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자유기업원장이라는 사람의 장하준 비판

Posted at 2012. 5. 9. 00:25// Posted in 시사

자유주의 경제학자의 장하준 비판이라는데, 읽다보니 왜곡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관점이 달라서 그런가? 라고 생각하고 다시 한 번 읽어봤지만 나로서는 아무리 납득해보려고 노력해도 이건 말이 안된다 싶다.

기사링크::신자유주의는 악이 아니다(한겨레21)

1. 발전국가 시절의 한국과 현재의 중국이 (일종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경제발전했다는 주장

- 한국에 대해 이 분은 '수출 중심 전략'(남미의 ISI와 대비되는)이니까 당시로서는 신자유주의라는데, 한국의 경제발전은 GATT체제의 비관세장벽에 대한 느슨한 제약을 기반으로 수출증대 & 수입차단 방식을 사용했다. 이게 신자유주의라면 애덤스미스가 그렇게 비판한 중상주의도 신자유주의다.

- 중국이 개방해서 성공했으니 신자유주의라는데, 물론 폐쇄에서 개방으로 일정부분 나간 건 사실이지만 경제의 중심이 공기업에 있고, 환률조작국 소리를 매번 듣는 나라가 신자유주의라니 어리둥절하다.

- 종합적으로 이 양반은 '대원군식 쇄국' 아니면 다 신자유주의라는 식이다. 그렇게 따지면 케인지언 경제정책도 신자유주의고, 장하준 교수의 주장도 신자유주의다. 그러면 논쟁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니, 이건 자기모순이다.


2. 최근 세계 경제위기는 미국 부동산 버블 탓이고, 이는 신자유주의를 '안해서' 생겼다.

- 부동산 버블이 왜 생겼나? 은행의 채권 금융화에 따른 무분별한 레버리지 추구와 그 와중에 위험도가 높은 주택채권을 증권화한 것이 터진 탓이다. 이는 금융규제 완화에 따른 금융회사의 탐욕과 단기수익추구(주주이익 극대화를 목표로 한)에 근거한 바 크며, 이런 요인들은 대단히 '신자유주의적'이다.

- 부동산 버블이 커지고 있을 때 줄곧 부동산 버블의 위험을 폄하하고 시장은 완전하므로 걱정할 것 없다고 한 이들이 바로 앨런 그린스펀이나 월스트리트를 장악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자들이었다.

- 거품이 신자유주의를 안해서 생겼다고? 아무리 신자유주의자라도 이건 좀 심한 왜곡 아닌가...


3. 복지가 경제에 해롭다는 것은 성장론자나 복지론자가 모두 합의한 것이다.

- 이런 합의가 언제 있었는지 듣도 보도 못했다. 내가 아는 '복지론자'들은 장기적인 시각에서의 인적자원투자, Anti-Cycling Effect, 빈곤예방을 통한 사회안정 유지 등의 이유로 복지가 경제에 이롭거나 최소한 해롭지 않다고 주장한다.

- 물론 그런 복지론자의 주장이 옳은지 아닌지는 논의할 만한 거리다. 하지만 복지가 경제에 해롭다는 '합의'가 있었다는 말은 어느 복지론자와 귀하가 합의하셨는지는 몰라도 왜곡이다.


전 자유기업원장이 쓴 글이라니 이 분의 당파성은 짐작가능하지만 이 분이 이야기하는 '팩트'에 대한 왜곡이 너무 심하다  싶어 읽으며 짜증이 났다. 물론 나도 당파적이니까 내 이야기가 객관적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 분의 이야기는 정도가 너무 지나쳐서 의도적인 왜곡이 아니라면 심각한 무식으로 보일 정도다.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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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는 해체되는가
국내도서>사회과학
저자 : 폴 피어슨 / 박시종역
출판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6.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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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복지국가는 19세기 말에 그 희미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이래 20세기 초의 격변 -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대공황 - 을 거치며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기본으로 자리를 잡았고, 그 후 30년간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열었다. 그리고 70년대 중반 Oil Shock와 그로 인한 Stagflation을 겪으며 보수주의적 정치세력의 집중포화를 받게 되고, 결국 영·미를 중심으로 쇠퇴의 수순을 밟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이 시기 - 즉,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불어닥친 1980~2000년대 - 에 복지국가가 의미있게 쇠퇴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의 관점이 다르다. 이를테면 여기서 리뷰할 폴 피어슨 같은 학자는 복지국가는 공격받고 상처받았지만 의미있는 정도의 후퇴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는 대략 다음과 같다.

  즉, 복지국가 팽창기에 팽창을 주도했던 세력 - 노동조합과 사민주의 정당 - 은 약화되었지만 기존의 복지국가를 구성하던 프로그램들은 새로운 지지세력을 형성하였을 뿐 아니라, 축소 자체가 갖는 정치적 특성 - 신뢰 획득의 정치가 아닌 비난 회피의 정치라는 - 으로 인해 레토릭에 비해 실제의 축소는 제한적이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피어슨은 권력자원 동원의 측면이나 권위의 집중화 정도, 정부의 행정/재정능력과 같은 복지국가 팽창을 설명하는 전통적인 관점들은 축소의 정치의 특수성으로 인해 그 실효성이 약하며, 따라서 축소의 과정에서는 기존의 프로그램 구조가 어떠했느냐가 핵심이 된다고 말한다. 프로그램별로 상이했던 축소의 결과나 권위가 집중화되었던 영국에서의 개혁이 꼭 미국보다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없었다는 부분 등이 그 근거가 된다.

  그렇다면 축소의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피어슨은 기존 프로그램의 구조가 현재에 어떻게 작용하는가? - 즉, 정책 피드백의 문제를 그 핵심으로 내새운다. 즉, 축소의 과정에서는 행위자가 정치적 비난의 회피를 위해 눈가리기 전략, 분할전략, 보상전략과 같은 수단을 동원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수단이 어느정도 성공적일지에 프로그램의 구조가 영향을 많이 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국의 연금제도는 프로그램의 분절화로 인해 그 이해관계자에게 분할전략을 시도하기 유리했으나 미국의 연금제도는 포괄적 성격의 단일 프로그램으로 이와 같은 전략의 활용이 힘들었으며, 이와 같은 요소가 해당 프로그램의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축소의 정치에서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또한 정책 피드백에서 살펴볼 부분은 무엇인지, 실제 프로그램별 축소 및 체계적 축소는 아래 테이블들을 참고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두 가지만 짚어보고 글을 마치겠다.

  첫째, 저자는 프로그램적 축소의 결과와 체계적 축소의 결과를 살펴보고 이들을 기준으로볼 때 복지국가에 의미 있는 축소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매우 타당하며 탁월한 연구성과이지만 한 편으로 아쉬운 점은 이와 같은 변화가 정책 수혜자의 삶에 어떻게 결과하였는지에 대한 분석이 있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저자는 자산조사 소득지지 프로그램과 관련하여 프로그램 축소의 결과 실질적인 축소의 폭은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70~80년대의 실업과 빈곤의 증가 양상과 맞물려 이와 같은 프로그램의 변화는 영국과 미국 저소득층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를 고려할 때도 '변화의 폭은 크지 않았다.'고 단정짓는 것이 적절한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특히 불평등과 빈곤을 측정하는 각종 지표상 20세기 이후 줄곧 감소해오던 불평등과 빈곤이 7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증가세로 돌아서는 중요한 변화가 있었는데, '인민의 삶'이라는 차원에서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라고 생각된다.

  둘째, '복지국가'라는 것이 적어도 어느 정도 수준의 물질과 기회를 그 국가의 구성원에게 분배하는 것이라고 할 때 70~80년대의 복지국가를 구성하는 제도들에 '큰 변화가 없었다.(약간의 축소만 있었다.)'는 것이 과연 '복지국가는 건재하다.'고 결론지을 만한 것인지에 대해 약간의 의구심이 있다. 다시 말하면 '완전고용'과 '포드주의'가 함께 작용하던 복지국가의 전성기의 제도는 70~80년대에 일어난 경제적 변화와 이로 인한 실업증가, 일자리의 양극화 추세와 더불어 오히려 강화되어야 하는 상황이었음에도 오히려 축소되거나 유지되었다는 것은 '복지국가가 제공하는 인민의 삶'이라는 차원에서는 중요한 후퇴일 수 있다. 비유하자면, 인플레이션이 진행되는데 급여는 명목급여 수준에서 고정된 것이라고 할까. 복지의 욕구가 크게 늘어나는데 공급이 유지되었다는 것은 복지 제도 자체가 (심각하게) 축소된 것일 수 있다.

