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정산

Posted at 2015. 1. 21. 14:15// Posted in 시사

석사논문을 쓸 때 건강보험공단의 소득 및 재산 데이터를 볼 수 있었다. 쉽게 접하기 힘든 전체경제활동인구(에서 1%를 무작위표본추출한)의 소득분포를 보며, 내가 회사원이던 시절에 받고 있던 연봉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분위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는 것을 알고 꽤 놀랐다. 그 후 이런 저런 소득분포를 보면서 우리가 손쉽게 '직장인'이라고 말하는 -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직장인'이라고 말할 때 떠올리는 이미지에 부합하는 - 사람들이 사실은 우리 사회에서 서민도, 중산층도 아닌 상당한 상류층임을 알 수 있었다.


연말정산을 둘러싼 논란을 바라보는 여러 시각들을 보며 이 문제를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된다. 좀 더 많은 데이터를 좀 더 실증적으로 살펴봐야 하겠지만, 우리가 흔히 '직장인'이라고 이야기할 때 떠올리는 정규직 화이트컬러의 지위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높다. 물론 조세정의를 바로세우기 위해서 최우선적으로 증세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이들은 아니지만, 다른 한 편으로 이들에 대한 증세 없이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부자증세를 기본으로 한 조세정의를 바로잡는 것과, 좀 더 보편적인 증세를 통해 공공의 영역을 넓히는 일은 함께 갈 수 있고 함께 가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보면 이번 박근혜 정부의 우회적 증세는 그 과정에서의 기만성에 대한 비판을 별도로하면, 부자증세를 우선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비판할 지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히 중산층이라고 잘못 인식되는) 상류층에 대한 증세의 성격을 갖는다는 측면에서 잘못되지 않은 지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중 어느 한 측면에 대한 여론이 지나치게 높아지고 있다면, 또 다른 측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흔히 말하는 '지식인'의 책무에 속한다. 그들은 원래 시도 때도 없이 불편한 이야기를 하고 욕먹는게 책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번 상황을 놓고 분노하는 사람들을 욕하고 싶은 마음이 없고, 그 분노의 근간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다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향해 당신들 대부분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부유하며, 따라서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더 많은 부담을 하셔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이런 나를 "(복지국가를 위한 증세라는) 좁은 도그마에 갇혀 대중들 정서도 읽지 못하는 관념파"라고 욕한다면 기꺼이 욕먹겠다. 하지만 의외로 그 정서를 가진 -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손익의 관점에서 그 정서를 갖는 것이 타당한 - '대중'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은 이번 연말정산으로 인한 변화의 영향을 받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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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뜨거운 감자로 등장할 주제 중 하나가 국민건강보험료 개편이다. 정부는 작년에 기획을 꾸리고 개편안을 마련 중이다. 국민 다수의 보험료가 변동될 수 있어 이를 둘러싼 논란이 클 것이다.

 

얼마 전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건강보험료가 고소득 직장가입자 건강보험료의 절반에도 못미친다는 기사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언뜻 대기업 총수의 도덕적 해이에 관한 기사로 들리지만, 실은 현재의 건강보험 부과 체계가 지닌 문제를 지적한 것이었다.

 

이건희 회장의 국민건강보험료가 적은 이유

 

이건희 회장은 국민건강보험 제도상 지역가입자로 되어 있다. 따라서 지역가입자 최고 보험료인 약 219만 원(2013년 기준)을 납부한다. 그러나 고소득 직장가입자의 경우는 근로 소득에 대한 최고 보험료 230만 원과 함께 근로 외 소득이 일정 기준 이상인 경우는 추가로 최고 230만 원을 부담하여 총 460만 원을 납부하게 된다.

 

사실 이 경우의 고소득 직장가입자는 근로 소득, 즉 월급과 별도로 월 7810만 원을 넘는 근로 외 소득이 있는 사람을 가정한 것으로 일반적 의미의 임금 노동자는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다른 사람도 아닌 이건희 회장보다 두 배의 보험료를 내는 직장가입자가 있다는 것에 시민들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국민건강보험 제도는 지역가입자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되어 있는 것일까?

 

그렇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지역가입자에게 불리한 요소가 있다는 민원 또한 꾸준히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 직장가입자가 은퇴할 경우를 보자. 은퇴 시 직장가입자는 소득이 없어지며, 직장가입자에서 지역가입자로 자격이 바뀐다. 그런데 이 때 소득 상실에도 불구하고 주택 보유 여부나 가족 수에 따라 보험료가 오히려 높아져 이에 대한 민원이 종종 발생하는데, 이는 지역가입자가 불리한 경우에 해당한다(이러한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현재 지역가입자로 전환되었을 때 보험료가 오르는 경우 2년 동안은 직장가입자 당시 보험료를 납부하는 임의계속가입 제도 있음).

 

또한 직장가입자의 경우 배우자나 자녀가 추가적인 보험료 부담 없이 피부양자로서 보험 혜택을 볼 수 있는데, 지역가입자는 원칙적으로 연소자까지 모두 보험료 부과 대상이라는 것도 불리한 요소이다.


국민건강보험 재정은 하나, 부과 체계는 넷

 

현재 건강보험 부과체계 문제의 핵심은 직장가입자와 지역가입자 간 유불리가 아니다. 그 보다는 부과 체계가 매우 복잡하게 설계되어 있고, 가입자의 자격이나 소득 수준에 따라 부과기준이 다르다는 점이 문제의 핵심이다.

 

부과 체계는 보험료를 납부하는 규칙인데 이 규칙이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가입자 간의 형평성 문제를 야기한다. 특히 한국의 건강보험이 2000년 관리운영주체 통합, 2003년 재정통합으로 단일 재정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국민건강보험의 보험료 부과체계는 직장가입자냐 지역가입자냐에 따라 다르고, 각 가입자 별로는 소득 수준에 따라 다시 둘로 나뉜다. 전체적으로는 4개의 서로 다른 부과기준이 있는 것이다.

 

우선 직장가입자는 기본적으로 근로 소득에 대해서 2014년 기준으로 5.99%의 보험료를 납부하며, 이는 가입자와 사용자가 절반씩 부담한다(근로소득은 7810만 원이 상한 소득이므로 이 금액 초과 소득은 모두 7810만 원으로 계산).

 

그러나 직장가입자의 근로 외 소득(사업 소득, 임대 소득, 금융 소득, 연금 소득, 기타 소득 등)이 연간 7200만 원을 넘을 때는 이에 대해서도 근로 소득의 본인 부담 비율(5.99% ÷ 2)만큼의 보험료가 추가적으로 부과된다. 따라서 근로자가 내는 본인부담 보험료를 기준으로 보면, 연간 근로 외 소득이 7200만 원을 넘는 경우는 근로소득과 근로 외 소득을 합친 종합 소득에, 그렇지 않으면 근로소득에만 보험료가 부과되고 있는 셈이다.

 

지역가입자는 직장가입자와 달리 기본적으로 종합 소득, 재산(주택, 토지, 건물, 전월세금), 자동차에 대해 각각 등급을 매기고 각 등급별 점수에 단가(2014년 기준 175.6원)를 곱하여 보험료를 산정한다.

 

그러나 지역가입자의 과세기준 종합 소득이 연간 500만 원 이하일 경우는 부과 요소에서 실제 소득 대신 평가소득을 적용하여 등급을 매기게 된다. 이 때 평가 소득을 구성하는 요소는 소득, 재산, 자동차, 성별 및 연령, 가족 수이다. 따라서 500만 원 이하 소득자의 경우 재산과 자동차가 평가 소득에서 한 번, 그리고 별도로 한 번, 총 두 번 산정되는 셈이다.

 

직장가입자의 지역가입자의 보험료 산정 규칙이 다른 또 한 가지는 보험료를 납부하는 단위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지역가입자는 가구를 단위로 보험료를 납부하기 때문에 세대 단위의 소득이나 자산을 고려하게 되고, 특히 연 소득 500만 원 이하의 가구는 가족의 수가 많을수록 보험료를 더 납부하게 되어 있다.

 

반면 직장가입자는 가입자 본인의 소득에만 보험료가 부과되고, 그 가족은 피부양자로 인정되어 추가적인 보험료 부담 없이 보험급여를 받을 수 있다. 물론 직장가입자의 피부양자의 경우 부양 조건과 소득 조건을 만족해야 하는 제한이 있지만, 그 범위가 상당히 넓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구체적으로 부양 조건은 가입자의 배우자, 직계존비속, 형제자매, 배우자의 직계존비속까지 상당히 넓은 범위가 포함될 수 있으며, 소득 조건도 금융 소득, 기타 소득 또는 연금 소득 중 어느 하나가 4000만 원을 넘거나 사업소득이 연 500만 원을 넘지 않는 한 피부양자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다.

 

이처럼 복잡하게 나뉘어져 있는 보험료 부과체계는 가입자가 제도를 이해하기 힘들다는 기본적인 문제점 외에 여러 가지 형평성 문제를 낳고 있다. 비슷한 소득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가 직장가입자인지 지역가입자인지, 연 소득이 500만 원인지 501만 원인지에 따라 상당히 다른 보험료를 납부하게 된다. 또한 상당한 수준의 사업 소득이나 임대 소득을 가진 지역가입자가 편법을 활용하여 직장가입자로 포함되어 근로 소득에 대한 보험료만 납부하는 도덕적 해이도 나타난다.

 

그밖에 소득이 적어졌는데 자격 변화로 보험료가 증가하는 경우나, 평균적인 지역가입자보다 많은 소득과 자산이 있는 사람이 직장가입자의 피부양자로 되어 보험료를 납부하지 않는 등 제도의 합리성이 훼손되는 사례가 빈발하고 있다.

 

소득중심 단일 부과체계로의 이행 필요성, 하지만 어떻게?

 

그렇다면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제도가 복잡하게 나누어진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하면 그 해결책은 어쩌면 매우 단순할 수 있다. 모든 가입자의 모든 소득에 대해 일정한 비율의 보험료를 부과하는 ‘소득 중심 단일 부과체계’로의 전환이 그것이다. 사실 이에 관련해서는 대다수의 전문가, 시민·사회단체, 노조, 공단, 그리고 정부에 이르기까지 큰 이견이 없다.

 

소득에 따른 보험료 납부는 건강 보장 재정에 대한 기여가 가입자의 경제적 부담 능력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건강 보장의 기본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며, 형평성이나 사회 정의의 차원에서도 설득력이 높다. 이 같은 상황을 반영하여 현재 보건복지부도 건강보험료 부과 체계 개선 기획단에서 단일 부과 체계로의 전환 방안을 논의 중이다.

 

하지만 소득 중심 단일 부과 체계로의 이행을 전제로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지, 어떤 사안들을 고려해야 하는지 검토할 과제들이 존재한다. 똑같은 목적지를 향하더라도 어떤 속도로, 어떤 단계를 거쳐, 어떻게 이행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관련한 몇 가지 논점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 번째 논점. 줄어드는 보험재정을 무엇으로 충당할 것인가?

 

지난 2012년 건강보험공단에서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지역가입자 790만 가구 중 공단이 과세 소득 자료를 보유한 가구는 44%에 불과하며, 그 중 절반 이상(26%)이 연간 과세 소득 500만 원 이하 세대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지역가입자의 보험료에서 소득이 아닌 요소들, 즉, 재산, 자동차, 성·연령 등에 대한 보험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68%에 이른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소득 중심 부과 체계로의 변화는 상당히 큰 폭의 보험 재정 감소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제도의 개선을 위해서는 형평성 문제와 함께 재정 감소에 대한 대안을 고려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기본보험료이다. 건강보험이 사회보험의 한 가지임을 감안하면, 모든 가입자에 대해 최소한의 기여를 담보하는 기본보험료는 상당한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기본보험료의 수준은 저소득층의 부담을 고려하여 설정되어야 한다. 기본보험료가 일정 수준 이상이 될 경우 상당수의 저소득 가구는 이를 납부하기 어렵다. 따라서 기본보험료만으로 소득중심 부과체계로의 전환 시 발생하는 보험재정 감소를 충분히 메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2012년 건강보험공단이 제시한 '실천적 건강복지플랜'에서는 재정 문제에 대한 또 다른 대안으로 소비세가 제안되었다. 그러나 이는 매우 신중할 필요가 있다. 물론 소비세 형태를 통해 건강보험 재정의 일부를 조달하는 사례는 서구 국가에서 찾아볼 수 있고, 특히 주세나 담배세처럼 건강 위험을 증가시키는 행위에 대한 과세에는 명분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간접세는 역진적인 성격을 가지며, 직접세나 사회보험료보다 더 저소득층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따라서 건강보험료의 형평성을 개선하기 위한 제도 변경으로 인해 발생하는 재정 부담을 간접세로 충당하는 것은 건강보험료의 형평성을 개선할지 몰라도 전체 보험 재정의 형평성은 오히려 악화시킬 수도 있다.

 

건강보험 부과 체계 개선 시 발생하는 보험 재정 감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건강보험제도 자체에서 재정 중립을 이루는 방안을 찾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재 근로 외 소득이 연 7200만 원 미만인 직장가입자에게도 근로 외 소득에 대한 보험료를 부과할 경우 소득에 따른 보험료 부담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보험 재정을 확대할 수 있다.

 

또한 직장가입자에만 있는 피부양자 제도를 좀 더 엄격하게 적용하여, 경제적 능력이 있는 피부양자를 지역가입자로 전환하는 것도 제도의 형평성 개선과 재정 측면에서 모두 긍정적 효과가 있다. 이와 같은 방안은 보험료 인상이나 정부 재정 투입을 최소화하며 부과 체계 개선으로 인한 보험 재정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두 번째 논점. 제도 개선의 속도와 단계는?

 

소득 중심 부과 체계로의 이행이 궁극적인 개선 방향이라는 것을 긍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속도와 단계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제도 환경의 제약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현재의 부과 체계가 가입자의 재산, 자동차, 성·연령과 같이 일반적으로 사회보험 부과에 사용되지 않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도 제도 도입 당시의 여건에 따른 것이었다. 행정기관의 소득 파악 능력이 부족하여 과세 소득 자료에 대한 신뢰도가 낮고, 연금 제도의 미성숙으로 거의 대부분의 노인 가구가 파악된 소득이 없는 상황으로 인해 소득에만 보험료를 부과할 경우 상당한 문제점이 예상되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제도 환경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현재 지역가입자의 과세소득 파악률은 약 44% 수준이다. 이는 현재의 부과 체계가 도입된 1998년에 과세 소득이 파악된 지역가구가 30%에 불과했음을 고려한다면 분명 개선된 것이지만, 아직까지 충분한 수준인지 의문이다.

