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국가의 사상과 이론
국내도서>전공도서/대학교재
저자 : 라메쉬미쉬라 / 남찬섭역
출판 : 한울아카데미 2011.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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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지국가를 보는 시각을 다루는 책으로 내가 최근에 읽은 미쉬라의 <<복지국가의 사상과 이론>>은 복지국가에 대한 여러 관점을 중립적 시각에서 다룬 후 현실에서의 복지국가는 어떤 모습인지를 더듬어보는 책이었다.(
2012/02/14 - [감상] - 복지국가의 사상과 이론 (라메쉬 미쉬라 저 / 남찬섭 역 / 한울아카데미) 참조
) 그 책이 다룬 관점들은 복지행정학 관점, 기술결정론(수렴론) 관점, 기능주의 관점,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관점이었는데, 저자는 마르크스주의 관점을 다루며 마르크스주의적 접근은 체계론적 분석집단행위적 분석을 결합할 수 있다는 것이 (기능주의와 비교할 때) 장점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집단행위적 시각을 포기하고 기능주의적(, 체계론적) 분석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며 아쉬움을 표현한다. 오늘 소개할 이안 고프의 이 책, <<복지국가의 정치경제학>>미쉬라의 아쉬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의 대답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물론 고프의 시각이 마르크스주의자 일반의 시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실제로 고프는 이윤율 저하 경향성의 법칙이라든가 공황 분석과 같은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관점을 결하고 있다는 부분에서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며, 이에 대해 역자는 고프가 신리카도주의적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역자후기 참조.) 고프는 마르크스주의 시각에서 미쉬라가 아쉬워한 두 부분을 모두 충분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이 조망하는 복지국가의 키워드를 하나만 꼽으라면 모순혹은 양면성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복지국가의 두 얼굴


마르크스주의 시각에서 복지국가를 바라보며 저자는 복지국가가 양면성을 가진 체계임을 강조한다. 복지국가는 사회복지를 향상시키고 시장의 횡포에 대항하는측면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인간을 억압/규제하고 자본주의 경제의 요구에 적응시키는측면도 가지고 있다. 사실 자본주의를 소위 시장 만능주의라고 하는 체제로 파악할 때 시장 질서에 따른 분배가 아닌 다른 방식의 분배(사회복지를 통한 분배, 부분적으로나마 욕구에 따른 분배)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모순인데,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자체로부터 기인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마르크스가 가치법칙이라고 말한 비정한 시장력의 힘으로 모든 개인이 규율 되는 체제인데, 이 안에서 개개의 노동자는 시장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하나의 상품이 되며, 지배계급은 마치 자본을 축적하도록 강요된 것처럼 탐욕스럽게 자본의 확장을 위해 움직인다. 당연히 자본주의에서는 재화나 서비스의 분배 과정 또한 이와 같은 시장 질서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인간을 시장의 힘에만 맡겨두게 되면 자본주의 자체의 지속성이 담보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노령, 산재, 실업, 가족의 붕괴와 같은 자본주의 산업사회가 초래한 위험들은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상품인 노동력을 재생산하는데 심각한 장애가 된다. 따라서 사회는 어느 정도가 되었든 시장질서에서 벗어난 욕구에 따른분배 방식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이것이 제도화 된 것이 복지국가이다. 결국 자본주의는 그 자신의 유지를 위해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체제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 설명은 하나의 중요한 요소를 결하고 있다. 바로 복지국가의 형성에서 계급갈등의 역할이 그것이다. 이 부분은 뒤에 살펴보도록 하자.) 그러나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적인 것자본주의적이지 않은 것은 충돌하게 마련이다. 다시 말하면, 복지국가가 성장하면 할수록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위협하게 된다는 말이다.

 

복지국가의 기원 계급갈등과 체제의 요구

복지국가가 자본주의를 어떻게 위협하게 되는 지를 다루기에 앞서서 복지국가라는 체제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위의 설명에서 배제되었던 계급갈등의 역할에서 출발하자. 자본주의는 그 체제의 특성상 자본의 이해와 대립되는 이해를 가진 계급 즉 노동 계급을 대량으로 발생시키게 된다. 노동자 계급은 대규모 공정이라는 일관작업의 환경 하에서 집합적 성격을 갖는 노동을 통해 조직화 역량을 갖추어 나가게 되며, ‘착취라는 자본주의의 본질로 인해 숙명적으로 자본가와의 계급대립을 발생시키게 된다. 더구나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중요한 특성, 즉 선거에 기반한 민주주의라는 특성은 (물론 이 또한 공짜로 주어진 것은 아니다. 보편적인 선거권 확립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자유주의 좌파 세력과 연대하여 싸웠는지는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대의제 구조 내에 노동자의 대표를 등장시키기까지 한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노동 계급을 자본주의 체제 내로 포섭하지 않으면 혁명이라는 – 1789년 프랑스 혁명 후 자코뱅 독재를 목격한 이래 모든 부르주아에게는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공포인 파국을 가져오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노동계급을 자본주의 체계 내로 포섭해야 하는데, 바로 이 포섭의 방법이 바로 복지국가이다. 어떤 경우는 노동 계급의 압력에 의해 또 어떤 경우는 예상되는 노동 계급의 압력을 사전에 약화시키기 위해 사회정책을 도입하는 식의 다양성은 있지만, 어쨌든 노동 계급의 계급투쟁에 대한 대응이라는 것은 대부분 국가에서 복지국가를 향한 움직임이 시작된 중요한 원인이다.

       복지국가는 분명 '부분적으로는' 조직화된 노동운동으로 인한 계급투쟁의 성과이다.

그러나 복지국가가 순수하게 조직화된 노동운동의 성과물인 것만은 아니다. 개별 자본가들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는 안돼!’라고 외친 한국의 한 자본가를 기억하라. 그 자본가의 눈에 흙이 들어간 지 오래지만 그 독점자본의 사업장에는 아직도 노조가 제대로 없다.) 자본가 전체의 이익을 생각할 때는 노동조합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인정과 복지정책의 어느 정도의 시행은 필수적이다. 이는 비단 복지라는 탈출구가 없다면 혁명을 불러올 수 있다는 공포 때문만은 아니다. 자유방임주의가 득세하던 19세기 영국의 공장 현실은 비참함 그 이상이었다. 생산비를 절감하기 위한 자본가들의 노력은 생존선 이하의 임금을 받으며 하루 12시간이 넘는 노동에 시달리는 아동들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었고, 이는 자본주의의 가장 중대한 투입요소인 노동의 재생산을 방해하는 지경에 이르러 자본가 전반의 이익 기반을 훼손할 정도가 되었다. , 개별 자본가의 이익이 무제한 관철되도록 놔두었을 때 전체 자본가의 이익기반은 파괴되고 결국 이는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을 위태롭게 하는 결과를 낳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공장법과 같은 최소한의 개입는 노동운동이 없더라도 자본주의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결국 미쉬라의 말처럼 계급갈등체계특성은 모두 자유방임주의국가를 복지국가로 이끄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까지 복지국가로 움직일 것인가?’를 놓고 자본과 노동은 또 한 번 힘겨루기를 해야만 하겠지만.

 

국가 자본의 이익 실현과 상대적 자율성

이 설명에서 개별 자본가의 이익이 아닌 전체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구가 바로 국가이다. 사실 국가는 자본주의의 형성에서부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수십 년간 신자유주의의 세례를 받은 결과 우리는 흔히 시장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이고 규제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하지만 사실 시장경제의 출발은 조금도 자연스럽지 않았다. 시장경제는 이른바 고전경제학의 투입요소인 토지, 노동, 자본이 시장에서 제한 없이 거래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이전의 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그 때의 사람들은 수많은 공유지를 가지고 집산적 생산을 하고 있었으며, 공동체는 개개인에 대한 일정한 자유의 제약보호기능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었다. (바람직한 경우를 보여주는 예는 아니지만, 중세의 농노제를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농노제 하에서 농노는 거주이전의 자유를 비롯한 갖가지 자유를 제한 받고 있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 어떤 이유로 인해서든 생존에 위협을 받게 되었을 때 영주로부터 최소한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장치들은 모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현에 장애일 뿐이었고 따라서 해체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역할을 수행한 것이 국가 , 정치권력이었다. 자본주의는 자연스럽게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이전 사회를 권력의 힘으로 폭력적으로 해체하며 등장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유를 가질 수 있었다. 비록 못 가진 사람에게 그 자유는 단지 굶을 자유일 뿐이었지만. 그리고 그 자유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거래에 의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형성의 중요한 근간이 된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일단 형성되게 되면 착취가 경제체제 내에서 자동적으로 실현된다는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잉여가치의 수탈은 의식적인 강제 없이도 시장기구의 힘으로 자연스럽게이루어진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경제정치로부터 분리하고, ‘사적인 것공적인 것과는 다른 것으로 취급하게 되는 상태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분리된정치는 분리된 국가구조’,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 국가가 된다. 물론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주어진다. 만약 국가가 이 범주를 넘으려고 할 때 자본은 보다 유망한 자본축적의 중심지로 이동하게 되고, 이는 (적어도 단기적인, 그러나 심각한) 경제적 난관으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에 국가는 (혁명을 일으키는 상황이 아닌 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범위 내에서 움직인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지구적차원의 체제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구조적 속박이며, 국가의 자율성이 상대적인 이유이다.

