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국가의 사상과 이론
국내도서>전공도서/대학교재
저자 : 라메쉬미쉬라 / 남찬섭역
출판 : 한울아카데미 2011.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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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지국가를 보는 시각을 다루는 책으로 내가 최근에 읽은 미쉬라의 <<복지국가의 사상과 이론>>은 복지국가에 대한 여러 관점을 중립적 시각에서 다룬 후 현실에서의 복지국가는 어떤 모습인지를 더듬어보는 책이었다.(
2012/02/14 - [감상] - 복지국가의 사상과 이론 (라메쉬 미쉬라 저 / 남찬섭 역 / 한울아카데미) 참조
) 그 책이 다룬 관점들은 복지행정학 관점, 기술결정론(수렴론) 관점, 기능주의 관점,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관점이었는데, 저자는 마르크스주의 관점을 다루며 마르크스주의적 접근은 체계론적 분석집단행위적 분석을 결합할 수 있다는 것이 (기능주의와 비교할 때) 장점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집단행위적 시각을 포기하고 기능주의적(, 체계론적) 분석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며 아쉬움을 표현한다. 오늘 소개할 이안 고프의 이 책, <<복지국가의 정치경제학>>미쉬라의 아쉬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의 대답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물론 고프의 시각이 마르크스주의자 일반의 시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실제로 고프는 이윤율 저하 경향성의 법칙이라든가 공황 분석과 같은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관점을 결하고 있다는 부분에서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며, 이에 대해 역자는 고프가 신리카도주의적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역자후기 참조.) 고프는 마르크스주의 시각에서 미쉬라가 아쉬워한 두 부분을 모두 충분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이 조망하는 복지국가의 키워드를 하나만 꼽으라면 모순혹은 양면성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복지국가의 두 얼굴


마르크스주의 시각에서 복지국가를 바라보며 저자는 복지국가가 양면성을 가진 체계임을 강조한다. 복지국가는 사회복지를 향상시키고 시장의 횡포에 대항하는측면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인간을 억압/규제하고 자본주의 경제의 요구에 적응시키는측면도 가지고 있다. 사실 자본주의를 소위 시장 만능주의라고 하는 체제로 파악할 때 시장 질서에 따른 분배가 아닌 다른 방식의 분배(사회복지를 통한 분배, 부분적으로나마 욕구에 따른 분배)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모순인데,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자체로부터 기인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마르크스가 가치법칙이라고 말한 비정한 시장력의 힘으로 모든 개인이 규율 되는 체제인데, 이 안에서 개개의 노동자는 시장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하나의 상품이 되며, 지배계급은 마치 자본을 축적하도록 강요된 것처럼 탐욕스럽게 자본의 확장을 위해 움직인다. 당연히 자본주의에서는 재화나 서비스의 분배 과정 또한 이와 같은 시장 질서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인간을 시장의 힘에만 맡겨두게 되면 자본주의 자체의 지속성이 담보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노령, 산재, 실업, 가족의 붕괴와 같은 자본주의 산업사회가 초래한 위험들은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상품인 노동력을 재생산하는데 심각한 장애가 된다. 따라서 사회는 어느 정도가 되었든 시장질서에서 벗어난 욕구에 따른분배 방식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이것이 제도화 된 것이 복지국가이다. 결국 자본주의는 그 자신의 유지를 위해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체제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 설명은 하나의 중요한 요소를 결하고 있다. 바로 복지국가의 형성에서 계급갈등의 역할이 그것이다. 이 부분은 뒤에 살펴보도록 하자.) 그러나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적인 것자본주의적이지 않은 것은 충돌하게 마련이다. 다시 말하면, 복지국가가 성장하면 할수록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위협하게 된다는 말이다.