 

노인 가구의 소득 주제도 그렇다. 2012년 기준 65세 이상 노인의 공적연금 수급율은 35%에 불과하고, 연금수급자의 급여 수준도 그다지 높지 않아 근본적으로 개선되었다고 보기 힘들다. 이와 같은 상황을 종합해보면 현재의 제도 환경은 이전보다 개선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수준이 충분하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단시일 내에 소득 중심 부과 체계로 급격하게 전환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보험 재정상의 문제 및 또 다른 형평성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건강보험 부과체계 개혁으로 인해 고액의 자산가가 파악된 소득이 없다는 이유로 보험료를 내지 않는 경우가 상당수 발생한다면 이 개혁은 사회적 지지를 받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과세기관의 소득 파악 능력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추진하면서, 일정 기간 동안은 중간 단계를 두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즉, 앞서 언급한 직장가입자의 부과 대상 소득 범위 확대나 피부양자 범위 조정, 지역가입자의 평가 소득 폐지와 같은 제도의 부분적 개선을 시행하되, 소득 중심 부과 체계로의 전환은 단계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제도 변화의 충격을 완화할 수 있다.

 

세 번째 논점. 저소득 가입자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부과 체계 변경 시 고려해야 할 세 번째 문제는 저소득 가입자에 대한 지원이다. 원칙적으로 사회보험으로서의 건강보험은 보험료 납부 능력이 있는 사람을 그 대상으로 하고, 보험료 납부 능력이 없는 사람의 의료비는 공공부조제도, 즉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의료급여에서 제공하는 것이 각각의 제도의 취지에 맞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국민기초생활보장 제도의 수급자 수가 매우 적어 최저 수준의 보험료 납부조차 어려운 저소득 가입자가 의료급여 대상에 포함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부과 체계 개선 시 기본보험의 도입으로 인해 소폭이라도 현재보다 최저보험료 수준이 높아질 경우 그 문제는 더욱 커질 수 있다. 현재도 건강보험료 납부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저소득 가구에게 더 큰 부담이 될 것이다.

 

건강보험제도가 충분히 발달한 서구 국가들의 경우 공공부조 대상자를 포함하여 소득이 낮은 20% 정도에 대해서는 보험료를 면제나 감면해 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의료급여 대상자는 약 150만 명으로 전체의 3% 수준에 불과하다. 이에 따라 일부 지자체에서 저소득층에 대한 건강보험료를 면제해주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으나 이것으로는 부족한 실정이다. 이번 기회에 건강보험료 납부가 어려운 저소득계층에 대한 건강보험료 경감 및 면제 기준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저소득층의 건강보험료 지원이 기본적으로는 공공부조 정책의 역할인 최종적인 빈곤 완화에 있음을 고려한다면, 그 재원은 일반 조세에서 충당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이다. 건강 보장의 목적이 소득 수준과 상관없이 기본적인 의료 혜택을 보장하는 것에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는 결코 부차적인 문제가 아니다.

 

보험료 부과체계 개선과 보장성 확대를 통해 건강보험제도를 지키자

 

의료법인의 우회적 영리화 조치에 반대하는 시민사회를 향해 보건복지부에서는 ‘정부가 건강보험 제도를 잘 지키고 있으므로 의료 민영화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로 건강보험 제도를 ‘잘 지키기’ 위해서는 현행 제도가 가진 문제점을 제대로 개선해야 한다.

 

이는 재정 측면에서 보험료 부과 체계의 개선과 급여 측면에서 보장성 확대를 의미한다. 이 두 과제는 언뜻 독립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이다. 건강보험의 보장성 확대는 필연적으로 보험 재정의 확대를 필요로 하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과 체계의 형평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부과 체계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보험료 증가는 많은 가입자들의 불만을 야기할 수 있다.

 

건강보험 부과 체계를 개선하는 방향이 가입자의 부담 능력에 따른 기여, 즉 소득에 근거한 부과 체계로의 전환임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이를 위해 어떤 요소를 고려해야 하며 어느 정도의 속도로 진행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의와 검토가 필요하다.

 

2000년 의료보험의 관리운영 주체 통합 시 설정된 부과 체계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처럼 일단 성립된 제도는 쉽게 바꾸기가 어렵다. 만약 건강보험제도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간접세의 비중을 높여 전체 건강보장 재원의 누진성을 약화시킨다거나, 제도 변화 과정에서 저소득층에게 불이익을 준다면 이는 사회 정의에 부합한다고 볼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 본 칼럼은 프레시안에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칼럼>으로 게재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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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들어간 사회복지 대학원에서 내가 공부하고 있는 세부전공은 '사회보장제도'이다. 이는 한국의 사회복지학과 영역의 대부분을 이루는 임상사회복지 - 아동복지, 노인복지, 장애인복지 등등 - 나 사회복지 행정 - 주로 전달체계 - 보다는 좀 더 거시적인 차원을 다루는 전공이며, 복지국가론보다는 조금 더 구체적인 전공이다. 물론 양자 모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어쨌든 사회보장제도를 공부하다보면, 이런 질문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사회보장제도는 불평등을 완화하는가?"


질문이 '빈곤을 완화하는가'가 된다면 좀 더 쉽게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있다. 빈곤 완화효과를 보여주는 연구야 차고 넘칠 정도니까.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회보장제도가 그 자체로써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대답은 좀 복잡하다. 대개 실질적으로 불평등을 완화시킨 '복지국가'는 애초에 시장소득 단계에서도 상당히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는 거시경제정책을 운영한 경우가 많고, 정치구조에서도 노동자 정당의 힘이 강하고 뭐 그런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사회보장제도'가 그 자체로 불평등을 완화시키는 '독립변수'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솔직히 확인하기 어렵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쉬라(1981)는 이 질문에 대해 사회보장제도가 사회경제적으로 상층에 속하는 집단으로부터 하층에 속하는 집단으로의 소득재분배의 정도는 미약하며, 사회보장제도의 소득이전 효과는 계급 내 소득이전 또는 삶의 주기에 따른 (시간적) 소득이전의 성격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실상 재분배효과가 미미하다는 사실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보장제도가 발달할 수 있는 전제조건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 변혁 없이 - 복지 따위로 - 노동자의 삶이 의미있는 정도로 나아질 수 없다고 보았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생각나기도 하고, 지배적 제도와 가치가 변하지 않는 한은 한 가지 구조의 개혁은 다른 구조의 변화로 부정된다고 봤던 데이비드 하비(1975)가 생각나기도 한다. 원인이 뭐가 되었든, '빈곤과 불평등'에 대한 관심으로 사회보장제도를 공부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우울한 이야기다.


자본주의의 전복...까지는 그렇다치고, 적어도 시장소득에서의 분배 변화 - 즉, 경제 영역의 변화 - 가 불평등 완화의 최소조건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한 진짜 독립변수는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해본다면, 그 답은 답을 하는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많이 다를 것 같다. 나의 경우는 '정치'라고 생각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 그리고 학문적인 개념을 좀 빌자면 - 권력자원이라고 생각한다(물론 권력자원 동원론은 유행이 좀 지났다. 하지만 그 후에 각광받은 제도주의 같은 개념에서도 권력자원은 중요하다. 권력자원의 효과가 제도에 의해 많이 다르게 나타나서 그렇지). 민주주의라는 조건을 무기로 했을 때, 현재의 구조에서 약자가 된 다수가 구조를 바꿀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무기는 결국 '쪽수' 아닐까. 물론 그 내부에서 - 산업사회에 비하면 비교도 안되게 - 다양한 요구와 입장을 조정하고 합의해서 최종적으로 '쪽수의 힘'을 살리는 것은 난망한 과제긴 하지만, 그래도 희망을 걸 데는 거기밖에 없지 않겠나. 그렇게 본다면 '쪽수'에 기반한 '정치'의 힘이 경제도 바꾸고, 복지도 바꿔서 1차 분배와 2차 분배에서의 분배정의를 개선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어느 정도로 어떻게 개선할지를 합의하는 일은 또 엄청난 과제긴 하겠지만.


역설적으로 나는 사회보장제도의 가치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쪽수'의 힘이 살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이 싸움에 나서야 한다. 물론 과거처럼 하나의 의제를 놓고 다 같이 모여서 우르르 나가는 싸움이 될 수 있는 경우는 - 앞서 말한 요구와 입장의 다양성으로 - 많지 않겠지만,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미시적인 투쟁이 이루어지고 그 힘이 느슨하게라도 조직화될 때 '쪽수의 힘에 의한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지 않겠나. 그런데 그런 싸움에 나서려면 적어도, '내가 이 싸움에서 지더라도, 그래서 일터에서 쫓겨나거나, 여타의 불이익을 겪더라도 우리 가족이 굶어죽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먼저 동을 뜨지는 못하더라도 동을 뜬 사람에게 뜨겁게 호응할 수 있지 않을까.


전두환이 그렇게 때려 잡으려던 학생운동이 취직하기 힘들게 만들어놨더니 스스로 없어지더라는 농담이 그냥 농담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공포' 앞에 취약하다. 왜 사람이 이기적이 되는 두 가지 근원이 '탐욕'과 '공포'라고 하지 않나. 만약 사회보장제도가 밑바닥으로 떨어져도 죽지는 않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면, 그 공포는 완화되지 않을까. 그리고 공포가 완화된 사회에서 '쪽수의 힘'은 좀 더 잘 동원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사회보장제도의 정비 자체가 '쪽수의 힘'의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한 편으로 그 힘을 강화할 수 있는 도구이지 않을까.


그래서 난 어쩌면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최근들어 '사회투자론'으로 급격히 수렴되고 있는 복지국가론보다도 좀 더 전통적인 소득과 비용에 대한 경제적 보장으로서의 사회보장제도가 중요한 진보적 의제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그 사회보장제도가 자체로서 불평등을 완화하지 못하더라도,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에서 조금은 벗어나서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울 수 있게 만들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공부 열심히 해야 겠다. 그게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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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에 읽은 미쉬라의 책(2012/02/14 - [감상] - 복지국가의 사상과 이론 (라메쉬 미쉬라 저 / 남찬섭 역 / 한울아카데미)이 워낙 좋았었기 때문에, 국내에 번역된 그의 또 다른 책의 존재를 아는 순간 보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더구나 부제가 Toward a Global Social Policy라니 이거 보지 않을 수가 없잖아! 그러나 이 책은 이미 절판 상태였고, 도서관에서 구할 수는 있었겠지만 유독 책에 대해서는 소유욕을 불태우는 성향상 아쉬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물론, 원서 구해서 보는 방법도 있겠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잖아!) 혹시나 해서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마침 책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3천원의 배송비를 부담하고도 기꺼이 득템! 행복한 마음으로 읽었다.

  미쉬라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바를 아주 거칠고 짧게 요약하면 이렇다. 70년대 후반 복지국가의 전성기의 종료와 함께 시작된 복지국가에 대한 우파의 공격은 세계화, 특히 금융의 세계화를 통해 실질적으로 복지국가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 미쉬라에 따르면 세계화는 화폐자본의 이동성에 대한 제약을 철폐시킴으로써 리플레이션 정책을 통한 완전고용과 경제성장이라는 일국적 케인즈주의 거시경제 관리모형을 붕괴시켰고, 국민국가에 지구적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강화시키고 투자자 친화적인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압력을 가함으로써 '사회적 덤핑'과 임금 및 노동조건의 하향악화를 초래하고 있다. 또 세계화는 '통화주의'로 상징되는 재정적자 및 국가채무 감축을 조세인하와 동시에 국가정책의 핵심목표로 제시함으로써 사회적 보호체계와 사회지출에 대한 하향합박을 행사하고, 국민국가를 탈중심화함으로써 국민적 연대를 허무는 방식으로 복지국가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약화시켰다. 뿐만아니라 세계화는 권력의 균형추를 노동자와 국가에서 자본으로 이전시켜 사회적 협력관계의 토대를 약화시키고, 국민국가의 정책선택지에서 중도좌파적 정책을 제거함으로써 정책선택의 범위를 우편향 이동시켰다. 끝으로 세계화의 논리는 국가공동체 및 민주주의 정치의 논리와 갈들을 일으킴으로써 지구적 자본주의와 민주적 국민국가 사이의 투쟁을 촉발한다.

  물론 이와 같은 '세계화'의 특징은 상당부분 앵글로 색슨 자본주의 국가의 이야기이며, 우리가 알고 있듯 80년대 이후 복지국가의 후퇴기에도 스웨덴이나 독일 같은 다른 유형의 자본주의 국가들은 영미권 국가들만큼 사회적 보호에 있어서 후퇴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영미권에 대해서도 어떤 학자들은 '근본적이 변화'가 있었다고 하기 어려우며, 이는 복지국가를 형성하는 제도들이 가진 경로의존성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대표적으로 Pierson(1994)이 그렇다. 미쉬라도 이와 같은 부분을 인식하고 있다(실제로 미쉬라 자신도 이전에는 우파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복지국가는 '역전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미쉬라는 케인즈주의 복지국가를 지탱하는 기본적인 가정, 즉 '완전고용'이 포기되었다는 것은 각 제도의 축소 정도 이전에 과거와의 근본적인 단절을 보여주는 것이며, 특히 세계화는 위에 언급한 것과 같은 효과를 통해 복지국가의 안정성에 대한 근본적인 차원에서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스웨덴과 독일과 같은 경우에 있어서도 영미권 국가와는 분명 크게 다른 상황이지만 적어도 사회정책이 확대가 아닌 축소의 방향성을 취하고 있다는 점과 이들의 사회정책 모델이 미래지향적인 모델이라기보다는 과거의 제도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수준이라는 점에서 지구적 자본주의의 차원에서보면 복지국가의 위기를 온전히 반박할만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저자가 이야기하는 대안은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지구적 사회정책'이다.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우(the right)로부터의 세계화, 위(Above)로부터의 세계화에 맞서 밑(Bottom)으로부터의 세계화, 좌(the Left)로부터의 세계화를 대면시키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사회권'으로부터 '사회적 표준'으로의 이행을 말하는데, 이는 '사회권' 개념이 그간 복지국가의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한 긍정적 역할에도 불구하고 개인주의적 성격으로 인해 비서구 문화권에 적용하기에 한계가 있고, 적정 수준의 보장이 아닌 최저 수준의 보장으로 귀결되며, 무엇보다 사유재산권과 충돌하는 성격으로 인해 세계화의 위협 앞에서 그 의미가 약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경제적 표준에 대응하는 '사회적 표준'이라는 개념은 문화와 사회가 달라도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으며, 국가의 경제적 표준에 연계시킴으로써 경제-사회 발전의 조화를 추구하기에 유리하고, 서로 다른 경제발전 수준에서 상응하는 표준을 제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사회적 표준은 이와 같은 장점으로 인해 기존의 UN이나 ILO의 사회정책과 관련된 권고가 가지고 있는 문제 - 후발 국가의 현실에서 적용하기 어려운 측면 - 를 해결할 수 있으며, 경제적 세계화에 대해 사회적 세계화를 병행함으로써 '사회적 덤핑'이 아닌 '사회적 보장'이 지구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가운데 경쟁이 이루어지도록 세계화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사실 이 책의 부제, '지구적 사회정책을 향하여(Toward a Global Social Policy)'를 처음 봤을 때 내가 떠올린 질문은 '왜?'가 아닌 '어떻게?'였다. 미쉬라가 한 것처럼 '논증'할 능력은 없지만 개념적으로 화폐자본의 세계화가 케인지언 복지국가 후퇴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이며, 따라서 현재는 과거와 같은 일국적 케인즈주의는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고 지구적 자본주의에 맞서는 좌파 버전의 지구적 비전이 필요하다는 것은 어렴풋이나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80%가 '왜?'에 대한 답이며, '어떻게?'에 대한 답은 말미의 '사회적 표준'에 대한 논의 뿐이다. 물론,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것들에 대한 분명한 하나의 답을 준다는 차원에서 매우 가치있는 책이긴 하지만, 여전히 '어떻게?'라는 질문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나로서는 조금은 아쉽다. 미쉬라가 제시한 '사회적 표준'은 그 스스로가 지적하고 있는 지구적 차원의 사회정책을 논의할 때 생기는 두 가지 중요한 문제점들 - 국민국가에서 민주주의적 정부처럼 사회적책을 강제하고 실행하기 위한 민주적 권위를 가진 주체가 없다는 것과, 각국의 경제적 수준의 차이가 일괄적으로 정책을 받아들일 수 없게 한다는 것 - 중 후자에 대한 해결책만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이 책은 첫번째 질문의 답에 대해 '이 책에서 다룰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라고 전제한 후 현존하는 국제기구의 현실과 한계만을 짚고 있다.)