  책의 내용을 정리한 아래 테이블들로 리뷰를 마친다.

====================================================================================================

1. 축소의 정치에서 고려할 사항

구분

내용

축소의

개념화

① 단기적 삭감 뿐 아니라 장기적 삭감을 고려 (점감주의전략, 수급자격 강화)

프로그램의 지출 뿐 아니라 구조를 함께 고려 (시장지향성 강화, 잔여주의화)

③ 프로그램적 축소 뿐 아니라 체계적 축소를 함께 고려

- 돈줄 옥죄기 : 세금삭감 및 미래 조세증가 방지제도, 조세의 가시성 강화

자산매각, 극심한 적자재정, 복지국가 외 항목의 지출 증가

- 사회복지에 대한 대중의 애착 약화 : 자유시장 이데올로기의 강조 등

- 복지국가 옹호 정치세력 약화 : 노동조합, 이익집단 등

축소의

위험

● 축소의 정치는 신뢰획득의 실천이 아닌 비난 회피의 실천

- 축소 비용은 집중적, 혜택은 분산적으로 표출

- 유권자의 ‘부정편향성’

⇒ 정책목표(복지축소)와 선거승리의 갈등 발생

축소비용

최소화

● 반대세력의 동원가능성 최소화를 통한 축소에 대한 정치적 반발 감소

눈 가리기 전략 : 인과 고리의 차단을 통한 책임 모호화

- 부정적 결과의 돌출성 완화 (예. 점감주의적 삭감)

- 정책과 부정적 결과의 연결고리 약화 (예. 간접세 인상)

- 정책과 의사결정자의 연결고리 차단 (예. 책임 떠넘기기, 삭감의 자동화)

분할전략 : 잠재적 저항 세력을 분할시켜 약화

- 일부 수혜자의 혜택만을 축소

- 서비스 생산자와 소비자의 균열을 유도

보상전략

- 축소의 최대 피해자에게 일정한 혜택을 부여

- 사적 급여의 확대

축소전략

한계

① 눈 가리기 전략 : 효과가 시간적으로 지연되며, 그 사이 정권교체 시 역전 가능

② 분할전략 : 축소 지지자들 또한 소외될 수 있으며, 정책이 비합리화 되는 경향

③ 보상전략 : 비용 부담이 발생하며, 정책이 비합리화 되는 경향

 

2. 팽창과 축소의 국면의 영향요인

 

(1) 권력자원의 역할

복지국가가 탄생시킨 이익집단의 존재로 인해 축소 국면에서 권력자원의 역할은 제한적

구분

내용

영향력

팽창국면

● 노동조합의 권력자원 정도 및 좌파정당의 역할이 결정적

축소국면

● 영/미 공히 노동조합과 좌파정당의 세력이 매우 약화에도 불구하고

축소의 성과는 대단치 않았으며, 프로그램별로 상이하게 나타남

● 축소의 정치는 유권자에게 인기가 없는 정책이라는 점과 복지국가

시대에 형성된 노조와 자율적인 프로그램별 이익집단의 존재

 

 

(2) 정치제도의 역할

정치제도가 축소에 미치는 역할은 복합적이며, 이는 각 프로그램의 특성에 의해 매개됨

구분

팽창국면

축소국면

수평적 통합

통합될수록

유리

복합적 영향

- 유리 : 정책 추진 시 반대파 무산 능력

- 불리 : 축소의 책임이 명확 (인기가 없는 정책이므로)

수직적

통합

통합될수록

유리

복합적 영향

- 유리 : 책임 떠넘기기, 지방정부 간 재정경쟁 유도

- 불리 : 정책 추진력 약화 (축소에 대한 지역의 저항)

정부의

행정능력

높을수록

유리

영향력 낮음

- 축소의 행위자는 관료보다는 정치인 → 행정능력 중요도 약화

정부의

재정능력

높을수록

유리

복합적 영향

- 유리 : 반대자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능력 (보상전략 구사)

- 불리 : 재정적자 문제를 축소의 논리로 삼을 수 없음

 

(3) 정책피드백

새로운 정책이 새로운 정치를 낳는다” (E.E. 샤츠슈나이더)

구분

내용

영향력

팽창

축소

자원과

유인동기

정책구조는 해당 프로그램을 둘러싼 자원과 유인동기를 창출하며, 이는 사회집단의 형성과 활동에 영향을 줌

고착효과

정책은 사회적∙경제적 이해관계자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한 편, 다른 정책대안의 비용을 상승시켜 제도의 경로의존을 발생시킴

정책학습

정책이 채택되면 정책결정 관련 주요 행위자가 해당 정책을 학습하게 되고 이후 유사한 문제에 대해 유사한 제도를 도입하도록 영향

정보효과

정책의 구조는 정보비대칭성을 낳을 수 있으며, 이는 인과고리의 길이에 영향을 줌으로써 축소전략의 구사에 영향을 미침

N/A

 

3. 프로그램 축소의 결과

 

(1) 프로그램 별 축소사례 : 프로그램 별로 상이하여, 일반적으로 알려진 수준 보다는 낮은 축소

구분

영국

미국

축소

사유

축소

사유

연금

- 기초연금, 자산조사P/G, 뒤늦은

소득비례 연금으로 분절화

- 소득비례 연금부분의 미성숙

- 민간연금은 공적연금과 경쟁

⇒ 사적대안 통한 공적연금 축소

에 성공 (잠재적 민영화)

- 단일연금 P/G의 포괄적 성격

- 소득비례 연금 부분의 성숙

- 민간연금은 공적연금을 보완

- 보험금 신탁기금 의존 (재정 risk)

⇒ 연동제 변화, 소득세 부과 등

일부 개혁만 성공 (구조적변화 X)

주택

- 광범위한 공공주택 프로그램

- 지방정부의 역할 중요

- 장기적 선행투자 P/G로 축소의

효과의 가시성이 낮음

⇒ 주택매입권을 통한 공공주택

사유화 및 지방보조금 축소를

통한 프로그램 잔여화에 성공

- 잔여적 공공주택 P/G (점증중)

- 권리로서의 수급권 P/G가 아님

- 장기적 선행투자 P/G로 축소의

효과의 가시성이 낮음

⇒ 공공주택 신축을 억제하고 주택

보조금 위주 정책으로 전환함으

로써 성공적 축소

부조

- 포괄적 급부의 범위

- 아동수당, 실업급여 등 보편적

P/G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음

- 중앙집권적 프로그램 구조

- 자산조사 P/G는 이미 잔여화된

상태로 추가 축소 여지 불충분

- 목표간 상충 (근로동기 vs. 재정)

⇒ 재정에 집중하여 점감주의적

축소 전략 구사, 실제 축소는

주택수당을 제외하고는 주변적

- 포괄성이 낮은 급부 범위

- 보편적 프로그램이 별로 없음

- 수직적 분권화된 프로그램 구조

- 자산조사 P/G는 이미 잔여화된

상태로 추가 축소 여지 불충분

- 목표간 상충 (근로동기 vs. 재정)

⇒ 직접적 삭감은 제한적이었으며,

workfare 부분은 오히려 증가,

지방 떠넘기기 전략(신연방주의)

구사하였으나 성과는 제한적

건강

- NHS라는 보편적 건강 프로그램

에 대한 국민의 폭넓은지지

- 민영화의 비용 문제

- 축소의 가시성이 높음

⇒ 공공부문 내부시장 창출로

경쟁원리는 도입하는 수준의

매우 부분적인 개혁

중하

- 공적 프로그램은 제한적으로 존재

- 신탁기금+3자 지불방식으로 재정

문제가 심각한 수준

- 민영화의 비용문제

- 과도한 축소 시 공적 건강보호가

더 심각하게 이슈화될 우려

⇒ 재정문제를 이슈화하여 메디케어

위주의 부분적 축소에만 성공

상병

장애

중하

- 법정상병수장(SSI) 제도

- 민간부문으로의 권한 이양 및

고용주에 대한 보상 전략

⇒ 민영 운영 전환하였으나 공공

비용 지출수준을 그대로이며,

피용자 → 고용자 재분배 초래

중하

- 장애보험(DI) 제도

- 권한을 집중시키는데 성공,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오히려 강력

한 정치적 반발에 봉착

⇒ 부분적 축소 (큰 정치적 대가)