그렇다면 상대적 자율성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위에서 설명한대로 국가는 상대적 자율성을 갖기 때문에 개별 자본의 단기적 이익이 아닌 전체 자본의 중/장기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 , 아무리 유력 자본가가 내 눈이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돼!’라고 외치더라도 노조의 존재가 자본주의 전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면 노조를 허용하는 정책이나 제도를 시행할 수 있는 것이 국가가 가진 상대적 자율성인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은 본질적으로 한계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피지배 계급에게 국가는 일정한 속박 내에서나마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들을 개선할 수 있는 중요한 가능성이 되며, 그 결과가 바로 지난 세기 자본주의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복지국가이다.

 

복지국가는 어떻게 위협이 되는가?

자본주의와 복지국가가 어떻게 결합되는가에 비하면, 복지국가가 어떻게 자본주의의 위협이 되는가(다시 말하면, ‘복지국가의 위기는 어떻게 도래하는가?)에 대한 저자의 논의는 빈약하다. 논의가 타당성이 약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양적으로 빈약하다는 말이다. 오히려 저자는 위기의 진짜 원인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보다는 사회지출의 증가를 70년대 경제위기의 진정한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이 왜 불완전한가?’에 대한 논의에 더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다. 저자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이른바 복지국가가 생산성 저하를 초래한다.’는 주장은 이렇다. 경제에는 시장부문비시장부문이 있는데 시장부문은 시장판매를 위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모든 경제적 활동으로 이루어지며, 비시장부문은 그 외의 것들, , 국방, NHS (국가 건강 서비스, 이 장에서의 모든 논의는 영국을 예로 들어 이루어지고 있다.) 등 주로 국가/공공 부문의 활동들로 구성된다. 이 중 국가 전체의 소비재, 투자재, 수출재 등의 수요총량을 공급하는 것은 시장부문이며, 따라서 시장부문이야말로 경제에서 유일하게 생산적인부문이다. 따라서 비시장부문에서 일하는 비생산적 노동자들의 소득은 생산적 부문이 생산한 시장부문생산물의 구입을 위해서만 지출될 수 있다. 그 결과로 비생산적부문의 국가고용 증대는 시장부문 산출의 몫을 축소시킴과 동시에 시장부문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킨다. 또한 국가지출의 증대는 시장부문에 대한 조세부담의 증대를 의미하며, 이는 결국 시장부문의 이윤에 의해 부담된다. 결국 복지국가가 초래한 국가와 공공부문의 확대는 ① (생산적인) 시장부문으로 가야 할 노동력을 (비생산적인) 비시장부문으로 돌리고, ② 시장부문의 산출부담을 증가시키며, ③ 조세부담으로 시장부문의 이윤을 축소시키는 3중의 부담을 시장부문에 전가하는 방식으로 산업기반을 약화시키고, 저성장과 무역적자의 원인이 된다.

    복지국가에 조종을 울린 '철의 여인' 마가렛 데처. 메릴스트립의 싱크로율이 후덜덜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의 파국을 이야기하는 이 시기에 왜 하필 그녀가 영화화된 걸까? 

저자는 복지국가를 저성장의 원인으로 몰아세우는 이런 주장이 타당하지 않음을 여러 각도에서 논증한다. 첫째, 비시장부문의 활동이 생산하는 사회적 임금집합적 소비는 그 자체가 생산적이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노동력을 재생산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를 공급하게 됨으로써 시장부문에서 시장임금으로 지급되어야 할 비용을 감소시키므로 비시장부문의 모든 활동이 시장부분의 이윤을 감소시키는 형태를 결과한다는 분석은 옳지 않다. 둘째, 예를 들어 NHS와 같은 필수 서비스가 국가에서 운영될 경우 민간에서 운영되는 것과 달리 소비자가 NHS에 지급할 비용에는 이윤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는 소비자의 후생을 증진시키거나, (만약 시장임금이 이와 같은 부분을 반영하여 낮아지거나 덜 상승하는 식으로 반응할 경우) 시장부문의 이윤을 증가시키게 된다. 이는 시장부문에서 NHS를 공급했을 때의 이윤과 같으므로 이윤의 총량은 같지만 (NHS를 공급하는 자본가가 없기 때문에 사회의 전체 자본가 수가 감소함으로써) 이윤율을 오히려 더 높아지는 결과가 된다. 셋째, 국가가 공급하는 사회서비스는 재생산적인 것 (예를 들면 교육, 보건 같은)비생산적인 것 (주로 사회통제를 담당하는 서비스, 예를 들면 군대, 경찰과 같은)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중 재생산적인 것은 장기적으로 시장부분의 생산 증대에 기여하게 되며, 따라서 이 부분의 비중을 높일수록 사회서비스는 그 자체로 생산적일 수 있다.

그렇다면 저자가 생각하는 1970년대 복지국가의 위기의 본질은 무엇일까? 저자는 복지국가의 위기는 전후 계속되어온 장기호황자체에서 싹튼 것이라고 말한다. , 전후의 경제적 호황은 산업예비군을 고갈시켜 노동운동의 힘을 강화시켰고 강력해진 노동운동은 임금을 상승시켜 인플레이션 압력을 증가시켰다. 한 편으로 유럽과 일본의 선진국가들은 미국의 기술수준을 따라잡음으로써 미국 자본의 경쟁을 증대시켰고, 이는 미국 자본의 이윤압박을 증가시켜 미국의 헤게모니 하의 국제질서라는 기존의 국제적 축적체제를 뒤흔들었다. 한편으로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국가지출은 증대했는데 이에 대한 재원조달시도는 다시금 인플레이션 압박을 증가시키게 된다. 결국 불황에 대처하는 국가지출확대라는 케인즈주의 경제학의 대응책은 인플레이션이라는 암초를 만나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었고 이것이 위기의 본질이다. , ‘복지국가는 위기의 한 측면일 뿐이지 이것이 위기의 중요한 원인도, 결과도 아니라는 것이다.

 

나가며. 복지국가의 미래는?

이와 같이 복지국가의 본질과 기원, 그리고 위기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고찰을 마친 저자는 위기에 봉착한 복지국가의 미래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저자는 후기에서 복지국가는 자본주의의 피조물임과 동시에 자본주의 속의 사회주의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한 번 복지국가의 양면성이다.) 그리고 복지정책이 가진 긍정적인 측면들을 보호하고 확대함과 동시에 복지정책의 부정적 측면들은 노출시켜 척결해야 한다는 (공자님 말씀 같은) 교훈을 던지며 글을 마무리한다. ‘복지자본주의에서 복지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바란다는, (‘어떻게가 빠져 있기에) 다소 갑작스러운 문장을 끝으로. 결국 복지국가의 과거와 현재를 일관성 있게 조망한 저자로서도 복지국가의 미래는 말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이 책이 쓰여진 시점부터 20여 년을 더 살아온 나로서는 당시의 저자가 몰랐던 복지국가의 미래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다. 70년대를 거치며 복지국가는 저자가 애써 증명하려 했던 바와는 달리 경제위기의 주범이자 비효율의 상징으로 몰렸고, 그 결과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좌파조차 (기존의 복지국가와 자유방임주의 사이의) 3의 길을 외치며 사실상 신자유주의의 조타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되었다. 사실 70년대의 위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다. 저자도 지적한 것처럼 노동운동의 강화와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 압박은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국가의 비대함과 그로 인한 비효율은 신자유주의 진영에서 주장한 것과는 달리 정말 위기의 원인이었는지 잘 밝혀지지 않은 것 같다. 한편 신자유주의 진영에서는 은폐했으며, 저자도 (적어도 이 책에서는) 다루지 않은 위기의 또 하나의 측면이었던 자본의 독점자본화는, 위기의 원인으로 주목 받지 않았던 덕분에 그 후 이십년동안 신자유주의의 시대를 거치며 더욱 증폭되어 오늘날 또 다른 위기의 원인이 되고 있다. (1970년대 인플레이션 압박은 노동의 임금상승도 있지만, 독점자본화에 따라 가격의 결정이 시장이 아닌 자본에 의해 이루어짐으로써 생산비 상승이나 임금인상이 이윤을 잠식하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가격의 상승으로 이어졌다는 측면도 있다. 또한 산업기반 약화의 원인은 신자유주의의 주장대로 국가의 비대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업자본이 덩치를 키우며 초국적 금융자본화된 것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복지국가는 무엇인가? 지난 30년 간 지구적 자본주의를 운영한 신자유주의가 실패했으니 이제 다시 복지국가로 돌아가면 되는 것일까? 30년 전의 경제위기를 몰고왔던 원인들은 해결되었는가? 복지 자본주의의 전성기를 열었던 지속적인 생산의 증대는 과연 돌아올 수 있는 것일까?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으로의 이행이라는 산업 조건의 변화는 어떠한가? 인구구조의 변화와 환경의 파괴, 그리고 석유의 고갈이라는 잠재적 위협들은 복지국가와 어떻게 어울릴 수 있을까? 2008년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건제한 초국적 금융자본은 과연 복지국가로의 회귀를 용인할까?

