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

Posted at 2013. 2. 26. 10:11// Posted in 기타

지금은 PC하면 누구나 퍼스널컴퓨터를 떠올리지만, 스무살 무렵의 나 그리고 내 주변의 어떤 사람들은 '플랭카드'를 떠올리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우리는 주로 정치선전을 위해서 이 'PC'를 끊임없이 제작해서 백양로에 달았는데, '대선자금 공개하라', '특별법 특검제로 학살자(전두환을 가리킴)를 처벌하라' 뭐 이런 것들이었을 것이다.


PC를 다는데는 크게 두 방법이 있었는데, 요즘도 다는 방식으로 백양로를 세로로, 그러니까 사람들이 걸어 올라가는 방향으로 다는 방법이 있었고, 백양로를 가로로 그러니까 차로를 가로지르며 다는 방법이 있었다. 가로 PC는 차들이 다녀야 하므로 상당히 높이 달아야 하고, 그래서 다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나무를 타야 했다.


당시의 나는 나무를 꽤 잘 타는 편이었다. 도시에서 자란 배경과는 - 마치 외모처럼 - 달리. 아마 몸무게가 가벼웠던 탓이리라. 어쨌든 그래서 종종 나무를 탔는데 한 번 나무를 타고 나면 옷이며 손이며 얼굴에 시커먼 얼룩이 묻곤 했다. 매연 탓이었으리라.


어느 날은 고등학교 때 활동했던 써클의 후배(남학교2, 여학교2 연합써클이었다.) 중 두엇(누구였는지는 불확실하게만 기억난다. 어쨌든 여자였다. 그게 중요하지.)이 우리학교를 구경하러 왔다가 우연히 내가 나무를 타고 PC를 다는 광경을 구경하고, 내려온 나에게 '오빠 그게 뭐하는 거에요?'라는 식의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고등학생이었던 그 아이들에겐 좀 의아했을 것이다. 무려 '명문대' 다니는 '대학생' 선배가 나무를 타는 모습이 말이다. 내려온 행색은 얼룩덜룩했을 것이고.


그 때 처음 느꼈던 것 같다. 자랑스럽던 나의 '나무타는 재능'이 약간 부끄럽다는 생각을. 사실 난 그때나 지금이나 늘 사람들에게 세련된 인텔리겐차로 보이고 싶어하는 허위의식 같은 걸 버리지 못하고 있어서....


오늘, 졸업식이라고 동아리에서, 학회에서, 과에서, 기업에서, 심지어 해병대에서 건 졸업축하 'PC'를 건 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가로 PC를 다는 사람은 없구나. 이제 정치선전을 위한 PC는 찾기 어렵구나. 뭐 그런. 혹시나 해서 백양로를 따라 늘어선 나무의 위쪽 - 예전에 PC를 달았을 법한 위치 - 을 보니 여전히 몇몇 나무에는 PC를 달았던 흔적(잘려나간 끈)이 남아있다. 어쩌면 저 중에 언젠가 내가 묶은 매듭도 있지 않을까라는 쓸대없는 감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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