 분류하는 한 편 이들과는 또 다른 수정주의의 흐름을 제시합니다. 바로 후에 파시즘을 낳게 되는 ‘혁명적 수정주의’입니다.(저자는 레닌의 볼셰비즘 또한 혁명적 엘리트의 지도를 통한 사회주의 이행을 제시하여 경제결정론을 부정하였다는 점을 들어 그 또한 수정주의의 한 흐름으로 분류합니다. 사실 이는 좀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수정주의를 ‘혁명을 포기하고 개혁을 추구하는 흐름’으로 보는 일반적인 입장에서 보면 볼셰비즘은 수정주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자의 경우 ‘경제결정론에 입각한 사회주의 이행’을 따르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정통과 수정주의를 나누고 있기 때문에 이 같은 분류가 전적으로 부당하다고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혁명적 수정주의는 조르주 소렐로부터 출발합니다. 소렐은 마르크스주의의 결정론적 세계관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는 베른슈타인과 관점을 같이합니다. 하지만 소렐은 베른슈타인보다 인간의 의지를 더 강조하는 주의주의(主意主義)적 입장을 취했으며, 보다 더 중요하게는 프랑스의 자코뱅주의적 전통을 이어받아 (민주주의적 방법이 아닌) 폭력적 직접행동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사상은 좌우 양극단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 좌측에는 아나코 생디칼리슴이 있었고, 우측에는 파시즘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저자가 파시즘과 나치즘을 다룬 방식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글의 저자인 셰리 버먼의 경우 파시즘이나 민족적 사회주의(나치즘)의 정책이 완전고용, 재정확장,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선성을 강조했다(즉, 국가가 자본가에 대한 우위에서 서서 경제 계획을 수행했다)는 측면에서 ‘민주주의’라는 절차적 요소와 인종주의적인 요소를 제외하고 보면, 사회 민주주의와 파시즘이 매우 유사하다고 말합니다. 정책 뿐 아니라 기원에 있어서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민주적이냐 혁명적이냐의 차이는 있어도 ‘수정주의’라는 공통의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욱 유사하다는 것이죠. 결국 저자는 이를 통해 ‘민주주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또한 이 책이 다룬 내용이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가 ‘민주주의’의 절대적 중요성이라고 생각하기에 상당부분 저자의 논지에 동감합니다. (민주주의의 절대적 중요성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하지만 파시즘/나치즘과 사회 민주주의 사이에는 저자가 다룬 것보다 더 큰 차이가 있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칼 폴라니는 ‘파시즘의 본질’이라는 논문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양립 불가능성을 지적하며 이의 해결 방안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민주주의를 경제 영역에까지 확장시키는 것.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사회에 경제생활만을 남겨놓는 것. 폴라니가 지목한 두 번째 경우가 바로 파시즘으로 그는 파시즘은 경제적 자유주의의 마지막 안전판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민주주의를 말살함으로써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경제를 국가가 보호하고 육성하는 방식으로 나갔다는 것이죠. 물론 저자 또한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만, 저의 짧은 소견으로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양립 불가능성’에 대해 저자는 폴라니와 같은 정도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2차 대전 후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러했듯이) 자본주의에 ‘어느 정도’의 규제만 가한다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양립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저자가 책 말미에 (이른바 ‘구조개혁좌파’라 할 수 있는) 70년대의 이탈리아 공산당이나 프랑스 사회당/공산당 연립정부를 ‘마르크스주의의 유산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즉, 지체된) 것으로 언급하는 데에서도 드러납니다. 이는 결국 사회민주주의를 완결된 체제로 보느냐, 경제적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간단계로 보느냐의 문제이며, 이 중 어느 쪽 입장을 취하는가에 따라 파시즘 및 민족적 사회주의와의 차이에 대한 시각도 달라질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이 글 말미에 다시 언급할 예정이니 일단 이 정도만 언급하고 저자의 논의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수정주의의 대립 문제는 1차 대전을 겪고 난 후 더욱 심각해집니다. 기존의 사적 유물론과 정치의 우선성의 대립, 계급투쟁론과 계급 교차적 협력의 대립은 몇 가지 현실적 상황의 변화로 더욱 심각해집니다. 우선 전쟁을 통해 나타난 민족주의의 등장은 사회주의 정당의 ‘국민정당화’에 대한 문제로 심화되어 기존의 계급투쟁론에 대한 도전을 더욱 거세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극에 달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인민의 반감은 선거를 통해 표출되어 많은 나라에서 마르크스주의 정당은 지배적 정당의 위치에 올라섭니다. 각국의 주요 정당의 위치에 올라선 마르크스주의 정당은 책임 있는 정치행위를 요구받게 되는데, 이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정치행위에 대한 부정적 입장과 충돌하게 되고 역사적 유물론에 대한 정치의 우선성의 도전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의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은 기존의 교조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이게 되고, 이로 인해 사회주의 정당들은 심각한 분열을 겪습니다. 이처럼 마르크스주의가 인민의 자본주의에 대한 실망을 해결해주지 못하는 틈을 비집고 나타난 것이 파시즘과 나치즘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파시즘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는 복합적이지만, 어쨌든 파시즘은 당시에 치솟던 민족주의적 요구와 기존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거부, 그리고 실업이나 빈곤과 같은 현실적 과제의 해결이라는 당시 인민의 요구들을 마르크스주의자들보다 더 빠르고 명확하게 자신의 것으로 하며 폭넓은 지지를 얻습니다. 물론 인권과 민주주의의 말살, 그리고 인종주의라는 요소들로 인해 처음 내세운 것과 달리 파시즘과 나치즘은 지독히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체제로 귀결되고 말았습니다만 그건 나중의 일입니다.
