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노동 (은수미 저 / 부·키)

Posted at 2012. 11. 15. 00:43// Posted in 감상

노동의 말

아마도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인 것 같다. 그 날은 마침 5월 1일이었고, 아버지와 무슨 대화 끝에 내가 '오늘이 노동자의 날'이라는 말을 했을 때, 아버지는 내 말을 멈추고 '노동자의 날이 아니고 근로자의 날'이라고 정정해주셨다. 그게 무슨 차이냐고 여쭤보니 '일을 부지런히(勤) 하는 사람의 날'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 때는 그러려니 했다. 어쨌든 무언가를 부지런히 한다는 것은 중요한 가치라고 배우면서 살았으니까. 하지만 이 작은 사건이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것을 보면, 무언가 위화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조금 더 나이가 들고 나서, 왜 아버지가 굳이 '부지런히'를 강조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왜 '부지런히'라는 규범적인 표현이 노동자에게만 부여되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자본가 혹은 사용자라는 말에는 어떤 규범적인 의미도 들어있지 않은데 말이다. (사실 이 책의 저자는 '노동' 혹은 '근로'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그다지 문제삼지 않는다. 그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근로자라는 표현은 현재의 한국의 법령에서 사용하고 있는 공식적인 용어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개인적으로는 노동자에게만 어떤 규범이 강요되는 것 같아 근로라는 말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이 책이 상당히 구체적인 현실문제로부터 출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자가 오랫동안 노동문제에 천착해왔다는 것, 특히 한국노동연구원에서 일하는 동안 많은 노동자들을 직접 만나며 '발로 뛰는 연구'를 해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의외로 '노동'과 관련된 '말'과 노동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같은 다소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처음엔 의외였지만, 이내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노동'이라는 가치중립적인(규범적인 의미가 들어있지 않다는 점에서) 표현에 대해 편견을 갖는다. '노동'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 사람은 어쩐지 과격한 것 같고, 수많은 노동자(실질적 사용종속관계에 있으며, 노동의 댓가로 임금을 받고 있는 자)들이 스스로 노동자로 불리기를 원치 않으며, 노동권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정치적으로 좌편향된 것으로 취급받기 일수다. '노동'이라는 말이 제자리를 잃어버리면서 우리의 인식 속에서 노동은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고, 그것은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노동이 처한 자리의 원인 중 하나일 수도 있다. 너무 지나친 단순화라고? 하지만 이렇게 '말'의 위치로 인해 '인식'이 바뀌고, 그 '인식'으로 인해 '현실적 상황'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그람시의 '자의적 이데올로기' 개념이나, 상징적상호작용이론가들의 '낙인' 개념을 통해 사회과학적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무심코 노동자와 나를 분리시키고 노동자인 자신을 부정하거나, 혹은 미래에 나나 내 자식들이 노동자가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것을 부정할 때, 사용자 중심의 사회가 구성한 헤게모니는 점점 강화되게 되고, 지난 수십년간 지속되어 온 노동권의 소외와 그 결과로서의 사회양극화는 계속될 것이기에 '말'과 그 말로 인한 '인식'의 문제에서부터 출발한 이 책의 논의는 절대로 추상적이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외면하기 쉬운 우리 자신의 문제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담고 있다. 나의 말과 인식이 바뀌는 것이 현실을 바꾸는 출발점임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의 현실