이안 고프 같은 이도 복지국가의 미래를 조망하지 못했는데 내가 이런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을 리 없다. 다만 한 가지만 이야기하고 싶다. 70년대 케인즈주의 복지국가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 마땅히 이에 대한 대안은 시대적 변화를 담은 새로운 비전이었어야 했다. 하지만 선택된 비전은 고전적 자유방임주의의 재판일 뿐인 신자유주의였고, 결국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낳았을 뿐이었다. 또 다른 위기에 봉착한 지금, 어떤 이유에서든 30년 전 폐기되었던 체제를 다시 들고 나오는 것인(물론 적어도 복지국가의 30년의 신자유주의의 30년 같은 야만의 세월은 아니었으니 좀 나을 수는 있어도) 그리 현명한 대안이 아닐지도 모른다. 고프의 말처럼 복지국가의 긍정적 측면을 담되, 새로운 시대의 질서가 될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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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와 복지정책 - 역사와 이슈 (테마한국사회복지1)
국내도서>사회과학
저자 : 이영환
출판 : 나눔의집 2004.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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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사회보장"이라는 책이나 "한국의 가난 - 오래된 빈곤, 새로운 과제"와 같은 책들, 그리고 복지국가 소사이어티에서 낸 책 두 권 정도, 여기에 최근에 읽은 '한국 복지국가 성격논쟁2"를 통해 한국의 복지와 관련된 문제들을 어느 정도 접하긴 했는데, 어디에선가 이 책에 대한 추천을 본 기억이 있어 오래전에 사놨다가 이번에 미쉬라와 고프의 책을 잇달아 보며, (동시에 두 가지 책을 보는 근래 생긴 습관으로 인해) 이 책을 한 챕터씩 읽어 어제 마쳤다.

  제목처럼 한국사회와 복지정책에 대해 역사적 측면과 몇 가지 이슈를 다룬 내용이었고, 각 챕터는 각기 다른 시기에 저자가 쓴 논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저자의 논문 모음집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책들을 통해 비교적 접해본 이슈임과 동시에 이론적이기보다는 현실적인 논의라 (한국 복지국가 성격논쟁 같은 책에 비하면) 비교적 평이하게 읽어갈 수 있었다. 이 책의 집필을 목적으로 새로 쓰여진 책이 아닌지라 2005년에 발간된 책임에도 오래된 논문은 96년에 쓰여진 것이 있을 정도라 '같은 문제를 현재적 시각에서 보면 어떻게 봐야 할까?'를 생각하게 되는 아쉬움을 있었지만, 여전히 이 분야에 대한 '공부'가 절실한 나에게는 또 한 권의 소중한 양식이 되어준 책이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저자의 '글투',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단어나 표현의 선택'이었는데 보통의 논문이라면 좀 더 가치중립적인 성격의 표현를 사용할만한 부분에서 거리낌없이 자신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표현을 사용하는 듯한 부분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런 느낌을 갖고 나서 다시 어떤 단어들이 있는지 훑어보니 막상 그런 단어가 딱 눈에 띄지는 않는다! 아마도 단어보다는 규범적인 성격이 있는 문장에서 단정적인 어미를 사용한다든가, 역사적 논란이 있는 사건에 대해 단언하는 부분이라든가 이런 것들이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좋게 느껴졌는데, 논문이라는 것이 어차피 어떤 주장을 하는 것이라면 단정적인 표현들이 좀 더 매력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덜 아카데믹하게 느껴질 수는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오랜만에 '편안하게'(아무래도 이론적인 논의가 아닌 현실에 대한 논의니만큼) 읽은 '불편한'(다루는 내용이 즐거운 내용은 아니니까) 책이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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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에 있었던 여러 가지 정치 이벤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단연 오세훈 전 서울 시장의 보편적 무상급식 몽니에 이은 셀프 탄핵과 그 후 야권연대에 기초한 시민운동가의 서울 시장 선출,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김어준 딴지 총수의 표현을 빌자면) ‘역사상 가장 빨리 시작된 대선 레이스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가카 (여러 가지 의미로) ‘삽질이 자리하고 있지만, 그 외에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보편적 무상급식이라는 지난 지방선거와 서울시장 재보선을 관통한 (한국에서는 보기 드물게 선거의 핵심 어젠다가 된) 복지정책 논란이다. 전근대적ㆍ중상주의적 재벌 위주 경제구조라는 한국의 특수성이 전세계적인 신자유주의의 돌풍이라는 보편성을 만나 대다수 서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어온 이래, 마침내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왜곡하는 요소는 구조적, 혹은 적어도 제도적인 문제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유력한 대안은 복지국가라는 (적어도 MB뉴타운돌이들에게 투표할 때보다는 훨씬) 진일보한 생각에 접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2011년을 뜨겁게 달군 오세훈 전 서울 시장의 "셀프 빅엿", 많은 것의 출발점이 될 것같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황금기라 불리는 50~60년대 성립된 서구의 복지국가를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을 것 같다. 우선은 더 이상 고도성장 기반의 완전고용이라는 복지국가의 전제조건이 성립할 수 없다는 국제적 환경의 차이를 고려해야 하며, 노동자 계급의 권력자원 동원이 어렵고 극소수 재벌위주의 생산체제를 가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노동시장의 이원화 문제가 심각한 한국적 특수성도 고려해야 한다. 평범한 시민의 입장에서 이런 것들을 다 고려해서 어떤 대안을 생각해 내기란 물론 요원한 일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가 막연히 말하는 복지국가가 어떤 생각에 기초하여 이루어진 체제이며, 그것이 (우리보다 앞서 나간) 서구의 국가들에서 어떻게 작용했는지에 대한 이해 정도는 가지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야 정치가들이 외치는 복지가 진정성을 가지고 실천방안까지 고민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표를 모으기 위한 캐치프레이즈일 뿐인지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복지국가에 대해 좀 더 편안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다른 책들도 많지만, ‘복지국가를 만들어낸 생각들을 들여다본다는 측면에서 라메쉬미쉬라의 복지국가의 사상과 이론은 충분히 좋은 책이다. 재미있고, 충실하며, 무엇보다도 얇다. 좀 오래된 책이지만 한국사회가 복지라는 측면에서 워낙 뒤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낡았다는 느낌도 전혀 들지 않는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전반부는 복지를 보는 여러 가지 시각들을 설명하고 있다. 사회개혁으로서의 복지(사회행정적 접근), 사회적 시민권 이론, 수렴이론(기술결정론), 기능주의 관점, 마르크스주의 관점으로 나누어 각자의 시각이 복지를 어떻게 보고 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이고 한계는 무엇인지를 일일히 짚어준다. 사회정책에 관한 개론서를 보면 거의 용어 설명 식으로 다루어져 있는 이 각각의 입장들을 좀 더 자세히 다루고 있어 복지국가를 설명하는 이론적 배경들을 개괄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뒤이어 후반부에서 이 책은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 사회에서 각각 복지국가가 어떻게 형성되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그 성과와 한계는 어떤지에 대해 설명한다. (이 책은 1981년에 쓰여졌다. 그렇기 때문에 근래 쓰여진 책이라면 담고 있지 않을 사회주의 국가 정확하게는, 소련 의 복지제도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이 책이 소중한 또 하나의 이유다. 쉽게 접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측면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복지를 다룬 내용 중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자본주의 체제 하 사회정책이 그 사회의 불평등을 완화시키는 효과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전략)… 대부분의 연구들이 지적하고 있는 일반적인 결론은, 계급 간 소득재분배, 즉 사회경제적으로 상층에 속하는 집단으로부터 하층에 속하는 집단으로의 소득재분배의 정도는 미약하며, 따라서 소득이전의 성격은 계급 내 소득이전 또는 삶의 주기에 따른 소득이전의 성격을 훨씬 더 많이 띠고 있다는 것이다… (후략)

   “…(전략)… 사실상 재분배효과가 미미하다는 사실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서비스가 발달할 수 있는 전제조건일 수도 있다.” (여기에서 사회서비스는 복지를 일반적으로 구분하여 사회보험, 공공부조, 사회서비스로 나눌 때의 사회서비스가 아닌 민간 차원의 복지와 구분되는 개념으로의 국가복지를 의미한다.)

   “…(전략)… 다시 말하면, 지배적인 제도와 가치가 변화하지 않는 한, 한 가지 구조에서의 개혁은 다른 구조에서의 보상적인 변화에 의해 부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후략

   저자의 이야기대로라면 재분배’, , ‘불평등의 완화로서의 사회복지제도는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제도와 가치가 불평등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사회복지제도 또한 그 전제를 크게 거스르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존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지국가가 그 한계를 넘어서려할 때, 복지국가는 자본주의 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힘에 의해 교정될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오일쇼크를 겪으며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힘을 얻고 대부분의 서구 국가들에서 복지국가가 약화되어 온 현실을 감안할 때 뼈아프지만 타당해 보이는 저자의 지적은 복지국가를 우리 사회의 대안으로 생각해온 이들의 가슴을 때린다. 결국 불평등의 의미 있는 교정은 일찍이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처럼 자본주의의 테두리 안에서는 불가능한 것일까? 복지국가는 노동자와 서민으로부터 체제에 대한 충성심을 끌어내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장치일 뿐일까?