 

복지국가의 기원 계급갈등과 체제의 요구

복지국가가 자본주의를 어떻게 위협하게 되는 지를 다루기에 앞서서 복지국가라는 체제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위의 설명에서 배제되었던 계급갈등의 역할에서 출발하자. 자본주의는 그 체제의 특성상 자본의 이해와 대립되는 이해를 가진 계급 즉 노동 계급을 대량으로 발생시키게 된다. 노동자 계급은 대규모 공정이라는 일관작업의 환경 하에서 집합적 성격을 갖는 노동을 통해 조직화 역량을 갖추어 나가게 되며, ‘착취라는 자본주의의 본질로 인해 숙명적으로 자본가와의 계급대립을 발생시키게 된다. 더구나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중요한 특성, 즉 선거에 기반한 민주주의라는 특성은 (물론 이 또한 공짜로 주어진 것은 아니다. 보편적인 선거권 확립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자유주의 좌파 세력과 연대하여 싸웠는지는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대의제 구조 내에 노동자의 대표를 등장시키기까지 한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노동 계급을 자본주의 체제 내로 포섭하지 않으면 혁명이라는 – 1789년 프랑스 혁명 후 자코뱅 독재를 목격한 이래 모든 부르주아에게는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공포인 파국을 가져오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노동계급을 자본주의 체계 내로 포섭해야 하는데, 바로 이 포섭의 방법이 바로 복지국가이다. 어떤 경우는 노동 계급의 압력에 의해 또 어떤 경우는 예상되는 노동 계급의 압력을 사전에 약화시키기 위해 사회정책을 도입하는 식의 다양성은 있지만, 어쨌든 노동 계급의 계급투쟁에 대한 대응이라는 것은 대부분 국가에서 복지국가를 향한 움직임이 시작된 중요한 원인이다.

       복지국가는 분명 '부분적으로는' 조직화된 노동운동으로 인한 계급투쟁의 성과이다.

그러나 복지국가가 순수하게 조직화된 노동운동의 성과물인 것만은 아니다. 개별 자본가들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는 안돼!’라고 외친 한국의 한 자본가를 기억하라. 그 자본가의 눈에 흙이 들어간 지 오래지만 그 독점자본의 사업장에는 아직도 노조가 제대로 없다.) 자본가 전체의 이익을 생각할 때는 노동조합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인정과 복지정책의 어느 정도의 시행은 필수적이다. 이는 비단 복지라는 탈출구가 없다면 혁명을 불러올 수 있다는 공포 때문만은 아니다. 자유방임주의가 득세하던 19세기 영국의 공장 현실은 비참함 그 이상이었다. 생산비를 절감하기 위한 자본가들의 노력은 생존선 이하의 임금을 받으며 하루 12시간이 넘는 노동에 시달리는 아동들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었고, 이는 자본주의의 가장 중대한 투입요소인 노동의 재생산을 방해하는 지경에 이르러 자본가 전반의 이익 기반을 훼손할 정도가 되었다. , 개별 자본가의 이익이 무제한 관철되도록 놔두었을 때 전체 자본가의 이익기반은 파괴되고 결국 이는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을 위태롭게 하는 결과를 낳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공장법과 같은 최소한의 개입는 노동운동이 없더라도 자본주의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결국 미쉬라의 말처럼 계급갈등체계특성은 모두 자유방임주의국가를 복지국가로 이끄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까지 복지국가로 움직일 것인가?’를 놓고 자본과 노동은 또 한 번 힘겨루기를 해야만 하겠지만.

 

