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관해서는,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단적인 이론을 받아들여야 한다. 즉 인간의 동기는 '물질적'인 것과 '관념적'인 것으로 나뉘는데, 일상생활이 조직되는 동기는 '물질적' 동기라는 것이다. 공리주의적 자유주의나 통속적 마르크스주의 모두 이러한 관점을 선호했다. 사회에 관해서는, 인간의 경우와 비슷한 다음과 같은 학설이 나왔다. 사회 제도는 경제 체제에 따라 '결정'된다. 이 견해는 자유주의자들보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훨씬 더 인기가 있다. 물론, 시장 경제 아래서는 두 가지 주장이 다 맞다. 하지만 오직 시장경제 체제에서만 그러하다. 이러한 관점을 과거에 적용하게 되면 시대착오적 입장만 나오게 될 뿐이고 미래에 적용하게 되면 편견만 나오게 된다."
  - 칼 폴라니,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p25

"아리스토텔레스가 옳았다. 인간은 경제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이다. 물질적 소유를 획득하는 과정에서도 인간이 노리는 것은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사회적 선의, 사회적 지위, 사회적 자산 등이다. 인간은 그러한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자신의 소유물의 가치를 평가한다. 인간을 움직이는 동기는 보통 우리가 사회적 인정을 얻기 위한 노력과 연결 짓는 혼합적 성격을 띤다. 인간의 생산에 들이는 수고는 사회적 인정을 얻으려는 노력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인간의 경제는 일반적으로 사회적 관계 속에 묻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사회의 모습이 정반대로 사회가 경제 체제에 묻어 들어간 형태로 변한 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사태이다."
  - 칼 폴라니,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p31

"경제 결정론을 모든 인간 사회에 적용하려는 노력은 망상이나 다름없다. 사회 인류학의 연구에 의해, 사용하는 생산 도구가 사실상 동일하다 해도 그 생산 도구들에 조응하는 제도는 다수라는 것이 밝혀졌다. 시장이라는 제도가 인간적 유대를 멧돌에 갈아 셀렌산으로 부식시킨 듯한 특징 없는 획일성으로 몰아넣기 전에는 제도를 낳는 인간의 창조성이 결코 멈춘 적 없었다."
  - 칼 폴라니,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p41

"자유 방임 철학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이미 지나가버린 산업 문명의 시대에 끝났다. 그것은 인간을 가난하게 만든 대신 사회를 부유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는 생활의 충만함을 인간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비록 기술적으로는 효율성이 덜한 사회가 되더라도 말이다."
  - 칼 폴라니,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p43

"노동 시장, 토지 시장, 화폐 시장이 시장 경제에 '필수적'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인간과 자연이라는 사회의 실체와 경제 조직이 보호받지 못한 채 그 '악마의 멧돌'에 노출된다면, 어떤 사회도 무지막지한 상품 허구의 경제 체제가 몰고 올 결과를 한순간도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 칼 폴라니,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p63

"하지만 산업 생산이 복잡해질수록 공급을 보장해야 할 산업 요소들의 종류도 늘어났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요소는 노동, 토지, 화폐였다. 상업 사회에서 이 세 요소의 공급을 조직하는 방법은 단 하나, 즉 구매를 통해 얻는 것 뿐이다. 따라서 이 세 가지는 시장에서의 판매를 위해 조직되어야만 했다. 즉, 상품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시장 메커니즘을 노동, 토지, 화폐라는 산업 요소들에까지 확장하게 된 것은 상업 사회에 공장제를 들여오면서 나타난 불가피한 현상이다."
  - 칼 폴라니,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p65

"19세기 사회사는 이중적 운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진짜 상품에 대해서는 시장적인 조직 방식을 확장해나가는 과정이, 허구적 상품들에 대해서는 그것을 제한하는 과정이 나란히 나타났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시장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시장에 나오는 재화의 양은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일련의 법령과 정책의 연결망이 노동, 토지, 화폐에 관한 시장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만든 강력한 제도들로 통합되었다."
  - 칼 폴라니,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p67