                              국가별 사회정책에 의한 소득재분배 효과. 저자의 논의와 달리
                        국가에 따라 상당한 수준이다. 저자가 주로 염두에 두고 논의를
                        전개하는 국가가 영국임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복지국가가 의외로 재분배적 효과가 별로 없다는 것을 지적할 뿐 이런 문제에 직접적으로 답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복지국가를 부정적이지만은 않게 볼 수 있는 몇 가지 이야기를 책 속에 담고 있다. 그 중 한가지는 복지제도가 재분배적 기능은 약하다고 해도 삶의 기회를 확대하는기능은 상당하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NHS 이전과 이후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의료서비스 이용 기회의 차이라든가, 공공주택의 공급이 주거의 평등을 실현하지는 못했더라도 최소한의 주거환경을 제공하는 기능은 수행했다는 것과 같은 내용들이다. 재분배는 못했어도 극단적인 불평등은 다소간 감소시켰다고 할까.(실제도 통계적으로도 복지국가는 지니계수를 개선하는 쪽보다는 빈곤율을 낮추는 쪽에서 훨씬 더 높은 성과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좀 더 적극적으로 불평등의 완화를 이루고 싶은 이들에게는 여전히 실망스럽지만, 사회주의 사회의 복지를 다룬 부분에서 저자는 약간의 희망을 남겨준다.

 “…(전략)… 그러나 사회주의적인 복지는 그것이 가진 몇 가지 특성으로 인해 재분배가 수직적이 될 가능성을 보다 많이 가지고 있다. 사회서비스 가운데 연금이나 상병급여 등과 같은 이전급여는 의료나 주택 등과 같은 현물급여에 비해 재분배의 정도가 적다. 이는 사회주의에서나 자본주의에서나 이전급여는 임금에 연계되어 있는 데 비해 현물급여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물급여에 대한 지출은 재분배적일 가능성이 보다 많다… (후략)…”

 흔히 복지국가하면 1순위로 떠올리는 스웨덴으로 대표되는 사민주의 모델의 복지국가는 다른 유형의 복지국가에 비해 사회서비스(국가복지의 의미에서의 사회서비스가 아닌 사회보험, 공공부조와 구분되는 개념으로서의 사회서비스, 이 책에서 저자의 표현을 빌면 현물급여에 대한 지출’)의 비중이 특히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알다시피 이들 국가들은 시장경제체제하에서 작동하는 어느 국가보다 평등주의적이면서도 성공적인 경제적, 사회적 모델을 만들어왔다. 여기서 또 한가지 기억할 부분은 현재 한국의 복지제도를 공공부조, 사회보험, 사회서비스로 나눌 때 제도적 외형이라도 어느 정도 갖추어진 처음의 두 가지에 비해 사회서비스는 가장 낙후된 영역이라는 점이다.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완화시키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복지를 고민할 때 고려해야 할 하나의 중요한 지점이 아닐까?

 

사회주의 국가의 복지에 대해 다룬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구조적 모형’(영미권 국가의 잔여적 모형은 물론 대륙유럽을 중심으로 한 발전된 복지국가의 제도적 모형보다도 복지제도의 중요성이 강조되는)으로서의 사회주의 국가의 복지가 갖는 우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동시에 스탈린 체제라는 전체주의 체제가 이를 어떻게 제약하고 왜곡했는지를 설명한다.

 “…(전략)… 전체주의적인 사회주의는 시장에 의해 생성된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을 정치적으로 조건화된 불안정성(비보장) – 순응치 않는 자의 고용과 소득, 주택, 기타 생계수단을 위협하는 으로 대체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보장은 정치적비보장에 압도되어버리는 것이다… (중략) … 복지는 그것이 공민권 및 정치권과 결합될 때 보다 인본주의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후략)…”

 현실사회주의는 전체주의적 요소는, 복지제도 자체가 가진 상대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정치적 불안정과 결합되어 사회통제의 수단으로 이용된 바 있다. 게다가 민주적 통제 없이 이루어진 국가의 비대화는 관료주의의 병폐를 심각하게 초래한 바, 결국 사회주의 국가의 복지체제가 가진 우위는 상당부분 훼손되고 만다. 이는 비록 민주화는 되었지만 여전히 관료적 제도가 사회 제도 곳곳에 산재해있는 우리 사회에 있어서도 함의하는 바가 작지 않을 것 같다.

 

지금까지 라메쉬미쉬라의 사회복지의 사상과 이론의 개략적인 내용과 그 중 내가 강한 인상을 받은 부분들에 대해 정리해보았다. 끝으로 책을 덮고 난 후의 소회로 글을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비록 나의 사회정책에 대한 지식 수준은 아직 일천하지만 이 분야의 책들을 읽으며 내가 가졌던 가장 큰 의문은 과연 앞으로의 사회에서 복지국가의 모델이 지속 가능할 수 있을까였다? 앞에도 언급한 것처럼 복지국가는 가장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 받는 스칸디나비아 모델을 포함해서 공통적으로 지속적인 경제의 성장과 완전고용을 전제로 한 국가 모델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과연 완전고용을 창출한 만한 지속적인 경제의 성장이라는 것이 앞으로도 지속가능한가? 비단 세계화나 서비스업 위주의 경제구조로의 변화, 그리고 그로 인한 고용 없는 성장의 문제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더 근본적으로 피크 오일이후의 세계, 즉 값싼 석유에 기초한 대규모 산업들의 경제성이 떨어져가는 미래의 세계에서 복지국가는 살아남을 수 있는 모델인가? 복지국가 또한 그것이 끊임없는 생산과 소비의 확장을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의 다른 얼굴이라면, 이 또한 신자유주의와 함께 한계에 봉착한 것은 아닐까?

아직까지 논란은 있지만, 피크오일은 분명 다가오고 있는 위협이다.

 이 책이 나의 이런 질문들에 대답을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책은 또 다른 각도에서의 질문을 던져주었다. , 복지국가에 대한 보다 더 전통적인 질문, 과연 복지국가는 진정으로 불평등을 완화하고 더 평평한 사회를 만들어 줄 수 있는가? 아니면 단지 부분적이며 비본질적인 개선을 통해 자본주의의 근본모순을 은폐하고 인민들의 충성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장치인가? 복지국가가 이데올로기적 장치가 아닌 진정한 진전이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사실 한국사회의 현실을 생각할 때 위의 두 가지 질문은 모두 사치인지도 모른다. 생태주의(피크오일에 대한 이야기는 생태주의와 관련이 깊다.)나 복지국가는커녕 법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서구적 기준에서는) 19세기적인 과제 조차 완료되지 않은 나라에서 지금 여기의과제는 이데올로기적 장치이든 무엇이든 당장 최소한의 개선을 이루어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사적 경험은 지속가능하지 않은 방법으로 당장의 개선을 이룰 때 그 개선은 미래의 다른 개선을 제약하는 조건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시대에서 복지국가나 사회정책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좀 더 깊은 고민에 빠질 필요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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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복지국가 성격논쟁 2 (양장)
국내도서>사회과학
저자 : 정무권
출판 : 인간과복지 2009.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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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마음으로 본 '한국 복지국가 성격논쟁2'. 1편부터 보고 보려고 했는데 1편은 구하기가 힘들어서(서점은 다 절판) 패스. 2편을 먼저 읽고 보니, 1편과 직접적 연관이 있는 건 아니라 읽는데 문제가 없었는데 재밌어서 1편도 (도서관 등에서) 구해 봐야겠다고 생각.

29명의 한국 사회정책학계의 연구자가 복지국가로서의 한국을 복지레짐차원, 관련제도차원, 개별 정책 차원에서 연구한 논문들의 모음집으로 (논문이니까 당연히) 쉽지는 않지만 '복지국가로서의 한국'에 대한 학계의 여러 시각을들 볼 수 있어서 (나처럼 향후 이 분야를 공부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유용하고 가치있는 책이었다.

배운다는 마음가짐으로 본 책이고 그럴만한 능력도 안되는 고로 서평을 쓰기에는 적절치 않다는게 아쉽다. 언젠가 그럴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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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비어니즘은 사회정책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기도 하고,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사회주의에 대한 스스로의 무식을 개선하고 싶은 생각도 있기도 해서 택한 책. 전반부는 페이비어니즘에 대한 설명을 후반부는 신디컬리즘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역사적 배경이라든가, 실제 그 운동이 어떤 식으로 현실과 만나 작용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좀 더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보다는 거의 각 운동의 이론적, 사상적 배경 및 그 운동에 대한 '오해'들을 해명하는 것이 내용의 거의 전부. 19세기에 대한 공부를 최근해 많이 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굉장히 불친절한 책이 될 뻔.

그래도 그 덕분에 각 부류의 사회주의가 어떤 사상적 배경에서 어떤 주장을 했는지를 비교적 쉽고 풍부하게 볼 수 있었다는 점은 큰 장점.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사회주의의 경향들에 대해 맛보기를 하고 싶은 사람은 한 번쯤 볼만하다. 단, 보기 전에 19세기~20세기 초 영국의 역사적/사회적 배경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갖출 것.

그나저나, 전부터 보고 싶던 아나키즘을 개괄할만한 좋은 책은 아직도 못찾고 있다. 원서를 질러야 하는 것일까. 사상사적인 관점에서 아나키즘의 여러 흐름들 다룬 책이면 딱 좋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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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76년 출간된 국부론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표지. 이 해는 미국이 독립한 해이기도 하다.