일찍이 민주주의적 수정주의가 결실을 맺었던 스웨덴이라는 하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에서 민주주의적 수정주의의 결실은 2차 대전을 겪은 후에 이루어집니다. 저자는 양차대전과 그 사이의 대공황을 겪으며 통제되지 않은 시장의 위험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서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루어졌으며, 한편으로 파시즘과 나치즘이라는 전체주의를 겪으며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의 중요성 또한 유럽인들에게 중요한 교훈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케인스주의와 복지국가입니다. 케인스주의 경제정책은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선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사회에서 독립된 경제’가 아닌 ‘사회 안에 묻어 들어간 경제’가 구현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복지국가는 사회 구성원간의 연대성을 강조함으로써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하의 원자화된 개인들의 이익사회(gesellschaft)가 아닌 공동체적 헌신에 기초한 공동사회(gemeinschaft)로의 이행을 보여줍니다. 저자는 비록 적지 않은 나라에서 케인스주의와 복지국가는 우파 정당에 의해 수행되기도 했고, 이로 인해 이것이 자유주의의 변형인 것처럼 오해되기도 하지만, 이는 명백히 민주주의적 수정주의의 주장을 이어받은 사회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20세기 사상사의 최후의 승자는 사회 민주주의라고 말합니다.
1930년대 스웨덴 사민당의 선거포스터
첫 번째 교훈. 도그마(Dogma)에 빠지지 마라.
그 기원이 마르크스에 있건 엥겔스와 카우츠키에 있건 간에 19세기 말~20세기 초의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이 ‘경제결정론’이라는 도그마에 빠졌던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사실 자본주의는 그 내적 모순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붕괴하게 되며, 그 다음 세상의 주인공은 지금 핍박받고 있는 프롤레타리아라는 명제는 마르크스주의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파산을 앞두고 가장 강력한 대항 이데올로기가 되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지금의 세상이 너무나 비참하고 힘겨울 때 누군가가 ‘걱정하지 마, 반드시 압제자들을 물리치고 네가 승리하게 될 거야.’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과학적 근거’를 가진 것이라고 여겨진다면 누구에게라도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는 그렇게 등장하여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력한 도전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세상은 마르크스가 예측한 것과 다르게 움직였고, 마르크스주의를 강력하게 만든 바로 그 강점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되었습니다. 이는 마르크스를 탓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설사 잘못된 예언이 온전히 마르크스의 몫이라고 가정해도 말이죠. 사상가는 예언자가 아닙니다. 사상가는 자신이 속한 시대에 발을 딛고 그 시대의 환경 속에서 그 시대까지의 지적 성과를 기반으로 새로운 시대를 조망하고 대안을 내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새로운 시대에 대한 예측이 완벽하게 실행되지 않더라도, 그들의 현실 분석과 미래에 대한 대안은 충분히 많은 교훈을 줄 수 있고 더 나은 시대를 설계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본주의가 스스로 붕괴하지 않았다고는 해도, 자본주의의 원리가 가진 근본적인 모순과 그로 인한 계급 문제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양상을 그릴 것인지를 이야기한 마르크스의 시도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바뀐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선대의 사상을 그대로 고집한 후대에게 있습니다. 그들은 시대의 변화를 스스로 체험하고 분석할 수 있는 상황에 있었음에도 선대의 사상을 마치 예언인양 받아들이고 고집했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알맞게 사상과 실천은 바뀌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한 것이죠. 이런 것이 바로 도그마(dogma)에 빠진 상황입니다. 종교적 영역이라면 몰라도 정치적·사회적 영역의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은 절대 도그마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사회는 항상 변하기 마련이며, 제아무리 뛰어난 사상가라도 그 변화를 완전히 예측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정치적·사회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원칙을 가지되 늘 사회의 변화에 조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공통적으로 가졌던 ‘경제결정론’의 도그마는 힘겨운 과정을 거쳐 극복되었습니다. 비록 ‘신자유주의’의 열풍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악몽을 떠올리게 했지만 역사를 완전히 되돌릴 수는 없었고, 복지국가는 약화되었을지언정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경제를 사회와 정치로부터 떼어 낸 채 운영한다는 원리가 지독한 유토피아에 불과하다는 역사의 교훈이 아직은 남아 있었던 까닭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경제에 관한 도그마가 이것뿐인 것은 아닙니다. 경제와 관련해서는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도그마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경제성장’의 도그마입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파시즘과 사회민주주의를 포함한 모든 이데올로기들이 공유했던 경제적 원칙은 ‘경제성장은 이롭다.’는 것이었습니다. 산업화의 진전과 경제의 ‘발전’, 그리고 그로 인한 생산과 소비의 증대는 20세기의 어떤 주류 사상도 거부하지 않았던 ‘공리’였습니다. 특히 이 책의 저자인 셰리 버먼이 20세기 사회사상의 진정한 승리자로 상찬해 마지않는 사회 민주주의와 그 결과물로서의 케인스주의 복지국가는 포드주의로 상징되는 대량생산과 포디즘 체제 하 노동자들의 소득 증대로 인한 대량 소비를 근간으로 한 ‘대중사회’가 그 본질이었습니다. 생산의 지속적인 증대는 노동자들의 고소득의 근간이 되었으며, 그 고소득 노동자들의 소비는 생산증대를 뒷받침할 유효수요를 창출했습니다. 또한 고소득 노동자들로부터의 조세는 복지재정의 근간이 되었으며, 완전고용에 가까운 상황은 복지수혜자를 전통적인 빈곤층 - 노인, 장애인 등 - 으로 제한함으로써 재정적 부담을 완화했습니다. 