"어떤 집단을 성공으로 이끄는 것은 그들 자신의 이해관계가 지닌 힘 때문이 아니다. 사실 성공의 비밀은 그 집단이 얼마나 다른 집단들의 이익을 - 자신들의 이익에 포괄시킴으로써 - 대표해내느냐에 달려 있다. 실제로 어떤 집단이 그러한 포괄을 이루고자 한다면 자신들이 지도하기를 열망하는 더 폭넓은 집단의 이익에 자신들의 이익을 갖다 맞춰야 할 것이다. 사회의 대다수는 양대 계급 간의 싸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아무런 '이해'도 갖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이는 더욱 쉬워진다. 사회의 성격이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에 소규모 중산 계급이나 농민들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가장 결정적으로 관심을 갖는 사실으 사회가 그 둘 중의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만약 노동 계급이 사회주의를 향한 길에 앞장서고 현실적으로 다른 계급들을 지도하기 위해 자신의 이익을 조화시켜 나간다면 그들은 노동 계급을 따를 것이다."
  - 칼 폴라니,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p80

"중앙 계획화된 경제 방식의 가장 뚜렷한 결함은, 노동 계급 운동의 구체적 현실과 그 운동이 체현하고 있는 역사적 임무를 조화시키지 못한다는 점과 관계 있다. 관치 경제 이론가들은 노동 조합, 산업 결사체, 협동 조합, 사회주의적 지방 자치 단체들이 사회주의 경제에 기여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간과하고 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장치들은 경제에 대한 '내적 조망'의 기관들로서 사회주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 칼 폴라니,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p110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무엇보다도 먼저 대외 정책의 문제이다. 금본위제의 실패에서 보았든이, 사적 기업이라는 경제 운영 방법이 파산했던 곳도 바로 이 대외 정책의 영역이며, 사적 기업이라는 방법에 집착한 나머지 현실적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는 곳도 대회 정책의 영역이다.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단순한 하나의 신조에 바탕을 두고 있다. 대외적인 구매와 판매, 대부와 차입 그리고 외환 거래가 벌어지는 단위는 개인들로서, 마치 그들 모두가 같은 나라의 국민인 것처럼 상정하는 것이다. '대외 경제'는 이로써 사적 개인들 간의 문제가 되고 시장 메커니즘음 만국의 대외 경제를 저절로 '균형에 이르게' 해주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힘을 갖는 것으로 신뢰받는다. 이러한 유토피아적인 관념은 현실에서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으며, 실제로 무너지고 말았다."
  - 칼 폴라니,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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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76년 출간된 국부론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표지. 이 해는 미국이 독립한 해이기도 하다.


들어가며.
時制와 고전읽기

   '공자' '논어'를 이야기할 때 보통 우리가 떠올리는 이미지는 '고리타분함', '보수적임' 같은 것입니다. 이는 유교문화권인 우리 사회의 특성상 제사, 예의범절, ()와 같은 전통적 가치가 자유, 민주주의, 인권과 같은 서구적 가치와 만났을 때 대개 우리는 전자에서 보수적인 느낌을, 그리고 후자에서 진보적인 느낌을 갖기 때문일 것입니다. 몇 해 전 유행했던 '공자를 죽여야 나라가 산다.'는 책 제목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사실 공자의 사상이 담고 있는 신분질서에 대한 옹호라든가 지배계층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성격은 이런 느낌 자체가 부당하지만은 않다는 생각도 들게 합니다. 하지만 공자에 대해서는 정 반대의 주장도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마찬가지로 몇 해 전 출간되었던 '논어는 진보다' 같은 책의 저자는 공자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과 공자의 말이 그 시대 속에서 가졌던 의미들을 논하면서 우리의 편견과는 달리 공자는 당대의 관점에서 볼 때 보수적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같은 사상가인데 왜 이렇게 다른 해석이 존재할까라는 질문을 해 볼만 한 부분입니다.

   공자가 보수인지 진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고전을 읽을 때 그 고전이 쓰여진 시대를 감안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신영복 선생은 그의 책 '강의'에서 논어에 대해 이야기하며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時制)’라고 말합니다. 잠깐 옮겨보자면 이렇습니다.

   "... (전략)... 우리가 이 지점에서 합의해야 하는 것은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時制)라는 사실입니다. 공자의 사상이 서주(西周)시대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오늘의 시점에서 규정하여 비민주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담론을 현대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지요. 공자의 인간 이해를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의 인권 사상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후략)…"

   이와 같은 '시제'의 중요성은 비단 고전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문제뿐 아니라, 고전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을 현실에 적용하는 데에 있어서는 더욱 중요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가라도 그가 발을 딛고 선 시대적, 사회적 상황에서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내기 마련입니다. 비록 그가 그 당시에는 나름대로 미래를 예측하고 그 미래까지 감안한 해결책을 내놓았을지라도 그가 인간인 한 그 예측은 불완전하게 마련이고, 따라서 현재의 시점에서 그 해결책을 활용하고자 할 때는 매우 주의 깊은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일견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의외로 이 당연한 이야기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혹은 알지만 의도적으로 묵살하는 논의들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고전을 읽는 데는 '시제'가 중요하다는 점을 기억하고 '국부론'에 대한 저의 서평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애덤스미스를 이해하다 - 이기적 인간과 자기조정시장

