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2013년

Posted at 2013. 12. 31. 00:13// Posted in 성찰

그 때 생각해도 지금 생각해도, 내가 포기해야 했던 혹은 포기한 것은 전혀 큰 것이 아니었고, 심지어 내가 뭘 포기한게 있기는 한 건가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조금쯤은 불편함을 무릅쓰겠다는 결정을 한 가장 근저에 자리한 것은 '부끄러움'이었다.

꿈을 쫓아가기라도 하면, 조금은 덜 부끄럽지 않을까. 당장 안부끄러워지는 것은 아니더라도 부끄러움을 조금은 덜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아마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생각이 아니었나 싶다.

몇 해 시간이 흘렀고, 나는 꿈을 쫓고 있다. 내 꿈 뒤에서 묵묵히 날 지원해주는 사람들 덕분에 그렇게 누군가에게 기생하여 꿈을 꾸고 있다. 그런데 어찌된 샘인지 하루 하루 부끄러움은 점점 더 깊어진다.

2013년이 저물어간다. 참 부끄러운 한 해다. 나에게든, 시대에게든. 
다음 해는 좀 덜 부끄러울 수 있을까. 어쩌면 덜 부끄러우려고 할 수록 더 부끄러워지는 것이 우리의 삶인게 아닐까. 그런 거라면 또 다음 해도, 그 다음 해도 나는 점점 더 부끄러워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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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Posted at 2012. 11. 8. 23:44// Posted in 성찰

언제나 내 삶은 너무나 평온한 것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고난'이라든가 '절망'을 경험한 적이 없다. 딱 한 번 진심으로,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날까?'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지만, 결국 그마저 1~2일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노력없이 얻은 것이 내 잘못없이 잃은 것보다 훨씬 많다.'는 결론으로 돌아갔다.

물론, 당연히 이건 참으로 운이 좋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고, 마땅히 감사하고 기뻐할 일이지만 한 편으로 고난과 절망을 통해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성장을 얻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지금 나의 부족하기 짝이 없는 사람됨의 일부는 그 때문이지 않을까.

고난과 절망이 없는 내 삶에서 그 자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내 생각에 그것은 '부끄러움'인 것 같다. 부분적으로는 고난과 절망이 없는 삶을 살아왔고, 그리 살아가고 있으며, (어쩌면 정당하지 못할 수도 있는) 그 평온함을 스스로 버리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불러오는 감정으로서의 '부끄러움'은, 다른 어떤 단어들보다 나와 내 삶을 잘 설명해줄 수 있는 단어인 것 같다.

고난이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것처럼, 부끄러움이 내일의 나를 오늘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쨌든 스스로의 삶의 평온함을 버릴만큼 자신이 훌륭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부끄러움을 자양분삼아 삶을 진전시켜나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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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수석

Posted at 2012. 3. 30. 16:48// Posted in 성찰


수석이는 내게 빚이었다. 

갚을 길이 난망하여 감히 꺼내보지도 못하고 마음 속 한 켠에 묻어두었던 빚이었다. 

이제 다 잊었다고, 그러니 나 하나만 생각하고 살아도 된다고 여기며 보내버린 시간 속에서도 문득문득 되살아나 날 괴롭혔던, 그런 빚이었다.

오늘 아주 오랜만에, 그의 16주기에 이르러 묵은 빚을 꺼내봤다. 여전히 어떻게 갚을 지를 생각하면 아득할 따름이다. 그래도 다시 이 빚을 묻어버리지는 않아야겠다. 그러면 조금쯤은 갚을 방법도 생겨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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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문

Posted at 2012. 3. 19. 21:31// Posted in 성찰
요즘 자주 교문을 지나다보니 간혹 오래전 그 교문 앞에서 벌였던 싸움의 기억이 난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교문 오른쪽을 바라보며 어깨가 움츠러든다. 그런데 돌아서서 보면 그 때 내가 무얼 위해 싸웠던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 때는 내가 무얼 위해 싸우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정말 알고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진짜 나의 싸움이 되기에는 내가 너무 미숙한 상태였다.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런 사실을 어렴풋이 느낀다.