 

(2) 프로그램의 장기적 구조 변화 정도 : ‘위축’은 인정되나 ‘축소’라 하기는 미흡

구분

영국

미국

사회지출 추이(‘78→’99)

공공지출 44% → 40%

사회지출 24% → 23%

공공지출 21% → 23%

사회지출 11% → 13%

잔여화 정도(‘80→’90)

자산조사 비중 18% 수준에서 유지

자산조사 비중 15% → 24%

 

 

4. 체계적 축소의 결과

구분

내용

영국

미국

대중의 여론

복지국가에 대한

대중적 지지

양국에서 모두 여론은 보수 정권 집권 즈음에 가장 나빴고, 프로그램 축소 추신 시 반전

돈줄 옥죄기

지속가능성 낮은 재원 의존

비복지 지출 항목 증가

조세인하 및 증가 장애 증대

통화주의 정책으로 세수는 오히려 증가했고, 조세 가시성도 감소함

조세 가시성을 증가시켰고 감세와 국방비로 재정적자 대폭 상승

정치제도

권위의 집중화 정도

권위가 집중된 체제에서 더욱 강화 (노동당 지역 영향력 약화)

분산화 강화

- 미래정부 개입 제어

- 지방 간 재정경쟁

- 삭감책임 분산

이익집단

복지국가지지 세력

노조는 약화되었으나 각 프로그램별 이익집단은 대체로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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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의 탄생
국내도서>사회과학
저자 : 장석준
출판 : 책세상 2011.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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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가 저물아가는 시점에서 다음 시대를 준비할 때, 그 시대의 등장이 애초에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살펴보는 것은 의미깊다. 인간이 미래를 조망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방법 중 하나가 '역사로부터의 교훈'이기 때문이다.

이 책 '신자유주의의 탄생'은 신자유주의의 몰락 내지는 최소한 위기의 시대에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등장했는가를 이야기한다. 신자유주의의 등장 시점에 '좌파'들은 무엇을 했던가, 신자유주의는 과연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는가, 신자유주의의 위기에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이 책이 상세하게 보여주는 '구조개혁 좌파'의 사례들, 칠레 아옌데 정부, 영국 노동장 정부, 프랑스 미테랑 정부의 예들은 케인지언 복지국가의 좌절 앞에서 좌파 정치세력들은 어떤 것을 준비하였으며, 어떻게 실패하였는지, 그리고 남은 교훈인지를 잘 보여준다. 물론 현 시대의 과제, 특히 한국이라는 지구적 자본주의의 뒤틀린 변종 주변국의 과제를 이런 예들이 보여줄 수는 없지만, 지구적 보편성은 한국적 특수성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기에 이 책이 알려주는 교훈은 소중하다.

자신이 '좌빨'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니 최소한 조중동의 기준으로볼 때 '좌빨'에 해당하는 사람이라면 한 벌 읽어볼만한 책. 사회와 역사를 다룬 책이지만, 무협지 보듯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순식간에 완독했다. 올해 읽은 12권의 책 중 손꼽을만한 재미+가치를 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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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국민 국가가 생활 세계와 지구 질서 사이에서 이 두 층위를 매개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데 주목했다. 국민국가는, 1848년 혁명 당시 프랑스 노동자들이 보여준 것처럼, 생활 세계로부터 출발한 좌파정치가 도전해볼 만한 현실적 목표로 다가왔다. 만약 노동자 세력이 국민국가를 장악한다면, 아마도 이것은 진정한 전 지구적 변혁을 향한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국민 국가가 자본주의 지구 질서의 극복 과정에서 중간 기착지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27

"노동 계급의 즉각적 요구를 경제적 구조 개혁 제안(국유화, 농지개혁 등)과 함께 발전시키고 이 둘을 결합해야 한다. 우리의 경제적 구조 개혁안은 자본주의적 계획에 맞서는 전반적인 경제 발전 계획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이것은 틀림없이 사회주의 계획은 아닐 것이다. 아직 그 조건이 결여돼 있기 대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회주의로의 전진을 위한 새로운 투쟁 형식이자 수단임에 분명하다."
  - 팔레이로 톨리아티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51에서 재인용

"구조 개혁은 현재의 권력관계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은 채 현 체제를 합리화해줄 뿐인 그런 개혁을 말하는 게 아니다. 또한 이것은 (자본주의적) 국가에 체제를 강화할 권한을 위임하는 것도 아니다. 구조 개혁의 뜻은 개혁을 요구하는 주체들 스스로 수행하고 통제하는 개혁이라는 것이다. 농엽 분야에서든, 대학에서든, 소유관계에서든, 지역에서든, 행정 영역에서든, 경제 영역에서든, 그 어디서든 구조 개혁은 항상 새로운 민주적 권력의 중심들을 만들어내야만한다."
  - 앙드레 고르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61에서 재인용

"미국 정부와 초국적 자본은 이렇게 철저히 지구적 맥락에서 인민연합 정부를 바라봤다. 칠레 내의 모든 움직임은 지구 질서의 유지 및 변동과 직결된 것이었다. 전선은 처음부터 지구적이었다. 하지만 위에서 이미 지적한 것처럼 이러한 지구적 전투는 칠레 내의 국가 기구 및 시민 사회라는 무대를 통해서만 가시화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지구적 맥락과 국민 국가의 정치적 결정 사이의 상호 작용이 작동했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93

"우리는 거대한 초국적 기업들과 주권 국가들 사이의 대격돌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후자의 근본적인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결정들은 집단적 이해를 대변하는 어떠한 의회나 기구로부터도 자신들의 행위의 총체적 결과와 관련해 책임을 지거나 규제받지 않으며 어떤 단일 국가에도 의존하지 않는 세계조직들에 의해 간섭받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세계의 전반적인 정치 구조가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 살바도르 아옌데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106에서 재인용

"문제는 인민연합 정부가 민중 권력 운동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데 있다. 인민연합 정부는 산업 코르돈이나 자치 지도부를 사회주의로 가는 민주적, 평화적 길의 역동적인 토대로 발전시킬 구체적 전만을 갖고 있지 못했다.... (중략)... 인민연합은 과도하게 국민 국가 수준의 정치에만 역량을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생활 세계 수준의 정치와 국민 국가 수준의 정치 사이의 직접적인 결합은 제대로 실험해보지도 못했다. 어쩌면 이것이 우파의 강점에 맞설 좌파의 강점이 될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114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이 직접 칠레를 방문해 이 전례 없는 실험을 격려했다. 프리드먼은 피노체트와 서신을 교환하며 독재자의 가정 교사 행세를 했다. 통화주의자들은 군부 파시스트가 짓밟아놓은 폐허 위에서 사용료도 내지 않고 칠레 사회를 실험실로 삼은 것이다. 실제 효과도 있었다. 인플레이션이 진정되었다. 통화주의의 효험이 입증된 듯 싶었다. 덕분에 통화주의를 몇몇 광신도의 학성레서 케인스주의를 대신할 현실 대안으로 위상이 높아졌다. 1980년대에 칠레는 바로 이 처방 때문에 다시금 심각한 경제 위기에 빠지게 되지만 말이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116~117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로 마련된 미결정의 무대 위에서 새로운 체제의 토대를 놓으려는 전략들이 상연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상황을 주도한 것은 이전 체제를 미련 없이 던져버린 장본인, 즉 미국 정부였다. 닉슨 정부는 새로 등장한 달러 본위제의 이점(발권 이익)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미국의 금융 세력에게 기회를 줬다. 미국 민간 은행들이 자유롭게 국제 금융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규제의 족쇄들을 풀기 시작했다. 이 금융 기관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국제금융시장은 급속히 모습을 갖춰갔다. 피터 고완이 '달러-월스트리트 체제'라고 이름 붙이 포스트-브레턴우즈 체제의 두 축이 마련된 것이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126~126