  하지만 미쉬라에게 이에 대한 온전한 답까지 요구하는 것은 다소 과도한 요구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는 정치적 실행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학자의 몫이 현실을 진단하고 가능한 대안을 조망하는 것 까지라면, 그것을 비전으로 가지고 실행하는 것은 정치의 몫일 것이다. 

  감상을 마무리하며 이 책을 읽으며 내내 놀라웠던 부분을 이야기하고 싶다. 미쉬라는 놀랍게도 이 짧은 책 한 권에서 내가 '복지국가'에 대해 근래 하고 있던 생각들을 거의 다 언급하고 있다. 물론 복지국가에 대한 미쉬라의 지식은 내 지식 쯤은 한쪽 구석에 있는 부분집합으로 가지고 있을테니 당연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놀라웠던 이유는 그 생각들 중 상당수가 이 글의 주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부분이 아니며, 따라서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는 내용이라는 데 있다. 그 이야기들이 다루어지는 방식도 - 주제와 직접적으로 연관 없는 부분이니 - 지나가듯 한 마디씩 툭툭 던져지는 형태인데, 예를 들어 사회투자국가에 대해 말하며 인적투자론은 일종의 '생태주의적 오류'라고 툭 던지고(근데, 맥락상 개체주의적 오류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뜻은 통했다.), 복지국가의 미래에 대해 말하다가 뜬금없이 '생태학적 파괴와 폐해가 극심해지면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분별 없는 성장과 천박한 소비주의로부터 급진적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라는 전체 문맥에서 없어도 되는 문장을 툭 던지는 식인데, 이런 부분을 볼 때마다 마치 저자가 내 머리속을 들여다보며 '너 이 부분에서 이 생각했지?'라고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뭔가 저자와 파장이 잘 맞는 느낌이랄까. 그러다보니 미쉬라의 팬이 되어버릴 것 같다. 국내에 번역된 그의 책이 (내가 알기로는) 내가 본 두 권이 모두인게 아쉬울 따름이다. 이제 안되는 영어실력을 동원할 차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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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는 해체되는가
국내도서>사회과학
저자 : 폴 피어슨 / 박시종역
출판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6.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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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복지국가는 19세기 말에 그 희미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이래 20세기 초의 격변 -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대공황 - 을 거치며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기본으로 자리를 잡았고, 그 후 30년간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열었다. 그리고 70년대 중반 Oil Shock와 그로 인한 Stagflation을 겪으며 보수주의적 정치세력의 집중포화를 받게 되고, 결국 영·미를 중심으로 쇠퇴의 수순을 밟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이 시기 - 즉,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불어닥친 1980~2000년대 - 에 복지국가가 의미있게 쇠퇴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의 관점이 다르다. 이를테면 여기서 리뷰할 폴 피어슨 같은 학자는 복지국가는 공격받고 상처받았지만 의미있는 정도의 후퇴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는 대략 다음과 같다.

  즉, 복지국가 팽창기에 팽창을 주도했던 세력 - 노동조합과 사민주의 정당 - 은 약화되었지만 기존의 복지국가를 구성하던 프로그램들은 새로운 지지세력을 형성하였을 뿐 아니라, 축소 자체가 갖는 정치적 특성 - 신뢰 획득의 정치가 아닌 비난 회피의 정치라는 - 으로 인해 레토릭에 비해 실제의 축소는 제한적이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피어슨은 권력자원 동원의 측면이나 권위의 집중화 정도, 정부의 행정/재정능력과 같은 복지국가 팽창을 설명하는 전통적인 관점들은 축소의 정치의 특수성으로 인해 그 실효성이 약하며, 따라서 축소의 과정에서는 기존의 프로그램 구조가 어떠했느냐가 핵심이 된다고 말한다. 프로그램별로 상이했던 축소의 결과나 권위가 집중화되었던 영국에서의 개혁이 꼭 미국보다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없었다는 부분 등이 그 근거가 된다.

  그렇다면 축소의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피어슨은 기존 프로그램의 구조가 현재에 어떻게 작용하는가? - 즉, 정책 피드백의 문제를 그 핵심으로 내새운다. 즉, 축소의 과정에서는 행위자가 정치적 비난의 회피를 위해 눈가리기 전략, 분할전략, 보상전략과 같은 수단을 동원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수단이 어느정도 성공적일지에 프로그램의 구조가 영향을 많이 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국의 연금제도는 프로그램의 분절화로 인해 그 이해관계자에게 분할전략을 시도하기 유리했으나 미국의 연금제도는 포괄적 성격의 단일 프로그램으로 이와 같은 전략의 활용이 힘들었으며, 이와 같은 요소가 해당 프로그램의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축소의 정치에서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또한 정책 피드백에서 살펴볼 부분은 무엇인지, 실제 프로그램별 축소 및 체계적 축소는 아래 테이블들을 참고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두 가지만 짚어보고 글을 마치겠다.

  첫째, 저자는 프로그램적 축소의 결과와 체계적 축소의 결과를 살펴보고 이들을 기준으로볼 때 복지국가에 의미 있는 축소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매우 타당하며 탁월한 연구성과이지만 한 편으로 아쉬운 점은 이와 같은 변화가 정책 수혜자의 삶에 어떻게 결과하였는지에 대한 분석이 있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저자는 자산조사 소득지지 프로그램과 관련하여 프로그램 축소의 결과 실질적인 축소의 폭은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70~80년대의 실업과 빈곤의 증가 양상과 맞물려 이와 같은 프로그램의 변화는 영국과 미국 저소득층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를 고려할 때도 '변화의 폭은 크지 않았다.'고 단정짓는 것이 적절한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특히 불평등과 빈곤을 측정하는 각종 지표상 20세기 이후 줄곧 감소해오던 불평등과 빈곤이 7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증가세로 돌아서는 중요한 변화가 있었는데, '인민의 삶'이라는 차원에서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라고 생각된다.

  둘째, '복지국가'라는 것이 적어도 어느 정도 수준의 물질과 기회를 그 국가의 구성원에게 분배하는 것이라고 할 때 70~80년대의 복지국가를 구성하는 제도들에 '큰 변화가 없었다.(약간의 축소만 있었다.)'는 것이 과연 '복지국가는 건재하다.'고 결론지을 만한 것인지에 대해 약간의 의구심이 있다. 다시 말하면 '완전고용'과 '포드주의'가 함께 작용하던 복지국가의 전성기의 제도는 70~80년대에 일어난 경제적 변화와 이로 인한 실업증가, 일자리의 양극화 추세와 더불어 오히려 강화되어야 하는 상황이었음에도 오히려 축소되거나 유지되었다는 것은 '복지국가가 제공하는 인민의 삶'이라는 차원에서는 중요한 후퇴일 수 있다. 비유하자면, 인플레이션이 진행되는데 급여는 명목급여 수준에서 고정된 것이라고 할까. 복지의 욕구가 크게 늘어나는데 공급이 유지되었다는 것은 복지 제도 자체가 (심각하게) 축소된 것일 수 있다.

  책의 내용을 정리한 아래 테이블들로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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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축소의 정치에서 고려할 사항

구분

내용

축소의

개념화

① 단기적 삭감 뿐 아니라 장기적 삭감을 고려 (점감주의전략, 수급자격 강화)

프로그램의 지출 뿐 아니라 구조를 함께 고려 (시장지향성 강화, 잔여주의화)

③ 프로그램적 축소 뿐 아니라 체계적 축소를 함께 고려

- 돈줄 옥죄기 : 세금삭감 및 미래 조세증가 방지제도, 조세의 가시성 강화

자산매각, 극심한 적자재정, 복지국가 외 항목의 지출 증가

- 사회복지에 대한 대중의 애착 약화 : 자유시장 이데올로기의 강조 등

- 복지국가 옹호 정치세력 약화 : 노동조합, 이익집단 등

축소의

위험

● 축소의 정치는 신뢰획득의 실천이 아닌 비난 회피의 실천

- 축소 비용은 집중적, 혜택은 분산적으로 표출

- 유권자의 ‘부정편향성’

⇒ 정책목표(복지축소)와 선거승리의 갈등 발생

축소비용

최소화

● 반대세력의 동원가능성 최소화를 통한 축소에 대한 정치적 반발 감소

눈 가리기 전략 : 인과 고리의 차단을 통한 책임 모호화

- 부정적 결과의 돌출성 완화 (예. 점감주의적 삭감)

- 정책과 부정적 결과의 연결고리 약화 (예. 간접세 인상)

- 정책과 의사결정자의 연결고리 차단 (예. 책임 떠넘기기, 삭감의 자동화)

분할전략 : 잠재적 저항 세력을 분할시켜 약화

- 일부 수혜자의 혜택만을 축소

- 서비스 생산자와 소비자의 균열을 유도

보상전략

- 축소의 최대 피해자에게 일정한 혜택을 부여

- 사적 급여의 확대

축소전략

한계

① 눈 가리기 전략 : 효과가 시간적으로 지연되며, 그 사이 정권교체 시 역전 가능

② 분할전략 : 축소 지지자들 또한 소외될 수 있으며, 정책이 비합리화 되는 경향

③ 보상전략 : 비용 부담이 발생하며, 정책이 비합리화 되는 경향

 

2. 팽창과 축소의 국면의 영향요인

 

(1) 권력자원의 역할

복지국가가 탄생시킨 이익집단의 존재로 인해 축소 국면에서 권력자원의 역할은 제한적

구분

내용

영향력

팽창국면

● 노동조합의 권력자원 정도 및 좌파정당의 역할이 결정적

축소국면

● 영/미 공히 노동조합과 좌파정당의 세력이 매우 약화에도 불구하고

축소의 성과는 대단치 않았으며, 프로그램별로 상이하게 나타남

● 축소의 정치는 유권자에게 인기가 없는 정책이라는 점과 복지국가

시대에 형성된 노조와 자율적인 프로그램별 이익집단의 존재

 

 

(2) 정치제도의 역할

정치제도가 축소에 미치는 역할은 복합적이며, 이는 각 프로그램의 특성에 의해 매개됨

구분

팽창국면

축소국면

수평적 통합

통합될수록

유리

복합적 영향

- 유리 : 정책 추진 시 반대파 무산 능력

- 불리 : 축소의 책임이 명확 (인기가 없는 정책이므로)

수직적

통합

통합될수록

유리

복합적 영향

- 유리 : 책임 떠넘기기, 지방정부 간 재정경쟁 유도

- 불리 : 정책 추진력 약화 (축소에 대한 지역의 저항)

정부의

행정능력

높을수록

유리

영향력 낮음

- 축소의 행위자는 관료보다는 정치인 → 행정능력 중요도 약화

정부의

재정능력

높을수록

유리

복합적 영향

- 유리 : 반대자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능력 (보상전략 구사)

- 불리 : 재정적자 문제를 축소의 논리로 삼을 수 없음

 

(3) 정책피드백

새로운 정책이 새로운 정치를 낳는다” (E.E. 샤츠슈나이더)

구분

내용

영향력

팽창

축소

자원과

유인동기

정책구조는 해당 프로그램을 둘러싼 자원과 유인동기를 창출하며, 이는 사회집단의 형성과 활동에 영향을 줌

고착효과

정책은 사회적∙경제적 이해관계자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한 편, 다른 정책대안의 비용을 상승시켜 제도의 경로의존을 발생시킴

정책학습

정책이 채택되면 정책결정 관련 주요 행위자가 해당 정책을 학습하게 되고 이후 유사한 문제에 대해 유사한 제도를 도입하도록 영향

정보효과

정책의 구조는 정보비대칭성을 낳을 수 있으며, 이는 인과고리의 길이에 영향을 줌으로써 축소전략의 구사에 영향을 미침

N/A

 

3. 프로그램 축소의 결과

 

(1) 프로그램 별 축소사례 : 프로그램 별로 상이하여, 일반적으로 알려진 수준 보다는 낮은 축소

구분

영국

미국

축소

사유

축소

사유

연금

- 기초연금, 자산조사P/G, 뒤늦은

소득비례 연금으로 분절화

- 소득비례 연금부분의 미성숙

- 민간연금은 공적연금과 경쟁

⇒ 사적대안 통한 공적연금 축소

에 성공 (잠재적 민영화)

- 단일연금 P/G의 포괄적 성격

- 소득비례 연금 부분의 성숙

- 민간연금은 공적연금을 보완

- 보험금 신탁기금 의존 (재정 risk)

⇒ 연동제 변화, 소득세 부과 등

일부 개혁만 성공 (구조적변화 X)

주택

- 광범위한 공공주택 프로그램

- 지방정부의 역할 중요

- 장기적 선행투자 P/G로 축소의

효과의 가시성이 낮음

⇒ 주택매입권을 통한 공공주택

사유화 및 지방보조금 축소를

통한 프로그램 잔여화에 성공

- 잔여적 공공주택 P/G (점증중)

- 권리로서의 수급권 P/G가 아님

- 장기적 선행투자 P/G로 축소의

효과의 가시성이 낮음

⇒ 공공주택 신축을 억제하고 주택

보조금 위주 정책으로 전환함으

로써 성공적 축소

부조

- 포괄적 급부의 범위

- 아동수당, 실업급여 등 보편적

P/G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음

- 중앙집권적 프로그램 구조

- 자산조사 P/G는 이미 잔여화된

상태로 추가 축소 여지 불충분

- 목표간 상충 (근로동기 vs. 재정)