그렇다고 지금 뭔가 대단한 것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내가 참 모른다는 것 뿐이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느끼는 것은 있다... 그 때 내가 얼마나 미숙했든, 그 때 이후 얼마나 오랫동안 그 시절을 잊고 지냈든간에 지금 내가 삶을 고쳐가겠다고 마음먹게된 문제의식의 출발은 바로 그 시절 이 교문 앞에서 시작되었다는 것. 그러니까 어쩌면, 내가 남은 내 삶을 제대로 살아낸다면 당시의 그 의미모를 싸움이 비로소 의미를 찾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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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의 이유

Posted at 2011. 3. 24. 14:45// Posted in 성찰

이 결심을 하고 수도 없이 떠올랐던,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이 회사를 박차고 나갔다가 실패한 회사원들의 이야기였다. 누구는 뭘 한다고 나갔다가 말아먹고 다시 돌아왔다더라, 그래도 돌아온 건 운좋은 케이스고 중소기업으로 다운그레이드해서 들어가거나 한 경우가 태반이더라. 누가 널 좋게 봐주는게 니가 속한 조직 때문이지 너 때문인줄 아냐 나가면 바로 허허벌판에 홀로서는 거다....

그렇겠지. 나라고 그런 고민 안해봤겠나. 가진 재주도 없고 리얼월드에서 맨몸으로 사람들과 부딪혀 본 적도 없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생기지는 않았지만)처럼 자랐지 않나. 초등학교 - 중학교 - 고등학교 다니면서 남들 하는대로 공부하고 덕분에 괜찮은 대학가서 졸업하고, 남들처럼 취직해서 살아온 삼십 몇 해 삶에 뭐 대단한게 있었겠어. 회사 짤리는 순간 갈 대 없는 백수되고 뭐 해보려다가 그나마 있는 돈 날리고 거지되기 십상이겠지.

그래도 싫었다. 이대로 사는 건 싫었다. 두려워서, 무서워서, 용기가 없어서, 가지고 있는 기득권 한 줌 포기하기가 싫어서 내가 아니라고 여기는대로 살기는 싫었다. 나이 사십 될 때까지 아무 시도도 하지 않으면, 그 땐 정말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게 거지되는 것보다 더 두려웠다. 뭐라도 해야 겠다고 생각했고 다행히 나의 삶의 공유자, 영원한 파트너인 아내가 나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줬고, 그래서 용기가 났다.

회사 그만둔다고 말하면 들은 사람의 반응은 크게 두 개다. "뭐할건데?" 혹은 "와... 부럽다... 근데 뭐할건데?" 같은 반응 같지만 다르더라. 전자는 시니어, 후자는 주니어... 아 주니어들이 회사에 참 만족을 못하는구나. 나 뿐이 아니었구나... 라고 생각했다. 많은 동기, 후배들이 나보다 더 착잡해하더라. 그들의 삶도 뭐 나랑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테니까 그렇겠지.

반응이야 어쨌는 저런 질문을 받으면 대답을 해야 하는데, 대답거리가 시원치 않았다. "공부하러 가요." 아니면 "다른 회사 가요."라고 할 수 있으면 수월할텐데 그게 아니니까. 어쨌든 밥벌이는 할 생각이라 "사업할거에요."하면 또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무슨 아이템?" "그게 아직 미정이에요."까지 이야기하면 사람들의 반응이 이상해진다. "얘 뭐지?" 뭐 이런 표정. 하지만 그게 팩트인걸 어쩌나. 그나마 연차가 비슷한 동기/후배들은 좀 이해하는 것 같더라.