"홀랜드는 국민-대중 경제 시대를 연 케인즈주의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부터 되짚었다. 케인스주의는 고전 경제학이 제시한 자유 경쟁 실서, 즉 '미시micro'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거시macro' 경제라는 새 지평을 열었다.... (중략)... 문제는 국민-대중 경제의 전성기 동안 바로 이 미시/거시 지평으로 환원되지 않는 또 다른 경제 행위자들과 이들의 질서가 출현했다는 데 있다. 홀랜드는 이 새 지평을 '중간meso' 경제라고 규정했다. 미시 경제의 주행위지가 중소 규모 기업이고 거시 경제의 주역이 국민 국가라면, 중간 경제란 곧 독점 대기업의 세계였다.... (중략) ... 거대 자본은 세계 시장으로 활동 무대를 확장했다. 즉, 초국적 자본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해외 이전을 통해 국민 국가의 조세 징수를 피하고 규제로부터 벗어났다. 생산망을 전 세계로 확장한 초국적 기업들이 해외 사업 부문으로 이전하는 자본의 규모가 국가 전체 수출 규모에 맞먹을 정도로 커졌다. 또한 이들은 국제 금융 활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142

"하지만 산업부의 실무는 고위 관료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벤 장관이 지시한 업무를 전반적으로 해태했다. 첫째 이유는 노동당 정부가 단명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장관이 몇 달 안에 다시 바뀔지 모르는데, 굳이 열심히 따를 것까지는 없다는 분위기였다. 둘째 이유는 보다 근본적인 것이었다. 대부분의 고위 관료들이 벤 장관의 산업 정책 비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중략) ... 관료들은 이미 계급 세력 관계에 대한 판단을 바탕으로 국가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선 안 되는 일의 경계선을 그어놓고 있었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154

"칼레츠키의 예언대로, 1970년대 초가 되면 자본주의 중심부에서 노동조합의 역량이 전에 없이 성장한다. 하지만 이것과 동시에 진행된 또 다른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1970년대 상황을 이해하려면 둘을 함께 봐야 한다. 그것은 홀랜드 등 AES 주창자들이 지적한 거대 자본의 성장이었다. 거대 독점 자본이 초국적 자본이 되고 다시 금융화하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자본 권력이 전무후무하게 확대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 역시 국민-대중 경제의 전성기가 낳은 산물이었다. 상당 기간의 완전 고용 상태가 노동조합의 힘을 증대시킨 것처럼, 장기 호황은 자본의 힘을 강화시켰다. 사실 노동 조함 역량의 강화는 자본 권력의 성장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둘은 여전히 비대칭적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동시에 성장했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165~166

"물가 상승의 책임은 특정 사회 세력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인건비 상승을 압박하는 노동자의 힘에 거대 자본이 가격 결정력이라는 더 큰 힘으로 맞섰고, 전통적인 경기 조절 정책에 몰두하던 국가가 통화 공급을 계속 늘려서 이 상호 상승 작용에 날개를 달아줬다. 결국 모든 힘들이 물가를 위로 밀어 올렸다. 인플레이션의 밑바탕에는 서로 대립하는 세력들 사이의 상호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166

"승리의 제1공신은 금융 시장 행위자들, 즉 화폐 자본의 대변자들이었다. 북반구의 오래된 국민 국가를 상대로 이들이 벌인 활약은 정말 눈부셨다. 국제 금융 시장이 한 번 들썩이면 국민 국가 하나쯤은 쉽게 농락할 수 있다는 게 처음으로 만천하에 드러났다.... (중략) ... 시티나 월스트리트의 큰손들이 지구적 권력 서열의 꼭대기로 진입했다. 화폐 자본이 초국적 자본의 세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확보한 것이다.... (중략) ... 이제 시장이 모든 사회적 평가 및 결정 과정에서 다른 조직이나 세력에 대해 우위를 확보해나가게 되었다. 시장의 '신뢰'가 사라지면 어떤 조직이나 세력도 존립 근거를 상실하고 마는 세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204

"신우파는 국민 국가의 정치를 재구성하려 했다. 이들은 국민 국가가 최소한의 민주적 토대(가령 선거를 통한 집권)를 유지하면서도 배타적으로 '시장'과 호응하게 만들려 했다. 국민 국가를 화폐 자본이 주도하는 새로운 지구 질서 안에 끼워 넣으려 한 것이다.... (중략) ... 신우파는 완전 고용과 복지 확대 대신 보편적 금융 시장을 새로운 경제생활의 중심으로 제시했다. 누구나 능력껏 금융 투자에 참여해 수익을 얻는 사회로 나아가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1976년 IMF 위기를 통해 확보한 자본 진영의 승리를 전면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였다. 이제 '시장'의 지배력이 인민들의 생활 세계로까지 뻗어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212

"한마디로 볼커 전환은 통화 가치 안정을 위해서는 다른 어떠한 경제적 고려 사항도 희생시킬 수 있다는 새로운 전 지구적 규범을 확립했다. 돈의 가치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면 실업의 증가도, 실질 임금의 하락도 어쩔 수 없는 게 돼버렸다. 이 새로운 정언 명령의 이면에 자리한 것은 바로 화폐 자본의 이해였다. 즉, 이제 화폐 자본이 새로운 지구 질서의 최정상 권력임이 만방에 선포된 것이다. 사회의 다른 모둔 구성 요소들은 화폐 자본의 이해에 맞춰 철저히 재평되어야만 했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221

"과거와 달리 일국 차원의 확장 정책은 국민-대중 경제의 활성화로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인플레이션이나 국제 수지 적자, 환률 불안 같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원인이 되었다. 문제는 지구 질서와 일국적 케인스주의 사이의 어긋남에 있었다. 지구 질서의 어떤 측면들이 일국적 확장 정책을 또 다른 경제적 재앙으로 되돌려주기 시작했다. 좌파는 과거에 케인스주의 정책 수단들이 국민-대중 경제의 토대 역할을 했던 것 자체가 특정한 지구 질서를 전제한 것이었음을 칠레, 영국 그리고 프랑스 등의 잇단 패배를 통해 뒤늦게 학습했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249

"우리는 구래의 자본 수유쥬들로부터 그들이 소유에 기초해 행사해오던 권력을 탈취할 필요가 있다. 모든 경험은 [사적 소유에 대한] 영향력 행사와 통제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소유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나는 마르크스와 비그포르스를 상기시키고자 한다. 소유를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사회를 근저에서부터 바꿀 수 없다. 내 확고한 의견으로는 기능 사회주의만으로는 철저한 사회 변화를 가져오기 어렵다."
  - 메이드네르 / 신정완, '임노동자기금 논쟁과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281에서 재재인용

"홀은 영국 좌파가 오랫동안 '사회'주의를 '국가'주의와 혼동했다고 비판했다. 케인스주의든 좀 더 급진적인 대안이든 국가 기구에 만사를 맡기는 식이었다. 그래서 대웆은 '사회주의'라고 하면 관료주의를 떠올리게 되었다. 대처 정부는 이러한 좌파의 약점을 활용했다. '국가'로부터 자유를 되찾기 위해 '시장'을 선택하자고 선동했고, 이 선동이 먹혀들었다. 홀의 결론은 이제 국가가 아니라 시민 사회의 다양한 세력들이 사회 변혁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300

"도시 사회주의의 행진은 이것으로 중단되었다. 하지만 GLC(런던 광역 의회)와 다른 좌파 지방 정부들의 경험은 구조 개혁 좌파에게 값진 교훈을 남겼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정치의 또 다른 층위에 눈길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생활 세계의 정치였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304

"미국의 새로운 축적 전략에 따라 화폐 자본이 주도하는 전 지구적 시장 위계 체계가 꼴을 갖춰갔다. 북반구의 자본 시장을 정점으로 해 지구 곳곳의 자본들이 위계적으로 편제되어갔다. 각국 경제는 이 새로운 지구 질서에 끼워 맞춰지기 시작했다. 초국적인 어떤 힘, 이른바 '시장'이 여러 나라의 경제 현실을 압도적으로 규정하게 되었다. 더 이상 '국민' 경제를 이야기하기 힘들다는 분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구 경제 질서가 국민 국가들의 세계와 어긋나게 된 것이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328

"신자유주의 지구 질서에서 국민 국가의 통치 노선으로는 대처 식의 우파 정부보다 이러한 '제3의 길' 노선이 적합했다. 실제도 대처-메이저 보수당 정부는 대중의 정치적 불만을 끊임없이 고조시키기만 했다. 1992년 미국에 클린턴 민주당 정부가 들어선 이래 북반구 여러 나라의 좌우 세력은 대체로 '제3의 길'로 수렴되었다. 이것이 이후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전성기에 표준적인 통치 방식이 되었다. 한국의 김대중-노무현 정권도 이 커다란 흐름의 일부였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333