⇒ 재정에 집중하여 점감주의적

축소 전략 구사, 실제 축소는

주택수당을 제외하고는 주변적

- 포괄성이 낮은 급부 범위

- 보편적 프로그램이 별로 없음

- 수직적 분권화된 프로그램 구조

- 자산조사 P/G는 이미 잔여화된

상태로 추가 축소 여지 불충분

- 목표간 상충 (근로동기 vs. 재정)

⇒ 직접적 삭감은 제한적이었으며,

workfare 부분은 오히려 증가,

지방 떠넘기기 전략(신연방주의)

구사하였으나 성과는 제한적

건강

- NHS라는 보편적 건강 프로그램

에 대한 국민의 폭넓은지지

- 민영화의 비용 문제

- 축소의 가시성이 높음

⇒ 공공부문 내부시장 창출로

경쟁원리는 도입하는 수준의

매우 부분적인 개혁

중하

- 공적 프로그램은 제한적으로 존재

- 신탁기금+3자 지불방식으로 재정

문제가 심각한 수준

- 민영화의 비용문제

- 과도한 축소 시 공적 건강보호가

더 심각하게 이슈화될 우려

⇒ 재정문제를 이슈화하여 메디케어

위주의 부분적 축소에만 성공

상병

장애

중하

- 법정상병수장(SSI) 제도

- 민간부문으로의 권한 이양 및

고용주에 대한 보상 전략

⇒ 민영 운영 전환하였으나 공공

비용 지출수준을 그대로이며,

피용자 → 고용자 재분배 초래

중하

- 장애보험(DI) 제도

- 권한을 집중시키는데 성공,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오히려 강력

한 정치적 반발에 봉착

⇒ 부분적 축소 (큰 정치적 대가)

 

(2) 프로그램의 장기적 구조 변화 정도 : ‘위축’은 인정되나 ‘축소’라 하기는 미흡

구분

영국

미국

사회지출 추이(‘78→’99)

공공지출 44% → 40%

사회지출 24% → 23%

공공지출 21% → 23%

사회지출 11% → 13%

잔여화 정도(‘80→’90)

자산조사 비중 18% 수준에서 유지

자산조사 비중 15% → 24%

 

 

4. 체계적 축소의 결과

구분

내용

영국

미국

대중의 여론

복지국가에 대한

대중적 지지

양국에서 모두 여론은 보수 정권 집권 즈음에 가장 나빴고, 프로그램 축소 추신 시 반전

돈줄 옥죄기

지속가능성 낮은 재원 의존

비복지 지출 항목 증가

조세인하 및 증가 장애 증대

통화주의 정책으로 세수는 오히려 증가했고, 조세 가시성도 감소함

조세 가시성을 증가시켰고 감세와 국방비로 재정적자 대폭 상승

정치제도

권위의 집중화 정도

권위가 집중된 체제에서 더욱 강화 (노동당 지역 영향력 약화)

분산화 강화

- 미래정부 개입 제어

- 지방 간 재정경쟁

- 삭감책임 분산

이익집단

복지국가지지 세력

노조는 약화되었으나 각 프로그램별 이익집단은 대체로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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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국내도서>사회과학
저자 : 토니 주트(Tony Judt) / 김일년역
출판 : 플래닛(PLANET) 2011.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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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책을 읽다가 현재(혹은 최근)의 서구 좌파의 무기력함을 통렬히 비판하는 책이라는 문구를 보고 위시리스트에 넣어놓았다가 최근에 사서 본 책. 약 240페이지라는 얇은 분량과, 학술적 엄밀성보다는 대중적 접근성을 추구한 글인 까닭에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손쉽게 읽을 수 있었다.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면 사민주의와 복지국가를 넘어서는 비전을 보고 싶었는데 그게 없었다는 것. 물론 공동체에 대한 강조라든가, 국제주의적 시각의 필요성이라든가, 기타 정치의식적인 차원에서 복지국가 +α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뭔가 전체적인 비전을 보기에는 한참 모자란 정도였다.

물론 저자의 논의 자체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 - 좌파, 젊은이들, 그리고 많은 시민들- 의 '사고'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긴 하겠지만, 복지국가의 쇠퇴가 나타나게 된 정치경제학적 배경에 대한 고찰이 없이 단지 68혁명을 전후로한 신좌파의 '의식'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도 아쉬웠다. 경제결정론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토대'의 변화에 대한 근본적 물음이 없이 주의주의적인 분석으로만 복지국가의 쇠퇴와 신자유주의의 등장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의 측면에 한정해서 이야기한다면 여러가지 의미있는 논의가 나온 책이었지만, 근래 포스트 신자유주의를 이야기한 많은 책들을 섭렵한 사람이라면 굳이 목록에 이 한 권을 더 얹는 것이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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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사회민주주의의 명예회복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자리한 국가들을 그 상징적 성공모델로 한 ‘사회민주주의’는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좌파와 우파 모두로부터 폄하되어왔습니다. 좌파로부터는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배신하고 자본과의 타협을 통해 탄생한 ‘개량주의 체제’로서 자본주의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아왔으며, 우파로부터는 ‘복지병’과 ‘비대한 공공부문으로 인한 비효율의 상징’이라는 모함에 가까운 비판을 받아 온 것이죠. 그러나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과 신자유주의의 광풍, 그리고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신자유주의의 위기라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혁명적 사회주의와 자유주의가 모두 한계를 드러내자, ‘구체제’ 취급을 받던 ‘복지국가’는 대안 체제로서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최근의 경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주의’라는 복지국가를 떠받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사회주의보다는 자본주의 쪽에 조금 더 가까운 타협점’ 정도인 것 같습니다. 사회민주주의를 하나의 구체적 지향과 이상을 가진 체계로 보기보다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이상 사이에서 나타난 ‘어중간한 중도’로 보는 입장이 지배적이라는 이야기죠. 사회민주주의를 이렇게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여러 요소를 짜깁기한, 그러면서도 자본주의적인 것이 더 중심이 되는 것으로 보는 시각으로 인해 좌파에서는 여전히 ‘개량주의’의 시각을 거두지 못하고 있고, 우파에서는 때로는 비효율의 상징으로 몰아붙이다가도 20세기를 자유주의의 승리로 선언할 때는 사회민주주의를 슬며시 자유주의의 변형으로 위치시키기도 합니다.

  이 책, ‘정치가 우선한다(The Primacy of Politics)’의 저자인 셰리 버먼은 이런 경향이 잘못되었음을 단호하게 주장합니다. 그녀는 사회민주주의가 ‘정치의 우선성’과 ‘공동체주의에 대한 믿음’이라는 분명한 이념적 지향을 가지고 있으며,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 모두에 대한 대안 이데올로기로서 양차대전 이후 70년대까지의 번영을 이끈 사상이자, 신자유주의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현재와 미래에도 여전히 기능할 20세기 사회사상사의 진정한 승리자라고 선언합니다. 그 말대로라면 가히 ‘사회민주주의의 명예회복’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그녀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사회민주주의 이데올로기의 형성과 발전을 정치사와 지성사를 포괄하여 역사적으로 조망합니다. 이 리뷰에서는 저자의 역사적 조망을 간략히 살펴보고,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들을 현재적 과제에 비추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조망

 저자의 이야기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심각한 불평등과 공동체의 뿌리 뽑힘, 개인의 원자화라는 폐해를 낳은 끝에 대안 이데올로기로서의 마르크스주의가 등장하고, 다시 19세기 말 마르크스주의조차 위기에 놓인 시점에서 시작합니다. 저자는 당시 엥겔스와 카우츠키가 주도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교리’는 역사적 유물론과 계급투쟁이었다고 말합니다. 역사적 유물론과 계급투쟁론은 자본주의는 그 내적 모순으로 인해 계급 간 대립을 격화시킴으로써 필연적으로 붕괴하게 되며, 이는 사회주의로의 필연적인 이행으로 이어진다는 결정론적인 내용입니다. 문제는 마르크스의 예언(이와 같은 경제 결정론은 마르크스의 것이 아니며 엥겔스와 카우츠키가 마르크스주의를 지나치게 도식화 한 나머지 초래된 것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저의 식견이 짧아 뭐라 할 수는 없지만, 아무리 엥겔스와 카우츠키에 의해 단순화가 되었다고는 해도 ‘경제적 토대가 결정적’이라는 생각 자체는 역시 마르크스로부터 기원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한 평가가 아닐까 합니다.)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19세기 후반의 불황을 겪고 난 후 자본주의는 호황 국면에 들어섰고, 적어도 상당 기간 동안은 붕괴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이죠. 이렇게 되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기모순에 봉착하게 됩니다. 당시의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전술한 바와 같이 ‘경제적 토대에 의한 필연적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제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 이행기를 대비해서 노동자들을 조직화하고 교육하는 것 외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혁명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할만한 어떤 지침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경제 결정론적 관점 외에도 마르크스주의의 국가론 - 국가는 지배 계급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일 뿐이라는 - 은 정치 자체에 대한 부정적 정향을 나타냈고, 결국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은 정당이면서도 정치활동에는 나서지 않아야 하는 모순된 입장에 처하게 됩니다. 만약 단기간 내에 자본주의가 붕괴되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시작된다면 이런 것들은 큰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일이 그렇게 진행되지 않게 되면서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 균열이 발생합니다. 바로 수정주의의 등장입니다.

 수정주의의 출발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베른슈타인입니다. (물론 저자는 장 조레스, 프란체스코 메를리노, 필리포 투라티, 오토 바우어 등의 이야기를 폭넓게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수정주의의 시조 격인 베른슈타인의 이야기만 간략하게 짚고 넘어 가겠습니다.) 그는 사회주의는 순전히 유물론적인 기반에서 오지 않으며,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통한 개혁으로 사회주의 이행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역사적 유물론에 대한 공식적 포기를 요구한 것이죠. 또한 그는 민주주의(좀 더 정확하게는 의회주의)의 실현은 사회주의로 가기 위한 중요한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라고 제시하며, 마르크스의 또 다른 예언인 프롤레타리아화(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라 중간계급은 사라지고 소수의 자본가를 제외한 계급들은 프롤레타리아가 된다는 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사회민주당은 득표를 위해 다양한 계급을 포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또 다른 중요한 교리인 계급투쟁론마저 저버린 것입니다. 대신 베른슈타인은 ‘정치의 우선성’과 ‘계급교차적 협력’을 내세웁니다. 자유주의 정치의 소중한 성과인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이용하여 사회의 전반적 피지배계급의 대표자로서 사회민주당이 적극적으로 의회에서 활동함으로써 ‘개혁을 통한 사회주의 이행’이 가능하다는 비전을 제시한 것입니다.

 저자는 베른슈타인과 흐름을 같이한 수정주의자들을 ‘민주주의적 수정주의’라 분류하는 한 편 이들과는 또 다른 수정주의의 흐름을 제시합니다. 바로 후에 파시즘을 낳게 되는 ‘혁명적 수정주의’입니다.(저자는 레닌의 볼셰비즘 또한 혁명적 엘리트의 지도를 통한 사회주의 이행을 제시하여 경제결정론을 부정하였다는 점을 들어 그 또한 수정주의의 한 흐름으로 분류합니다. 사실 이는 좀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수정주의를 ‘혁명을 포기하고 개혁을 추구하는 흐름’으로 보는 일반적인 입장에서 보면 볼셰비즘은 수정주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자의 경우 ‘경제결정론에 입각한 사회주의 이행’을 따르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정통과 수정주의를 나누고 있기 때문에 이 같은 분류가 전적으로 부당하다고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혁명적 수정주의는 조르주 소렐로부터 출발합니다. 소렐은 마르크스주의의 결정론적 세계관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는 베른슈타인과 관점을 같이합니다. 하지만 소렐은 베른슈타인보다 인간의 의지를 더 강조하는 주의주의(主意主義)적 입장을 취했으며, 보다 더 중요하게는 프랑스의 자코뱅주의적 전통을 이어받아 (민주주의적 방법이 아닌) 폭력적 직접행동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사상은 좌우 양극단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 좌측에는 아나코 생디칼리슴이 있었고, 우측에는 파시즘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저자가 파시즘과 나치즘을 다룬 방식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글의 저자인 셰리 버먼의 경우 파시즘이나 민족적 사회주의(나치즘)의 정책이 완전고용, 재정확장,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선성을 강조했다(즉, 국가가 자본가에 대한 우위에서 서서 경제 계획을 수행했다)는 측면에서 ‘민주주의’라는 절차적 요소와 인종주의적인 요소를 제외하고 보면, 사회 민주주의와 파시즘이 매우 유사하다고 말합니다. 정책 뿐 아니라 기원에 있어서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민주적이냐 혁명적이냐의 차이는 있어도 ‘수정주의’라는 공통의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욱 유사하다는 것이죠. 결국 저자는 이를 통해 ‘민주주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또한 이 책이 다룬 내용이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가 ‘민주주의’의 절대적 중요성이라고 생각하기에 상당부분 저자의 논지에 동감합니다. (민주주의의 절대적 중요성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하지만 파시즘/나치즘과 사회 민주주의 사이에는 저자가 다룬 것보다 더 큰 차이가 있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칼 폴라니는 ‘파시즘의 본질’이라는 논문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양립 불가능성을 지적하며 이의 해결 방안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민주주의를 경제 영역에까지 확장시키는 것.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사회에 경제생활만을 남겨놓는 것. 폴라니가 지목한 두 번째 경우가 바로 파시즘으로 그는 파시즘은 경제적 자유주의의 마지막 안전판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민주주의를 말살함으로써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경제를 국가가 보호하고 육성하는 방식으로 나갔다는 것이죠. 물론 저자 또한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만, 저의 짧은 소견으로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양립 불가능성’에 대해 저자는 폴라니와 같은 정도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2차 대전 후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러했듯이) 자본주의에 ‘어느 정도’의 규제만 가한다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양립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저자가 책 말미에 (이른바 ‘구조개혁좌파’라 할 수 있는) 70년대의 이탈리아 공산당이나 프랑스 사회당/공산당 연립정부를 ‘마르크스주의의 유산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즉, 지체된) 것으로 언급하는 데에서도 드러납니다. 이는 결국 사회민주주의를 완결된 체제로 보느냐, 경제적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간단계로 보느냐의 문제이며, 이 중 어느 쪽 입장을 취하는가에 따라 파시즘 및 민족적 사회주의와의 차이에 대한 시각도 달라질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이 글 말미에 다시 언급할 예정이니 일단 이 정도만 언급하고 저자의 논의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로마에서의 무솔리니와 히틀러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수정주의의 대립 문제는 1차 대전을 겪고 난 후 더욱 심각해집니다. 기존의 사적 유물론과 정치의 우선성의 대립, 계급투쟁론과 계급 교차적 협력의 대립은 몇 가지 현실적 상황의 변화로 더욱 심각해집니다. 우선 전쟁을 통해 나타난 민족주의의 등장은 사회주의 정당의 ‘국민정당화’에 대한 문제로 심화되어 기존의 계급투쟁론에 대한 도전을 더욱 거세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극에 달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인민의 반감은 선거를 통해 표출되어 많은 나라에서 마르크스주의 정당은 지배적 정당의 위치에 올라섭니다. 각국의 주요 정당의 위치에 올라선 마르크스주의 정당은 책임 있는 정치행위를 요구받게 되는데, 이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정치행위에 대한 부정적 입장과 충돌하게 되고 역사적 유물론에 대한 정치의 우선성의 도전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의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은 기존의 교조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이게 되고, 이로 인해 사회주의 정당들은 심각한 분열을 겪습니다. 이처럼 마르크스주의가 인민의 자본주의에 대한 실망을 해결해주지 못하는 틈을 비집고 나타난 것이 파시즘과 나치즘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파시즘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는 복합적이지만, 어쨌든 파시즘은 당시에 치솟던 민족주의적 요구와 기존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거부, 그리고 실업이나 빈곤과 같은 현실적 과제의 해결이라는 당시 인민의 요구들을 마르크스주의자들보다 더 빠르고 명확하게 자신의 것으로 하며 폭넓은 지지를 얻습니다. 물론 인권과 민주주의의 말살, 그리고 인종주의라는 요소들로 인해 처음 내세운 것과 달리 파시즘과 나치즘은 지독히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체제로 귀결되고 말았습니다만 그건 나중의 일입니다.