들어가며.
時制와 고전읽기

   '공자' '논어'를 이야기할 때 보통 우리가 떠올리는 이미지는 '고리타분함', '보수적임' 같은 것입니다. 이는 유교문화권인 우리 사회의 특성상 제사, 예의범절, ()와 같은 전통적 가치가 자유, 민주주의, 인권과 같은 서구적 가치와 만났을 때 대개 우리는 전자에서 보수적인 느낌을, 그리고 후자에서 진보적인 느낌을 갖기 때문일 것입니다. 몇 해 전 유행했던 '공자를 죽여야 나라가 산다.'는 책 제목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사실 공자의 사상이 담고 있는 신분질서에 대한 옹호라든가 지배계층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성격은 이런 느낌 자체가 부당하지만은 않다는 생각도 들게 합니다. 하지만 공자에 대해서는 정 반대의 주장도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마찬가지로 몇 해 전 출간되었던 '논어는 진보다' 같은 책의 저자는 공자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과 공자의 말이 그 시대 속에서 가졌던 의미들을 논하면서 우리의 편견과는 달리 공자는 당대의 관점에서 볼 때 보수적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같은 사상가인데 왜 이렇게 다른 해석이 존재할까라는 질문을 해 볼만 한 부분입니다.

   공자가 보수인지 진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고전을 읽을 때 그 고전이 쓰여진 시대를 감안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신영복 선생은 그의 책 '강의'에서 논어에 대해 이야기하며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時制)’라고 말합니다. 잠깐 옮겨보자면 이렇습니다.

   "... (전략)... 우리가 이 지점에서 합의해야 하는 것은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時制)라는 사실입니다. 공자의 사상이 서주(西周)시대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오늘의 시점에서 규정하여 비민주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담론을 현대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지요. 공자의 인간 이해를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의 인권 사상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후략)…"

   이와 같은 '시제'의 중요성은 비단 고전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문제뿐 아니라, 고전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을 현실에 적용하는 데에 있어서는 더욱 중요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가라도 그가 발을 딛고 선 시대적, 사회적 상황에서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내기 마련입니다. 비록 그가 그 당시에는 나름대로 미래를 예측하고 그 미래까지 감안한 해결책을 내놓았을지라도 그가 인간인 한 그 예측은 불완전하게 마련이고, 따라서 현재의 시점에서 그 해결책을 활용하고자 할 때는 매우 주의 깊은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일견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의외로 이 당연한 이야기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혹은 알지만 의도적으로 묵살하는 논의들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고전을 읽는 데는 '시제'가 중요하다는 점을 기억하고 '국부론'에 대한 저의 서평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애덤스미스를 이해하다 - 이기적 인간과 자기조정시장

   우리가 '애덤스미스', '국부론'하면 떠올리는 개념들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 핀 공장, 이기적 인간, 시장경제와 같은 것들이지요. 특히 최근에는 '신자유주의'와 연관된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도 많을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스미스의 이미지들 중에는 지하에 있는 그가 들으면 다소간 억울해 할만한 것도 있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부당하다고 할만한 것은 없는 듯합니다. 신자유주의를 포함하여 이 모든 이야기들을 시작한 고전적 자유주의는 분명히 스미스의 국부론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국부론(원제 :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은 원래 절대왕정 시대의 정치경제적 지배이데올로기라 할 중상주의를 비판하고 다가오는 부르주아의 시대의 정치경제학을 제시한 책입니다. 중상주의란 국가의 부의 근원을 '금은(金銀, 당시로서는 화폐)'으로 생각하여 보호무역을 통한 무역수지 흑자의 극대화와 국내적 경제활동의 제한을 통해 '좀 더 많은 금은을 국가(당시로서는 곧 국왕)의 금고에 확보하는 것'이 부국강병의 길이라고 봤던 17~18세기의 정치경제정책입니다. 이에 대해 애덤스미스는 국부론을 통해 국가의 부의 근원은 '금은'이 아닌 '재화(그리고 재화를 생산할 수 있는 노동량)'에 있으며, 생산은 분업을 통해 촉진되고, 촉진된 재화의 소비를 위해서는 시장을 확대해야 하므로 자유무역과 국내적 경제활동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스미스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봅시다. 사실 국왕도, 교회도, 영주도 간섭할 필요가 없는 '자유시장'이라는 발상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좀 아연한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때문에 저 이기적이고 탐욕스런 개인들에게, 더구나 교회의 약화로 인해 개인의 욕망에 대한 절제조차 무너진 시대에, 통제되지 않는 자유를 준다면 혼돈이 초래되지 않겠는가?’ 라는 질문을 예측했는지 스미스는 '자기조정시장'의 논리를 거의 대부분의 챕터에서 각기 다른 예를 통해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개개인은 (대부분의 경우 이 개인은 자본가입니다.) 자신의 사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신이 가장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곳에 투자합니다. 그 자본의 투자를 통해 고용이 창출되고 재화가 생산되고, 소비되어 국부가 증진됩니다. 앞에 이야기한 것처럼 국부는 그 사회가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는 재화의 양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니까요. (통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특정한 분야에 투자가 몰린다면 그 분야의 이윤이 감소하고 이에 따라 자본은 좀 더 이윤이 좋은 다른 분야(아마도 투자가 부족했던 분야)로 이동하게 되어 전자는 경쟁의 약화 및 생산량의 감소로 이윤이 다시 증대되며, 후자는 경쟁의 강화 및 생산량의 증대로 이윤이 감소하여 양 분야의 이윤은 적정수준을 되찾게 됩니다. 마치 진자의 운동과 같이 작동하는 '자기조정시장'의 매커니즘은 자유롭게 풀어놓았을 때 가장 잘 작동하여 사회의 생산량을 극대화시키고 그에 맞는 소비시장을 창출합니다. 여기에 국가나 다른 주체가 인위적인 수단으로 개입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자연적인' 수준보다 높은(혹은 낮은) 이윤을 창출하는 분야를 만들어내고 이는 자기조정시스템을 왜곡하고 국부 - , 그 사회의 재화의 양 또는 그 사회가 고용할 수 있는 노동의 총량 - 를 감소시키게 된다는 것이 그의 논리입니다.

   (자본가들 간의 경쟁에 좀 더 초점을 맞추긴 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수요/공급의 법칙'의 원조라 할만한 스미스의 '자기조정시장의 원리'는 중상주의가 추구했던 국가의 간섭을 배격하고 경제적 자유주의를 주장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근거가 됩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푸주간 주인과 양조장 주인, 그리고 빵집 주인'의 예시가 말해주는 것처럼 이 자유경쟁시장에서 사람들 - 주로, 자본가들 - 의 핵심적인 행동동기는 '자신의 이익에 대한 고려'라고 국부론은 이야기하고 있기에 우리가 이념형으로 기억하고 있는 '애덤스미스' '국부론'의 이미지는 대체로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애덤스미스를 오해하다 - 자본가와 노동자, 독점과 정치권력

   하지만 스미스의 '국부론'은 무려 1,200페이지에 이르는 대작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들 외에도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기적 인간, 보이지 않는 손, 자유시장, 정부의 실패가 국부론의 전부인 것 같지만 실은 이는 '(누군가의 필요에 따라) 국부론에서 부각된 전부'일 따름입니다. 물론 저도 국부론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를 둘만 꼽으라면 '국부의 근원으로서의 재화/노동력/생산성' '자기조정시장 매커니즘'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하지만 스미스의 사상체계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많은 다른 중요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 중 애덤스미스의 후예를 자처하는 이들이 의도적으로 누락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드는 부분들만 언급해 보겠습니다.

   우선 자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스미스가 자본가의 사적 이익 추구가 자본축적에 이르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국부를 증진시키게 된다는 이야기를 강조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스미스는 이와 같은 원리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자본가의 이해가 일정 정도 제한되어야 함을 분명히 합니다. 스미스는 사회를 지주, 노동자, 자본가 계급으로 나누었을 때 자본가 계급만이 자신의 이해와 사회의 이해를 분명히 인식할 수 있지만, 동시에 자본가 계급의 이해만이 사회 일반의 이익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는 자본자는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여 '시장을 확대하고 경쟁을 제한하려는' 경향을 가진다고 말하고, "시장을 확대하는 것은 종종 공공의 이익에 합당할 수 있지만, 경쟁을 제한하는 것은 항상 공공의 이익과 충돌한다."고 언급합니다. 다시 말해 스미스가 생각한 '자기조정시장'이 성립하려면 '자본가 사이의 경쟁'이 그 전제가 되어야 하는데, 자본가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경쟁을 일정하게 제한하려고 하고, 그렇기 때문에 자본가의 이와 같은 시도를 통제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독점적, 혹은 (카르텔을 형성하기 쉬운) 과점적 기업에 의한 시장의 장악은 자유시장 시스템에 정부의 개입보다 더 큰 위협이 됩니다. 결국 자본가 계급의 이해를 반영하는 정책은 경제적 자유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서민경제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젠 골목상권까지 장악해가는 한국의 독점적 재벌집단과, 그 재벌집단의 이해를 대변하기 위해 환율과 주가를 조작하기에 급급한 한국 정부(이렇게 놓고 보니, 한국의 경제정책은 참으로 중상주의적이네요.)의 눈앞에 들이밀고 싶은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과 같이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체제는 19세기를 거쳐 독점자본주의로 이행하며 엄청나게 많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노동빈민입니다. 당시 많은 자본가들은 노동계급이 '천성적으로 게으르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이들이 노동규율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생존 수준의 임금을 지급함으로써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이 주장의 뒤에는 노동자의 임금을 낮게 유지함으로써 자본가의 이윤을 높이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야 19세기 이야기지 지금 누가 그런 생각을 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현실은 꼭 그렇지 만도 않습니다. 당장 최근 정치권의 이슈가 되고 있는 복지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라에서 일 안 해도 돈을 주면 누가 일을 해?’라는 생각을 합니다. 청년실업의 심각함을 이야기할 때 늘 따라 나오는 이야기가 청년실업 이야기를 하지만 중소기업은 사람이 모자라다고 하니 이는 청년들이 일하기 싫어하는 탓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은 발상의 근간에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아야 한다.’ 19세기 자본가들의 논리와 일맥상통하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에 대해 스미스는 뭐라고 이야기했을까요? 그는 노동의 후한 보수는 인구 증가를 장려하면서도 보통 사람의 근면을 증대시킨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풍부한 생활물자는 노동자의 체력을 증진시키고, 자신의 상태를 개선시켜 안락하고 풍부한 가운데 생을 마칠 수 있을 것이라는 유괘한 희망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체력을 최대한도로 발휘하도록 고무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노동시간과 관련해서도 정신적인 노동이든 육체적인 노동이든 간에 계속해서 며칠간 많은 노동을 하고 난 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쉬고 잎은 욕구가 생기는데, 이 욕구는 폭력 또는 어떤 강력한 필요성에 의해 저지되지 않는 한 거의 억제할 수 없다.”고 말하며 적당히 일함으로써 계속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의 건강을 가장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 년 전체로 보면 가장 많은 양의 일을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그는 지금까지도 많은 기업에서 활용되고 있는 성과급제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의견을 표명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편견과 달리 스미스는 포디즘 체제 하의 노동자를 보며 가장 흐뭇한 미소를 지었을지도 모릅니다.