이 모든 체제의 근간에는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 좀 더 직설적인 표현을 쓰자면 ‘생산과 소비의 지속적인 증대’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왔다가 다시 저물고 있는 지금에도 주류 이데올로기에서는 어느 쪽도 ‘경제성장’이라는 전제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주로 생태주의 진영으로부터 나오는 ‘경제성장’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일축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경제성장’은 ‘경제결정론’보다 더 강력하게 지속되고 있는 도그마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그리고 이 경우에는 특히 우리를 둘러싼 자연환경은 우리의 생각의 변화보다 더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많은 생태주의자들이 지적하는 산업발전의 부정적 부산물들, 즉 기후변화나 피크오일, 생태계파괴와 같은 문제들은 이미 지구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봉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멜서스의 ‘인구론’이 그랬던 것처럼, 생태주의자들의 경고 또한 인간의 ‘진보’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현실속의 기술 발전의 정도로 봐서는(보다 더 중요하게는 인간들이 기술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봐서는) 과연 그럴까 싶긴 하지만 설사 그런 논의의 적실성을 어느정도 인정한다고 해도,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은 현재 수준 이상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만약 남반구의 나라들이 북반구의 나라들만큼 산업을 ‘발전’시킨다면, 그 때는 정말 지구가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될 것입니다. (로스엔젤레스의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을 세계 전역으로 확산시킬 경우 지구가 다섯 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나, 세계 모든 가족이 자동차를 한 대씩 가진다면 석유는 수개월밖에 지탱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상황에서 경제성장의 도그마를 그대로 가지고 미래를 설계한다면, 그 미래가 과연 지속가능할까요? 어쩌면 현 시대에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가치는 '자유로운 시장‘이나 ’복지국가‘가 아니라 생태주의일지도 모릅니다. 설사 생태주의자들의 주장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경제성장이 도전받지 않는 도그마로 존재하는 상황은 위험하다는 것을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실패에서 읽어내는 것이야말로 역사적 교훈을 현재화하는 지혜일 것입니다.
두 번째 교훈. 민주주의가 우선한다.
제가 이 책을 읽으며 느낀 두 번째의 중요한 교훈을 바로 ‘민주주의의 우선성’입니다. 파시즘과 사민주의의 차이의 대부분이 민주주의라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가장 중요한 차이 중 하나였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19~20세기를 거치며 형성된 체제 중 어쨌든 ‘민주주의적인’ 제도를 정착시킨 체제는 불완전할지언정 그럭저럭 생존해온 반면, 그렇지 못한 체제는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몰락했습니다. 나치즘과 파시즘,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이 그 좋은 예입니다. ‘이슬람 사회주의’라는 슬로건으로 서구 기업의 착취와 전근대적 왕정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등장했던 ‘혁명가’, 카다피는 최초의 ‘좋은 뜻’은 간데없이 최악의 독재자가 되어 결국 인민에 의해 축출되었으며, 우리에게 더 가까운 예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해방 직후 친일파 청산과 토지 재분배라는 시대적 과제를 대한민국보다 더 잘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세계 유일의 3대 세습 국가(남쪽에는 3대 세습 재벌이 있긴 합니다만)가 되어 ‘인민은 굶고 있는데 지배층은 권력 유지에만 골몰하고 있는’ 비참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민주주의의 유무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도한 일반화이겠습니다만, 민주적 제도가 없는 나라가 시대의 변화에 더 적응하지 못하며 권력 중심부로부터의 부패에 더 취약한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때문에, 바로 위에 도그마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만, 만약 사회의 운영원리로서 단 한 가지 ‘절대 흔들리지 말아야 할 원칙’이 있다면 저는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의 원칙을 말함에 있어 정말로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행하는 것입니다. 사실 위에 ‘민주주의가 없었던’ 체제로 예를 들었던 사회들도 민주집중제라든가 하는 식으로 스스로의 ‘민주주의’를 추진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작동되는 민주주의였냐고 질문해본다면 아마 상식을 가진 현대인의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더 추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일까요?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라고 하면 보통·평등·직접·비밀의 원칙에 근거한 선거, 의회, 복수의 정당 등을 떠올립니다. 이것들은 모두 오랜 세월을 거치며 형성된 ‘민주주의를 운영하기 위한 장치들’입니다. 민주주의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죠. 그런데 이런 제도들이 대부분 갖춰진 지금의 우리나라 정치는 ‘민주주의적’인가요?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민주주의를 정의해야 합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는 학자마다 여러 가지로 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민주주의는 민중(Demos)에 의한 지배(Kratos)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수의 선택받은 이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민중이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지금 우리의 현실을 어떨까요? 2011년 전세계를 뒤흔들었던 말이 바로 1%에 대한 99%의 반격입니다. 민주주의의 원리가 관철되고 있다면 말도 안되는 소리죠. ‘반격’이라는 것은 이전까지 열위에 있었음을 내포한 표현인데 99%의 사람들이 1%에 의해 열위에 있다면 우리가 떠들어온 ‘민주주의’는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이런 문제가 발생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대의 민주주의 체제의 한계라든가 관료주의의 문제도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부분은 참여 민주주의적 요소의 도입 - 주민소환이라든가, 주민참여예산제 같은 - 이나 정당의 정책역량 강화를 통해 선출된 권력의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대한 통제 강화 같은 대안이 있을 수 있겠지요. 이런 문제들을 깊이 있게 다룰 수 있으면 좋겠지만, 여기서는 다른 이야기를 조금 하고 넘어갈까 합니다. 바로 앞서 언급한 폴라니의 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충돌의 문제입니다.
