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회의 (2)

Posted at 2010. 11. 29. 18:44// Posted in 성찰
일제시대라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를 가장 잘 보낸 사람들은 당연히 독립투사들이다. 그 다음으로 잘 보낸 사람들을 꼽자면 만주에서 연해주에서, 혹은 한반도 안에서 일제의 핍박을 받으며 농사를 짓고, 그러면서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본능적으로 파악하여 밤이면 간혹 나타나는 독립투사들에게 밥이며, 옷이며, 돈이며, 잠자리를 없는 살림에도 싫은 소리 하지 않고 제공했던 아름다운 민초들이다.

제일 밑바닥에는 당연히 조선 총독부에서 적극적 친일을 한 자들이나 순사, 혹은 순사의 앞잡이, 이광수처럼 글과 지식으로 일제에 적극 협력한 자들, 친일 지주들이 있을 것이고, 그 바로 위에는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생존을 핑계로 소극적이나마 일제에 협력한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일제의 통치기관의 말단에서 근무한 자들이라든가, 적당히 일제에 협력하면서 부를 축적하고자 했던 상인들 같은 이들이 그쯤 되지 않을까. 그리고 아마도 상위 두 그룹과 하위 두 그룹 사이에는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계층이 있을 것이다. 주로 지식층이면서 자신의 지식을 당시의 체제 내에서 사용한다는 것이 일제에 간접적으로 부역한다는 것을 알고, 이를 거부한 상태로 농사를 짓거나 재산이 좀 있는 경우는 집에서 칩거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지는 못해도 친일도 못하겠다는 상태로 살았던 사람들이 여기에 속할 것 같다.

1) 독립투사
2) 독립투사의 협력자 그룹
3)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람
4) 소극적 부역자
5) 적극적 부역자

너무 도식적인 분류 같지만 사실 어느 시대든 이런 식의 분류는 가능하다. 즉, 체제와 맞서는 사람, 체제와 갈등하는 사람, 체제와 맞서지도 협력하지도 않는 사람, 체제에 협력하는 사람, 체제를 주도하는 사람이라는 구분은 어떤 체제에서든 가능하며, 체제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가정할 때 1~2는 정의로운 사람, 4~5는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 되며, 3는 중립적인 위치가 될 것이다. (사실 중립적인 위치가 가능할 지는 의문이다. 결국 어느 시점에서 2 또는 4로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지 않을까.)

이런 분류가 당대에도 가능할까?

가능할 것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의 체제가 정의로운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는 어렵다. 전적으로 정의롭지도, 전적으로 불의이지도 않다는 애매한 대답이 나오겠지? 그리고 현제의 체제를 기준으로 보면 (식민지와는 달리) '체제 내에서 개혁하려는 사람'도 분류에 포함시킬 수 있을 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개 이 그룹은 체제에 협력하기 마련이다.)

만약 현재의 시대를 '정의롭지 못하다'고 한다면, 단연 그 불의의 핵심에는 '자본'이 있을 것이다. 타인의 몫을 엄청나게 많이 차지하고 ('타인의 몫' 드립은 '인생의 회의(1)' 참조) 그걸로도 모자라서 신자유주의의 광풍하에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흔들어가며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자본은, 당대를 대표하는 '불의'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렇다면 그 불의에 대한 '소극적 부역자'는 누구일까? 혹시 자본의 (그것도 대한민국을 기준으로는 손에 꼽히는 거대 자본의) 이익을 위해 30여년 간 배운 지식과 기술을 열심히 활용하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이 아닐까?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보다는 어떻게 하면 좋은 직장에 들어갈까를 고민하고, 그 결과로 나름대로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는 나야말로 전형적인 '소극적 부역자'가 아닐까. 그리고 만약 자본에게 그 성실함을 인정받아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간다면, 그 때는 '적극적 부역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

나름대로 성실하게 학창시절을 보내고 그 결과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취직한 것이 결국은 불의에 대한 '부역' 이라니... 내 인생에 대한 회의가 심하게 몰려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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