그렇다고 이 책이 언어와 개념의 문제만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운동가로, 연구자로, 이제는 국회의원으로 노동문제를 다루어온 전문가답게 현재 우리 사회의 노동이 처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비정규직, 최저임금, 근로빈곤이라는 우리 사회의 노동의 현실문제를 통계와 인터뷰를 넘나들며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저임금과 실직과 근로빈곤이 어떻게 악순환의 고리를 이루는지, 그 속에서 부족한 사회안전망이나 고용보호, 최저임금과 같은 제도의 문제가 이를 어떻게 강화하는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결과로 나타난 비정규·불안정 노동이 어떻게 인간성을 왜곡하는지를 많지 않은 분량의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사실 후기산업사회의 특징적인 단면이자, 신자유주의의 상징적 결과로서의 비정규직을 비롯한 불안정노동은 이 책에서도 이야기하는 것처럼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며 오히려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그 문제가 한국에서 더욱 심각한 것은 한국사회의 노동을 둘러싼 여러 법규나 제도가 노동을 보호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은 과거의 빈곤 - 주로 노령, 장애, 실업, 질병, 사고 등의 결과로 인한 노동력 상실로 인한 빈곤 -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 보호장치 - 사회보험이나 공공부조와 같은 - 가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노동시장 양극화, 고용 불안정, 가족해체와 같은 새로운 사회적 위험에 직면하여, 이중적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러나 한국의 제도들은 이와 같은 중첩적 문제에 대응하기는커녕 해고를 더욱 자유롭게, 노동에 대한 보호는 더욱 약하게, 경제적 효율성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는 변화를 지난 십여년 간 지속해왔고 그 결과로 지금의 한국 사회의 노동은 벼랑 끝에 서 있다. 저자가 비정규직의 문제를 이토록 절실하게 다룬 까닭도 이처럼 보편적 위험으로서의 비정규직 문제가 우리 사회의 특수성과 만나 더욱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문제의 또 다른 심각성은 비정규직이 그 특성상 단결하기 어려운 노동자라는 데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그 고용의 문제로 인해 정규직보다 사용자의 눈치를 더 보게 되고, 때로는 누가 사용자인지 규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고용관계의 사슬에 놓여 있으며, 많은 수의 불안정 노동자들은 싸울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고 할 정도로 위축되고 취약해져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과거의 전형적인 정규직 공장노동자와 달리 근무 장소나 기간이 일정치 않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단결하기 어려운 환경을 제공하고 있으며, 정규직 위주의 노동조합이 비정규직과는 미묘한 입장 차이를 보인다는 것도 사용자나 국가와의 관계 뿐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와의 관계에서 오는 문제를 더하게 되는 원인이 되고 있다. 물론 기륭전자 노조의 싸움처럼 의미 있는 비정규직 노동운동의 성과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비정규직의 노조조직율이나 노동운동 성과가 문제의 심각성 대비 적은 것에는 이와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특수성이 자리하고 있다(저자가 지적한 ‘창구단일화’나 사용자의 교섭거부에 대한 관리 문제와 같은 제도적 불리함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이렇게 볼 때 2012년 한국의 노동문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바로 ‘비정규직’이다. 수 년째 계속되는 비정규직 노동에 대한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리의 내일을 여는 핵심적인 과제가 될 것이다.


노동의 미래

그렇다면 노동의 문제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불안정 노동에 대비한 실업부조 제도의 확립, 비정규직의 사용제한과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의 확보, 최저임금의 상승, 좋은 일자리 창출 등 해야 할 일은 무수히 많다. 현재의 사용자 위주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제도와 문화는 하나의 강건한 고리를 형성하고 있기에 어느 지점에서부터 그 고리를 깨어 나가야 할 지를 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다면 가장 핵심적이고도 중요한 지점이 어디일까?

저자는 이 대목에서 다시 노동조합을 강조한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단결하고, 그래서 사용자 위주의 사회 속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비로소 노동이 소외된 사회에서 노동이 인정받는 사회로의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 민주주의가 시민이 힘을 가지고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있을 때 가능하듯, 경제적 민주주의는 노동자가 힘을 가지고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있을 때 가능하다는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이를 위해 노동조합법 개정, 노동조합 조직률의 제고, 노조의 경영참여와 사회참여, 기업단위를 넘어선 다양한 노동조합활동, 사회안전망 활동을 강조한다. 나는 이 중에 특히 저자도 언급한 바 있는 노동조합과 사회운동이 결합된 - 예를 들면 청년유니온과 같은 - 형태의 새로운 노동운동을 강조하고자 한다.

앞서서도 언급한 것처럼 비정규직을 비롯한 불안정 노동자들은 많은 경우 정규직 노동자와 같이 사업장 단위에서 단결하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으며, 싸울 준비를 갖추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취약한 상태인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의 노동조합은 기업별 노조는 물론이고 산업별 노조의 형태일지라도 소규모의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불안정 노동자들을 모두 포괄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따라서 이들의 단결을 위해서는 세대, 직종, 지역, 성별과 같은 새로운 단위로 구성된 다양한 유니온들이 병존하면서 그 유니온들이 느슨하게 연대하는 형태를 가질 필요가 있다. 현존하는 청년유니온이나 일본의 다양한 유니온들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조직화’의 노력을 통해 개별적이지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불안정 노동자들의 힘이 모일 때 누구나 말하지만 누구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경제 민주화’가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저자가 글의 마지막을 닫는 말은 ‘노동으로 시작하지만 노동을 지양해야 한다.’는 철학적 숙제이다. 책 전체를 걸쳐 노동권의 확립, 노동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지만, 경제적 문제해결의 수단으로서의 노동이 인간을 속박할 수 있음을 들어 노동의 해방 다음의 숙제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일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말이되, 어디서부터 어떻게 실천해야 할 지 갈피를 잡기 힘든 말이기도 하다. 더구나 노동의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장되지 못한 한국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저자의 지적에 공감하기에 저자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내비친 마르크스의 말로 글을 맺는다.

노동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는, 혹은 그 자신이 노동자인, 혹은 언젠가 노동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모두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오늘은 이 일을, 내일은 저 일을, 즉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를 한다. 저녁에는 소를 몰며, 저녁을 먹은 후에는 비평도 해본다. 그러면서 사냥꾼도 아니고, 어부도 아니고, 목동도 아니고, 비평가도 되지 않는다.“

- 칼 마르크스, 『독일이데올로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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