최근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상당히 넓은 스펙트럼에서 쓰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넓은 스펙트럼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지점은 ‘재벌이 법 위에 군림하는’ 상황을 바꿔야 한다는 것인 듯합니다. 그런데 사실 엄밀히 따지면 이건 ‘민주주의’라기보다는 ‘제대로 된 자유주의’의 영역에 속합니다. 공정한 경쟁의 보장이라든가, 법치주의의 원칙을 분명히 하는 것은 서구에서는 19세기 고전적 자유주의 시대의 과제였습니다. 이는 사실 민주주의의 문제라기보다는 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전제조건 같은 것들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을 ‘경제 민주화’라고 부르는 것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지체된 경제 자유화의 회복’이라고 하면 더 적합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경제 민주주의는 경제 영역에서 민중에 의한 지배를 확립해나가는 데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독일 같은 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는 노조의 경영참여 제도화는 우리의 현실에서 좋은 출발점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더 나간다면 협동조합처럼 민주적 원리에 의해 운영되는 생산/소비 조직이 경제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 또한 경제 민주주의의 중요한 요소일 수 있을 것입니다. 공공이 운영하는 - 달리 말하면 국유화된 - 기업을 늘림으로써 사적 기업의 전횡을 견제하는 문제는 좀 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입니다. ‘국가’라는 기관을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냐는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국과 같이 선출되지 않은 관료의 힘이 강한 나라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현 시점에서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할 때 초국적 자본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라는 주제는 매우 중요하고도 어렵습니다. 어찌 보면 케인지언 복지국가가 실패한 원인 중 하나는 일국적 케인즈주의가 초국적 자본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결국 ‘경제 민주화’는 나라 안에서 뿐 아니라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공통의 노력이 필요한 과제입니다. 최소한 지역적 차원의 다국적 공조가 필요한데, 현재 남미에서 시도되고 있는 ALBA(Alternativa Bolivariana para América Latina y el Caribe)와 같은 경우가 하나의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폴라니는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본질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원리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민주주의를 폐기하거나 자본주의를 민주화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완벽한 자본가의 통치 기구로서의 국가’를 만들거나 ‘경제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거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셰리 버먼은 이와 같은 ‘자본주의의 민주화’의 과제가 케인지언 복지국가에 의해 훌륭하게 수행되었다는 의견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진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좀 더 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가 우선해야 한다.’는 역사의 교훈을 현재화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영역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할 것입니다.
나가며. 사회민주주의의 현재와 미래
글을 맺으며 이 책에 나온 저자의 중요한 주장들과 그 주장들에 대한 저의 부족하나마 간략한 견해를 덧붙여볼까 합니다. 우선 저자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 즉, ‘사회민주주의야말로 20세기 사회사상사의 진정한 승리자’라는 주장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합니다. 어쨌든 19~20세기를 거치며 나온 여러 사회사상 중 사회민주주의에 기반한 사회가 가장 번영했고 성공적이었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검증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영미권을 제외한 유럽 대부분 지역을 ‘사회민주주의’라는 하나의 틀로 묶을 만큼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많은 공통점을 찾을 수 있긴 하지만, 이를테면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과 대륙 유럽 국가들의 차이가 대륙 유럽 국가들과 영국(미국은 꽤 차이가 커 보이니 논외로 하겠습니다.) 과 같은 국가와의 차이에 비해 그렇게 좁았다고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좀 더 중요하게는 저는 사실 사회민주주의는 ‘과도기적 체제’였다고(혹은 그랬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사회민주주의가 폴라니가 제시한 방법대로 정치의 힘으로 경제의 영역에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체제였다고 한다면 현실속의 사회민주주의가 균형점을 이루었던 지점은 너무나 불충분한 민주화였습니다. 불가역적인 수준까지 경제 영역에 민주주의를 심지 못했기 때문에 전 세계적 정치경제 환경의 변화 시기에 이루어진 ‘신자유주의의 역습’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스웨덴의 임노동자 기금 시도나, 셰리 버먼이 마르크스주의의 구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지체된 현상쯤으로 취급했던 프랑스 사회당-공산당의 ‘공동강령’ 같은 것들이 좀 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면, 지구촌 몇몇 국가에서나마 사회민주주의를 통한 경제 영역의 민주화는 후퇴할 수 없는 수준까지 전진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끝으로 “사람들이 함께 노력하면 어떤 장애물이라도 극복해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기반을 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사회민주주의가 20세기에 큰 성공을 거두었듯, 21세기에도 “그 형태는 다를지 모르나 성격은 다르지 않은” 정치 이데올로기를 통해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저자의 마지막 주장에 대해서는 전적인 공감을 표하고 싶습니다. 