 스미스가 거대 재벌을 비롯한 특정인들의 자유가 극대화되고 정부는 이를 정책적으로 뒷받침하며,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으로 고용불안과 저임금의 덫에 빠져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면 뭐라고 했을까요? 스미스가 은행업에 대한 규제를 옹호했던 문장으로 이에 대한 답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회 전체의 안전을 위협하는 몇몇 개인의 자연적 자유의 행사는, 가장 자유로운 정부이든 가장 전제적인 정부이든, 모든 정부의 법률에 의해 제한되고 있으며 또 제한되어야만 한다.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방화벽을 쌓게 하는 법률은 자연적 자유의 침해지만, 여기에서 제안하는 은행업의 규제와 정확히 동일한 종류의 침해이다.”

 

애덤스미스를 비판하다 - 자기조정시장의 몰락

  스미스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과는 사뭇 다른 아이디어들을 그의 저서에서 적잖이 제시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그의 아이디어의 핵심은 자기조정시장입니다. 자기조정시장의 아이디어에 따르면 진자의 운동이 결국은 가운데서 멈추는 것처럼 시장은 누가 애써 손대지 않아도, 아니 손대지 않을 때 스스로 최적의 지점을 찾아 그 지점에서 적절한 생산과 소비와 분배를 이루어내며 이 기본원리야말로 경제와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일반법칙입니다. 실제로 스미스는 비단 국내경제나 무역 뿐 아니라 종교나 교육과 같은 경제외적 분야에 대한 논의에서도 자기조정의 법칙이 최선임을 국부론에서 이야기합니다. 사실 이처럼 하나의 일반법칙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18세기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상의 특징적인 부분이기도 합니다. 자연과 사회와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보편법칙이 있고, 그 법칙의 구동으로 모든 것이 움직이며, 인간의 이성은 그 법칙을 간파할 수 있기 때문에 자연과 사회를 모두 지배할 수 있다는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무모할 만큼 자신감 넘치는 생각은 비단 스미스 뿐 아니라 당시의 많은 사상가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습니다. (스미스의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마르크스마저 자본주의의 도래와 붕괴를 역사적 필연으로 설명했습니다. 마치 물리학의 법칙과 같이 사회역사의 법칙을 바라본 것이죠.) 단지 스미스의 경우 자기조정메커니즘을 그 법칙으로 삼은 것 뿐이고 수많은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학자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사실 고전적 자유주의 이후에도 주류 경제학은 여기에 근거하여 펼쳐집니다. 이런 법칙을 적용시키려다 보니 환경을 단순화시켜야 하고, 그러다 보니 완전경쟁시장과 같은 현실에서 절대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스미스의 자기조정시장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를 몰락으로 이끌어갔죠. 스미스의 사후에 펼쳐진 독점자본주의화에서 벌어진 처참한 현실과 대공황,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스미스의 자기조정시장이데올로기가 도전 받았음을 물론이고 (계몽주의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인간의 이성자체가 의심받게 됩니다. 자기조정시장의 몰락은 사회주의와 파시즘을 등장시켰고, 어떤 나라들은 계획경제를, 그리고 좀 더 스미스에 대해 친화적이었던 나라들도 국가에 의한 시장의 제어에 근거한 복지국가를 선택합니다.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의 최전성기는, 우리가 잘 알 듯 자기조정시장메커니즘에 대한 제어와 (스미스가 그토록 부정적으로 논했던) 정부의 개입을 근간으로 하는 복지국가체제에서 펼쳐졌습니다. 그 복지국가체제가 한계에 봉착했을 때 고전적 자유주의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할 신자유주의가 등장했지만, 그 귀결은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1%를 위한 세계일 따름입니다.

 물론 이런 변명도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과거 고전적 자유주의의 실패, 그리고 현재 신자유주의의 실패는 그 아이디어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아이디어가 제대로 현실에서 적용된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주장 말입니다. 실제로 현재 일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현실에 목도한 신자유주의체제의 실패를 놓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지요. ‘우리는 정부의 간섭 없는 시장을 이야기했고, 많은 (, 미를 중심으로 한) 많은 국가에서 정부가 이를 실천하겠다고 했지만 완전히 간섭 없는 시장을 실천하지 못했다. 따라서 현실의 실패는 신자유주의의 실패가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제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한 국가의 실패일 뿐이다.’라는 식으로 말이죠. 어찌 들어보면 동구권이 몰락했을 때 이것은 사회주의의 실패가 아니라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좌익 파시즘의 실패일 뿐이다.’라고 주장했던 사회주의자들과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 때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론은 현실을 통해 검증되며, 따라서 현실에서 실패한 이론은 (원인이 무엇이든) 실패한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 말을 지금의 신자유주의에 그대로 돌려주고 싶습니다.

 사실 자기조정메커니즘에 의한 시장이라는 발상은 미시적으로, 즉 부분적으로는 가동할 지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이상태(理想態)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70년대 이후 좌우를 막론하고(영국과 미국의 좌파라 할 수 있는 노동당과 민주당 정부는 신자유주의의 대세를 고스란히 받아들였습니다.)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도 현실에서 일부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자기조정시장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자기조정시장의 이와 같은 본질적 한계는 일찍이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사상가 칼 폴라니에 의해 날카롭게 간파된 바 있습니다. 그는 인간, 자연, 화폐라는 절대로 상품일 수 없는 요소들을 상품화하는 것이 자기조정시장의 기본 전제이며, 이와 같은 시도는 그에 저항하는 사회의 이중운동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도저히 실현될 수 없는 적나라한 유토피아라고 설파한 바 있습니다.

 스미스의 사상의 출발점이 되는 전제는 인간에 대한 고찰에서 출발합니다. 그는 인간이 천성적으로교환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으며, 동시에 인간의 가장 중심적인 행동동기로 이기성(혹은, 순화해서 말하자면 합리성)을 제시했습니다. (물론 스미스의 인간관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습니다. 이기성 말고도 인간에게는 Sympathy, 즉 동감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경제활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행동동기는 Self-interest입니다. 인간 본성으로서의 동감(Sympathy)에 대해서는 그의 또 다른 저서 도덕감정론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귀결되는 인간본성의 이 두 전제는 그가 고고학과 인류학의 도움을 받아 인간성의 역사적 측면을 고찰한 결과로 나온 것이 아니고, 이미 형성된 시장을 바라보며 이럴 것이다.’라고 주장한 것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럴싸해 보이지만,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앞서 언급한 폴라니가 상세히 밝히고 있는 것처럼) 고고학과 문화인류학의 연구성과는 과거의 인간에게 교환 성향이나 지배적 행동동기로서의 이기성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스미스의 자기조정시장은 그 논의가 출발한 가장 근본 전제에서부터 의심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스미스의 아이디어를 몽땅 부정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시장에 수요-공급을 통한 가격결정이라는 자기조정 메커니즘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은 굉장히 날카로운 고찰이며, 이기적 행동동기가 공익적 결과를 낳는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지요. 하지만 이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자기조정 메커니즘이나 이기적 행동동기만큼 중요한 다른 것들이 인간에게는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나가며. 누군가 논어의 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왕조국가로 돌아가자고 한다면

  제 나름의 시각으로 스미스를 이해해보기도 하고, 그가 어떻게 오해되고 있는 지를 살펴보기도 하고, 그의 사상이 갖는 근본적인 한계라 할 수 있는 부분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이 긴 서평을 마치며 서두에서 생뚱 맞게 언급했던 논어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논어를 연구하다가 공자의 사상은 참으로 위대하고 깊이가 있으니 진정으로 우리 현실에 적용할 만하다. 그러니 우선 민주주의를 폐기하고 왕조국가로 돌아가자.’고 한다면 누구라도 뭐 이런 미친 사람이 있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공자의 사상이 위대하지 않고 깊이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우리 시대에 맞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어떤 위대한 사상이라도 그 사상이 펼쳐진 시대의 사회적, 역사적 환경을 고려하여 해석하고, 거기서 얻은 교훈을 현재에 적용할 때는 당시와 현재의 차이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스미스의 사상은 국왕이 금은의 형태로 국부를 독점하려 들었던 절대왕정의 이데올로기인 중상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기획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아이디어가 가진 의미와 교훈도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여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스미스의 사상이 고전적 자유주의니까 우파고 보수다라고 간단히 이야기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는 오히려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대항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그 고전적 자유주의가 초래한 세상이 얼마나 파괴적이고 비참한 모습을 보여줬었는지를 19~20세기의 역사를 거치며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에 대한 수정 작용으로 나타났던 사회의 모습이 복지국가 체제 하의 사회였으며, 그 때가 자본주의의 황금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체제가 한계에 봉착했을 때 그 반동으로 나타난 체제는 보다 발전된 형태의 무엇이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목격한 것은 고전적 자유주의 시즌2’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 결과는 아시다시피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와 1%를 위한 사회입니다.