"오늘날 이 '사회'는 자본-임노동 관계나 국가 관료 기구의 거대 체계로부터 자율성부터 되찾아야 한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 자체를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 점에서 여성주의와 생태주의는 기존 사회주의 운동에 부족했던 새로운 각성을 불러 일으켰다. 따라서 '급진적' 구조개혁론의 대표자인 고르가 생태사회주의의 열렬한 주창자가 된 것인 필연적인 일이었다. 말년에 그는 임금에 의존하는 생활 양식에서 벗어나는 것과 함께, 다양한 공동체 실험들을 통해 도시의 삶 자체를 바꾸는 것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제시했다. 그는 이렇게 도시인의 일상 자체를 새롭에 구성하는 과정이 우리가 잊고 있던 또 다른 층위의 '정치'라고 보았다. 우리의 용어를 사용한다면 이것은 곧 '생활 세계의 정치'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343

"그러나 라틴 아메이카의 실험이 미래 탈자본주의 구조 개혁 노선의 필수적 과제를 미리 보여주고 있다는 것만을 분명하다. 그것은 일국 차원을 넘어서는 지구 질서 수준의 정치 무대를 스스로 새롭게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라틴 아메리가 좌파 정치 세력들이 지금 한 지역에서 벌이는 실험들을 앞으로 구조 개혁 좌파는 다른 지역에서도 그리고 지역의 틀을 넘어서는 차원에서도 끊임없이 시도해야 할 것이다."
  -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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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76년 출간된 국부론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표지. 이 해는 미국이 독립한 해이기도 하다.


들어가며.
時制와 고전읽기

   '공자' '논어'를 이야기할 때 보통 우리가 떠올리는 이미지는 '고리타분함', '보수적임' 같은 것입니다. 이는 유교문화권인 우리 사회의 특성상 제사, 예의범절, ()와 같은 전통적 가치가 자유, 민주주의, 인권과 같은 서구적 가치와 만났을 때 대개 우리는 전자에서 보수적인 느낌을, 그리고 후자에서 진보적인 느낌을 갖기 때문일 것입니다. 몇 해 전 유행했던 '공자를 죽여야 나라가 산다.'는 책 제목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사실 공자의 사상이 담고 있는 신분질서에 대한 옹호라든가 지배계층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성격은 이런 느낌 자체가 부당하지만은 않다는 생각도 들게 합니다. 하지만 공자에 대해서는 정 반대의 주장도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마찬가지로 몇 해 전 출간되었던 '논어는 진보다' 같은 책의 저자는 공자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과 공자의 말이 그 시대 속에서 가졌던 의미들을 논하면서 우리의 편견과는 달리 공자는 당대의 관점에서 볼 때 보수적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같은 사상가인데 왜 이렇게 다른 해석이 존재할까라는 질문을 해 볼만 한 부분입니다.

   공자가 보수인지 진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고전을 읽을 때 그 고전이 쓰여진 시대를 감안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신영복 선생은 그의 책 '강의'에서 논어에 대해 이야기하며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時制)’라고 말합니다. 잠깐 옮겨보자면 이렇습니다.

   "... (전략)... 우리가 이 지점에서 합의해야 하는 것은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時制)라는 사실입니다. 공자의 사상이 서주(西周)시대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오늘의 시점에서 규정하여 비민주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담론을 현대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지요. 공자의 인간 이해를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의 인권 사상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후략)…"

   이와 같은 '시제'의 중요성은 비단 고전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문제뿐 아니라, 고전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을 현실에 적용하는 데에 있어서는 더욱 중요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가라도 그가 발을 딛고 선 시대적, 사회적 상황에서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내기 마련입니다. 비록 그가 그 당시에는 나름대로 미래를 예측하고 그 미래까지 감안한 해결책을 내놓았을지라도 그가 인간인 한 그 예측은 불완전하게 마련이고, 따라서 현재의 시점에서 그 해결책을 활용하고자 할 때는 매우 주의 깊은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일견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의외로 이 당연한 이야기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혹은 알지만 의도적으로 묵살하는 논의들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고전을 읽는 데는 '시제'가 중요하다는 점을 기억하고 '국부론'에 대한 저의 서평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애덤스미스를 이해하다 - 이기적 인간과 자기조정시장

   우리가 '애덤스미스', '국부론'하면 떠올리는 개념들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 핀 공장, 이기적 인간, 시장경제와 같은 것들이지요. 특히 최근에는 '신자유주의'와 연관된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도 많을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스미스의 이미지들 중에는 지하에 있는 그가 들으면 다소간 억울해 할만한 것도 있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부당하다고 할만한 것은 없는 듯합니다. 신자유주의를 포함하여 이 모든 이야기들을 시작한 고전적 자유주의는 분명히 스미스의 국부론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국부론(원제 :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은 원래 절대왕정 시대의 정치경제적 지배이데올로기라 할 중상주의를 비판하고 다가오는 부르주아의 시대의 정치경제학을 제시한 책입니다. 중상주의란 국가의 부의 근원을 '금은(金銀, 당시로서는 화폐)'으로 생각하여 보호무역을 통한 무역수지 흑자의 극대화와 국내적 경제활동의 제한을 통해 '좀 더 많은 금은을 국가(당시로서는 곧 국왕)의 금고에 확보하는 것'이 부국강병의 길이라고 봤던 17~18세기의 정치경제정책입니다. 이에 대해 애덤스미스는 국부론을 통해 국가의 부의 근원은 '금은'이 아닌 '재화(그리고 재화를 생산할 수 있는 노동량)'에 있으며, 생산은 분업을 통해 촉진되고, 촉진된 재화의 소비를 위해서는 시장을 확대해야 하므로 자유무역과 국내적 경제활동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스미스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봅시다. 사실 국왕도, 교회도, 영주도 간섭할 필요가 없는 '자유시장'이라는 발상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좀 아연한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때문에 저 이기적이고 탐욕스런 개인들에게, 더구나 교회의 약화로 인해 개인의 욕망에 대한 절제조차 무너진 시대에, 통제되지 않는 자유를 준다면 혼돈이 초래되지 않겠는가?’ 라는 질문을 예측했는지 스미스는 '자기조정시장'의 논리를 거의 대부분의 챕터에서 각기 다른 예를 통해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개개인은 (대부분의 경우 이 개인은 자본가입니다.) 자신의 사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신이 가장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곳에 투자합니다. 그 자본의 투자를 통해 고용이 창출되고 재화가 생산되고, 소비되어 국부가 증진됩니다. 앞에 이야기한 것처럼 국부는 그 사회가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는 재화의 양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니까요. (통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특정한 분야에 투자가 몰린다면 그 분야의 이윤이 감소하고 이에 따라 자본은 좀 더 이윤이 좋은 다른 분야(아마도 투자가 부족했던 분야)로 이동하게 되어 전자는 경쟁의 약화 및 생산량의 감소로 이윤이 다시 증대되며, 후자는 경쟁의 강화 및 생산량의 증대로 이윤이 감소하여 양 분야의 이윤은 적정수준을 되찾게 됩니다. 마치 진자의 운동과 같이 작동하는 '자기조정시장'의 매커니즘은 자유롭게 풀어놓았을 때 가장 잘 작동하여 사회의 생산량을 극대화시키고 그에 맞는 소비시장을 창출합니다. 여기에 국가나 다른 주체가 인위적인 수단으로 개입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자연적인' 수준보다 높은(혹은 낮은) 이윤을 창출하는 분야를 만들어내고 이는 자기조정시스템을 왜곡하고 국부 - , 그 사회의 재화의 양 또는 그 사회가 고용할 수 있는 노동의 총량 - 를 감소시키게 된다는 것이 그의 논리입니다.