경제든 뭐든 ‘결정지어져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인간의 힘을 통해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어떤 사족도 달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근래에 꽤 여러 편의 책 리뷰를 작성한 바 있는데, 이번 리뷰는 그 어느 때보다 제 의견을 많이 넣었고(물론 저의 무지 탓으로 많은 다른 글에서 본 내용들을 활용하긴 했습니다만), 저자에게 많이 반항(?)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전문성이나 깊이 있는 지식도 갖지 못한 제가 감히 셰리버먼과 같은 학자의 책에 너무 많은 토를 단 것 같아 낯 뜨겁긴 합니다만, 무식한 자라도 용감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또 민주주의의 장점인 듯합니다. 어찌 되었든 부족한 제가 있는 힘을 다해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해준 이 책과 저자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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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복지국가'를 공부하면서 내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의문 중 하나는 바로, '복지국가는 지속가능할까?'이다. 복지국가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라 할 '스웨덴 모델'을 다룬 책을 보다가 '생산부문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것이 스웨덴 복지국가를 지탱하는 데 있어서도 관건이라는 내용을 얼핏 본 이후 생긴 의문인데, 물론 지금의 내 수준에서 이 질문에 대한 어떠한 답도 내릴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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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가 저물아가는 시점에서 다음 시대를 준비할 때, 그 시대의 등장이 애초에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살펴보는 것은 의미깊다. 인간이 미래를 조망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방법 중 하나가 '역사로부터의 교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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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at 2012. 2. 21. 00:22// Posted in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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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를 보는 시각을 다루는 책으로 내가 최근에 읽은 미쉬라의 <<복지국가의 사상과 이론>>은 복지국가에 대한 여러 관점을 중립적 시각에서 다룬 후 현실에서의 복지국가는 어떤 모습인지를 더듬어보는 책이었다.(
2012/02/14 - [감상] - 복지국가의 사상과 이론 (라메쉬 미쉬라 저 / 남찬섭 역 / 한울아카데미) 참조) 그 책이 다룬 관점들은 복지행정학 관점, 기술결정론(수렴론) 관점, 기능주의 관점,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관점이었는데, 저자는 마르크스주의 관점을 다루며 마르크스주의적 접근은 ‘체계론적 분석’과 ‘집단행위적 분석’을 결합할 수 있다는 것이 (기능주의와 비교할 때) 장점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집단행위적 시각을 포기하고 기능주의적(즉, 체계론적) 분석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며 아쉬움을 표현한다. 오늘 소개할 이안 고프의 이 책, <<복지국가의 정치경제학>>은 ‘미쉬라의 아쉬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의 대답’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물론 고프의 시각이 마르크스주의자 일반의 시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실제로 고프는 ‘이윤율 저하 경향성의 법칙’이라든가 ‘공황 분석’과 같은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관점을 결하고 있다는 부분에서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며, 이에 대해 역자는 고프가 ‘신리카도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역자후기 참조.) 고프는 마르크스주의 시각에서 미쉬라가 아쉬워한 두 부분을 모두 충분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이 조망하는 복지국가의 키워드를 하나만 꼽으라면 ‘모순’ 혹은 ‘양면성’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복지국가의 두 얼굴
복지국가의 기원 – 계급갈등과 체제의 요구
복지국가가 자본주의를 어떻게 위협하게 되는 지를 다루기에 앞서서
복지국가라는 체제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위의 설명에서 배제되었던 계급갈등의
역할에서 출발하자. 자본주의는 그 체제의 특성상 자본의 이해와 대립되는 이해를 가진 계급 – 즉 노동 계급을 대량으로 발생시키게 된다. 노동자 계급은 대규모
공정이라는 일관작업의 환경 하에서 집합적 성격을 갖는 노동을 통해 조직화 역량을 갖추어 나가게 되며, ‘착취’라는 자본주의의 본질로 인해 숙명적으로 자본가와의 계급대립을 발생시키게 된다.
더구나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중요한 특성, 즉 선거에 기반한 민주주의라는 특성은 (물론 이 또한 공짜로 주어진 것은 아니다. 보편적인 선거권 확립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자유주의 좌파 세력과 연대하여 싸웠는지는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대의제
구조 내에 노동자의 대표를 등장시키기까지 한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노동 계급을 자본주의 체제 내로
포섭하지 않으면 ‘혁명’이라는 – 1789년 프랑스 혁명 후 자코뱅 독재를 목격한 이래 모든 부르주아에게는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공포인 – 파국을 가져오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노동계급을 자본주의 체계 내로 포섭해야 하는데, 바로 이 ‘포섭의
방법’이 바로 복지국가이다. 어떤 경우는 노동 계급의 압력에
의해 또 어떤 경우는 예상되는 노동 계급의 압력을 사전에 약화시키기 위해 사회정책을 도입하는 식의 다양성은 있지만, 어쨌든 노동 계급의 계급투쟁에 대한 대응이라는 것은 대부분 국가에서 복지국가를 향한 움직임이 시작된 중요한
원인이다.