국가 자본의 이익 실현과 상대적 자율성

이 설명에서 개별 자본가의 이익이 아닌 전체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구가 바로 국가이다. 사실 국가는 자본주의의 형성에서부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수십 년간 신자유주의의 세례를 받은 결과 우리는 흔히 시장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이고 규제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하지만 사실 시장경제의 출발은 조금도 자연스럽지 않았다. 시장경제는 이른바 고전경제학의 투입요소인 토지, 노동, 자본이 시장에서 제한 없이 거래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이전의 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그 때의 사람들은 수많은 공유지를 가지고 집산적 생산을 하고 있었으며, 공동체는 개개인에 대한 일정한 자유의 제약보호기능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었다. (바람직한 경우를 보여주는 예는 아니지만, 중세의 농노제를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농노제 하에서 농노는 거주이전의 자유를 비롯한 갖가지 자유를 제한 받고 있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 어떤 이유로 인해서든 생존에 위협을 받게 되었을 때 영주로부터 최소한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장치들은 모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현에 장애일 뿐이었고 따라서 해체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역할을 수행한 것이 국가 , 정치권력이었다. 자본주의는 자연스럽게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이전 사회를 권력의 힘으로 폭력적으로 해체하며 등장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유를 가질 수 있었다. 비록 못 가진 사람에게 그 자유는 단지 굶을 자유일 뿐이었지만. 그리고 그 자유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거래에 의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형성의 중요한 근간이 된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일단 형성되게 되면 착취가 경제체제 내에서 자동적으로 실현된다는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잉여가치의 수탈은 의식적인 강제 없이도 시장기구의 힘으로 자연스럽게이루어진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경제정치로부터 분리하고, ‘사적인 것공적인 것과는 다른 것으로 취급하게 되는 상태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분리된정치는 분리된 국가구조’,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 국가가 된다. 물론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주어진다. 만약 국가가 이 범주를 넘으려고 할 때 자본은 보다 유망한 자본축적의 중심지로 이동하게 되고, 이는 (적어도 단기적인, 그러나 심각한) 경제적 난관으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에 국가는 (혁명을 일으키는 상황이 아닌 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범위 내에서 움직인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지구적차원의 체제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구조적 속박이며, 국가의 자율성이 상대적인 이유이다.

그렇다면 상대적 자율성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위에서 설명한대로 국가는 상대적 자율성을 갖기 때문에 개별 자본의 단기적 이익이 아닌 전체 자본의 중/장기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 , 아무리 유력 자본가가 내 눈이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돼!’라고 외치더라도 노조의 존재가 자본주의 전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면 노조를 허용하는 정책이나 제도를 시행할 수 있는 것이 국가가 가진 상대적 자율성인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은 본질적으로 한계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피지배 계급에게 국가는 일정한 속박 내에서나마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들을 개선할 수 있는 중요한 가능성이 되며, 그 결과가 바로 지난 세기 자본주의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복지국가이다.

 

복지국가는 어떻게 위협이 되는가?

자본주의와 복지국가가 어떻게 결합되는가에 비하면, 복지국가가 어떻게 자본주의의 위협이 되는가(다시 말하면, ‘복지국가의 위기는 어떻게 도래하는가?)에 대한 저자의 논의는 빈약하다. 논의가 타당성이 약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양적으로 빈약하다는 말이다. 오히려 저자는 위기의 진짜 원인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보다는 사회지출의 증가를 70년대 경제위기의 진정한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이 왜 불완전한가?’에 대한 논의에 더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다. 저자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이른바 복지국가가 생산성 저하를 초래한다.’는 주장은 이렇다. 경제에는 시장부문비시장부문이 있는데 시장부문은 시장판매를 위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모든 경제적 활동으로 이루어지며, 비시장부문은 그 외의 것들, , 국방, NHS (국가 건강 서비스, 이 장에서의 모든 논의는 영국을 예로 들어 이루어지고 있다.) 등 주로 국가/공공 부문의 활동들로 구성된다. 이 중 국가 전체의 소비재, 투자재, 수출재 등의 수요총량을 공급하는 것은 시장부문이며, 따라서 시장부문이야말로 경제에서 유일하게 생산적인부문이다. 따라서 비시장부문에서 일하는 비생산적 노동자들의 소득은 생산적 부문이 생산한 시장부문생산물의 구입을 위해서만 지출될 수 있다. 그 결과로 비생산적부문의 국가고용 증대는 시장부문 산출의 몫을 축소시킴과 동시에 시장부문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킨다. 또한 국가지출의 증대는 시장부문에 대한 조세부담의 증대를 의미하며, 이는 결국 시장부문의 이윤에 의해 부담된다. 결국 복지국가가 초래한 국가와 공공부문의 확대는 ① (생산적인) 시장부문으로 가야 할 노동력을 (비생산적인) 비시장부문으로 돌리고, ② 시장부문의 산출부담을 증가시키며, ③ 조세부담으로 시장부문의 이윤을 축소시키는 3중의 부담을 시장부문에 전가하는 방식으로 산업기반을 약화시키고, 저성장과 무역적자의 원인이 된다.