   (자본가들 간의 경쟁에 좀 더 초점을 맞추긴 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수요/공급의 법칙'의 원조라 할만한 스미스의 '자기조정시장의 원리'는 중상주의가 추구했던 국가의 간섭을 배격하고 경제적 자유주의를 주장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근거가 됩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푸주간 주인과 양조장 주인, 그리고 빵집 주인'의 예시가 말해주는 것처럼 이 자유경쟁시장에서 사람들 - 주로, 자본가들 - 의 핵심적인 행동동기는 '자신의 이익에 대한 고려'라고 국부론은 이야기하고 있기에 우리가 이념형으로 기억하고 있는 '애덤스미스' '국부론'의 이미지는 대체로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애덤스미스를 오해하다 - 자본가와 노동자, 독점과 정치권력

   하지만 스미스의 '국부론'은 무려 1,200페이지에 이르는 대작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들 외에도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기적 인간, 보이지 않는 손, 자유시장, 정부의 실패가 국부론의 전부인 것 같지만 실은 이는 '(누군가의 필요에 따라) 국부론에서 부각된 전부'일 따름입니다. 물론 저도 국부론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를 둘만 꼽으라면 '국부의 근원으로서의 재화/노동력/생산성' '자기조정시장 매커니즘'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하지만 스미스의 사상체계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많은 다른 중요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 중 애덤스미스의 후예를 자처하는 이들이 의도적으로 누락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드는 부분들만 언급해 보겠습니다.

   우선 자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스미스가 자본가의 사적 이익 추구가 자본축적에 이르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국부를 증진시키게 된다는 이야기를 강조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스미스는 이와 같은 원리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자본가의 이해가 일정 정도 제한되어야 함을 분명히 합니다. 스미스는 사회를 지주, 노동자, 자본가 계급으로 나누었을 때 자본가 계급만이 자신의 이해와 사회의 이해를 분명히 인식할 수 있지만, 동시에 자본가 계급의 이해만이 사회 일반의 이익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는 자본자는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여 '시장을 확대하고 경쟁을 제한하려는' 경향을 가진다고 말하고, "시장을 확대하는 것은 종종 공공의 이익에 합당할 수 있지만, 경쟁을 제한하는 것은 항상 공공의 이익과 충돌한다."고 언급합니다. 다시 말해 스미스가 생각한 '자기조정시장'이 성립하려면 '자본가 사이의 경쟁'이 그 전제가 되어야 하는데, 자본가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경쟁을 일정하게 제한하려고 하고, 그렇기 때문에 자본가의 이와 같은 시도를 통제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독점적, 혹은 (카르텔을 형성하기 쉬운) 과점적 기업에 의한 시장의 장악은 자유시장 시스템에 정부의 개입보다 더 큰 위협이 됩니다. 결국 자본가 계급의 이해를 반영하는 정책은 경제적 자유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서민경제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젠 골목상권까지 장악해가는 한국의 독점적 재벌집단과, 그 재벌집단의 이해를 대변하기 위해 환율과 주가를 조작하기에 급급한 한국 정부(이렇게 놓고 보니, 한국의 경제정책은 참으로 중상주의적이네요.)의 눈앞에 들이밀고 싶은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과 같이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체제는 19세기를 거쳐 독점자본주의로 이행하며 엄청나게 많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노동빈민입니다. 당시 많은 자본가들은 노동계급이 '천성적으로 게으르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이들이 노동규율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생존 수준의 임금을 지급함으로써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이 주장의 뒤에는 노동자의 임금을 낮게 유지함으로써 자본가의 이윤을 높이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야 19세기 이야기지 지금 누가 그런 생각을 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현실은 꼭 그렇지 만도 않습니다. 당장 최근 정치권의 이슈가 되고 있는 복지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라에서 일 안 해도 돈을 주면 누가 일을 해?’라는 생각을 합니다. 청년실업의 심각함을 이야기할 때 늘 따라 나오는 이야기가 청년실업 이야기를 하지만 중소기업은 사람이 모자라다고 하니 이는 청년들이 일하기 싫어하는 탓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은 발상의 근간에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아야 한다.’ 19세기 자본가들의 논리와 일맥상통하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에 대해 스미스는 뭐라고 이야기했을까요? 그는 노동의 후한 보수는 인구 증가를 장려하면서도 보통 사람의 근면을 증대시킨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풍부한 생활물자는 노동자의 체력을 증진시키고, 자신의 상태를 개선시켜 안락하고 풍부한 가운데 생을 마칠 수 있을 것이라는 유괘한 희망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체력을 최대한도로 발휘하도록 고무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노동시간과 관련해서도 정신적인 노동이든 육체적인 노동이든 간에 계속해서 며칠간 많은 노동을 하고 난 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쉬고 잎은 욕구가 생기는데, 이 욕구는 폭력 또는 어떤 강력한 필요성에 의해 저지되지 않는 한 거의 억제할 수 없다.”고 말하며 적당히 일함으로써 계속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의 건강을 가장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 년 전체로 보면 가장 많은 양의 일을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그는 지금까지도 많은 기업에서 활용되고 있는 성과급제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의견을 표명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편견과 달리 스미스는 포디즘 체제 하의 노동자를 보며 가장 흐뭇한 미소를 지었을지도 모릅니다.

 스미스가 거대 재벌을 비롯한 특정인들의 자유가 극대화되고 정부는 이를 정책적으로 뒷받침하며,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으로 고용불안과 저임금의 덫에 빠져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면 뭐라고 했을까요? 스미스가 은행업에 대한 규제를 옹호했던 문장으로 이에 대한 답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회 전체의 안전을 위협하는 몇몇 개인의 자연적 자유의 행사는, 가장 자유로운 정부이든 가장 전제적인 정부이든, 모든 정부의 법률에 의해 제한되고 있으며 또 제한되어야만 한다.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방화벽을 쌓게 하는 법률은 자연적 자유의 침해지만, 여기에서 제안하는 은행업의 규제와 정확히 동일한 종류의 침해이다.”

 

애덤스미스를 비판하다 - 자기조정시장의 몰락

  스미스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과는 사뭇 다른 아이디어들을 그의 저서에서 적잖이 제시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그의 아이디어의 핵심은 자기조정시장입니다. 자기조정시장의 아이디어에 따르면 진자의 운동이 결국은 가운데서 멈추는 것처럼 시장은 누가 애써 손대지 않아도, 아니 손대지 않을 때 스스로 최적의 지점을 찾아 그 지점에서 적절한 생산과 소비와 분배를 이루어내며 이 기본원리야말로 경제와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일반법칙입니다. 실제로 스미스는 비단 국내경제나 무역 뿐 아니라 종교나 교육과 같은 경제외적 분야에 대한 논의에서도 자기조정의 법칙이 최선임을 국부론에서 이야기합니다. 사실 이처럼 하나의 일반법칙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18세기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상의 특징적인 부분이기도 합니다. 자연과 사회와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보편법칙이 있고, 그 법칙의 구동으로 모든 것이 움직이며, 인간의 이성은 그 법칙을 간파할 수 있기 때문에 자연과 사회를 모두 지배할 수 있다는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무모할 만큼 자신감 넘치는 생각은 비단 스미스 뿐 아니라 당시의 많은 사상가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습니다. (스미스의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마르크스마저 자본주의의 도래와 붕괴를 역사적 필연으로 설명했습니다. 마치 물리학의 법칙과 같이 사회역사의 법칙을 바라본 것이죠.) 단지 스미스의 경우 자기조정메커니즘을 그 법칙으로 삼은 것 뿐이고 수많은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학자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사실 고전적 자유주의 이후에도 주류 경제학은 여기에 근거하여 펼쳐집니다. 이런 법칙을 적용시키려다 보니 환경을 단순화시켜야 하고, 그러다 보니 완전경쟁시장과 같은 현실에서 절대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스미스의 자기조정시장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를 몰락으로 이끌어갔죠. 스미스의 사후에 펼쳐진 독점자본주의화에서 벌어진 처참한 현실과 대공황,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스미스의 자기조정시장이데올로기가 도전 받았음을 물론이고 (계몽주의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인간의 이성자체가 의심받게 됩니다. 자기조정시장의 몰락은 사회주의와 파시즘을 등장시켰고, 어떤 나라들은 계획경제를, 그리고 좀 더 스미스에 대해 친화적이었던 나라들도 국가에 의한 시장의 제어에 근거한 복지국가를 선택합니다.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의 최전성기는, 우리가 잘 알 듯 자기조정시장메커니즘에 대한 제어와 (스미스가 그토록 부정적으로 논했던) 정부의 개입을 근간으로 하는 복지국가체제에서 펼쳐졌습니다. 그 복지국가체제가 한계에 봉착했을 때 고전적 자유주의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할 신자유주의가 등장했지만, 그 귀결은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1%를 위한 세계일 따름입니다.