사실 내가 회사를 그만두는 결심에서 더 중요했던 것은 "퇴사 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 보다 퇴사 그 자체였다. 대기업의 말단 직원으로 있는 현재 상태를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더 컸다. 당연히 그냥 회사 다니는 게 싫어서는 아니다. 좀 더 나답게 살기 위해서는 마음먹은 것이었다. 나에겐 그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나답게 산다는 게 뭘까? 사실 지난 몇 해 동안 내가 제일 많이 했던 고민이었다. 근데 이걸 명확히 잡는게 쉽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현재의 내 삶에서 '나답지 못한 요소들'을 찾아내서 없앤다면 그것이 명확히 '나답게 사는 것'은 아닐지 몰라도 내 삶을 현재보다는 나답게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에서 나답지 못한 첫번째는 '대기업 직원'이라는 사실 그 자체였다. 나는 현재 한국사회의 문제점 중 아주 많은 부분이 '거대 자본의 지나친 탐욕으로 인해 사람보다 돈이 위에 있는 현실'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하는데, 나 자신이 그 거대자본의 일부분으로 복무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 첫번째 문제였다. 좀 더 손에 와닿는 이야기로 하자면 반도체 공장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암에 걸려 죽어가고 있는데도 산재조차 인정치 않으려고 하는 어떤 회사를 불매하고 싶은데, 현실은 그 회사에서 나온 상품을 좀 더 잘 팔기 위해 야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내 삶을 꼬이게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나는 옳다고 믿는 바대로만 살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은 아니다. 나는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랐고, 풍요로운 환경에서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사람을 야구배트로 패면서 매값을 던져주는 이들을 위해 손발을 놀리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선을 넘은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 부분은 그동안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없었던 것이, 지금도 우리 회사를 다니고 있는 동료들을 모독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마다 다른 가치관과 고민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니까... 그 정도로 이해해주길.)

내 삶에서 나답지 못한 두번째는 '분업'이었다. 처음엔 그렇지 않았는데 아내가 육아휴직을 하면서 한 사람은 돈을 벌고 한 사람은 육아와 살림을 맡는 분업이 일어났다. 어느 쪽이 더 힘든지를 떠나서 (사실 애 보는게 더 힘들다. 이건 명확하다. ㅋ) 이 분업 자체는 나의 가장 이상적인 파트너와 나 사이에 이해의 균열을 가져왔다. 나는 나대로 회사에서 시달리면서도 나름 집에도 신경쓰려고 하는데... 하면서 서운해하고, 아내는 아내대로 하루 종일 휴식도 없이 애만 보느라 시간을 다 보내고 있는데... 하면서 서운해했다. 물론 우리 두 사람의 성격상 이 문제가 계속 악화만 된 것은 아니지만 잠재적인 문제요인으로 남아 있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남자는 돈벌고 여자는 애본다는 고래로부터의 공식을 내가 차곡차곡 따라간다는 것이 싫었다. 그렇다고 두 사람 다 일을 하고 애는 돈써서 기르는 것이 맞는 것일까?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 부부는 우리가 그럴 수 없으리라는 것을 이내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겠지.

내 삶에서 나답지 못한 세번째는 '과로'였다. 나는 인생의 행복은 하루하루의 행복의 총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먼 미래의 어느날 아마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하는 경제적 안정을 위해 현재의 하루하루를 희생하는 것은 내 평소의 생각에 비추어 볼 때 뭔가 잘못된 것이다. 적게 벌고 적게 쓰면서 남의 눈 의식 안하고 살면 되는 건데, 그걸 못해서 꾸역꾸역 야근하고 주말근무해야 하는 삶이 싫었다. 물론 회사를 나이롱뽕으로 다니는 방법도 있긴 하겠지. 근데 그건 주변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방법이다. 차라리 내 일을 하면서 정해놓은 시간에는 최선을 다하고 그 외의 시간에는 충분한 휴식과 여가와 가족과의 시간을 갖는 것이 더 나은 대안이지 않을까?

이 세가지의 문제를 꺼내놓고보니 대안은 명확해졌다.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여기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물론 회사 그만둔다고 다 해결될 리는 없다. 대기업을 그만둔다고 해도 장사라도 하나 하려고 치면 자본과의 관계를 피할 수 없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살고 있으니까. 아내는 휴직중인데, 그 기간이 끝나면 역시 '분업'이 전과는 반대의 역할로 나타날 수 있다. 장사든 사업이든 내 일을 하면 어쩌면 월급쟁이보다 더 바빠야 할 수도 있다. 그런 가능성들을 모두 고려해야겠지만 그래도 출발점이 여기 - 퇴사 - 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여기서 출발해서 '나답지 못한 요소들'을 줄여 나가고 반대로 '나다운 요소들' - 이를테면 사회/정치적인 활동이나 혹은 공부를 더 할 수도 있고 - 을 조금씩 더해 나갈 때 내 삶이 더 빛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지금도 불안하다. 내가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인지 의심할 때도 많다. 내가 철이 없어서, 세상 험한 걸 몰라서 이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행복하다. 나는 적어도 뭔가를 하고 있으니까. 누가 시켜서도 아닌 나 스스로의 고민과 생각으로 움직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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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生加笑