 사실 스미스의 사상은 서구사회보다는 한국사회에서 훨씬 의미 깊을 지도 모릅니다. 한국사회의 재벌, 관료집단은 스미스가 그토록 비판했던 중상주의에 가까운 정책을 잘도 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스미스의 기획을 현 시대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공자의 아이디어를 적용하고자 왕조시대로 돌아가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스미스의 아이디어를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이해하고, 그 교훈을 현재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이 위대한 사상가의 업적을 제대로 기리는 일일 것입니다

    1%를 위한 자본주의에 저항한 미국민들의 시위는 전 세계인의 공감과 지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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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것이 살아남는 경제의 숨겨진 법칙
국내도서>경제경영
저자 : 정태인
출판 : 상상너머 2011.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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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의 가장 중요한 독서목표를 '고전읽기'로 정하면서 나의 독서 전략(?)은 고전과 좀 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트렌디한 책을 동시에 읽는 것이다. 물론 3월부터 다시 학교를 다닐 예정인고로 개강하면 여러가지가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다음달 말까지는 그렇다. 이렇게 방향을 잡은 이유는 과거에 (많지는 않아도) 고전을 좀 읽어보려고 시도한 바, 고전만 읽다가는 자칫 독서 자체가 재미없어질 수도 있고 (마크트웨인이 그랬지 않는가, 고전이란 누구든지 읽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지만, 실은 아무도 읽기 싫은 책이라고) 고전읽기에 걸리는 시간을 고려할 때 최근에 나온 책을 영 읽기 힘들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고전인 '국부론'의 짝으로 뭐가 좋을까를 고민하다가 내가 자주 참고하는 대한민국 최고의(주관적으로) 씽크탱크 중 하나인 '새로운 사회를 위한 연구원'의 원장인 정태인씨의 이 책을 골랐다. 많이들 아는 것처럼 '이기적 인간'에게 생명력을 부여한 국부론의 짝으로 '이기적 인간'에 대한 부정과 극복을 이야기한 이 책만큼 잘 어울리는 것이 어디있겠는가!

  그래서 잡았는데, 안타깝게도 국부론 상권도 다 읽기 전에 끝내버렸다. 일단 책이 얇고 내용이 (결코 평이하기 어려운 논의임에도) 매우 평이하기 때문이다. 화장실에서 일보면서만 읽어도 며칠이면 독파 가능하달까. (내가 변비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마저 가벼운 것은 아니다.

  책의 내용을 조금 스포일러해보면 이렇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경제학, 혹은 조금 폭을 넓혀 현재의 주류경제학은, 그리고 그 경제학이 지배하는 현재의 주류 세계는 '이기적 인간' 즉,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상정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의 행동경제학의 성과를 살펴보면 인간은 이기적이지만은 않다. 인간에게는 이타성도 있고 경쟁이 아닌 협력을 하고자 하는 성향도 있다. 따라서 인간은 '이기적'이라기보다는 '상호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맞다. 바로 이 지점, 즉 인간을 보는 관점의 차이에 시장의 실패를 극복하고, 사회적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단초가 있으며, 실천적으로는 '국가복지'와 '사회적 경제'가 그 방법이 될 수 있다.

  사실 이 책은 가볍게 읽을 수 있다고 했지만 행동경제학, 게임이론, 사회적경제 등 쉽지 않은 내용들을 조합해서 글을 이끌어가고 있다. 물론 각 분야에 대한 초보적인 이해만 있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다루어져 있으며, 설사 없어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하도록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다. 사실 합리적기대가설 혹은 효율적시장가설에 상당부분 기대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시장에 맡겨!' 방법은 2008년 금융위기를 계기로 이미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신자유주의 이후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세계가 아닐까. 이 책은 바로 그 대안세계에 대한 아주 기초적인 안내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충분한 답을 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고민해야 할 그 지점을 건드린다는 면에서는 일독의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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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가치 / 박영균 저 / 책세상

Posted at 2012. 1. 10. 10:27// Posted in 감상
노동가치
국내도서>사회과학
저자 : 박영균
출판 : 책세상 2009.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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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세상의 Vita Activa 시리즈는 사회과학의 여러 중요한 개념들을 역사적으로 살펴보고 그 개념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상과 이론을 살펴볼 수 있는, 일종의 입문적 참고서적으로 상당히 유용하다. 나는 이 시리즈를 재작년에 18권 정도 사놓고 현재까지 2/3정도 봤는데, (본격적으로 읽는) 책과 책 사이에, 자투리 시간을 활용할 때, 혹은 특정한 개념에 대한 참조가 필요할 때 한 권씩 꺼내어 보곤 했다. 그 말은 곧, 대체로 이 시리즈의 책들이 쉽게 쓰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덕감정론을 다 읽고 국부론의 배송을 기다리며 그 사이에 가벼운 마음으로 잡은 것이 이 책 '노동가치'였다. 이전의 시리즈처럼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친절한 안내서를 기대하며. 결론적으로 나의 기대는 완전히 배신당했다.

  마르크스 이전 노동가치론의 등장(로크, 스미스, 리카도)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런데 예상대로 노동가치론의 역사와 배경을, 그리고 각 사상가의 차이를 쉽게 잘 안내해주던 이 책은 마르크스에 이르러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우선 노동가치론에서 사용가치/가치/교환가치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흔히 우리들은 사용가치/교환가치의 이분법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나 마르크스가 언급한 '가치'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나도 그랬다. 나 자본론 안 읽었거덩...) 그런데 이 책은 위의 세 가지가 다르다고 하면서도 그 차이를 정확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특히 가치 - 교환가치가 뭐가 다른지에 대해서는 한참 고민했다. 어쨌는 우여곡절 끝에 교환을 가능하게 해주는 상품의 내재적 가치는 '가치(혹은 상품가치)'이며, 교환가치는 그 현상상태로서 우연적이고 일시적인 성질을 보인다는 면에서 내재적인 가치라고 할 수는 없다는 정도로 정리.

  다음으로 잉여가치론으로 넘어갔다. 잉여가치론은 노동가치론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고 여겼기에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으나 개별자본에서의 가치≠생산가격, 잉여가치 ≠이윤 관계와 총자본에서의 총가치=생산가격, 총이윤=총잉여가치 부분에서 막혀서 또 한참 버벅 버벅. 이 부분은 더 많은 이윤을 획득하기 위한 개별 자본가의 경쟁과 자본의 이동으로 인한 것으로 이해하고 넘어갔는데 아직도(자본론을 읽기 전까지는) 나의 이해가 정확한지에 대한 약간의 의문이 남는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시간이 걸려서라도 이해하고 넘어갔지만, 가치전형논쟁을 다룬 부분에서는 KO당하고 말았다. 내가 알기로 가치-전형 논쟁은 수많은 경제학자가 참여하여 주로 수리경제학의 방법을 통해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가격과 가치의 전형 문제를 논쟁한 사안인데 저자는 이 부분을 (수리는 제시하지도 않고, 제시해도 이해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긴 하지만) 몇 장을 통해 대략적으로 정리한다. 문제는 이 부분이 읽어도 무슨 논쟁을 했다는 것인지 통 이해가 안간다는 점. 차라리 수리를 제시했다면 이해하려고 노력이라도 해보겠지만 이 책에는 제시되지 않았고 일일히 찾아보기에는 시간이 부족하여 그냥 패스. 그렇게 책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총평하자면 마르크스를 중심으로 노동가치론과 관련된 여러가지 내용들을 포괄적으로 다룬 것은 좋았지만, 책의 분량에 비해 너무 많은 내용을 다루다보니 설명히 충분히 친절치 못하여 마르크스에 대해 정통하지 못한 - 전혀 모르거나, 나처럼 얼치기로 주워들은 정도의 지식만 있는 - 사람으로서는 이 책을 100% 이해하고 넘어가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또한 너무 마르크스주의 혹은 네오마르크스주의 혹은 넓게 봐 마르크스의 영향력을 상당히 받은 이들의 관점만을 제시한 부분도 아쉬웠다. 예를 들어 슘페터의 노동가치론 비판이라든가 한계요용학파의 비판과 같은 부분들을 좀 더 책장을 할애해 다루었으면 어땠을까. 저자의 취향에는 맞지 않겠지만, 적어도 이들이 '주류경제학'의 이름으로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에 대한 무시는 반쪽짜리 지식밖에 안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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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감정론 (양장)
국내도서>인문
저자 : 애덤 스미스(Adam Smith) / 박세일,민경국역
출판 : 비봉출판사 2009.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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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덤스미스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은 굳이 그의 책을 읽어보지 않아도 수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는 바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의 야수적인 신자유주의가 보여주고 있는 자본의 횡포, 요즘 좀 더 인기 있는 용어로 이야기하자면 1%의 횡포를 보고도 '시장은 전지전능하니 내비둬!'라고 외치는 사람은 많은 이들의 오해와는 달리 애덤스미스가 아니라는 이야기는 수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알려져 있다는 말이다. (차라리 맨더빌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애덤스미스가 어떻게 안그런지, 왜 안그런지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가지려면 그의 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의 명저 '국부론'을 읽기 전에 '도덕감정론'을 읽어둔다면 분명히 그를 좀 더 내밀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도덕감정론을 잡은 이유였다.