그러나 복지국가가 순수하게 조직화된 노동운동의 성과물인 것만은 아니다. 개별 자본가들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는 안돼!’라고 외친 한국의 한 자본가를 기억하라. 그 자본가의 눈에 흙이 들어간 지 오래지만 그 독점자본의 사업장에는 아직도 노조가 제대로 없다.) 자본가 전체의 이익을 생각할 때는 노동조합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인정과 복지정책의 어느 정도의 시행은 필수적이다. 이는 비단 복지라는 탈출구가 없다면 혁명을 불러올 수 있다는 공포 때문만은 아니다. 자유방임주의가 득세하던 19세기 영국의 공장 현실은 비참함 그 이상이었다. 생산비를 절감하기 위한 자본가들의 노력은 생존선 이하의 임금을 받으며 하루 12시간이 넘는 노동에 시달리는 아동들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었고, 이는 자본주의의 가장 중대한 투입요소인 ‘노동’의 재생산을 방해하는 지경에 이르러 자본가 전반의 이익 기반을 훼손할 정도가 되었다. 즉, 개별 자본가의 이익이 무제한 관철되도록 놔두었을 때 전체 자본가의 이익기반은 파괴되고 결국 이는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을 위태롭게 하는 결과를 낳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공장법’과 같은 최소한의 ‘개입’는 노동운동이 없더라도 자본주의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결국 미쉬라의 말처럼 ‘계급갈등’과 ‘체계특성’은 모두 자유방임주의국가를 복지국가로 이끄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까지 복지국가로 움직일 것인가?’를 놓고 자본과 노동은 또 한 번 힘겨루기를 해야만 하겠지만.
국가 –
자본의 이익 실현과 상대적 자율성
이 설명에서 ‘개별 자본가의 이익’이 아닌 ‘전체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구가 바로 국가이다. 사실 국가는 자본주의의 형성에서부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수십 년간 신자유주의의 세례를 받은 결과 우리는 흔히 ‘시장’은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이고 ‘규제’는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하지만 사실 시장경제의 출발은 조금도 자연스럽지 않았다. 시장경제는 이른바 고전경제학의 ‘투입요소’인 토지, 노동, 자본이 시장에서 제한 없이 거래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이전의 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그 때의 사람들은 수많은 공유지를 가지고 집산적 생산을 하고 있었으며, 공동체는 개개인에 대한 일정한 ‘자유의 제약’과 ‘보호’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었다. (바람직한 경우를 보여주는 예는 아니지만, 중세의 ‘농노제’를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농노제 하에서 농노는 거주이전의 자유를 비롯한 갖가지 자유를 제한 받고 있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 어떤 이유로 인해서든 생존에 위협을 받게 되었을 때 영주로부터 최소한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장치들은 모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현에 장애일 뿐이었고 따라서 해체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역할을 수행한 것이 국가 – 즉, 정치권력이었다. 자본주의는 자연스럽게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이전 사회를 권력의 힘으로 폭력적으로 해체하며 등장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유’를 가질 수 있었다. 비록 못 가진 사람에게 그 자유는 단지 ‘굶을 자유’일 뿐이었지만. 그리고 그 ‘자유’는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거래’에 의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형성의 중요한 근간이 된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일단 형성되게 되면 착취가 경제체제 내에서 자동적으로 실현된다는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잉여가치의 수탈은 의식적인 강제 없이도 시장기구의 힘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경제’를 ‘정치’로부터 분리하고, ‘사적인 것’이 ‘공적인 것’과는 다른 것으로 취급하게 되는 상태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분리된’ 정치는 ‘분리된 국가구조’, 즉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 국가’가 된다. 물론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주어진다. 만약 국가가 이 범주를 넘으려고 할 때 자본은 보다 유망한 자본축적의 중심지로 이동하게 되고, 이는 (적어도 단기적인, 그러나 심각한) 경제적 난관으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에 국가는 (혁명을 일으키는 상황이 아닌 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범위 내에서 움직인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지구적’ 차원의 체제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구조적 속박’이며, 국가의 자율성이 ‘상대적’인 이유이다.
그렇다면 ‘상대적 자율성’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위에서 설명한대로 국가는 ‘상대적 자율성’을 갖기 때문에 개별 자본의 단기적 이익이 아닌 전체 자본의 중/장기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 즉, 아무리 유력 자본가가 ‘내 눈이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돼!’라고 외치더라도 노조의 존재가 자본주의 전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면 노조를 허용하는 정책이나 제도를 시행할 수 있는 것이 ‘국가’가 가진 ‘상대적 자율성’인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은 본질적으로 한계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피지배 계급에게 국가는 일정한 속박 내에서나마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들을 개선할 수 있는 중요한 가능성이 되며, 그 결과가 바로 지난 세기 자본주의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복지국가이다.
복지국가는 어떻게 위협이 되는가?
자본주의와 복지국가가 어떻게 결합되는가에 비하면, 복지국가가 어떻게 자본주의의 위협이 되는가(다시 말하면, ‘복지국가의 위기’는 어떻게 도래하는가?)에 대한 저자의 논의는 빈약하다. 논의가 타당성이 약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양적으로 빈약하다는 말이다. 오히려 저자는 ‘위기의
진짜 원인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보다는 ‘사회지출의
증가를 70년대 경제위기의 진정한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이 왜 불완전한가?’에 대한 논의에 더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다. 저자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이른바 ‘복지국가가 생산성 저하를 초래한다.’는 주장은 이렇다. 경제에는 ‘시장부문’과 ‘비시장부문’이 있는데
시장부문은 시장판매를 위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모든 경제적 활동으로 이루어지며, 비시장부문은 그
외의 것들, 즉, 국방,
NHS (국가 건강 서비스, 이 장에서의 모든 논의는 영국을 예로 들어 이루어지고 있다.) 등 주로 국가/공공 부문의 활동들로 구성된다. 이 중 국가 전체의 소비재, 투자재, 수출재 등의 수요총량을 공급하는 것은 ‘시장부문’이며, 따라서 시장부문이야말로 경제에서 유일하게 ‘생산적인’ 부문이다. 따라서
비시장부문에서 일하는 ‘비생산적 노동자들’의 소득은 생산적
부문이 생산한 시장부문생산물의 구입을 위해서만 지출될 수 있다. 그 결과로 비생산적부문의 국가고용 증대는
시장부문 산출의 몫을 축소시킴과 동시에 시장부문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킨다. 또한 국가지출의 증대는 시장부문에
대한 조세부담의 증대를 의미하며, 이는 결국 시장부문의 이윤에 의해 부담된다. 결국 복지국가가 초래한 국가와 공공부문의 확대는 ① (생산적인) 시장부문으로 가야 할 노동력을 (비생산적인) 비시장부문으로 돌리고, ② 시장부문의 산출부담을 증가시키며, ③ 조세부담으로 시장부문의 이윤을 축소시키는 3중의 부담을 시장부문에
전가하는 방식으로 산업기반을 약화시키고, 저성장과 무역적자의 원인이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의 파국을 이야기하는 이 시기에 왜 하필 그녀가 영화화된 걸까?