 일찍이 민주주의적 수정주의가 결실을 맺었던 스웨덴이라는 하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에서 민주주의적 수정주의의 결실은 2차 대전을 겪은 후에 이루어집니다. 저자는 양차대전과 그 사이의 대공황을 겪으며 통제되지 않은 시장의 위험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서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루어졌으며, 한편으로 파시즘과 나치즘이라는 전체주의를 겪으며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의 중요성 또한 유럽인들에게 중요한 교훈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케인스주의와 복지국가입니다. 케인스주의 경제정책은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선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사회에서 독립된 경제’가 아닌 ‘사회 안에 묻어 들어간 경제’가 구현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복지국가는 사회 구성원간의 연대성을 강조함으로써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하의 원자화된 개인들의 이익사회(gesellschaft)가 아닌 공동체적 헌신에 기초한 공동사회(gemeinschaft)로의 이행을 보여줍니다. 저자는 비록 적지 않은 나라에서 케인스주의와 복지국가는 우파 정당에 의해 수행되기도 했고, 이로 인해 이것이 자유주의의 변형인 것처럼 오해되기도 하지만, 이는 명백히 민주주의적 수정주의의 주장을 이어받은 사회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20세기 사상사의 최후의 승자는 사회 민주주의라고 말합니다.

                                       1930년대 스웨덴 사민당의 선거포스터

첫 번째 교훈. 도그마(Dogma)에 빠지지 마라.

 그 기원이 마르크스에 있건 엥겔스와 카우츠키에 있건 간에 19세기 말~20세기 초의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이 ‘경제결정론’이라는 도그마에 빠졌던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사실 자본주의는 그 내적 모순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붕괴하게 되며, 그 다음 세상의 주인공은 지금 핍박받고 있는 프롤레타리아라는 명제는 마르크스주의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파산을 앞두고 가장 강력한 대항 이데올로기가 되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지금의 세상이 너무나 비참하고 힘겨울 때 누군가가 ‘걱정하지 마, 반드시 압제자들을 물리치고 네가 승리하게 될 거야.’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과학적 근거’를 가진 것이라고 여겨진다면 누구에게라도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는 그렇게 등장하여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력한 도전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세상은 마르크스가 예측한 것과 다르게 움직였고, 마르크스주의를 강력하게 만든 바로 그 강점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되었습니다. 이는 마르크스를 탓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설사 잘못된 예언이 온전히 마르크스의 몫이라고 가정해도 말이죠. 사상가는 예언자가 아닙니다. 사상가는 자신이 속한 시대에 발을 딛고 그 시대의 환경 속에서 그 시대까지의 지적 성과를 기반으로 새로운 시대를 조망하고 대안을 내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새로운 시대에 대한 예측이 완벽하게 실행되지 않더라도, 그들의 현실 분석과 미래에 대한 대안은 충분히 많은 교훈을 줄 수 있고 더 나은 시대를 설계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본주의가 스스로 붕괴하지 않았다고는 해도, 자본주의의 원리가 가진 근본적인 모순과 그로 인한 계급 문제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양상을 그릴 것인지를 이야기한 마르크스의 시도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바뀐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선대의 사상을 그대로 고집한 후대에게 있습니다. 그들은 시대의 변화를 스스로 체험하고 분석할 수 있는 상황에 있었음에도 선대의 사상을 마치 예언인양 받아들이고 고집했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알맞게 사상과 실천은 바뀌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한 것이죠. 이런 것이 바로 도그마(dogma)에 빠진 상황입니다. 종교적 영역이라면 몰라도 정치적·사회적 영역의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은 절대 도그마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사회는 항상 변하기 마련이며, 제아무리 뛰어난 사상가라도 그 변화를 완전히 예측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정치적·사회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원칙을 가지되 늘 사회의 변화에 조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공통적으로 가졌던 ‘경제결정론’의 도그마는 힘겨운 과정을 거쳐 극복되었습니다. 비록 ‘신자유주의’의 열풍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악몽을 떠올리게 했지만 역사를 완전히 되돌릴 수는 없었고, 복지국가는 약화되었을지언정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경제를 사회와 정치로부터 떼어 낸 채 운영한다는 원리가 지독한 유토피아에 불과하다는 역사의 교훈이 아직은 남아 있었던 까닭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경제에 관한 도그마가 이것뿐인 것은 아닙니다. 경제와 관련해서는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도그마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경제성장’의 도그마입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파시즘과 사회민주주의를 포함한 모든 이데올로기들이 공유했던 경제적 원칙은 ‘경제성장은 이롭다.’는 것이었습니다. 산업화의 진전과 경제의 ‘발전’, 그리고 그로 인한 생산과 소비의 증대는 20세기의 어떤 주류 사상도 거부하지 않았던 ‘공리’였습니다. 특히 이 책의 저자인 셰리 버먼이 20세기 사회사상의 진정한 승리자로 상찬해 마지않는 사회 민주주의와 그 결과물로서의 케인스주의 복지국가는 포드주의로 상징되는 대량생산과 포디즘 체제 하 노동자들의 소득 증대로 인한 대량 소비를 근간으로 한 ‘대중사회’가 그 본질이었습니다. 생산의 지속적인 증대는 노동자들의 고소득의 근간이 되었으며, 그 고소득 노동자들의 소비는 생산증대를 뒷받침할 유효수요를 창출했습니다. 또한 고소득 노동자들로부터의 조세는 복지재정의 근간이 되었으며, 완전고용에 가까운 상황은 복지수혜자를 전통적인 빈곤층 - 노인, 장애인 등 - 으로 제한함으로써 재정적 부담을 완화했습니다. 이 모든 체제의 근간에는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 좀 더 직설적인 표현을 쓰자면 ‘생산과 소비의 지속적인 증대’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왔다가 다시 저물고 있는 지금에도 주류 이데올로기에서는 어느 쪽도 ‘경제성장’이라는 전제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주로 생태주의 진영으로부터 나오는 ‘경제성장’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일축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경제성장’은 ‘경제결정론’보다 더 강력하게 지속되고 있는 도그마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지구 환경의 문제는 '경제성장'이라는 도그마가 초래한 재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그리고 이 경우에는 특히 우리를 둘러싼 자연환경은 우리의 생각의 변화보다 더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많은 생태주의자들이 지적하는 산업발전의 부정적 부산물들, 즉 기후변화나 피크오일, 생태계파괴와 같은 문제들은 이미 지구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봉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멜서스의 ‘인구론’이 그랬던 것처럼, 생태주의자들의 경고 또한 인간의 ‘진보’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현실속의 기술 발전의 정도로 봐서는(보다 더 중요하게는 인간들이 기술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봐서는) 과연 그럴까 싶긴 하지만 설사 그런 논의의 적실성을 어느정도 인정한다고 해도,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은 현재 수준 이상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만약 남반구의 나라들이 북반구의 나라들만큼 산업을 ‘발전’시킨다면, 그 때는 정말 지구가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될 것입니다. (로스엔젤레스의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을 세계 전역으로 확산시킬 경우 지구가 다섯 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나, 세계 모든 가족이 자동차를 한 대씩 가진다면 석유는 수개월밖에 지탱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상황에서 경제성장의 도그마를 그대로 가지고 미래를 설계한다면, 그 미래가 과연 지속가능할까요? 어쩌면 현 시대에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가치는 '자유로운 시장‘이나 ’복지국가‘가 아니라 생태주의일지도 모릅니다. 설사 생태주의자들의 주장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경제성장이 도전받지 않는 도그마로 존재하는 상황은 위험하다는 것을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실패에서 읽어내는 것이야말로 역사적 교훈을 현재화하는 지혜일 것입니다.

 

두 번째 교훈. 민주주의가 우선한다.

 제가 이 책을 읽으며 느낀 두 번째의 중요한 교훈을 바로 ‘민주주의의 우선성’입니다. 파시즘과 사민주의의 차이의 대부분이 민주주의라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가장 중요한 차이 중 하나였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19~20세기를 거치며 형성된 체제 중 어쨌든 ‘민주주의적인’ 제도를 정착시킨 체제는 불완전할지언정 그럭저럭 생존해온 반면, 그렇지 못한 체제는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몰락했습니다. 나치즘과 파시즘,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이 그 좋은 예입니다. ‘이슬람 사회주의’라는 슬로건으로 서구 기업의 착취와 전근대적 왕정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등장했던 ‘혁명가’, 카다피는 최초의 ‘좋은 뜻’은 간데없이 최악의 독재자가 되어 결국 인민에 의해 축출되었으며, 우리에게 더 가까운 예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해방 직후 친일파 청산과 토지 재분배라는 시대적 과제를 대한민국보다 더 잘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세계 유일의 3대 세습 국가(남쪽에는 3대 세습 재벌이 있긴 합니다만)가 되어 ‘인민은 굶고 있는데 지배층은 권력 유지에만 골몰하고 있는’ 비참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민주주의의 유무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도한 일반화이겠습니다만, 민주적 제도가 없는 나라가 시대의 변화에 더 적응하지 못하며 권력 중심부로부터의 부패에 더 취약한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때문에, 바로 위에 도그마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만, 만약 사회의 운영원리로서 단 한 가지 ‘절대 흔들리지 말아야 할 원칙’이 있다면 저는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의 원칙을 말함에 있어 정말로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행하는 것입니다. 사실 위에 ‘민주주의가 없었던’ 체제로 예를 들었던 사회들도 민주집중제라든가 하는 식으로 스스로의 ‘민주주의’를 추진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작동되는 민주주의였냐고 질문해본다면 아마 상식을 가진 현대인의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더 추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일까요?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라고 하면 보통·평등·직접·비밀의 원칙에 근거한 선거, 의회, 복수의 정당 등을 떠올립니다. 이것들은 모두 오랜 세월을 거치며 형성된 ‘민주주의를 운영하기 위한 장치들’입니다. 민주주의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죠. 그런데 이런 제도들이 대부분 갖춰진 지금의 우리나라 정치는 ‘민주주의적’인가요?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민주주의를 정의해야 합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는 학자마다 여러 가지로 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민주주의는 민중(Demos)에 의한 지배(Kratos)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수의 선택받은 이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민중이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지금 우리의 현실을 어떨까요? 2011년 전세계를 뒤흔들었던 말이 바로 1%에 대한 99%의 반격입니다. 민주주의의 원리가 관철되고 있다면 말도 안되는 소리죠. ‘반격’이라는 것은 이전까지 열위에 있었음을 내포한 표현인데 99%의 사람들이 1%에 의해 열위에 있다면 우리가 떠들어온 ‘민주주의’는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이런 문제가 발생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대의 민주주의 체제의 한계라든가 관료주의의 문제도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부분은 참여 민주주의적 요소의 도입 - 주민소환이라든가, 주민참여예산제 같은 - 이나 정당의 정책역량 강화를 통해 선출된 권력의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대한 통제 강화 같은 대안이 있을 수 있겠지요. 이런 문제들을 깊이 있게 다룰 수 있으면 좋겠지만, 여기서는 다른 이야기를 조금 하고 넘어갈까 합니다. 바로 앞서 언급한 폴라니의 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충돌의 문제입니다.

      '김진표 아웃' 같은 것으로 간단히 경제민주화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물론 아웃은 필요하긴 하다.

 최근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상당히 넓은 스펙트럼에서 쓰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넓은 스펙트럼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지점은 ‘재벌이 법 위에 군림하는’ 상황을 바꿔야 한다는 것인 듯합니다. 그런데 사실 엄밀히 따지면 이건 ‘민주주의’라기보다는 ‘제대로 된 자유주의’의 영역에 속합니다. 공정한 경쟁의 보장이라든가, 법치주의의 원칙을 분명히 하는 것은 서구에서는 19세기 고전적 자유주의 시대의 과제였습니다. 이는 사실 민주주의의 문제라기보다는 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전제조건 같은 것들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을 ‘경제 민주화’라고 부르는 것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지체된 경제 자유화의 회복’이라고 하면 더 적합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경제 민주주의는 경제 영역에서 민중에 의한 지배를 확립해나가는 데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독일 같은 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는 노조의 경영참여 제도화는 우리의 현실에서 좋은 출발점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더 나간다면 협동조합처럼 민주적 원리에 의해 운영되는 생산/소비 조직이 경제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 또한 경제 민주주의의 중요한 요소일 수 있을 것입니다. 공공이 운영하는 - 달리 말하면 국유화된 - 기업을 늘림으로써 사적 기업의 전횡을 견제하는 문제는 좀 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입니다. ‘국가’라는 기관을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냐는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국과 같이 선출되지 않은 관료의 힘이 강한 나라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현 시점에서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할 때 초국적 자본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라는 주제는 매우 중요하고도 어렵습니다. 어찌 보면 케인지언 복지국가가 실패한 원인 중 하나는 일국적 케인즈주의가 초국적 자본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결국 ‘경제 민주화’는 나라 안에서 뿐 아니라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공통의 노력이 필요한 과제입니다. 최소한 지역적 차원의 다국적 공조가 필요한데, 현재 남미에서 시도되고 있는 ALBA(Alternativa Bolivariana para América Latina y el Caribe)와 같은 경우가 하나의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폴라니는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본질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원리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민주주의를 폐기하거나 자본주의를 민주화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완벽한 자본가의 통치 기구로서의 국가’를 만들거나 ‘경제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거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셰리 버먼은 이와 같은 ‘자본주의의 민주화’의 과제가 케인지언 복지국가에 의해 훌륭하게 수행되었다는 의견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진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좀 더 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가 우선해야 한다.’는 역사의 교훈을 현재화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영역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할 것입니다.