 물론 이런 변명도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과거 고전적 자유주의의 실패, 그리고 현재 신자유주의의 실패는 그 아이디어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아이디어가 제대로 현실에서 적용된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주장 말입니다. 실제로 현재 일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현실에 목도한 신자유주의체제의 실패를 놓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지요. ‘우리는 정부의 간섭 없는 시장을 이야기했고, 많은 (, 미를 중심으로 한) 많은 국가에서 정부가 이를 실천하겠다고 했지만 완전히 간섭 없는 시장을 실천하지 못했다. 따라서 현실의 실패는 신자유주의의 실패가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제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한 국가의 실패일 뿐이다.’라는 식으로 말이죠. 어찌 들어보면 동구권이 몰락했을 때 이것은 사회주의의 실패가 아니라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좌익 파시즘의 실패일 뿐이다.’라고 주장했던 사회주의자들과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 때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론은 현실을 통해 검증되며, 따라서 현실에서 실패한 이론은 (원인이 무엇이든) 실패한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 말을 지금의 신자유주의에 그대로 돌려주고 싶습니다.

 사실 자기조정메커니즘에 의한 시장이라는 발상은 미시적으로, 즉 부분적으로는 가동할 지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이상태(理想態)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70년대 이후 좌우를 막론하고(영국과 미국의 좌파라 할 수 있는 노동당과 민주당 정부는 신자유주의의 대세를 고스란히 받아들였습니다.)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도 현실에서 일부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자기조정시장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자기조정시장의 이와 같은 본질적 한계는 일찍이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사상가 칼 폴라니에 의해 날카롭게 간파된 바 있습니다. 그는 인간, 자연, 화폐라는 절대로 상품일 수 없는 요소들을 상품화하는 것이 자기조정시장의 기본 전제이며, 이와 같은 시도는 그에 저항하는 사회의 이중운동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도저히 실현될 수 없는 적나라한 유토피아라고 설파한 바 있습니다.

 스미스의 사상의 출발점이 되는 전제는 인간에 대한 고찰에서 출발합니다. 그는 인간이 천성적으로교환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으며, 동시에 인간의 가장 중심적인 행동동기로 이기성(혹은, 순화해서 말하자면 합리성)을 제시했습니다. (물론 스미스의 인간관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습니다. 이기성 말고도 인간에게는 Sympathy, 즉 동감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경제활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행동동기는 Self-interest입니다. 인간 본성으로서의 동감(Sympathy)에 대해서는 그의 또 다른 저서 도덕감정론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귀결되는 인간본성의 이 두 전제는 그가 고고학과 인류학의 도움을 받아 인간성의 역사적 측면을 고찰한 결과로 나온 것이 아니고, 이미 형성된 시장을 바라보며 이럴 것이다.’라고 주장한 것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럴싸해 보이지만,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앞서 언급한 폴라니가 상세히 밝히고 있는 것처럼) 고고학과 문화인류학의 연구성과는 과거의 인간에게 교환 성향이나 지배적 행동동기로서의 이기성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스미스의 자기조정시장은 그 논의가 출발한 가장 근본 전제에서부터 의심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스미스의 아이디어를 몽땅 부정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시장에 수요-공급을 통한 가격결정이라는 자기조정 메커니즘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은 굉장히 날카로운 고찰이며, 이기적 행동동기가 공익적 결과를 낳는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지요. 하지만 이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자기조정 메커니즘이나 이기적 행동동기만큼 중요한 다른 것들이 인간에게는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나가며. 누군가 논어의 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왕조국가로 돌아가자고 한다면

  제 나름의 시각으로 스미스를 이해해보기도 하고, 그가 어떻게 오해되고 있는 지를 살펴보기도 하고, 그의 사상이 갖는 근본적인 한계라 할 수 있는 부분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이 긴 서평을 마치며 서두에서 생뚱 맞게 언급했던 논어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논어를 연구하다가 공자의 사상은 참으로 위대하고 깊이가 있으니 진정으로 우리 현실에 적용할 만하다. 그러니 우선 민주주의를 폐기하고 왕조국가로 돌아가자.’고 한다면 누구라도 뭐 이런 미친 사람이 있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공자의 사상이 위대하지 않고 깊이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우리 시대에 맞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어떤 위대한 사상이라도 그 사상이 펼쳐진 시대의 사회적, 역사적 환경을 고려하여 해석하고, 거기서 얻은 교훈을 현재에 적용할 때는 당시와 현재의 차이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스미스의 사상은 국왕이 금은의 형태로 국부를 독점하려 들었던 절대왕정의 이데올로기인 중상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기획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아이디어가 가진 의미와 교훈도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여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스미스의 사상이 고전적 자유주의니까 우파고 보수다라고 간단히 이야기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는 오히려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대항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그 고전적 자유주의가 초래한 세상이 얼마나 파괴적이고 비참한 모습을 보여줬었는지를 19~20세기의 역사를 거치며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에 대한 수정 작용으로 나타났던 사회의 모습이 복지국가 체제 하의 사회였으며, 그 때가 자본주의의 황금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체제가 한계에 봉착했을 때 그 반동으로 나타난 체제는 보다 발전된 형태의 무엇이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목격한 것은 고전적 자유주의 시즌2’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 결과는 아시다시피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와 1%를 위한 사회입니다.

 사실 스미스의 사상은 서구사회보다는 한국사회에서 훨씬 의미 깊을 지도 모릅니다. 한국사회의 재벌, 관료집단은 스미스가 그토록 비판했던 중상주의에 가까운 정책을 잘도 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스미스의 기획을 현 시대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공자의 아이디어를 적용하고자 왕조시대로 돌아가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스미스의 아이디어를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이해하고, 그 교훈을 현재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이 위대한 사상가의 업적을 제대로 기리는 일일 것입니다

    1%를 위한 자본주의에 저항한 미국민들의 시위는 전 세계인의 공감과 지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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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채널e - 눈물의 룰라 (2011-01-25일 방영)

룰라는 대통령 당선과 함께 일정 정도의 '우클릭'을 통해 안정과 성장을 동시에 이루어냈다. 그는 노무현 정무와 마찬가지로 '온정주의적 신자유주의' 정책노선을 걸었지만, 노무현 정부보다는 더 효과적으로 하층민에 대한 지원을 펼쳐서 빈곤퇴치에 불평등 해소에 성공적이었으며, 그의 당선 시에 우파들이 퍼부은 비난과는 달리 안정적으로 경제를 성장시켰다. (물론 브라질의 빈부차가 워낙 커서 시혜적 복지 정책 자체가 상당한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은 노무현 정부와는 환경적 요인에서 다른 점인지도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그는 퇴임 시까지 80%의 지지율을 간직한 채로 노동자당 후보인 호세프에게 정권을 인계한다.

노무현 정부가 조금만 더 노무현 전 대통령 그 자신의 정체성에 맞는 정책을 펼쳤더라면 (혹은 펼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룰라도 야당시절보다는 우클릭했지만, 적어도 좌회전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한 정도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여러모로 아쉬울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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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 김대중 자서전을 읽고

Posted at 2011. 1. 19. 17:02// Posted in 감상

  내가 올해 세 번째로 완독한 책 (두 권짜리니 권수로는 네 권이구나)은 '김대중 자서전'이다. 나는 본래 공정성에 대한 집착이 약간 있는 관계로 자서전은 잘 읽지 않는데 최근 몇 개월간 두 편의 자서전을 읽었다. 하나는 몇 개월 전에 읽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이다' 였고, 다른 하나는 이 책이다. 최근 서거한 두 분의 대통령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지만 이렇다 할 평전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자서전을 읽었다. 운명이다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이 책을 읽을 때도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읽으려고 노력했다. 하나는 이 사람에 대한 호(好)든 오(惡)든 선입견을 최대한 배제할 것, 또 하나는 자서전임을 감안하여 필터링하며 읽을 것. 이 두 자기를 놓치지 않아야 의미있는 독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대중 자서전'은 상당한 두께에 두 권으로 된 책이다. 1권은 출생부터 대통령 당선까지를, 2권은 대통령 시절과 퇴임 후를 다루고 있다. 두께에 지레 겁먹을 필요는 전혀 없는게 책장이 정말 쉽게 넘어간다. 소설책 - 중에서도 노벨문학상 수상작 같은 것 말고 베르나르 베르베르나 파블로 코엘류 류의 가벼운 소설책 - 읽는 속도와 거의 비슷하다. 더구나 한국 현대사에 대한 지식이 약간 있고, '국민의 정부' 시절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책 읽는 속도는 더더욱 탄력을 받게 된다.