    복지국가에 조종을 울린 '철의 여인' 마가렛 데처. 메릴스트립의 싱크로율이 후덜덜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의 파국을 이야기하는 이 시기에 왜 하필 그녀가 영화화된 걸까? 

저자는 복지국가를 저성장의 원인으로 몰아세우는 이런 주장이 타당하지 않음을 여러 각도에서 논증한다. 첫째, 비시장부문의 활동이 생산하는 사회적 임금집합적 소비는 그 자체가 생산적이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노동력을 재생산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를 공급하게 됨으로써 시장부문에서 시장임금으로 지급되어야 할 비용을 감소시키므로 비시장부문의 모든 활동이 시장부분의 이윤을 감소시키는 형태를 결과한다는 분석은 옳지 않다. 둘째, 예를 들어 NHS와 같은 필수 서비스가 국가에서 운영될 경우 민간에서 운영되는 것과 달리 소비자가 NHS에 지급할 비용에는 이윤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는 소비자의 후생을 증진시키거나, (만약 시장임금이 이와 같은 부분을 반영하여 낮아지거나 덜 상승하는 식으로 반응할 경우) 시장부문의 이윤을 증가시키게 된다. 이는 시장부문에서 NHS를 공급했을 때의 이윤과 같으므로 이윤의 총량은 같지만 (NHS를 공급하는 자본가가 없기 때문에 사회의 전체 자본가 수가 감소함으로써) 이윤율을 오히려 더 높아지는 결과가 된다. 셋째, 국가가 공급하는 사회서비스는 재생산적인 것 (예를 들면 교육, 보건 같은)비생산적인 것 (주로 사회통제를 담당하는 서비스, 예를 들면 군대, 경찰과 같은)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중 재생산적인 것은 장기적으로 시장부분의 생산 증대에 기여하게 되며, 따라서 이 부분의 비중을 높일수록 사회서비스는 그 자체로 생산적일 수 있다.

그렇다면 저자가 생각하는 1970년대 복지국가의 위기의 본질은 무엇일까? 저자는 복지국가의 위기는 전후 계속되어온 장기호황자체에서 싹튼 것이라고 말한다. , 전후의 경제적 호황은 산업예비군을 고갈시켜 노동운동의 힘을 강화시켰고 강력해진 노동운동은 임금을 상승시켜 인플레이션 압력을 증가시켰다. 한 편으로 유럽과 일본의 선진국가들은 미국의 기술수준을 따라잡음으로써 미국 자본의 경쟁을 증대시켰고, 이는 미국 자본의 이윤압박을 증가시켜 미국의 헤게모니 하의 국제질서라는 기존의 국제적 축적체제를 뒤흔들었다. 한편으로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국가지출은 증대했는데 이에 대한 재원조달시도는 다시금 인플레이션 압박을 증가시키게 된다. 결국 불황에 대처하는 국가지출확대라는 케인즈주의 경제학의 대응책은 인플레이션이라는 암초를 만나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었고 이것이 위기의 본질이다. , ‘복지국가는 위기의 한 측면일 뿐이지 이것이 위기의 중요한 원인도, 결과도 아니라는 것이다.

 

나가며. 복지국가의 미래는?