  

나가며. 사회민주주의의 현재와 미래

 글을 맺으며 이 책에 나온 저자의 중요한 주장들과 그 주장들에 대한 저의 부족하나마 간략한 견해를 덧붙여볼까 합니다. 우선 저자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 즉, ‘사회민주주의야말로 20세기 사회사상사의 진정한 승리자’라는 주장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합니다. 어쨌든 19~20세기를 거치며 나온 여러 사회사상 중 사회민주주의에 기반한 사회가 가장 번영했고 성공적이었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검증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영미권을 제외한 유럽 대부분 지역을 ‘사회민주주의’라는 하나의 틀로 묶을 만큼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많은 공통점을 찾을 수 있긴 하지만, 이를테면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과 대륙 유럽 국가들의 차이가 대륙 유럽 국가들과 영국(미국은 꽤 차이가 커 보이니 논외로 하겠습니다.) 과 같은 국가와의 차이에 비해 그렇게 좁았다고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좀 더 중요하게는 저는 사실 사회민주주의는 ‘과도기적 체제’였다고(혹은 그랬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사회민주주의가 폴라니가 제시한 방법대로 정치의 힘으로 경제의 영역에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체제였다고 한다면 현실속의 사회민주주의가 균형점을 이루었던 지점은 너무나 불충분한 민주화였습니다. 불가역적인 수준까지 경제 영역에 민주주의를 심지 못했기 때문에 전 세계적 정치경제 환경의 변화 시기에 이루어진 ‘신자유주의의 역습’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스웨덴의 임노동자 기금 시도나, 셰리 버먼이 마르크스주의의 구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지체된 현상쯤으로 취급했던 프랑스 사회당-공산당의 ‘공동강령’ 같은 것들이 좀 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면, 지구촌 몇몇 국가에서나마 사회민주주의를 통한 경제 영역의 민주화는 후퇴할 수 없는 수준까지 전진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끝으로 “사람들이 함께 노력하면 어떤 장애물이라도 극복해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기반을 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사회민주주의가 20세기에 큰 성공을 거두었듯, 21세기에도 “그 형태는 다를지 모르나 성격은 다르지 않은” 정치 이데올로기를 통해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저자의 마지막 주장에 대해서는 전적인 공감을 표하고 싶습니다. 경제든 뭐든 ‘결정지어져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인간의 힘을 통해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어떤 사족도 달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근래에 꽤 여러 편의 책 리뷰를 작성한 바 있는데, 이번 리뷰는 그 어느 때보다 제 의견을 많이 넣었고(물론 저의 무지 탓으로 많은 다른 글에서 본 내용들을 활용하긴 했습니다만), 저자에게 많이 반항(?)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전문성이나 깊이 있는 지식도 갖지 못한 제가 감히 셰리버먼과 같은 학자의 책에 너무 많은 토를 단 것 같아 낯 뜨겁긴 합니다만, 무식한 자라도 용감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또 민주주의의 장점인 듯합니다. 어찌 되었든 부족한 제가 있는 힘을 다해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해준 이 책과 저자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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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의 사상과 이론
국내도서>전공도서/대학교재
저자 : 라메쉬미쉬라 / 남찬섭역
출판 : 한울아카데미 2011.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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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지국가를 보는 시각을 다루는 책으로 내가 최근에 읽은 미쉬라의 <<복지국가의 사상과 이론>>은 복지국가에 대한 여러 관점을 중립적 시각에서 다룬 후 현실에서의 복지국가는 어떤 모습인지를 더듬어보는 책이었다.(
2012/02/14 - [감상] - 복지국가의 사상과 이론 (라메쉬 미쉬라 저 / 남찬섭 역 / 한울아카데미) 참조
) 그 책이 다룬 관점들은 복지행정학 관점, 기술결정론(수렴론) 관점, 기능주의 관점,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관점이었는데, 저자는 마르크스주의 관점을 다루며 마르크스주의적 접근은 체계론적 분석집단행위적 분석을 결합할 수 있다는 것이 (기능주의와 비교할 때) 장점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집단행위적 시각을 포기하고 기능주의적(, 체계론적) 분석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며 아쉬움을 표현한다. 오늘 소개할 이안 고프의 이 책, <<복지국가의 정치경제학>>미쉬라의 아쉬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의 대답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물론 고프의 시각이 마르크스주의자 일반의 시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실제로 고프는 이윤율 저하 경향성의 법칙이라든가 공황 분석과 같은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관점을 결하고 있다는 부분에서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며, 이에 대해 역자는 고프가 신리카도주의적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역자후기 참조.) 고프는 마르크스주의 시각에서 미쉬라가 아쉬워한 두 부분을 모두 충분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이 조망하는 복지국가의 키워드를 하나만 꼽으라면 모순혹은 양면성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복지국가의 두 얼굴


마르크스주의 시각에서 복지국가를 바라보며 저자는 복지국가가 양면성을 가진 체계임을 강조한다. 복지국가는 사회복지를 향상시키고 시장의 횡포에 대항하는측면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인간을 억압/규제하고 자본주의 경제의 요구에 적응시키는측면도 가지고 있다. 사실 자본주의를 소위 시장 만능주의라고 하는 체제로 파악할 때 시장 질서에 따른 분배가 아닌 다른 방식의 분배(사회복지를 통한 분배, 부분적으로나마 욕구에 따른 분배)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모순인데,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자체로부터 기인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마르크스가 가치법칙이라고 말한 비정한 시장력의 힘으로 모든 개인이 규율 되는 체제인데, 이 안에서 개개의 노동자는 시장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하나의 상품이 되며, 지배계급은 마치 자본을 축적하도록 강요된 것처럼 탐욕스럽게 자본의 확장을 위해 움직인다. 당연히 자본주의에서는 재화나 서비스의 분배 과정 또한 이와 같은 시장 질서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인간을 시장의 힘에만 맡겨두게 되면 자본주의 자체의 지속성이 담보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노령, 산재, 실업, 가족의 붕괴와 같은 자본주의 산업사회가 초래한 위험들은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상품인 노동력을 재생산하는데 심각한 장애가 된다. 따라서 사회는 어느 정도가 되었든 시장질서에서 벗어난 욕구에 따른분배 방식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이것이 제도화 된 것이 복지국가이다. 결국 자본주의는 그 자신의 유지를 위해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체제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 설명은 하나의 중요한 요소를 결하고 있다. 바로 복지국가의 형성에서 계급갈등의 역할이 그것이다. 이 부분은 뒤에 살펴보도록 하자.) 그러나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적인 것자본주의적이지 않은 것은 충돌하게 마련이다. 다시 말하면, 복지국가가 성장하면 할수록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위협하게 된다는 말이다.

 

복지국가의 기원 계급갈등과 체제의 요구

복지국가가 자본주의를 어떻게 위협하게 되는 지를 다루기에 앞서서 복지국가라는 체제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위의 설명에서 배제되었던 계급갈등의 역할에서 출발하자. 자본주의는 그 체제의 특성상 자본의 이해와 대립되는 이해를 가진 계급 즉 노동 계급을 대량으로 발생시키게 된다. 노동자 계급은 대규모 공정이라는 일관작업의 환경 하에서 집합적 성격을 갖는 노동을 통해 조직화 역량을 갖추어 나가게 되며, ‘착취라는 자본주의의 본질로 인해 숙명적으로 자본가와의 계급대립을 발생시키게 된다. 더구나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중요한 특성, 즉 선거에 기반한 민주주의라는 특성은 (물론 이 또한 공짜로 주어진 것은 아니다. 보편적인 선거권 확립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자유주의 좌파 세력과 연대하여 싸웠는지는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대의제 구조 내에 노동자의 대표를 등장시키기까지 한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노동 계급을 자본주의 체제 내로 포섭하지 않으면 혁명이라는 – 1789년 프랑스 혁명 후 자코뱅 독재를 목격한 이래 모든 부르주아에게는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공포인 파국을 가져오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노동계급을 자본주의 체계 내로 포섭해야 하는데, 바로 이 포섭의 방법이 바로 복지국가이다. 어떤 경우는 노동 계급의 압력에 의해 또 어떤 경우는 예상되는 노동 계급의 압력을 사전에 약화시키기 위해 사회정책을 도입하는 식의 다양성은 있지만, 어쨌든 노동 계급의 계급투쟁에 대한 대응이라는 것은 대부분 국가에서 복지국가를 향한 움직임이 시작된 중요한 원인이다.

       복지국가는 분명 '부분적으로는' 조직화된 노동운동으로 인한 계급투쟁의 성과이다.

그러나 복지국가가 순수하게 조직화된 노동운동의 성과물인 것만은 아니다. 개별 자본가들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는 안돼!’라고 외친 한국의 한 자본가를 기억하라. 그 자본가의 눈에 흙이 들어간 지 오래지만 그 독점자본의 사업장에는 아직도 노조가 제대로 없다.) 자본가 전체의 이익을 생각할 때는 노동조합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인정과 복지정책의 어느 정도의 시행은 필수적이다. 이는 비단 복지라는 탈출구가 없다면 혁명을 불러올 수 있다는 공포 때문만은 아니다. 자유방임주의가 득세하던 19세기 영국의 공장 현실은 비참함 그 이상이었다. 생산비를 절감하기 위한 자본가들의 노력은 생존선 이하의 임금을 받으며 하루 12시간이 넘는 노동에 시달리는 아동들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었고, 이는 자본주의의 가장 중대한 투입요소인 노동의 재생산을 방해하는 지경에 이르러 자본가 전반의 이익 기반을 훼손할 정도가 되었다. , 개별 자본가의 이익이 무제한 관철되도록 놔두었을 때 전체 자본가의 이익기반은 파괴되고 결국 이는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을 위태롭게 하는 결과를 낳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공장법과 같은 최소한의 개입는 노동운동이 없더라도 자본주의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결국 미쉬라의 말처럼 계급갈등체계특성은 모두 자유방임주의국가를 복지국가로 이끄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까지 복지국가로 움직일 것인가?’를 놓고 자본과 노동은 또 한 번 힘겨루기를 해야만 하겠지만.

 

국가 자본의 이익 실현과 상대적 자율성

이 설명에서 개별 자본가의 이익이 아닌 전체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구가 바로 국가이다. 사실 국가는 자본주의의 형성에서부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수십 년간 신자유주의의 세례를 받은 결과 우리는 흔히 시장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이고 규제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하지만 사실 시장경제의 출발은 조금도 자연스럽지 않았다. 시장경제는 이른바 고전경제학의 투입요소인 토지, 노동, 자본이 시장에서 제한 없이 거래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이전의 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그 때의 사람들은 수많은 공유지를 가지고 집산적 생산을 하고 있었으며, 공동체는 개개인에 대한 일정한 자유의 제약보호기능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었다. (바람직한 경우를 보여주는 예는 아니지만, 중세의 농노제를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농노제 하에서 농노는 거주이전의 자유를 비롯한 갖가지 자유를 제한 받고 있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 어떤 이유로 인해서든 생존에 위협을 받게 되었을 때 영주로부터 최소한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장치들은 모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현에 장애일 뿐이었고 따라서 해체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역할을 수행한 것이 국가 , 정치권력이었다. 자본주의는 자연스럽게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이전 사회를 권력의 힘으로 폭력적으로 해체하며 등장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유를 가질 수 있었다. 비록 못 가진 사람에게 그 자유는 단지 굶을 자유일 뿐이었지만. 그리고 그 자유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거래에 의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형성의 중요한 근간이 된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일단 형성되게 되면 착취가 경제체제 내에서 자동적으로 실현된다는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잉여가치의 수탈은 의식적인 강제 없이도 시장기구의 힘으로 자연스럽게이루어진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경제정치로부터 분리하고, ‘사적인 것공적인 것과는 다른 것으로 취급하게 되는 상태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분리된정치는 분리된 국가구조’,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 국가가 된다. 물론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주어진다. 만약 국가가 이 범주를 넘으려고 할 때 자본은 보다 유망한 자본축적의 중심지로 이동하게 되고, 이는 (적어도 단기적인, 그러나 심각한) 경제적 난관으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에 국가는 (혁명을 일으키는 상황이 아닌 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범위 내에서 움직인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지구적차원의 체제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구조적 속박이며, 국가의 자율성이 상대적인 이유이다.

그렇다면 상대적 자율성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위에서 설명한대로 국가는 상대적 자율성을 갖기 때문에 개별 자본의 단기적 이익이 아닌 전체 자본의 중/장기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 , 아무리 유력 자본가가 내 눈이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돼!’라고 외치더라도 노조의 존재가 자본주의 전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면 노조를 허용하는 정책이나 제도를 시행할 수 있는 것이 국가가 가진 상대적 자율성인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은 본질적으로 한계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피지배 계급에게 국가는 일정한 속박 내에서나마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들을 개선할 수 있는 중요한 가능성이 되며, 그 결과가 바로 지난 세기 자본주의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복지국가이다.

 

복지국가는 어떻게 위협이 되는가?

자본주의와 복지국가가 어떻게 결합되는가에 비하면, 복지국가가 어떻게 자본주의의 위협이 되는가(다시 말하면, ‘복지국가의 위기는 어떻게 도래하는가?)에 대한 저자의 논의는 빈약하다. 논의가 타당성이 약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양적으로 빈약하다는 말이다. 오히려 저자는 위기의 진짜 원인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보다는 사회지출의 증가를 70년대 경제위기의 진정한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이 왜 불완전한가?’에 대한 논의에 더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다. 저자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이른바 복지국가가 생산성 저하를 초래한다.’는 주장은 이렇다. 경제에는 시장부문비시장부문이 있는데 시장부문은 시장판매를 위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모든 경제적 활동으로 이루어지며, 비시장부문은 그 외의 것들, , 국방, NHS (국가 건강 서비스, 이 장에서의 모든 논의는 영국을 예로 들어 이루어지고 있다.) 등 주로 국가/공공 부문의 활동들로 구성된다. 이 중 국가 전체의 소비재, 투자재, 수출재 등의 수요총량을 공급하는 것은 시장부문이며, 따라서 시장부문이야말로 경제에서 유일하게 생산적인부문이다. 따라서 비시장부문에서 일하는 비생산적 노동자들의 소득은 생산적 부문이 생산한 시장부문생산물의 구입을 위해서만 지출될 수 있다. 그 결과로 비생산적부문의 국가고용 증대는 시장부문 산출의 몫을 축소시킴과 동시에 시장부문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킨다. 또한 국가지출의 증대는 시장부문에 대한 조세부담의 증대를 의미하며, 이는 결국 시장부문의 이윤에 의해 부담된다. 결국 복지국가가 초래한 국가와 공공부문의 확대는 ① (생산적인) 시장부문으로 가야 할 노동력을 (비생산적인) 비시장부문으로 돌리고, ② 시장부문의 산출부담을 증가시키며, ③ 조세부담으로 시장부문의 이윤을 축소시키는 3중의 부담을 시장부문에 전가하는 방식으로 산업기반을 약화시키고, 저성장과 무역적자의 원인이 된다.