  얇지 않은 책을 쭉 읽어가며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우리 현대사의 질곡이 이렇게 한 사람의 일생에 다 담겨 있을 수도 있구나.'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 시대를 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많든 적든 시대 상황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는 줄곧 역사를 만드는 사람의 위치에서 그 많은 사건들을 정면으로 맞이하며 참으로 고단한 삶을 살아온 경우다. 그에 대한 공과를 어떻게 평가하든, 그의 삶 전체에서 드러나는 역사를 대하는 정치인으로서의 진정성만큼은 누구에게나 커다란 울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우선 (이건 '운명이다'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보수언론의 강력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나는 보수언론이 제시하지 않는 Agenda도 많이 접하는 편이고, 그들이 보도하는 내용을 대체로 의심하며 살아온 편임에도, 보수언론이 그려 놓은 김대중/노무현의 모습에 의해 실제 그들을 정확하게 보지 못한 측면이 많았다. 언론에서 다루는 그들보다 그들의 자서전에 그려진 그들은 더 오른쪽에 있었고, 덜 부패했으며, 더 현실적이었다. 좋고 나쁨을 떠나 보수언론의 힘이 (나같은 사람에게조차) 인식을 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은 섬뜩하게 다가왔다. 이제 종편까지 선정되었으니 이들이 어디까지 갈까... 인터넷, SNS가 이들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그런 고민들이 꼬리를 잇게 된다.

   또 하나는 대통령의 힘이 생각보다는 훨씬 제한적이라는 부분이다. 물론 이건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여러 경로로 한 생각이었지만, 한국사회처럼 수구/보수 진영의 힘이 압도적으로 강한 사회에서 한 사람의 소수파 대통령의 - 더구나 5년 단임으로 그쳐야 하는(물론 요즘에는 왜 3년 단임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 역량이 사회 전체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은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제한적이다. 비단 대통령의 정적들 뿐 아니라 대통령의 주변 사람 조차도 때로는 집권자의 의도를 곡해하고 거부하는 일이 잦다. 그러니까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은 아닐 수 있다는 이야기다. 사실 이는 민주주의의 당연한 부분이고 장점이기도 한데, 어떤 경우에는 아쉬운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하긴 그렇기 때문에 더욱 시스템과 토대의 변화가 필요한 것일게다.

   마지막으로 '어떤 악정도 처음에는 선한 의도에서 출발한다.'는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김대중도 노무현도 신자유주의를 의도하지는 않았다. 다만 '세계화'는 필연이고 '지식사회/금융중심경제'는 나라의 발전을 위해 필수적이며, '복지'는 필요하지만 '생산적 복지' - 다른 말로 하면 사회투자국가론 - 가 21세기 형 복지의 대안이다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에 근거한 그들의 정책은 공기업 민영화, 생활의 금융화, 노동시장 유연화, 자본 이동의 자유화, 보편적 복지의 실종을 낳았고, 결국은 금융 부문의 취약성을 증가시키고 양극화를 심화시켰으며, 수많은 노동자의 삶을 피폐하게 했다. OECD 국가 중 가장 비정규직 비중이 높은 나라, '88만원 세대'라는 말로 대표되는 청년에게 희망이 없는 나라의 단초는 불행하게도 민주정부 10년에서 시작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것은 사실이고, 우리가 반MB 뿐 아니라 beyond 김대중/노무현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이제 반 년 가량이 지났다. 2011년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그에 대한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존재는 척박한 한국 정치에 소중한 자산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독재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은 민주화의 투사였으며, 한국경제가 가장 위급한 순간에 등판에서 위기를 넘긴 구원투수였고, 한반도에 평화의 싹을 심은 지도자였다. 그의 아쉬운 부분은 뒷 세대가 짊어지고 가야할 짐이지, 한 평생 치열하게 살았던 그를 비난해야 할 무엇을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가톨릭 신자였던 그가 생전에 바랐을 대로 천국에 갔다면, 고단했던 이승에서의 삶일랑 모두 잊고 편안히 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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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회의 (2)

Posted at 2010. 11. 29. 18:44// Posted in 성찰
일제시대라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를 가장 잘 보낸 사람들은 당연히 독립투사들이다. 그 다음으로 잘 보낸 사람들을 꼽자면 만주에서 연해주에서, 혹은 한반도 안에서 일제의 핍박을 받으며 농사를 짓고, 그러면서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본능적으로 파악하여 밤이면 간혹 나타나는 독립투사들에게 밥이며, 옷이며, 돈이며, 잠자리를 없는 살림에도 싫은 소리 하지 않고 제공했던 아름다운 민초들이다.

제일 밑바닥에는 당연히 조선 총독부에서 적극적 친일을 한 자들이나 순사, 혹은 순사의 앞잡이, 이광수처럼 글과 지식으로 일제에 적극 협력한 자들, 친일 지주들이 있을 것이고, 그 바로 위에는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생존을 핑계로 소극적이나마 일제에 협력한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일제의 통치기관의 말단에서 근무한 자들이라든가, 적당히 일제에 협력하면서 부를 축적하고자 했던 상인들 같은 이들이 그쯤 되지 않을까. 그리고 아마도 상위 두 그룹과 하위 두 그룹 사이에는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계층이 있을 것이다. 주로 지식층이면서 자신의 지식을 당시의 체제 내에서 사용한다는 것이 일제에 간접적으로 부역한다는 것을 알고, 이를 거부한 상태로 농사를 짓거나 재산이 좀 있는 경우는 집에서 칩거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지는 못해도 친일도 못하겠다는 상태로 살았던 사람들이 여기에 속할 것 같다.

1) 독립투사
2) 독립투사의 협력자 그룹
3)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람
4) 소극적 부역자
5) 적극적 부역자

너무 도식적인 분류 같지만 사실 어느 시대든 이런 식의 분류는 가능하다. 즉, 체제와 맞서는 사람, 체제와 갈등하는 사람, 체제와 맞서지도 협력하지도 않는 사람, 체제에 협력하는 사람, 체제를 주도하는 사람이라는 구분은 어떤 체제에서든 가능하며, 체제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가정할 때 1~2는 정의로운 사람, 4~5는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 되며, 3는 중립적인 위치가 될 것이다. (사실 중립적인 위치가 가능할 지는 의문이다. 결국 어느 시점에서 2 또는 4로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지 않을까.)

이런 분류가 당대에도 가능할까?

가능할 것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의 체제가 정의로운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는 어렵다. 전적으로 정의롭지도, 전적으로 불의이지도 않다는 애매한 대답이 나오겠지? 그리고 현제의 체제를 기준으로 보면 (식민지와는 달리) '체제 내에서 개혁하려는 사람'도 분류에 포함시킬 수 있을 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개 이 그룹은 체제에 협력하기 마련이다.)

만약 현재의 시대를 '정의롭지 못하다'고 한다면, 단연 그 불의의 핵심에는 '자본'이 있을 것이다. 타인의 몫을 엄청나게 많이 차지하고 ('타인의 몫' 드립은 '인생의 회의(1)' 참조) 그걸로도 모자라서 신자유주의의 광풍하에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흔들어가며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자본은, 당대를 대표하는 '불의'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렇다면 그 불의에 대한 '소극적 부역자'는 누구일까? 혹시 자본의 (그것도 대한민국을 기준으로는 손에 꼽히는 거대 자본의) 이익을 위해 30여년 간 배운 지식과 기술을 열심히 활용하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이 아닐까?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보다는 어떻게 하면 좋은 직장에 들어갈까를 고민하고, 그 결과로 나름대로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는 나야말로 전형적인 '소극적 부역자'가 아닐까. 그리고 만약 자본에게 그 성실함을 인정받아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간다면, 그 때는 '적극적 부역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

나름대로 성실하게 학창시절을 보내고 그 결과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취직한 것이 결국은 불의에 대한 '부역' 이라니... 내 인생에 대한 회의가 심하게 몰려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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