이와 같이 복지국가의 본질과 기원, 그리고 위기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고찰을 마친 저자는 위기에 봉착한 복지국가의 미래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저자는 후기에서 복지국가는 자본주의의 피조물임과 동시에 자본주의 속의 사회주의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한 번 복지국가의 양면성이다.) 그리고 복지정책이 가진 긍정적인 측면들을 보호하고 확대함과 동시에 복지정책의 부정적 측면들은 노출시켜 척결해야 한다는 (공자님 말씀 같은) 교훈을 던지며 글을 마무리한다. ‘복지자본주의에서 복지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바란다는, (‘어떻게가 빠져 있기에) 다소 갑작스러운 문장을 끝으로. 결국 복지국가의 과거와 현재를 일관성 있게 조망한 저자로서도 복지국가의 미래는 말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이 책이 쓰여진 시점부터 20여 년을 더 살아온 나로서는 당시의 저자가 몰랐던 복지국가의 미래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다. 70년대를 거치며 복지국가는 저자가 애써 증명하려 했던 바와는 달리 경제위기의 주범이자 비효율의 상징으로 몰렸고, 그 결과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좌파조차 (기존의 복지국가와 자유방임주의 사이의) 3의 길을 외치며 사실상 신자유주의의 조타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되었다. 사실 70년대의 위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다. 저자도 지적한 것처럼 노동운동의 강화와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 압박은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국가의 비대함과 그로 인한 비효율은 신자유주의 진영에서 주장한 것과는 달리 정말 위기의 원인이었는지 잘 밝혀지지 않은 것 같다. 한편 신자유주의 진영에서는 은폐했으며, 저자도 (적어도 이 책에서는) 다루지 않은 위기의 또 하나의 측면이었던 자본의 독점자본화는, 위기의 원인으로 주목 받지 않았던 덕분에 그 후 이십년동안 신자유주의의 시대를 거치며 더욱 증폭되어 오늘날 또 다른 위기의 원인이 되고 있다. (1970년대 인플레이션 압박은 노동의 임금상승도 있지만, 독점자본화에 따라 가격의 결정이 시장이 아닌 자본에 의해 이루어짐으로써 생산비 상승이나 임금인상이 이윤을 잠식하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가격의 상승으로 이어졌다는 측면도 있다. 또한 산업기반 약화의 원인은 신자유주의의 주장대로 국가의 비대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업자본이 덩치를 키우며 초국적 금융자본화된 것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복지국가는 무엇인가? 지난 30년 간 지구적 자본주의를 운영한 신자유주의가 실패했으니 이제 다시 복지국가로 돌아가면 되는 것일까? 30년 전의 경제위기를 몰고왔던 원인들은 해결되었는가? 복지 자본주의의 전성기를 열었던 지속적인 생산의 증대는 과연 돌아올 수 있는 것일까?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으로의 이행이라는 산업 조건의 변화는 어떠한가? 인구구조의 변화와 환경의 파괴, 그리고 석유의 고갈이라는 잠재적 위협들은 복지국가와 어떻게 어울릴 수 있을까? 2008년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건제한 초국적 금융자본은 과연 복지국가로의 회귀를 용인할까?

