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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씨 아들의 사회적 배려 전형 국제중 입학 관련, 제도상 문제가 없다는 사람도 있고, 욕을 하는 사람(나 같은)도 있고 해서... 잠시 정리해봤다.

우선 팩트를 정리해보자. 국제중학교에는 '사회적 배려 전형'이라는 것이 있다. 국제중 사배자 전형 대상자는 ‘경제적 배려 대상자’와 ‘비경제적 배려 대상자’로 나누어지며, 전자에는  기초생활 수급자, 한부모 가족 보호대상자(저소득), 차상위계층 등이 후자에는 한부모 가정 자녀, 소년소녀 가장, 조손가정 자녀, 북한이탈주민 자녀, 환경미화원의 자녀, 다자녀 가정 자녀 등이 포함된다. 삼성 이재용 부회장의 아들은 2009년 이 부회장의 이혼으로 ‘비경제적 배려 대상자’인 한부모 가정 자녀에 해당돼 사회적 배려 전형에 지원했다.

자, 그럼 이 팩트를 중심으로 한 번 살펴보자.

일단 사회적 배려 전형 중 비경제적 배려 대상자는 대상의 소득/재산과 무관한 조건을 보는 것이며, 따라서 이재용씨의 아들이라도 제도적으로 결격 사유는 없다. 적어도 제도와 절차에 관한 한 문제가 없다는 삼성측의 주장이 맞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 기사를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뱉은 욕설에 대해서는 사과하는 게 옳다. 내키지 않아도. 물론 그쪽에선 내가 사과하든 말든 관심도 없고 애초에 욕했는지 어쨌는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제도에는 '합목적성'이라는 것이 있다. 즉, 그 제도의 규정이 어떻더라도 운영자체가 그 제도를 수립한 목적에 맞에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배려 전형'의 목적은 무엇일까? 이는 그 이름에서 쉽게 알 수 있는 것처럼 사회적으로 배려가 필요한, 즉 배려가 없을 경우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모종의 손해를 볼 수 있는 대상자에 대한 '배려'를 하는 것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국제중학교가 일종의 '엘리트 교육'이라고 할 때 여기에 특례 입학을 시키는 것은 교육에 있어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일게다. 미국의 affirmative action처럼 일반적으로 성적 등에 의해서만 선발할 경우 국제중이라는 '엘리트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게 별도의 Quota를 배정함으로써 기회의 평등을 보완하고 해당 교육기관 내 학생들의 다양성을 얻는 것이 아마 그 목적이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과연 이재용씨의 아들이 여기에 맞는 사람인지는 의문이다. 누구도 그 사람이 '일반적인 경우에서 교육기회의 평등에서 손해를 볼'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삼성전자 측 관계자 말대로 “이혼한 부모의 자녀는 정서적으로 배려를 받아야 할 대상”일 것이다. 그러나 그 정서적 배려가 왜 엘리트 교육기관에의 특례입학인지는 납득이 잘 가지 않는다. 엘리트 교육기관에의 특례 입학이 '학생의 정서'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기회의 평등'을 위한 것인가? 전자라면 일반적인 공교육을 받는 학생은 '정서적으로 문제가 생긴다는' 이야기인가?

한겨레 기사에서 인용한 것처럼 교육학 전문가는 이 전형방식에 경제적/비경제적 구분이 생긴것은 애당처 경제적 배려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제도 개선 과정에서 경제적 배려 대상자는 증빙조건을 강화하고 선발 할당량을 부여했다. 동시에, 자사고·국제중의 사배자 전형 미달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시교육청이 부유층 자녀들이 섞여들 수 있도록 기준을 완화해 준 점도 있다. 재벌가 자녀의 사배자 전형 이용은 이 허점을 이용한 것인데, 이는 제도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리하자. 

1) 이재용씨 아들의 국제중 사회적 배려 전형 입학에 규정상 문제는 없다.

2) 그러나 제도의 합목적성에 맞지 않는다.

3) 따라서 학교측이 제도의 합목적성을 고려했다면(사회적 배려자 전형이 미달이 아니었던 한은) 지원을 했더라도  
    탈락시켰어야 한다. 물론 현실은 그 반대로 행동했을 확률이 매우 매우 매우 높다.

4) 지원한 측도 적어도 한국사회의 소위 지도층 인사로써 이런 편법은 자제했어야 맞다.

5) 물론 삼성에 이런 걸 기대하는 건 무리다. 법도 안지키는데 양심까지 바라면 쓰나. 있는 법만이라도 잘 지키길
    바라야지.

6) 궁극적으로는,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 제도를 유용하기 쉽게 만들어놓고 행위자가 양심껏 행동하길 바라는 건
    적어도 현재의 대한민국에는 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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