Posted at 2011. 2. 24. 10:13// Posted in 성찰

얼마 전에 본 TV 프로그램에서 행복해지기 위한 조건으로 두 가지를 이야기했다. 적게 벌고 적게 쓰는 삶에 익숙해질 것, 남의 눈을 의식하지 말 것. 물론 전자는 한국사회에서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눈물겨운 투쟁을 해야 하는 현실과 다소간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그냥 '너무 많이 가지려고 버둥거리지 말 것'이라는 의미정도로 해석한다면 상당히 공감이 가는 이야기다.

 내가 전부터 생각해온 행복한 삶, 가치 있는 삶의 조건도 두 가지다. 正生加笑. 바르게 살 것, 그리고 거기에 웃음을 더할 것. 행복하고, 가치있는 삶을 사는 데는 그렇게 많은 물질도, 그렇게 높은 지위도 필요치 않다. 바르게 살고 웃으며 살 수 있으면 그걸로 된다. (물론 양심을 지키고, 웃으며 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물질이 필요하다. 이 사회의 문제는 그런 최소한의 물질조차 박탈당하는 너무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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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at 2010. 11. 29. 18:44// Posted in 성찰
일제시대라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를 가장 잘 보낸 사람들은 당연히 독립투사들이다. 그 다음으로 잘 보낸 사람들을 꼽자면 만주에서 연해주에서, 혹은 한반도 안에서 일제의 핍박을 받으며 농사를 짓고, 그러면서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본능적으로 파악하여 밤이면 간혹 나타나는 독립투사들에게 밥이며, 옷이며, 돈이며, 잠자리를 없는 살림에도 싫은 소리 하지 않고 제공했던 아름다운 민초들이다.

제일 밑바닥에는 당연히 조선 총독부에서 적극적 친일을 한 자들이나 순사, 혹은 순사의 앞잡이, 이광수처럼 글과 지식으로 일제에 적극 협력한 자들, 친일 지주들이 있을 것이고, 그 바로 위에는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생존을 핑계로 소극적이나마 일제에 협력한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일제의 통치기관의 말단에서 근무한 자들이라든가, 적당히 일제에 협력하면서 부를 축적하고자 했던 상인들 같은 이들이 그쯤 되지 않을까. 그리고 아마도 상위 두 그룹과 하위 두 그룹 사이에는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계층이 있을 것이다. 주로 지식층이면서 자신의 지식을 당시의 체제 내에서 사용한다는 것이 일제에 간접적으로 부역한다는 것을 알고, 이를 거부한 상태로 농사를 짓거나 재산이 좀 있는 경우는 집에서 칩거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지는 못해도 친일도 못하겠다는 상태로 살았던 사람들이 여기에 속할 것 같다.

1) 독립투사
2) 독립투사의 협력자 그룹
3)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람
4) 소극적 부역자
5) 적극적 부역자

너무 도식적인 분류 같지만 사실 어느 시대든 이런 식의 분류는 가능하다. 즉, 체제와 맞서는 사람, 체제와 갈등하는 사람, 체제와 맞서지도 협력하지도 않는 사람, 체제에 협력하는 사람, 체제를 주도하는 사람이라는 구분은 어떤 체제에서든 가능하며, 체제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가정할 때 1~2는 정의로운 사람, 4~5는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 되며, 3는 중립적인 위치가 될 것이다. (사실 중립적인 위치가 가능할 지는 의문이다. 결국 어느 시점에서 2 또는 4로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지 않을까.)

이런 분류가 당대에도 가능할까?

가능할 것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의 체제가 정의로운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는 어렵다. 전적으로 정의롭지도, 전적으로 불의이지도 않다는 애매한 대답이 나오겠지? 그리고 현제의 체제를 기준으로 보면 (식민지와는 달리) '체제 내에서 개혁하려는 사람'도 분류에 포함시킬 수 있을 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개 이 그룹은 체제에 협력하기 마련이다.)