이안 고프 같은 이도 복지국가의 미래를 조망하지 못했는데 내가 이런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을 리 없다. 다만 한 가지만 이야기하고 싶다. 70년대 케인즈주의 복지국가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 마땅히 이에 대한 대안은 시대적 변화를 담은 새로운 비전이었어야 했다. 하지만 선택된 비전은 고전적 자유방임주의의 재판일 뿐인 신자유주의였고, 결국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낳았을 뿐이었다. 또 다른 위기에 봉착한 지금, 어떤 이유에서든 30년 전 폐기되었던 체제를 다시 들고 나오는 것인(물론 적어도 복지국가의 30년의 신자유주의의 30년 같은 야만의 세월은 아니었으니 좀 나을 수는 있어도) 그리 현명한 대안이 아닐지도 모른다. 고프의 말처럼 복지국가의 긍정적 측면을 담되, 새로운 시대의 질서가 될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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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에 있었던 여러 가지 정치 이벤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단연 오세훈 전 서울 시장의 보편적 무상급식 몽니에 이은 셀프 탄핵과 그 후 야권연대에 기초한 시민운동가의 서울 시장 선출,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김어준 딴지 총수의 표현을 빌자면) ‘역사상 가장 빨리 시작된 대선 레이스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가카 (여러 가지 의미로) ‘삽질이 자리하고 있지만, 그 외에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보편적 무상급식이라는 지난 지방선거와 서울시장 재보선을 관통한 (한국에서는 보기 드물게 선거의 핵심 어젠다가 된) 복지정책 논란이다. 전근대적ㆍ중상주의적 재벌 위주 경제구조라는 한국의 특수성이 전세계적인 신자유주의의 돌풍이라는 보편성을 만나 대다수 서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어온 이래, 마침내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왜곡하는 요소는 구조적, 혹은 적어도 제도적인 문제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유력한 대안은 복지국가라는 (적어도 MB뉴타운돌이들에게 투표할 때보다는 훨씬) 진일보한 생각에 접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2011년을 뜨겁게 달군 오세훈 전 서울 시장의 "셀프 빅엿", 많은 것의 출발점이 될 것같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황금기라 불리는 50~60년대 성립된 서구의 복지국가를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을 것 같다. 우선은 더 이상 고도성장 기반의 완전고용이라는 복지국가의 전제조건이 성립할 수 없다는 국제적 환경의 차이를 고려해야 하며, 노동자 계급의 권력자원 동원이 어렵고 극소수 재벌위주의 생산체제를 가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노동시장의 이원화 문제가 심각한 한국적 특수성도 고려해야 한다. 평범한 시민의 입장에서 이런 것들을 다 고려해서 어떤 대안을 생각해 내기란 물론 요원한 일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가 막연히 말하는 복지국가가 어떤 생각에 기초하여 이루어진 체제이며, 그것이 (우리보다 앞서 나간) 서구의 국가들에서 어떻게 작용했는지에 대한 이해 정도는 가지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야 정치가들이 외치는 복지가 진정성을 가지고 실천방안까지 고민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표를 모으기 위한 캐치프레이즈일 뿐인지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복지국가에 대해 좀 더 편안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다른 책들도 많지만, ‘복지국가를 만들어낸 생각들을 들여다본다는 측면에서 라메쉬미쉬라의 복지국가의 사상과 이론은 충분히 좋은 책이다. 재미있고, 충실하며, 무엇보다도 얇다. 좀 오래된 책이지만 한국사회가 복지라는 측면에서 워낙 뒤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낡았다는 느낌도 전혀 들지 않는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전반부는 복지를 보는 여러 가지 시각들을 설명하고 있다. 사회개혁으로서의 복지(사회행정적 접근), 사회적 시민권 이론, 수렴이론(기술결정론), 기능주의 관점, 마르크스주의 관점으로 나누어 각자의 시각이 복지를 어떻게 보고 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이고 한계는 무엇인지를 일일히 짚어준다. 사회정책에 관한 개론서를 보면 거의 용어 설명 식으로 다루어져 있는 이 각각의 입장들을 좀 더 자세히 다루고 있어 복지국가를 설명하는 이론적 배경들을 개괄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뒤이어 후반부에서 이 책은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 사회에서 각각 복지국가가 어떻게 형성되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그 성과와 한계는 어떤지에 대해 설명한다. (이 책은 1981년에 쓰여졌다. 그렇기 때문에 근래 쓰여진 책이라면 담고 있지 않을 사회주의 국가 정확하게는, 소련 의 복지제도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이 책이 소중한 또 하나의 이유다. 쉽게 접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측면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복지를 다룬 내용 중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자본주의 체제 하 사회정책이 그 사회의 불평등을 완화시키는 효과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전략)… 대부분의 연구들이 지적하고 있는 일반적인 결론은, 계급 간 소득재분배, 즉 사회경제적으로 상층에 속하는 집단으로부터 하층에 속하는 집단으로의 소득재분배의 정도는 미약하며, 따라서 소득이전의 성격은 계급 내 소득이전 또는 삶의 주기에 따른 소득이전의 성격을 훨씬 더 많이 띠고 있다는 것이다… (후략)

   “…(전략)… 사실상 재분배효과가 미미하다는 사실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서비스가 발달할 수 있는 전제조건일 수도 있다.” (여기에서 사회서비스는 복지를 일반적으로 구분하여 사회보험, 공공부조, 사회서비스로 나눌 때의 사회서비스가 아닌 민간 차원의 복지와 구분되는 개념으로의 국가복지를 의미한다.)