    복지국가에 조종을 울린 '철의 여인' 마가렛 데처. 메릴스트립의 싱크로율이 후덜덜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의 파국을 이야기하는 이 시기에 왜 하필 그녀가 영화화된 걸까? 

저자는 복지국가를 저성장의 원인으로 몰아세우는 이런 주장이 타당하지 않음을 여러 각도에서 논증한다. 첫째, 비시장부문의 활동이 생산하는 사회적 임금집합적 소비는 그 자체가 생산적이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노동력을 재생산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를 공급하게 됨으로써 시장부문에서 시장임금으로 지급되어야 할 비용을 감소시키므로 비시장부문의 모든 활동이 시장부분의 이윤을 감소시키는 형태를 결과한다는 분석은 옳지 않다. 둘째, 예를 들어 NHS와 같은 필수 서비스가 국가에서 운영될 경우 민간에서 운영되는 것과 달리 소비자가 NHS에 지급할 비용에는 이윤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는 소비자의 후생을 증진시키거나, (만약 시장임금이 이와 같은 부분을 반영하여 낮아지거나 덜 상승하는 식으로 반응할 경우) 시장부문의 이윤을 증가시키게 된다. 이는 시장부문에서 NHS를 공급했을 때의 이윤과 같으므로 이윤의 총량은 같지만 (NHS를 공급하는 자본가가 없기 때문에 사회의 전체 자본가 수가 감소함으로써) 이윤율을 오히려 더 높아지는 결과가 된다. 셋째, 국가가 공급하는 사회서비스는 재생산적인 것 (예를 들면 교육, 보건 같은)비생산적인 것 (주로 사회통제를 담당하는 서비스, 예를 들면 군대, 경찰과 같은)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중 재생산적인 것은 장기적으로 시장부분의 생산 증대에 기여하게 되며, 따라서 이 부분의 비중을 높일수록 사회서비스는 그 자체로 생산적일 수 있다.

그렇다면 저자가 생각하는 1970년대 복지국가의 위기의 본질은 무엇일까? 저자는 복지국가의 위기는 전후 계속되어온 장기호황자체에서 싹튼 것이라고 말한다. , 전후의 경제적 호황은 산업예비군을 고갈시켜 노동운동의 힘을 강화시켰고 강력해진 노동운동은 임금을 상승시켜 인플레이션 압력을 증가시켰다. 한 편으로 유럽과 일본의 선진국가들은 미국의 기술수준을 따라잡음으로써 미국 자본의 경쟁을 증대시켰고, 이는 미국 자본의 이윤압박을 증가시켜 미국의 헤게모니 하의 국제질서라는 기존의 국제적 축적체제를 뒤흔들었다. 한편으로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국가지출은 증대했는데 이에 대한 재원조달시도는 다시금 인플레이션 압박을 증가시키게 된다. 결국 불황에 대처하는 국가지출확대라는 케인즈주의 경제학의 대응책은 인플레이션이라는 암초를 만나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었고 이것이 위기의 본질이다. , ‘복지국가는 위기의 한 측면일 뿐이지 이것이 위기의 중요한 원인도, 결과도 아니라는 것이다.

 

나가며. 복지국가의 미래는?

이와 같이 복지국가의 본질과 기원, 그리고 위기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고찰을 마친 저자는 위기에 봉착한 복지국가의 미래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저자는 후기에서 복지국가는 자본주의의 피조물임과 동시에 자본주의 속의 사회주의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한 번 복지국가의 양면성이다.) 그리고 복지정책이 가진 긍정적인 측면들을 보호하고 확대함과 동시에 복지정책의 부정적 측면들은 노출시켜 척결해야 한다는 (공자님 말씀 같은) 교훈을 던지며 글을 마무리한다. ‘복지자본주의에서 복지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바란다는, (‘어떻게가 빠져 있기에) 다소 갑작스러운 문장을 끝으로. 결국 복지국가의 과거와 현재를 일관성 있게 조망한 저자로서도 복지국가의 미래는 말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이 책이 쓰여진 시점부터 20여 년을 더 살아온 나로서는 당시의 저자가 몰랐던 복지국가의 미래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다. 70년대를 거치며 복지국가는 저자가 애써 증명하려 했던 바와는 달리 경제위기의 주범이자 비효율의 상징으로 몰렸고, 그 결과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좌파조차 (기존의 복지국가와 자유방임주의 사이의) 3의 길을 외치며 사실상 신자유주의의 조타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되었다. 사실 70년대의 위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다. 저자도 지적한 것처럼 노동운동의 강화와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 압박은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국가의 비대함과 그로 인한 비효율은 신자유주의 진영에서 주장한 것과는 달리 정말 위기의 원인이었는지 잘 밝혀지지 않은 것 같다. 한편 신자유주의 진영에서는 은폐했으며, 저자도 (적어도 이 책에서는) 다루지 않은 위기의 또 하나의 측면이었던 자본의 독점자본화는, 위기의 원인으로 주목 받지 않았던 덕분에 그 후 이십년동안 신자유주의의 시대를 거치며 더욱 증폭되어 오늘날 또 다른 위기의 원인이 되고 있다. (1970년대 인플레이션 압박은 노동의 임금상승도 있지만, 독점자본화에 따라 가격의 결정이 시장이 아닌 자본에 의해 이루어짐으로써 생산비 상승이나 임금인상이 이윤을 잠식하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가격의 상승으로 이어졌다는 측면도 있다. 또한 산업기반 약화의 원인은 신자유주의의 주장대로 국가의 비대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업자본이 덩치를 키우며 초국적 금융자본화된 것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복지국가는 무엇인가? 지난 30년 간 지구적 자본주의를 운영한 신자유주의가 실패했으니 이제 다시 복지국가로 돌아가면 되는 것일까? 30년 전의 경제위기를 몰고왔던 원인들은 해결되었는가? 복지 자본주의의 전성기를 열었던 지속적인 생산의 증대는 과연 돌아올 수 있는 것일까?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으로의 이행이라는 산업 조건의 변화는 어떠한가? 인구구조의 변화와 환경의 파괴, 그리고 석유의 고갈이라는 잠재적 위협들은 복지국가와 어떻게 어울릴 수 있을까? 2008년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건제한 초국적 금융자본은 과연 복지국가로의 회귀를 용인할까?

이안 고프 같은 이도 복지국가의 미래를 조망하지 못했는데 내가 이런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을 리 없다. 다만 한 가지만 이야기하고 싶다. 70년대 케인즈주의 복지국가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 마땅히 이에 대한 대안은 시대적 변화를 담은 새로운 비전이었어야 했다. 하지만 선택된 비전은 고전적 자유방임주의의 재판일 뿐인 신자유주의였고, 결국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낳았을 뿐이었다. 또 다른 위기에 봉착한 지금, 어떤 이유에서든 30년 전 폐기되었던 체제를 다시 들고 나오는 것인(물론 적어도 복지국가의 30년의 신자유주의의 30년 같은 야만의 세월은 아니었으니 좀 나을 수는 있어도) 그리 현명한 대안이 아닐지도 모른다. 고프의 말처럼 복지국가의 긍정적 측면을 담되, 새로운 시대의 질서가 될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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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그들 자신의 역사를 만들 수 있지만,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상황 아래서는 아니다."
 - 마르크스 / 이안 고프, '복지국가의 정치경제학' p25 에서 재인용

"복지국가는, 사회복지를 향상시키고 개인의 능력을 개발하며 시장력의 맹목적 역할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가능하게 하는 경향들과, 인간을 억압하고 규제하며 그들을 자본주의 경제의 요구에 적응시키는 경향들을 동시에 갖고 있다. 이러한 이중적 경향은 정반대 방향으로 상쇄경향을 유발한다. 이것이 복지국가를 모순적인 과정이라고 하는 이유이다."
 - 이안 고프, '복지국가의 정치경제학' p28

"자본주의가 사물의 자연적인 질서도 인식되는 한, 사회에 대한 이러한 관념 및 설명은 명백하고 불가피할 뿐 아니라 그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도 정당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복지국가의 이데올로기는 그 좋은 예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와 집단적인 급여 사이의 실재적인 관계를 왜곡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적으로 환상적인 것은 아니다. 즉 복지국가의 이데올로기는 현실적인 기반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 이안 고프, '복지국가의 정치경제학' p42~43

"자본주의의 비밀은 일찌기 정치경제학자들이 파악했던 바와 같이 아무도 그것을 계획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사람들의 의도가 역사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예컨대 국가가 시장력의 역할을 수정할 수 없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들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존속하는 한 그것들을 없앨 수는 없다."
  - 이안 고프, '복지국가의 정치경제학' p47~48

"마르크스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특정한 계급이 국가제도를 지배한다는 관점이 아니라(이것이 보편적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사람이 이러한 위치에 있게 되더라도 그는 자본축적 과정상의 불가피성에 의해 강제되어진다는 관점이다. 그러나 동시에 국가제도가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과 국가가 상대적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국가로 하여금 다양한 개혁을 할 수 있게 하며, 한 계급의 수동적 도구만으로는 작용하지 않게 한다. 이러한 속박 내에서 경쟁적인 전략과 정책 그리고 조정을 위한 공간이 존재한다. 많은 국가기관들이 정책을 수립하고 파기하며 선택과 실책을 범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가가 경쟁하는 집단간의 중립적 중재인이라는 다원주의자의 국가관이나, 단지 사회 지배계급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는 경제 결정론적 관점 양자 모두를 거부한다."
  - 이안 고프, '복지국가의 정치경제학' p65

"표준노동일의 성립은 수 세기에 걸친 자본가와 노동자의 투쟁의 결과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노동자가 국가내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투쟁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자본 장기적 축적을 돕고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강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접근방법은 금세기의 대부분 복지정책에 적용될 수 있다. 여기서 진실의 핵심은 노동계급이 자본의 한 요소('가변 자본')인 동시에 자신의 요구와 생활수준을 개선하기 위해 투쟁하는 살아있는 인간계급이라는 사실에 있다."
  - 이안 고프, '복지국가의 정치경제학' p77~78

"강력학 노동계급운동의 위험이,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더욱 응집력 있고 전략적으로 생각하게 만들며 이러한 목적을 위해 국가기구를 재편성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중략)... 이러한 (노동계급의) 도전에 대한 대응 역시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공통적인 것은 더욱 중앙집중화된 개입주의 국가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일반적인 현상은 노동계급정당이 의회에 진출함으로써 의회의 중요한 정책결정활동이 제거되고 그것이 국가의 행정부로 이전되는 현상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 이안 고프, '복지국가의 정치경제학' p90~91

"그러나 도시재개발이 창출해 낸 새로운 사회적 욕구를 생각해 보라. 자녀를 가진 젊은 세대들이, 종전의 경우에는 중요한 부양기능을 담당했을 그들의 부모로부터 점점 더 분리되고 있다. 만약 젊은 세대의 어머니가 취업하기를 원한다면, 지방정부의 탁아소나 어떤 다른 대체물을 찾아야만 한다. 만약 종종 그러하듯 국가가 탁아소의 시설확대를 거부한다면, 자격을 갖추지 못한 탁아모의 확산과 같은 일련의 만족스럽지 못한 대체물이 필연적으로 창출되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 집에 있는 노인들은 또한 그들의 직계가족과 격리되어, 가정보호나 시설보호를 통한 국가보조의 증대를 요구하게 된다."
  - 이안 고프, '복지국가의 정치경제학' p122

"여기서 우리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상호모순된 영향에 관하여 설득력 있는 논의를 전개할 수 있다. 사회서비스와 기타 항목들에 대한 국가지출의 증가는 한편으로 자본축적과 재생산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하나,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바로 그 성장이 자본축적을 방해한다."
  - 이안 고프, '복지국가의 정치경제학' p138

"만약 현물급여가 배제된다면 재분배는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주택이나 다른 생활필수품을 위한 보조금이 없고 국민보건서비스도 없이, 사회보장기여금(임금과 관련된다 할지라도)이나 간접세로부터 재정의 보다 많은 부분을 조달하는 나라는, 이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하여 본다면, 소득집단 사이에 수직적 재분배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정도는 훨씬 미약할 것이다."
  - 이안 고프, '복지국가의 정치경제학' p146

"개략적으로 말하면, 복지국가는 자녀를 가진 가존, 연금수령자 가계와 병자들 쪽으로 자원을 이동시킨다. 다시 말하면 복지국가는 이윤으로부터 임금소득에로의 재분배나 상류 및 중상류계층으로부터 저소득계층에로의 재분배가 아니라, 임금과 봉급을 얻는 계급(광의의 노동계급)의 내부에서 소득을 재분배하는 것이다."
  - 이안 고프, '복지국가의 정치경제학' p146

"모든 조세는 잉여가치로부터 공제된 것이라는 생각은, 노동력가치는 잉여가치를 제하고 남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력가치는 모든 조세와 모든 국가급여를 공제한 나머지로 계산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노동력가치는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임금으로 실제로 구입한 상품들을 말한다. 그러나 즉시 두 가지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첫째, 이들 상품과 서비스의 일부는 사회보장급여로 구입되며, 임금으로 구입한 빵과 가족수당으로 구입한 빵을 분리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둘째,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과정에서 소비된 사용가치의 측면에서 볼 때, 소비되는 사용가치 중 상당부분이 이제는 국가에 의해 직접 제공되고 가족에 의하여 구매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서비스는 상품과 똑같은 방식으로 노동계급의 일상적, 세대간 재생산에 기여하고 있다."
  - 이안 고프, '복지국가의 정치경제학' p149

"사회서비스가 노동력 재생산(질적으로든 양적으로든)에 기여하면 할수록 장기적으로 생산물의 증가에 보다 많이 공헌하게 된다. 동시에 이 국가고용노동자들이 잉여노동을 수행한다면, 그들은 또한 자본주의 부문에서의 이윤 똔ㄴ 실질임금, 혹은 이들 양자에 모두 기여하게 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사회복지비용이 많이 증가하면 할수록 미래의 생산에 사용된 수 있는 자원은 적어질 것이다."
  - 이안 고프, '복지국가의 정치경제학' p156

"생산성 향상수준이 낮다는 사실과 실질임금수준을 방어할 수 있는 노동세력의 존재를 전제하면, 인플레이션이나 성장 또는 이들 양자를 악화시키지 않는 방법으로 증가하는 국가지출에 재정조달하는 일든 불가능하다. 앞 장의 논의에서 보았듯이 많은 국가지출이 간접적으로는 '생산적' 성질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이 결론은 유효하다."
  - 이안 고프, '복지국가의 정치경제학' p161

"복지국가의 성장은 자본주의 발전의 원인도 결과도 아니고, 단지 그것을 한 측면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현재 위기의 원인도 결과도 아닌 그것의 한 측면일 뿐이다.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조세율 및 복지지출수준은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영역에서의 자본과 노동간의 갈들을 심화시킨다. 복지지출의 증가에 대한 압력과 그것을 재정 조달하는 문제가 결합되면서 결과적으로 오코너가 지칭한 '국가의 재정위기'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주의의 성장 및 발전이라는 바로 그 본질에 의해 야기된, 현 경제위기상의 한 국면으로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 이안 고프, '복지국가의 정치경제학' p162