저자는 복지국가를 저성장의 원인으로 몰아세우는 이런 주장이 타당하지
않음을 여러 각도에서 논증한다. 첫째, 비시장부문의 활동이
생산하는 ‘사회적 임금’과 ‘집합적 소비’는 그 자체가 생산적이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노동력을 재생산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를 공급하게 됨으로써 시장부문에서 시장임금으로 지급되어야 할 비용을 감소시키므로 비시장부문의 모든 활동이 시장부분의 이윤을 감소시키는
형태를 결과한다는 분석은 옳지 않다. 둘째, 예를 들어 NHS와 같은 필수 서비스가 국가에서 운영될 경우 민간에서 운영되는 것과 달리 소비자가 NHS에 지급할 비용에는 ‘이윤’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는 소비자의 후생을 증진시키거나, (만약
시장임금이 이와 같은 부분을 반영하여 낮아지거나 덜 상승하는 식으로 반응할 경우) 시장부문의 이윤을
증가시키게 된다. 이는 시장부문에서 NHS를 공급했을 때의
이윤과 같으므로 이윤의 총량은 같지만 (NHS를 공급하는 ‘자본가’가 없기 때문에 사회의 전체 자본가 수가 감소함으로써) 이윤율을 오히려
더 높아지는 결과가 된다. 셋째, 국가가 공급하는 사회서비스는
‘재생산적’인 것 (예를
들면 교육, 보건 같은)과 ‘비생산적’인 것 (주로
사회통제를 담당하는 서비스, 예를 들면 군대, 경찰과 같은)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중 재생산적인 것은 장기적으로 시장부분의 생산 증대에 기여하게 되며, 따라서 이 부분의 비중을 높일수록 사회서비스는 그 자체로 ‘생산적’일 수 있다.
그렇다면 저자가 생각하는 1970년대
‘복지국가의 위기’의 본질은 무엇일까? 저자는 복지국가의 위기는 전후 계속되어온 ‘장기호황’ 자체에서 싹튼 것이라고 말한다. 즉, 전후의 경제적 호황은 산업예비군을 고갈시켜 노동운동의 힘을 강화시켰고 강력해진 노동운동은 임금을 상승시켜 인플레이션
압력을 증가시켰다. 한 편으로 유럽과 일본의 선진국가들은 미국의 기술수준을 따라잡음으로써 미국 자본의
경쟁을 증대시켰고, 이는 미국 자본의 이윤압박을 증가시켜 ‘미국의
헤게모니 하의 국제질서’라는 기존의 국제적 축적체제를 뒤흔들었다. 한편으로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국가지출은 증대했는데 이에 대한 재원조달시도는 다시금 인플레이션 압박을 증가시키게 된다. 결국
‘불황’에 대처하는 ‘국가지출확대’라는 케인즈주의 경제학의 대응책은 ‘인플레이션’이라는 암초를 만나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었고 이것이 위기의 본질이다. 즉, ‘복지국가’는 위기의 한 측면일 뿐이지 이것이 위기의 중요한 원인도, 결과도 아니라는 것이다.
나가며. 복지국가의 미래는?