   “…(전략)… 다시 말하면, 지배적인 제도와 가치가 변화하지 않는 한, 한 가지 구조에서의 개혁은 다른 구조에서의 보상적인 변화에 의해 부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후략

   저자의 이야기대로라면 재분배’, , ‘불평등의 완화로서의 사회복지제도는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제도와 가치가 불평등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사회복지제도 또한 그 전제를 크게 거스르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존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지국가가 그 한계를 넘어서려할 때, 복지국가는 자본주의 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힘에 의해 교정될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오일쇼크를 겪으며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힘을 얻고 대부분의 서구 국가들에서 복지국가가 약화되어 온 현실을 감안할 때 뼈아프지만 타당해 보이는 저자의 지적은 복지국가를 우리 사회의 대안으로 생각해온 이들의 가슴을 때린다. 결국 불평등의 의미 있는 교정은 일찍이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처럼 자본주의의 테두리 안에서는 불가능한 것일까? 복지국가는 노동자와 서민으로부터 체제에 대한 충성심을 끌어내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장치일 뿐일까?

                              국가별 사회정책에 의한 소득재분배 효과. 저자의 논의와 달리
                        국가에 따라 상당한 수준이다. 저자가 주로 염두에 두고 논의를
                        전개하는 국가가 영국임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복지국가가 의외로 재분배적 효과가 별로 없다는 것을 지적할 뿐 이런 문제에 직접적으로 답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복지국가를 부정적이지만은 않게 볼 수 있는 몇 가지 이야기를 책 속에 담고 있다. 그 중 한가지는 복지제도가 재분배적 기능은 약하다고 해도 삶의 기회를 확대하는기능은 상당하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NHS 이전과 이후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의료서비스 이용 기회의 차이라든가, 공공주택의 공급이 주거의 평등을 실현하지는 못했더라도 최소한의 주거환경을 제공하는 기능은 수행했다는 것과 같은 내용들이다. 재분배는 못했어도 극단적인 불평등은 다소간 감소시켰다고 할까.(실제도 통계적으로도 복지국가는 지니계수를 개선하는 쪽보다는 빈곤율을 낮추는 쪽에서 훨씬 더 높은 성과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좀 더 적극적으로 불평등의 완화를 이루고 싶은 이들에게는 여전히 실망스럽지만, 사회주의 사회의 복지를 다룬 부분에서 저자는 약간의 희망을 남겨준다.

 “…(전략)… 그러나 사회주의적인 복지는 그것이 가진 몇 가지 특성으로 인해 재분배가 수직적이 될 가능성을 보다 많이 가지고 있다. 사회서비스 가운데 연금이나 상병급여 등과 같은 이전급여는 의료나 주택 등과 같은 현물급여에 비해 재분배의 정도가 적다. 이는 사회주의에서나 자본주의에서나 이전급여는 임금에 연계되어 있는 데 비해 현물급여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물급여에 대한 지출은 재분배적일 가능성이 보다 많다… (후략)…”

 흔히 복지국가하면 1순위로 떠올리는 스웨덴으로 대표되는 사민주의 모델의 복지국가는 다른 유형의 복지국가에 비해 사회서비스(국가복지의 의미에서의 사회서비스가 아닌 사회보험, 공공부조와 구분되는 개념으로서의 사회서비스, 이 책에서 저자의 표현을 빌면 현물급여에 대한 지출’)의 비중이 특히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알다시피 이들 국가들은 시장경제체제하에서 작동하는 어느 국가보다 평등주의적이면서도 성공적인 경제적, 사회적 모델을 만들어왔다. 여기서 또 한가지 기억할 부분은 현재 한국의 복지제도를 공공부조, 사회보험, 사회서비스로 나눌 때 제도적 외형이라도 어느 정도 갖추어진 처음의 두 가지에 비해 사회서비스는 가장 낙후된 영역이라는 점이다.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완화시키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복지를 고민할 때 고려해야 할 하나의 중요한 지점이 아닐까?