  스미스는 중세의 신분제에 근거한 사회질서가 거의 해체되고 '개인'이 바야흐로 역사의 주체로 나서며, 경제적으로는 장원경제의 해체와 초기적인 자본주의 경제의 등장이 이루어지던 18세기에 살았다. 당시 유럽의 사회과학자들은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 하에서 한편으로는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있던 공동체의 해체와 함께 이기적인 개인들이 어떻게 사회를 구성하며 살 수 있을지를 모색해야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타고난 신분'으로 정당화되지 않는 개개인의 부의 축적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 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17~18세기의 수많은 사상가들 - 토머스 홉스부터 마르크스까지 - 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 나름의 시각으로 답을 해왔으며, 스미스의 두 저서, 도덕감정론과 국부론, 또한 이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도덕감정론이 주로 대답하고 있는 것은 첫번째 질문이다. 인간 행동의 동기는 무엇이며, 미덕(virtue)은 무엇으로부터 기원하며, 인간은 어떻게 미덕과 악덕을 구별하고 인식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스미스는 교회공동체가 없어도 개개인은 이렇게 사회를 구성하며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 것 같다.

  스미스는 인간행동의 근원을 '공감(sympathy)'에서 찾는다. 인간은 타인의 행복과 불행을 상대 입장에 자신을 대입하여 상상함으로써 공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의 행복에 같이 기뻐하고, 상대의 불행에 같이 슬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단지 상상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나의 기쁨이 당사자만큼일 수 없고, 나의 슬픔도 당사자만큼일 수는 없다. 따라서 나(관찰자)와 상대(당사자)의 진정한 공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상대(당사자)가 어느 정도까지 자신의 기쁨과 슬픔을 억제해야 한다. 이와 같은 자기억제가 이루어질 때 나와 상대간의 진정한 공감이 이루어지며, 나는 상대의 행위가 적정하다고 '시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상대(당사자)는 어떻게 하여 자기억제를 하게 되는가? 이 또한 공감에서 기인한다. 상대의 시인을, 나아가서 찬탄을 얻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의 욕망 중 가장 큰 것이라고 스미스는 지적한다. 따라서 행위의 당사자는 자신의 행동을 상대의 시인 혹은 감탄과 찬사를 얻을 수 있는 수준까지 억제하고자 하는 동기를 갖게 된다. 그런데 개개인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어떤 사람의 행위에 방관자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해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당사자는 이 경험을 통해 타인의 시각으로 자기 자신의 행위를 바라보게 되는데, 이를 '공평한 관찰자' 혹은 '내부인간'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개개인은 공평한 관찰자의 시각에서 자신의 행위를 바라보고 그 시각에 맞추어 자신의 기쁨과 슬픔을 억제하게 됨으로써 타인의 시인이나 찬탄을 획득하려고 노력한다. 결국 이와 같은 당사자의 공평한 관찰자 시각과 관찰자의 공감이 공명함으로써 각 개인은 절제와 시인을 하게 되며 이는 사회조화의 근원이 된다.

  스미스를 이처럼 - 우리가 스미스하면 흔히 떠올리는 인간의 이기성이 아니라 - 공감(sympathy)이라는 인간의 천성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스미스는 어떻게 된 것일까? 사실 나는 스미스의 '공감'에 관한 논의가 '이기적 개인'의 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우선 스미스는 인간이 '공평한 관찰자'의 시각을 따르는 이유에 대해 '타인의 시인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이야기한다. 이는 이타적 감정과는 다르다. 인간은 타인의 시인을 얻기 위해 자기억제를 하게 되지만 이 시인을 얻고자하는 마음 자체는 이타적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미스는 이타성, 즉 '자혜(benevolence)의 덕'에 대해 권장받고 칭찬할 수 있는 일이지만 강제될 수는 없는 것이며, 모두가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 즉, 예외적으로 훌륭한 사람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결국 스미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행동동기는 타인, 혹은 사회에 대한 관심사가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사에서 출발하게 되며, 이것이 공감과 시인의 원리에 따라 조화를 이룸으로써 사회가 작동된다는 것이다. 이를 '개인의 이기적 행위가 공공의 이익이다.'라고 줄인다면 스미스가 화를 내겠지만(실제로 그는 '꿀벌들의 우화'의 저자인 멘더빌 박사의 주장을 이렇게 줄인 후 비판하고 있다.) 비슷한 해석이 가능하게 만드는 요소는 있는 샘이다.

  그렇지만 스미스는 여전히 이기적 행위의 억제를 '정의의 덕'으로 표현하며, 이를 무엇보다 중요한 사회의 원칙으로서 강제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제한적이긴 하지만 인간의 이기성이 무한하게 발휘되어도 좋은 것으로 보지는 않고 있다는 말이다. 또한 그는 '자혜의 덕'에 대해서도 법규를 통해 어느 정도까지 시민들 상호간에 선행을 명령할 수 있다고 단서를 달고 있기도 하다. 결국 스미스의 사상체계를 '인간의 이기성에 의한 사회원리'라고 축약해버리는 것은 여러모로 온당치 못한 구석이 있다고 해야겠다.

  스미스의 도덕철학은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나의 시각에서 보기에는 여러가지 못마땅한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선은 '공감'이라는 단일 원리로 인간과 사회를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있다. 사실 이는 자연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인간이 자연과 사회를 모두 이해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무장한 계몽주의 시대 사상의 공통적인 특성인데, 우리는 이미 그것이 자연과학에서도 사회과학에서도 무리한 시도였음을 알고 있다. 또한 스미스의 철학은 - 우리가 가진 편견만큼은 아니지만 - 여전히 '배분적 정의'의 문제는 법적 강제가 아닌 개인적 덕의 몫으로 남겨둠으로써(이 부분은 도덕감정론에는 일부만 드러나 있을 뿐이지만, 그이 '법학강의'에는 보다 직접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사회적 원인에 의한 빈부격차의 문제에 대한 시각을 결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 스미스를 탓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가 속한 시대의 역사적 한계를 고려할 때 스미스의 사상은 새로운 시대를 적정하게, 그러면서도 충분히 조심스럽게 설명하고 제시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본격화되고 빈곤과 불평등의 문제가 시대적 과제가 된 것은 19세기라고 볼 수 있으며, 이런 부분에 대한 그의 관점이 제한적인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계몽주의적 한계는 양차대전을 겪고 나서야 제대로 반성이 이루어질 내용이니 이는 더더욱 그렇다.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야수적 자본주의의 시대'에 대한 책임을 스미스에게 물을 수는 없다. 잘못이 있다면 스미스를 (의도적으로) 오독하고, 스미스 이후 200년간의 역사적 경험을 무시한채 19세기적 자유시장경제를 떠받들고 있는 지금의 사상가들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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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의 배신
국내도서>경제경영
저자 : 라즈 파텔(Raj Patel) / 제현주역
출판 : 북돋움 2011.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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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에 읽은 첫 책. 

나처럼 책 읽는 속도보다 책 사는 속도가 빠른 사람은 간혹 사놓고 안읽었던 책을 나중에 보며 이 책을 왜 샀는지 기억이 안나는 경우가 있다. 이 책도 몇 주 전에 사놓고 잊고 있다가 며칠 전에 잡았다. 잡을 땐 그저 그런, 최근 신자유주의의 위기를 설파하고 복지국가로의 회귀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책인가... 하면서 봤는데(그런 책들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워낙 흔해서) 읽다 보니 훨씬 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는 책.

이중운동, 사회적 경제, 생태주의와 같은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풍부한 사례와 함께 제시하고 있다.

풍부한 사례가 그 장점이라면 다소 두서가 없는 것과 결국 겨울에 눈내리는 이야기가 결론이라는 것이 그 단점.

'복지국가로의 회귀'를 말하는 책들은 이미 그 체제로 운용되고 있는 모범(북유럽 같은)적인 국가가 있기 때문에 짜임새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장점이 있는 반면, 50~60년대 복지국가의 전성기와 지금의 전지구적 환경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부분을 놓치고 있다는 - 즉, 상상력의 결핍이라는 - 한계를 보여주는데, 이 책처럼 보다 근본적인 대안을 이야기하려는 책은 정확히 반대의 장단점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현재의 체제 - 즉 단지 신자유주의가 아닌 자본주의 자체 - 를 넘어설 수 있는 근본적인 대안을 나름의 상상력과 함께 검토해본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전세계는 커녕 하나의 국가 단위에서 추진할 수 있는 수준의 체계적인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점을 보여준다. 

물론 상상력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실천이고, 그 실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을 고려할 때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대안의 조야함을 탓할 것이 아니라 당장 무엇이라도 실천해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묘하게 요즘 읽는 책마다 폴라니가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다.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이분법으로 인해 상당부분 무시당했던 이 위대한 사상가의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일까? 혹은 그냥 우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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