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감정론 (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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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애덤 스미스(Adam Smith) / 박세일,민경국역
출판 : 비봉출판사 2009.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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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덤스미스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은 굳이 그의 책을 읽어보지 않아도 수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는 바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의 야수적인 신자유주의가 보여주고 있는 자본의 횡포, 요즘 좀 더 인기 있는 용어로 이야기하자면 1%의 횡포를 보고도 '시장은 전지전능하니 내비둬!'라고 외치는 사람은 많은 이들의 오해와는 달리 애덤스미스가 아니라는 이야기는 수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알려져 있다는 말이다. (차라리 맨더빌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애덤스미스가 어떻게 안그런지, 왜 안그런지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가지려면 그의 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의 명저 '국부론'을 읽기 전에 '도덕감정론'을 읽어둔다면 분명히 그를 좀 더 내밀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도덕감정론을 잡은 이유였다.

  스미스는 중세의 신분제에 근거한 사회질서가 거의 해체되고 '개인'이 바야흐로 역사의 주체로 나서며, 경제적으로는 장원경제의 해체와 초기적인 자본주의 경제의 등장이 이루어지던 18세기에 살았다. 당시 유럽의 사회과학자들은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 하에서 한편으로는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있던 공동체의 해체와 함께 이기적인 개인들이 어떻게 사회를 구성하며 살 수 있을지를 모색해야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타고난 신분'으로 정당화되지 않는 개개인의 부의 축적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 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17~18세기의 수많은 사상가들 - 토머스 홉스부터 마르크스까지 - 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 나름의 시각으로 답을 해왔으며, 스미스의 두 저서, 도덕감정론과 국부론, 또한 이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도덕감정론이 주로 대답하고 있는 것은 첫번째 질문이다. 인간 행동의 동기는 무엇이며, 미덕(virtue)은 무엇으로부터 기원하며, 인간은 어떻게 미덕과 악덕을 구별하고 인식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스미스는 교회공동체가 없어도 개개인은 이렇게 사회를 구성하며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 것 같다.

  스미스는 인간행동의 근원을 '공감(sympathy)'에서 찾는다. 인간은 타인의 행복과 불행을 상대 입장에 자신을 대입하여 상상함으로써 공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의 행복에 같이 기뻐하고, 상대의 불행에 같이 슬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단지 상상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나의 기쁨이 당사자만큼일 수 없고, 나의 슬픔도 당사자만큼일 수는 없다. 따라서 나(관찰자)와 상대(당사자)의 진정한 공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상대(당사자)가 어느 정도까지 자신의 기쁨과 슬픔을 억제해야 한다. 이와 같은 자기억제가 이루어질 때 나와 상대간의 진정한 공감이 이루어지며, 나는 상대의 행위가 적정하다고 '시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상대(당사자)는 어떻게 하여 자기억제를 하게 되는가? 이 또한 공감에서 기인한다. 상대의 시인을, 나아가서 찬탄을 얻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의 욕망 중 가장 큰 것이라고 스미스는 지적한다. 따라서 행위의 당사자는 자신의 행동을 상대의 시인 혹은 감탄과 찬사를 얻을 수 있는 수준까지 억제하고자 하는 동기를 갖게 된다. 그런데 개개인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어떤 사람의 행위에 방관자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해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당사자는 이 경험을 통해 타인의 시각으로 자기 자신의 행위를 바라보게 되는데, 이를 '공평한 관찰자' 혹은 '내부인간'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개개인은 공평한 관찰자의 시각에서 자신의 행위를 바라보고 그 시각에 맞추어 자신의 기쁨과 슬픔을 억제하게 됨으로써 타인의 시인이나 찬탄을 획득하려고 노력한다. 결국 이와 같은 당사자의 공평한 관찰자 시각과 관찰자의 공감이 공명함으로써 각 개인은 절제와 시인을 하게 되며 이는 사회조화의 근원이 된다.

  스미스를 이처럼 - 우리가 스미스하면 흔히 떠올리는 인간의 이기성이 아니라 - 공감(sympathy)이라는 인간의 천성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스미스는 어떻게 된 것일까? 사실 나는 스미스의 '공감'에 관한 논의가 '이기적 개인'의 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우선 스미스는 인간이 '공평한 관찰자'의 시각을 따르는 이유에 대해 '타인의 시인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이야기한다. 이는 이타적 감정과는 다르다. 인간은 타인의 시인을 얻기 위해 자기억제를 하게 되지만 이 시인을 얻고자하는 마음 자체는 이타적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미스는 이타성, 즉 '자혜(benevolence)의 덕'에 대해 권장받고 칭찬할 수 있는 일이지만 강제될 수는 없는 것이며, 모두가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 즉, 예외적으로 훌륭한 사람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결국 스미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행동동기는 타인, 혹은 사회에 대한 관심사가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사에서 출발하게 되며, 이것이 공감과 시인의 원리에 따라 조화를 이룸으로써 사회가 작동된다는 것이다. 이를 '개인의 이기적 행위가 공공의 이익이다.'라고 줄인다면 스미스가 화를 내겠지만(실제로 그는 '꿀벌들의 우화'의 저자인 멘더빌 박사의 주장을 이렇게 줄인 후 비판하고 있다.) 비슷한 해석이 가능하게 만드는 요소는 있는 샘이다.

  그렇지만 스미스는 여전히 이기적 행위의 억제를 '정의의 덕'으로 표현하며, 이를 무엇보다 중요한 사회의 원칙으로서 강제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제한적이긴 하지만 인간의 이기성이 무한하게 발휘되어도 좋은 것으로 보지는 않고 있다는 말이다. 또한 그는 '자혜의 덕'에 대해서도 법규를 통해 어느 정도까지 시민들 상호간에 선행을 명령할 수 있다고 단서를 달고 있기도 하다. 결국 스미스의 사상체계를 '인간의 이기성에 의한 사회원리'라고 축약해버리는 것은 여러모로 온당치 못한 구석이 있다고 해야겠다.

  스미스의 도덕철학은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나의 시각에서 보기에는 여러가지 못마땅한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선은 '공감'이라는 단일 원리로 인간과 사회를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있다. 사실 이는 자연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인간이 자연과 사회를 모두 이해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무장한 계몽주의 시대 사상의 공통적인 특성인데, 우리는 이미 그것이 자연과학에서도 사회과학에서도 무리한 시도였음을 알고 있다. 또한 스미스의 철학은 - 우리가 가진 편견만큼은 아니지만 - 여전히 '배분적 정의'의 문제는 법적 강제가 아닌 개인적 덕의 몫으로 남겨둠으로써(이 부분은 도덕감정론에는 일부만 드러나 있을 뿐이지만, 그이 '법학강의'에는 보다 직접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사회적 원인에 의한 빈부격차의 문제에 대한 시각을 결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 스미스를 탓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가 속한 시대의 역사적 한계를 고려할 때 스미스의 사상은 새로운 시대를 적정하게, 그러면서도 충분히 조심스럽게 설명하고 제시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본격화되고 빈곤과 불평등의 문제가 시대적 과제가 된 것은 19세기라고 볼 수 있으며, 이런 부분에 대한 그의 관점이 제한적인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계몽주의적 한계는 양차대전을 겪고 나서야 제대로 반성이 이루어질 내용이니 이는 더더욱 그렇다.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야수적 자본주의의 시대'에 대한 책임을 스미스에게 물을 수는 없다. 잘못이 있다면 스미스를 (의도적으로) 오독하고, 스미스 이후 200년간의 역사적 경험을 무시한채 19세기적 자유시장경제를 떠받들고 있는 지금의 사상가들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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