   우리가 '애덤스미스', '국부론'하면 떠올리는 개념들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 핀 공장, 이기적 인간, 시장경제와 같은 것들이지요. 특히 최근에는 '신자유주의'와 연관된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도 많을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스미스의 이미지들 중에는 지하에 있는 그가 들으면 다소간 억울해 할만한 것도 있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부당하다고 할만한 것은 없는 듯합니다. 신자유주의를 포함하여 이 모든 이야기들을 시작한 고전적 자유주의는 분명히 스미스의 국부론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국부론(원제 :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은 원래 절대왕정 시대의 정치경제적 지배이데올로기라 할 중상주의를 비판하고 다가오는 부르주아의 시대의 정치경제학을 제시한 책입니다. 중상주의란 국가의 부의 근원을 '금은(金銀, 당시로서는 화폐)'으로 생각하여 보호무역을 통한 무역수지 흑자의 극대화와 국내적 경제활동의 제한을 통해 '좀 더 많은 금은을 국가(당시로서는 곧 국왕)의 금고에 확보하는 것'이 부국강병의 길이라고 봤던 17~18세기의 정치경제정책입니다. 이에 대해 애덤스미스는 국부론을 통해 국가의 부의 근원은 '금은'이 아닌 '재화(그리고 재화를 생산할 수 있는 노동량)'에 있으며, 생산은 분업을 통해 촉진되고, 촉진된 재화의 소비를 위해서는 시장을 확대해야 하므로 자유무역과 국내적 경제활동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스미스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봅시다. 사실 국왕도, 교회도, 영주도 간섭할 필요가 없는 '자유시장'이라는 발상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좀 아연한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때문에 저 이기적이고 탐욕스런 개인들에게, 더구나 교회의 약화로 인해 개인의 욕망에 대한 절제조차 무너진 시대에, 통제되지 않는 자유를 준다면 혼돈이 초래되지 않겠는가?’ 라는 질문을 예측했는지 스미스는 '자기조정시장'의 논리를 거의 대부분의 챕터에서 각기 다른 예를 통해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개개인은 (대부분의 경우 이 개인은 자본가입니다.) 자신의 사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신이 가장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곳에 투자합니다. 그 자본의 투자를 통해 고용이 창출되고 재화가 생산되고, 소비되어 국부가 증진됩니다. 앞에 이야기한 것처럼 국부는 그 사회가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는 재화의 양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니까요. (통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특정한 분야에 투자가 몰린다면 그 분야의 이윤이 감소하고 이에 따라 자본은 좀 더 이윤이 좋은 다른 분야(아마도 투자가 부족했던 분야)로 이동하게 되어 전자는 경쟁의 약화 및 생산량의 감소로 이윤이 다시 증대되며, 후자는 경쟁의 강화 및 생산량의 증대로 이윤이 감소하여 양 분야의 이윤은 적정수준을 되찾게 됩니다. 마치 진자의 운동과 같이 작동하는 '자기조정시장'의 매커니즘은 자유롭게 풀어놓았을 때 가장 잘 작동하여 사회의 생산량을 극대화시키고 그에 맞는 소비시장을 창출합니다. 여기에 국가나 다른 주체가 인위적인 수단으로 개입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자연적인' 수준보다 높은(혹은 낮은) 이윤을 창출하는 분야를 만들어내고 이는 자기조정시스템을 왜곡하고 국부 - , 그 사회의 재화의 양 또는 그 사회가 고용할 수 있는 노동의 총량 - 를 감소시키게 된다는 것이 그의 논리입니다.

   (자본가들 간의 경쟁에 좀 더 초점을 맞추긴 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수요/공급의 법칙'의 원조라 할만한 스미스의 '자기조정시장의 원리'는 중상주의가 추구했던 국가의 간섭을 배격하고 경제적 자유주의를 주장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근거가 됩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푸주간 주인과 양조장 주인, 그리고 빵집 주인'의 예시가 말해주는 것처럼 이 자유경쟁시장에서 사람들 - 주로, 자본가들 - 의 핵심적인 행동동기는 '자신의 이익에 대한 고려'라고 국부론은 이야기하고 있기에 우리가 이념형으로 기억하고 있는 '애덤스미스' '국부론'의 이미지는 대체로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애덤스미스를 오해하다 - 자본가와 노동자, 독점과 정치권력