 

사회주의 국가의 복지에 대해 다룬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구조적 모형’(영미권 국가의 잔여적 모형은 물론 대륙유럽을 중심으로 한 발전된 복지국가의 제도적 모형보다도 복지제도의 중요성이 강조되는)으로서의 사회주의 국가의 복지가 갖는 우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동시에 스탈린 체제라는 전체주의 체제가 이를 어떻게 제약하고 왜곡했는지를 설명한다.

 “…(전략)… 전체주의적인 사회주의는 시장에 의해 생성된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을 정치적으로 조건화된 불안정성(비보장) – 순응치 않는 자의 고용과 소득, 주택, 기타 생계수단을 위협하는 으로 대체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보장은 정치적비보장에 압도되어버리는 것이다… (중략) … 복지는 그것이 공민권 및 정치권과 결합될 때 보다 인본주의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후략)…”

 현실사회주의는 전체주의적 요소는, 복지제도 자체가 가진 상대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정치적 불안정과 결합되어 사회통제의 수단으로 이용된 바 있다. 게다가 민주적 통제 없이 이루어진 국가의 비대화는 관료주의의 병폐를 심각하게 초래한 바, 결국 사회주의 국가의 복지체제가 가진 우위는 상당부분 훼손되고 만다. 이는 비록 민주화는 되었지만 여전히 관료적 제도가 사회 제도 곳곳에 산재해있는 우리 사회에 있어서도 함의하는 바가 작지 않을 것 같다.

 

지금까지 라메쉬미쉬라의 사회복지의 사상과 이론의 개략적인 내용과 그 중 내가 강한 인상을 받은 부분들에 대해 정리해보았다. 끝으로 책을 덮고 난 후의 소회로 글을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비록 나의 사회정책에 대한 지식 수준은 아직 일천하지만 이 분야의 책들을 읽으며 내가 가졌던 가장 큰 의문은 과연 앞으로의 사회에서 복지국가의 모델이 지속 가능할 수 있을까였다? 앞에도 언급한 것처럼 복지국가는 가장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 받는 스칸디나비아 모델을 포함해서 공통적으로 지속적인 경제의 성장과 완전고용을 전제로 한 국가 모델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과연 완전고용을 창출한 만한 지속적인 경제의 성장이라는 것이 앞으로도 지속가능한가? 비단 세계화나 서비스업 위주의 경제구조로의 변화, 그리고 그로 인한 고용 없는 성장의 문제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더 근본적으로 피크 오일이후의 세계, 즉 값싼 석유에 기초한 대규모 산업들의 경제성이 떨어져가는 미래의 세계에서 복지국가는 살아남을 수 있는 모델인가? 복지국가 또한 그것이 끊임없는 생산과 소비의 확장을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의 다른 얼굴이라면, 이 또한 신자유주의와 함께 한계에 봉착한 것은 아닐까?

아직까지 논란은 있지만, 피크오일은 분명 다가오고 있는 위협이다.

 이 책이 나의 이런 질문들에 대답을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책은 또 다른 각도에서의 질문을 던져주었다. , 복지국가에 대한 보다 더 전통적인 질문, 과연 복지국가는 진정으로 불평등을 완화하고 더 평평한 사회를 만들어 줄 수 있는가? 아니면 단지 부분적이며 비본질적인 개선을 통해 자본주의의 근본모순을 은폐하고 인민들의 충성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장치인가? 복지국가가 이데올로기적 장치가 아닌 진정한 진전이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사실 한국사회의 현실을 생각할 때 위의 두 가지 질문은 모두 사치인지도 모른다. 생태주의(피크오일에 대한 이야기는 생태주의와 관련이 깊다.)나 복지국가는커녕 법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서구적 기준에서는) 19세기적인 과제 조차 완료되지 않은 나라에서 지금 여기의과제는 이데올로기적 장치이든 무엇이든 당장 최소한의 개선을 이루어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사적 경험은 지속가능하지 않은 방법으로 당장의 개선을 이룰 때 그 개선은 미래의 다른 개선을 제약하는 조건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시대에서 복지국가나 사회정책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좀 더 깊은 고민에 빠질 필요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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