이와 같이
복지국가의 본질과 기원, 그리고 위기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고찰을 마친 저자는 위기에 봉착한 복지국가의
미래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저자는 후기에서 복지국가는 ‘자본주의의
피조물’임과 동시에 ‘자본주의 속의 사회주의’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한 번 복지국가의 양면성이다.) 그리고 복지정책이 가진 긍정적인 측면들을 보호하고 확대함과 동시에 복지정책의 부정적 측면들은 노출시켜 척결해야
한다는 (공자님 말씀 같은) 교훈을 던지며 글을 마무리한다. ‘복지자본주의에서 복지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바란다는, (‘어떻게’가 빠져 있기에) 다소
갑작스러운 문장을 끝으로. 결국 복지국가의 과거와 현재를 일관성 있게 조망한 저자로서도 ‘복지국가의 미래’는 말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이 책이
쓰여진 시점부터 20여 년을 더 살아온 나로서는 당시의 저자가 몰랐던 복지국가의 미래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다. 70년대를 거치며 복지국가는 저자가 애써 증명하려 했던 바와는 달리 ‘경제위기의 주범’이자 ‘비효율의
상징’으로 몰렸고, 그 결과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좌파’ 조차 (기존의 복지국가와
자유방임주의 사이의) 제3의 길을 외치며 사실상 신자유주의의
조타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되었다. 사실 70년대의 위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다. 저자도 지적한 것처럼 노동운동의 강화와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 압박은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국가의 비대함’과 그로 인한 ‘비효율’은 신자유주의 진영에서 주장한 것과는 달리 정말 위기의 원인이었는지
잘 밝혀지지 않은 것 같다. 한편 신자유주의 진영에서는 은폐했으며, 저자도 (적어도 이 책에서는) 다루지 않은 위기의 또 하나의 측면이었던 자본의
독점자본화는, 위기의 원인으로 주목 받지 않았던 덕분에 그 후 이십년동안 신자유주의의 시대를 거치며
더욱 증폭되어 오늘날 또 다른 위기의 원인이 되고 있다. (1970년대 인플레이션 압박은 노동의 임금상승도
있지만, 독점자본화에 따라 가격의 결정이 시장이 아닌 자본에 의해 이루어짐으로써 생산비 상승이나 임금인상이
이윤을 잠식하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가격의 상승으로 이어졌다는 측면도 있다. 또한 ‘산업기반 약화’의 원인은 신자유주의의 주장대로 ‘국가의 비대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업자본이 덩치를 키우며 ‘초국적 금융자본화’된 것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복지국가’는 무엇인가? 지난 30년 간 지구적 자본주의를 운영한 신자유주의가 실패했으니
이제 다시 복지국가로 돌아가면 되는 것일까? 30년 전의 경제위기를 몰고왔던 원인들은 해결되었는가? 복지 자본주의의 전성기를 열었던 지속적인 생산의 증대는 과연 돌아올 수 있는 것일까?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으로의 이행이라는 산업 조건의 변화는 어떠한가? 인구구조의
변화와 환경의 파괴, 그리고 석유의 고갈이라는 잠재적 위협들은 복지국가와 어떻게 어울릴 수 있을까? 2008년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건제한 초국적 금융자본은 과연 복지국가로의 회귀를 용인할까?
이안 고프
같은 이도 ‘복지국가의 미래’를 조망하지 못했는데 내가 이런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을 리 없다. 다만 한 가지만 이야기하고 싶다.
70년대 케인즈주의 복지국가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 마땅히 이에 대한 대안은 시대적 변화를
담은 새로운 비전이었어야 했다. 하지만 선택된 비전은 고전적 자유방임주의의 재판일 뿐인 신자유주의였고, 결국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낳았을 뿐이었다. 또 다른 위기에 봉착한
지금, 어떤 이유에서든 30년 전 폐기되었던 체제를 다시
들고 나오는 것인(물론 적어도 복지국가의 30년의 신자유주의의 30년 같은 ‘야만의 세월’은
아니었으니 좀 나을 수는 있어도) 그리 현명한 대안이 아닐지도 모른다.
고프의 말처럼 복지국가의 긍정적 측면을 담되, 새로운 시대의 질서가 될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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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at 2012. 2. 18. 23:47// Posted in 감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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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회보장"이라는 책이나 "한국의 가난 - 오래된 빈곤, 새로운 과제"와 같은 책들, 그리고 복지국가 소사이어티에서 낸 책 두 권 정도, 여기에 최근에 읽은 '한국 복지국가 성격논쟁2"를 통해 한국의 복지와 관련된 문제들을 어느 정도 접하긴 했는데, 어디에선가 이 책에 대한 추천을 본 기억이 있어 오래전에 사놨다가 이번에 미쉬라와 고프의 책을 잇달아 보며, (동시에 두 가지 책을 보는 근래 생긴 습관으로 인해) 이 책을 한 챕터씩 읽어 어제 마쳤다.
제목처럼 한국사회와 복지정책에 대해 역사적 측면과 몇 가지 이슈를 다룬 내용이었고, 각 챕터는 각기 다른 시기에 저자가 쓴 논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저자의 논문 모음집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책들을 통해 비교적 접해본 이슈임과 동시에 이론적이기보다는 현실적인 논의라 (한국 복지국가 성격논쟁 같은 책에 비하면) 비교적 평이하게 읽어갈 수 있었다. 이 책의 집필을 목적으로 새로 쓰여진 책이 아닌지라 2005년에 발간된 책임에도 오래된 논문은 96년에 쓰여진 것이 있을 정도라 '같은 문제를 현재적 시각에서 보면 어떻게 봐야 할까?'를 생각하게 되는 아쉬움을 있었지만, 여전히 이 분야에 대한 '공부'가 절실한 나에게는 또 한 권의 소중한 양식이 되어준 책이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저자의 '글투',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단어나 표현의 선택'이었는데 보통의 논문이라면 좀 더 가치중립적인 성격의 표현를 사용할만한 부분에서 거리낌없이 자신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표현을 사용하는 듯한 부분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런 느낌을 갖고 나서 다시 어떤 단어들이 있는지 훑어보니 막상 그런 단어가 딱 눈에 띄지는 않는다! 아마도 단어보다는 규범적인 성격이 있는 문장에서 단정적인 어미를 사용한다든가, 역사적 논란이 있는 사건에 대해 단언하는 부분이라든가 이런 것들이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좋게 느껴졌는데, 논문이라는 것이 어차피 어떤 주장을 하는 것이라면 단정적인 표현들이 좀 더 매력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덜 아카데믹하게 느껴질 수는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오랜만에 '편안하게'(아무래도 이론적인 논의가 아닌 현실에 대한 논의니만큼) 읽은 '불편한'(다루는 내용이 즐거운 내용은 아니니까) 책이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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