   하지만 스미스의 '국부론'은 무려 1,200페이지에 이르는 대작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들 외에도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기적 인간, 보이지 않는 손, 자유시장, 정부의 실패가 국부론의 전부인 것 같지만 실은 이는 '(누군가의 필요에 따라) 국부론에서 부각된 전부'일 따름입니다. 물론 저도 국부론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를 둘만 꼽으라면 '국부의 근원으로서의 재화/노동력/생산성' '자기조정시장 매커니즘'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하지만 스미스의 사상체계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많은 다른 중요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 중 애덤스미스의 후예를 자처하는 이들이 의도적으로 누락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드는 부분들만 언급해 보겠습니다.

   우선 자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스미스가 자본가의 사적 이익 추구가 자본축적에 이르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국부를 증진시키게 된다는 이야기를 강조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스미스는 이와 같은 원리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자본가의 이해가 일정 정도 제한되어야 함을 분명히 합니다. 스미스는 사회를 지주, 노동자, 자본가 계급으로 나누었을 때 자본가 계급만이 자신의 이해와 사회의 이해를 분명히 인식할 수 있지만, 동시에 자본가 계급의 이해만이 사회 일반의 이익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는 자본자는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여 '시장을 확대하고 경쟁을 제한하려는' 경향을 가진다고 말하고, "시장을 확대하는 것은 종종 공공의 이익에 합당할 수 있지만, 경쟁을 제한하는 것은 항상 공공의 이익과 충돌한다."고 언급합니다. 다시 말해 스미스가 생각한 '자기조정시장'이 성립하려면 '자본가 사이의 경쟁'이 그 전제가 되어야 하는데, 자본가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경쟁을 일정하게 제한하려고 하고, 그렇기 때문에 자본가의 이와 같은 시도를 통제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독점적, 혹은 (카르텔을 형성하기 쉬운) 과점적 기업에 의한 시장의 장악은 자유시장 시스템에 정부의 개입보다 더 큰 위협이 됩니다. 결국 자본가 계급의 이해를 반영하는 정책은 경제적 자유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서민경제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젠 골목상권까지 장악해가는 한국의 독점적 재벌집단과, 그 재벌집단의 이해를 대변하기 위해 환율과 주가를 조작하기에 급급한 한국 정부(이렇게 놓고 보니, 한국의 경제정책은 참으로 중상주의적이네요.)의 눈앞에 들이밀고 싶은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과 같이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체제는 19세기를 거쳐 독점자본주의로 이행하며 엄청나게 많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노동빈민입니다. 당시 많은 자본가들은 노동계급이 '천성적으로 게으르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이들이 노동규율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생존 수준의 임금을 지급함으로써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이 주장의 뒤에는 노동자의 임금을 낮게 유지함으로써 자본가의 이윤을 높이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야 19세기 이야기지 지금 누가 그런 생각을 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현실은 꼭 그렇지 만도 않습니다. 당장 최근 정치권의 이슈가 되고 있는 복지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라에서 일 안 해도 돈을 주면 누가 일을 해?’라는 생각을 합니다. 청년실업의 심각함을 이야기할 때 늘 따라 나오는 이야기가 청년실업 이야기를 하지만 중소기업은 사람이 모자라다고 하니 이는 청년들이 일하기 싫어하는 탓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은 발상의 근간에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아야 한다.’ 19세기 자본가들의 논리와 일맥상통하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에 대해 스미스는 뭐라고 이야기했을까요? 그는 노동의 후한 보수는 인구 증가를 장려하면서도 보통 사람의 근면을 증대시킨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풍부한 생활물자는 노동자의 체력을 증진시키고, 자신의 상태를 개선시켜 안락하고 풍부한 가운데 생을 마칠 수 있을 것이라는 유괘한 희망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체력을 최대한도로 발휘하도록 고무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노동시간과 관련해서도 정신적인 노동이든 육체적인 노동이든 간에 계속해서 며칠간 많은 노동을 하고 난 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쉬고 잎은 욕구가 생기는데, 이 욕구는 폭력 또는 어떤 강력한 필요성에 의해 저지되지 않는 한 거의 억제할 수 없다.”고 말하며 적당히 일함으로써 계속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의 건강을 가장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 년 전체로 보면 가장 많은 양의 일을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그는 지금까지도 많은 기업에서 활용되고 있는 성과급제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의견을 표명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편견과 달리 스미스는 포디즘 체제 하의 노동자를 보며 가장 흐뭇한 미소를 지었을지도 모릅니다.