만약 현재의 시대를 '정의롭지 못하다'고 한다면, 단연 그 불의의 핵심에는 '자본'이 있을 것이다. 타인의 몫을 엄청나게 많이 차지하고 ('타인의 몫' 드립은 '인생의 회의(1)' 참조) 그걸로도 모자라서 신자유주의의 광풍하에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흔들어가며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자본은, 당대를 대표하는 '불의'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렇다면 그 불의에 대한 '소극적 부역자'는 누구일까? 혹시 자본의 (그것도 대한민국을 기준으로는 손에 꼽히는 거대 자본의) 이익을 위해 30여년 간 배운 지식과 기술을 열심히 활용하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이 아닐까?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보다는 어떻게 하면 좋은 직장에 들어갈까를 고민하고, 그 결과로 나름대로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는 나야말로 전형적인 '소극적 부역자'가 아닐까. 그리고 만약 자본에게 그 성실함을 인정받아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간다면, 그 때는 '적극적 부역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

나름대로 성실하게 학창시절을 보내고 그 결과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취직한 것이 결국은 불의에 대한 '부역' 이라니... 내 인생에 대한 회의가 심하게 몰려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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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at 2010. 11. 29. 18:25// Posted in 성찰

자원은 유한한데 인간의 욕구는 무한하다.

소위 '경제학의 근본문제'이다. 즉, 경제라는 것은 결국 유한한 자원을 분배하는 문제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자원은 유한하다.'라는 말에 주목한다. 자원이 유한하기 때문에 분배의 문제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의'를 다룬 이론이 '분배'의 문제에 포커스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신 앞에서 평등하다...라고 기독교는 말한다. (물론 그들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이런 말을 실천한 적은 없다. 적어도 기독교가 핍박을 벗어나 메이저 종교가 된 이후 - 그러니까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로마 이후 - 기독교 주류는 항상 승자나 가진자의 편이었다.) 나는 종교가 없으니 '신 앞에서'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히 모든 인간이 남자든 여자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아시아인이든, 한국 사람이든 북한 사람이든 아이티 사람이든 간에 침해될 수 없는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이 권리를 만약 '누구나 가져야할 자신의 몫'이라고 정의한다면, 앞서의 경제학의 근본문제에 입각해서 볼 때 '부유하다'는 것은 결국 '타인의 몫을 많이 차지하고 있다'의 다른 말이다. 물론 자본주의가 (거의) 전 인류를 지배하고 있는 마당에 이게 무선 멍멍이 이단옆차기 하는 소리냐... 싶을 수도 있지만, 나는 인간이 차지할 수 있는 자본이 유한한 한 좀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상당한 부채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그리 급진적인 것이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탈탈 털어서 나누고 또 나눠서 마침내 '내 몫'만 갖는 자발적 가난을 실천한다면야 진짜 존경받아야 할 사람이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도 남의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의식 정도는 있는게 맞다고 믿는다. (우리나라의 가난한 사람은 몰라도 아이티에 있는 사람의 가난이 왜 내가 더 가진 탓이냐고 묻지는 말자. 세계화 시대라며?)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전세계 수많은 국가들 중에서도 (평균적으로, 물론 평균의 오류가 있지만) 잘 사는 나라로 손에는 몰라도 발에는 꼽힐 가능성이 높은 대한민국에서 평균적인 중산층 수준 이상의 삶을 한 평생 향유해온 나는 적어도 몇 십명 인류의 몫을 차지하고 있다. 그게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미약하나마 인지하고는 있는데 그 부끄러움을 깨부술만큼 용기있지 못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머리로는 잘못을 알면서 가진 것을 포기하기는 싫어서 포기는 못하고 있는, 얼마 전에 옆집을 털어 최신형 TV를 장만해놓고 아침 저녁으로 마주치는 옆집 아저씨의 그늘진 얼굴에 마음만 캥겨하는 도둑놈이랄까.

어쩌다 내 인생이 도둑놈 인생이 되었을까... 참으로 인생의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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