"자본축적과 재생산을 보조하고 도와주기 위하여 사회정책에 대한 압력이 행사될 것이고 그 두 가지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고안된 서비스를 삭감시키려는 압력도 있을 것이다."
  - 이안 고프, '복지국가의 정치경제학' p176

"전후 시기에 생산력의 발정과 정치적 민주주의 및 사회적 권리를 가져다 준 유럽 주요국과 미국 등의 자본주의는 더 이상 세 가지 모두를 동시에 수행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 축적과 경제성장이 희생되거나 혹은 정치적 권리와 사회적 권리가 희생되어야 한다. 어떤 것이 희생되든지 간에 복지국가의 본질은 변화될 것이다. 크로스랜드와 다른 사람들의 견해와는 반대로 복지국가와 혼합경제는 자본주의의 종언과 산업사회의 여명을 알리는 것이 아니다. 복지국가는 자본주의사회의 모순적 발달이 낳은 산물의 하나이며 이것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화된 새로운 모순을 창출하여 왔다."
  - 이안 고프, '복지국가의 정치경제학' p192

"복지국가를 순전히 단순한 자본의 피조물로 인식하는 사회주의적 입장에 선 사람들은 복지국가를 옹호하거나 확대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다른 한편으로 복지국가를 자본주의의 대해 속에 있는 사회주의라는 하나의 섬으로서, 노동의 피조물로서 파악하는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복지국가에 자신의 판단기준을 고정시킬 것이다. 후자는 복지국가의 결함을 보지 못하는 것이며 전자는 그 잠재력을 간과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어느 입장도 적절하지 못하다. 일단 복지국가의 모순적 성격과 그것이 자본주의에 미치는 모순적 영향을 인식하게 되면, 복지국가에서 노동을 하며 복지국가의 혜택을 받고 복지국가에 관심을 갖는 모든 사람들의 정치적 전략은 정교화될 수 있을 것이다. 복지정책의 긍정적인 측면들을 보호하고 확대할 필요가 있으나, 그 부정적 측면들은 노출시켜서 척결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 '인간욕구'의 개념은, 무엇이 긍정적이며 무엇이 부정적인 것인가를 명확히 하는데 적절한 개념이 된다."
  - 이안 고프, '복지국가의 정치경제학'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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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에 있었던 여러 가지 정치 이벤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단연 오세훈 전 서울 시장의 보편적 무상급식 몽니에 이은 셀프 탄핵과 그 후 야권연대에 기초한 시민운동가의 서울 시장 선출,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김어준 딴지 총수의 표현을 빌자면) ‘역사상 가장 빨리 시작된 대선 레이스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가카 (여러 가지 의미로) ‘삽질이 자리하고 있지만, 그 외에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보편적 무상급식이라는 지난 지방선거와 서울시장 재보선을 관통한 (한국에서는 보기 드물게 선거의 핵심 어젠다가 된) 복지정책 논란이다. 전근대적ㆍ중상주의적 재벌 위주 경제구조라는 한국의 특수성이 전세계적인 신자유주의의 돌풍이라는 보편성을 만나 대다수 서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어온 이래, 마침내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왜곡하는 요소는 구조적, 혹은 적어도 제도적인 문제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유력한 대안은 복지국가라는 (적어도 MB뉴타운돌이들에게 투표할 때보다는 훨씬) 진일보한 생각에 접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2011년을 뜨겁게 달군 오세훈 전 서울 시장의 "셀프 빅엿", 많은 것의 출발점이 될 것같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황금기라 불리는 50~60년대 성립된 서구의 복지국가를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을 것 같다. 우선은 더 이상 고도성장 기반의 완전고용이라는 복지국가의 전제조건이 성립할 수 없다는 국제적 환경의 차이를 고려해야 하며, 노동자 계급의 권력자원 동원이 어렵고 극소수 재벌위주의 생산체제를 가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노동시장의 이원화 문제가 심각한 한국적 특수성도 고려해야 한다. 평범한 시민의 입장에서 이런 것들을 다 고려해서 어떤 대안을 생각해 내기란 물론 요원한 일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가 막연히 말하는 복지국가가 어떤 생각에 기초하여 이루어진 체제이며, 그것이 (우리보다 앞서 나간) 서구의 국가들에서 어떻게 작용했는지에 대한 이해 정도는 가지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야 정치가들이 외치는 복지가 진정성을 가지고 실천방안까지 고민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표를 모으기 위한 캐치프레이즈일 뿐인지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복지국가에 대해 좀 더 편안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다른 책들도 많지만, ‘복지국가를 만들어낸 생각들을 들여다본다는 측면에서 라메쉬미쉬라의 복지국가의 사상과 이론은 충분히 좋은 책이다. 재미있고, 충실하며, 무엇보다도 얇다. 좀 오래된 책이지만 한국사회가 복지라는 측면에서 워낙 뒤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낡았다는 느낌도 전혀 들지 않는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전반부는 복지를 보는 여러 가지 시각들을 설명하고 있다. 사회개혁으로서의 복지(사회행정적 접근), 사회적 시민권 이론, 수렴이론(기술결정론), 기능주의 관점, 마르크스주의 관점으로 나누어 각자의 시각이 복지를 어떻게 보고 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이고 한계는 무엇인지를 일일히 짚어준다. 사회정책에 관한 개론서를 보면 거의 용어 설명 식으로 다루어져 있는 이 각각의 입장들을 좀 더 자세히 다루고 있어 복지국가를 설명하는 이론적 배경들을 개괄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뒤이어 후반부에서 이 책은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 사회에서 각각 복지국가가 어떻게 형성되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그 성과와 한계는 어떤지에 대해 설명한다. (이 책은 1981년에 쓰여졌다. 그렇기 때문에 근래 쓰여진 책이라면 담고 있지 않을 사회주의 국가 정확하게는, 소련 의 복지제도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이 책이 소중한 또 하나의 이유다. 쉽게 접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측면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복지를 다룬 내용 중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자본주의 체제 하 사회정책이 그 사회의 불평등을 완화시키는 효과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전략)… 대부분의 연구들이 지적하고 있는 일반적인 결론은, 계급 간 소득재분배, 즉 사회경제적으로 상층에 속하는 집단으로부터 하층에 속하는 집단으로의 소득재분배의 정도는 미약하며, 따라서 소득이전의 성격은 계급 내 소득이전 또는 삶의 주기에 따른 소득이전의 성격을 훨씬 더 많이 띠고 있다는 것이다… (후략)

   “…(전략)… 사실상 재분배효과가 미미하다는 사실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서비스가 발달할 수 있는 전제조건일 수도 있다.” (여기에서 사회서비스는 복지를 일반적으로 구분하여 사회보험, 공공부조, 사회서비스로 나눌 때의 사회서비스가 아닌 민간 차원의 복지와 구분되는 개념으로의 국가복지를 의미한다.)

   “…(전략)… 다시 말하면, 지배적인 제도와 가치가 변화하지 않는 한, 한 가지 구조에서의 개혁은 다른 구조에서의 보상적인 변화에 의해 부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후략

   저자의 이야기대로라면 재분배’, , ‘불평등의 완화로서의 사회복지제도는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제도와 가치가 불평등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사회복지제도 또한 그 전제를 크게 거스르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존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지국가가 그 한계를 넘어서려할 때, 복지국가는 자본주의 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힘에 의해 교정될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오일쇼크를 겪으며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힘을 얻고 대부분의 서구 국가들에서 복지국가가 약화되어 온 현실을 감안할 때 뼈아프지만 타당해 보이는 저자의 지적은 복지국가를 우리 사회의 대안으로 생각해온 이들의 가슴을 때린다. 결국 불평등의 의미 있는 교정은 일찍이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처럼 자본주의의 테두리 안에서는 불가능한 것일까? 복지국가는 노동자와 서민으로부터 체제에 대한 충성심을 끌어내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장치일 뿐일까?

                              국가별 사회정책에 의한 소득재분배 효과. 저자의 논의와 달리
                        국가에 따라 상당한 수준이다. 저자가 주로 염두에 두고 논의를
                        전개하는 국가가 영국임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복지국가가 의외로 재분배적 효과가 별로 없다는 것을 지적할 뿐 이런 문제에 직접적으로 답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복지국가를 부정적이지만은 않게 볼 수 있는 몇 가지 이야기를 책 속에 담고 있다. 그 중 한가지는 복지제도가 재분배적 기능은 약하다고 해도 삶의 기회를 확대하는기능은 상당하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NHS 이전과 이후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의료서비스 이용 기회의 차이라든가, 공공주택의 공급이 주거의 평등을 실현하지는 못했더라도 최소한의 주거환경을 제공하는 기능은 수행했다는 것과 같은 내용들이다. 재분배는 못했어도 극단적인 불평등은 다소간 감소시켰다고 할까.(실제도 통계적으로도 복지국가는 지니계수를 개선하는 쪽보다는 빈곤율을 낮추는 쪽에서 훨씬 더 높은 성과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좀 더 적극적으로 불평등의 완화를 이루고 싶은 이들에게는 여전히 실망스럽지만, 사회주의 사회의 복지를 다룬 부분에서 저자는 약간의 희망을 남겨준다.

 “…(전략)… 그러나 사회주의적인 복지는 그것이 가진 몇 가지 특성으로 인해 재분배가 수직적이 될 가능성을 보다 많이 가지고 있다. 사회서비스 가운데 연금이나 상병급여 등과 같은 이전급여는 의료나 주택 등과 같은 현물급여에 비해 재분배의 정도가 적다. 이는 사회주의에서나 자본주의에서나 이전급여는 임금에 연계되어 있는 데 비해 현물급여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물급여에 대한 지출은 재분배적일 가능성이 보다 많다… (후략)…”

 흔히 복지국가하면 1순위로 떠올리는 스웨덴으로 대표되는 사민주의 모델의 복지국가는 다른 유형의 복지국가에 비해 사회서비스(국가복지의 의미에서의 사회서비스가 아닌 사회보험, 공공부조와 구분되는 개념으로서의 사회서비스, 이 책에서 저자의 표현을 빌면 현물급여에 대한 지출’)의 비중이 특히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알다시피 이들 국가들은 시장경제체제하에서 작동하는 어느 국가보다 평등주의적이면서도 성공적인 경제적, 사회적 모델을 만들어왔다. 여기서 또 한가지 기억할 부분은 현재 한국의 복지제도를 공공부조, 사회보험, 사회서비스로 나눌 때 제도적 외형이라도 어느 정도 갖추어진 처음의 두 가지에 비해 사회서비스는 가장 낙후된 영역이라는 점이다.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완화시키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복지를 고민할 때 고려해야 할 하나의 중요한 지점이 아닐까?

 

사회주의 국가의 복지에 대해 다룬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구조적 모형’(영미권 국가의 잔여적 모형은 물론 대륙유럽을 중심으로 한 발전된 복지국가의 제도적 모형보다도 복지제도의 중요성이 강조되는)으로서의 사회주의 국가의 복지가 갖는 우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동시에 스탈린 체제라는 전체주의 체제가 이를 어떻게 제약하고 왜곡했는지를 설명한다.

 “…(전략)… 전체주의적인 사회주의는 시장에 의해 생성된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을 정치적으로 조건화된 불안정성(비보장) – 순응치 않는 자의 고용과 소득, 주택, 기타 생계수단을 위협하는 으로 대체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보장은 정치적비보장에 압도되어버리는 것이다… (중략) … 복지는 그것이 공민권 및 정치권과 결합될 때 보다 인본주의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후략)…”

 현실사회주의는 전체주의적 요소는, 복지제도 자체가 가진 상대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정치적 불안정과 결합되어 사회통제의 수단으로 이용된 바 있다. 게다가 민주적 통제 없이 이루어진 국가의 비대화는 관료주의의 병폐를 심각하게 초래한 바, 결국 사회주의 국가의 복지체제가 가진 우위는 상당부분 훼손되고 만다. 이는 비록 민주화는 되었지만 여전히 관료적 제도가 사회 제도 곳곳에 산재해있는 우리 사회에 있어서도 함의하는 바가 작지 않을 것 같다.

 

지금까지 라메쉬미쉬라의 사회복지의 사상과 이론의 개략적인 내용과 그 중 내가 강한 인상을 받은 부분들에 대해 정리해보았다. 끝으로 책을 덮고 난 후의 소회로 글을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비록 나의 사회정책에 대한 지식 수준은 아직 일천하지만 이 분야의 책들을 읽으며 내가 가졌던 가장 큰 의문은 과연 앞으로의 사회에서 복지국가의 모델이 지속 가능할 수 있을까였다? 앞에도 언급한 것처럼 복지국가는 가장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 받는 스칸디나비아 모델을 포함해서 공통적으로 지속적인 경제의 성장과 완전고용을 전제로 한 국가 모델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과연 완전고용을 창출한 만한 지속적인 경제의 성장이라는 것이 앞으로도 지속가능한가? 비단 세계화나 서비스업 위주의 경제구조로의 변화, 그리고 그로 인한 고용 없는 성장의 문제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더 근본적으로 피크 오일이후의 세계, 즉 값싼 석유에 기초한 대규모 산업들의 경제성이 떨어져가는 미래의 세계에서 복지국가는 살아남을 수 있는 모델인가? 복지국가 또한 그것이 끊임없는 생산과 소비의 확장을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의 다른 얼굴이라면, 이 또한 신자유주의와 함께 한계에 봉착한 것은 아닐까?

아직까지 논란은 있지만, 피크오일은 분명 다가오고 있는 위협이다.

 이 책이 나의 이런 질문들에 대답을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책은 또 다른 각도에서의 질문을 던져주었다. , 복지국가에 대한 보다 더 전통적인 질문, 과연 복지국가는 진정으로 불평등을 완화하고 더 평평한 사회를 만들어 줄 수 있는가? 아니면 단지 부분적이며 비본질적인 개선을 통해 자본주의의 근본모순을 은폐하고 인민들의 충성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장치인가? 복지국가가 이데올로기적 장치가 아닌 진정한 진전이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사실 한국사회의 현실을 생각할 때 위의 두 가지 질문은 모두 사치인지도 모른다. 생태주의(피크오일에 대한 이야기는 생태주의와 관련이 깊다.)나 복지국가는커녕 법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서구적 기준에서는) 19세기적인 과제 조차 완료되지 않은 나라에서 지금 여기의과제는 이데올로기적 장치이든 무엇이든 당장 최소한의 개선을 이루어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사적 경험은 지속가능하지 않은 방법으로 당장의 개선을 이룰 때 그 개선은 미래의 다른 개선을 제약하는 조건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시대에서 복지국가나 사회정책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좀 더 깊은 고민에 빠질 필요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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