 스미스가 거대 재벌을 비롯한 특정인들의 자유가 극대화되고 정부는 이를 정책적으로 뒷받침하며,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으로 고용불안과 저임금의 덫에 빠져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면 뭐라고 했을까요? 스미스가 은행업에 대한 규제를 옹호했던 문장으로 이에 대한 답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회 전체의 안전을 위협하는 몇몇 개인의 자연적 자유의 행사는, 가장 자유로운 정부이든 가장 전제적인 정부이든, 모든 정부의 법률에 의해 제한되고 있으며 또 제한되어야만 한다.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방화벽을 쌓게 하는 법률은 자연적 자유의 침해지만, 여기에서 제안하는 은행업의 규제와 정확히 동일한 종류의 침해이다.”

 

애덤스미스를 비판하다 - 자기조정시장의 몰락

  스미스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과는 사뭇 다른 아이디어들을 그의 저서에서 적잖이 제시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그의 아이디어의 핵심은 자기조정시장입니다. 자기조정시장의 아이디어에 따르면 진자의 운동이 결국은 가운데서 멈추는 것처럼 시장은 누가 애써 손대지 않아도, 아니 손대지 않을 때 스스로 최적의 지점을 찾아 그 지점에서 적절한 생산과 소비와 분배를 이루어내며 이 기본원리야말로 경제와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일반법칙입니다. 실제로 스미스는 비단 국내경제나 무역 뿐 아니라 종교나 교육과 같은 경제외적 분야에 대한 논의에서도 자기조정의 법칙이 최선임을 국부론에서 이야기합니다. 사실 이처럼 하나의 일반법칙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18세기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상의 특징적인 부분이기도 합니다. 자연과 사회와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보편법칙이 있고, 그 법칙의 구동으로 모든 것이 움직이며, 인간의 이성은 그 법칙을 간파할 수 있기 때문에 자연과 사회를 모두 지배할 수 있다는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무모할 만큼 자신감 넘치는 생각은 비단 스미스 뿐 아니라 당시의 많은 사상가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습니다. (스미스의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마르크스마저 자본주의의 도래와 붕괴를 역사적 필연으로 설명했습니다. 마치 물리학의 법칙과 같이 사회역사의 법칙을 바라본 것이죠.) 단지 스미스의 경우 자기조정메커니즘을 그 법칙으로 삼은 것 뿐이고 수많은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학자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사실 고전적 자유주의 이후에도 주류 경제학은 여기에 근거하여 펼쳐집니다. 이런 법칙을 적용시키려다 보니 환경을 단순화시켜야 하고, 그러다 보니 완전경쟁시장과 같은 현실에서 절대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스미스의 자기조정시장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를 몰락으로 이끌어갔죠. 스미스의 사후에 펼쳐진 독점자본주의화에서 벌어진 처참한 현실과 대공황,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스미스의 자기조정시장이데올로기가 도전 받았음을 물론이고 (계몽주의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인간의 이성자체가 의심받게 됩니다. 자기조정시장의 몰락은 사회주의와 파시즘을 등장시켰고, 어떤 나라들은 계획경제를, 그리고 좀 더 스미스에 대해 친화적이었던 나라들도 국가에 의한 시장의 제어에 근거한 복지국가를 선택합니다.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의 최전성기는, 우리가 잘 알 듯 자기조정시장메커니즘에 대한 제어와 (스미스가 그토록 부정적으로 논했던) 정부의 개입을 근간으로 하는 복지국가체제에서 펼쳐졌습니다. 그 복지국가체제가 한계에 봉착했을 때 고전적 자유주의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할 신자유주의가 등장했지만, 그 귀결은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1%를 위한 세계일 따름입니다.

 물론 이런 변명도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과거 고전적 자유주의의 실패, 그리고 현재 신자유주의의 실패는 그 아이디어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아이디어가 제대로 현실에서 적용된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주장 말입니다. 실제로 현재 일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현실에 목도한 신자유주의체제의 실패를 놓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지요. ‘우리는 정부의 간섭 없는 시장을 이야기했고, 많은 (, 미를 중심으로 한) 많은 국가에서 정부가 이를 실천하겠다고 했지만 완전히 간섭 없는 시장을 실천하지 못했다. 따라서 현실의 실패는 신자유주의의 실패가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제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한 국가의 실패일 뿐이다.’라는 식으로 말이죠. 어찌 들어보면 동구권이 몰락했을 때 이것은 사회주의의 실패가 아니라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좌익 파시즘의 실패일 뿐이다.’라고 주장했던 사회주의자들과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 때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론은 현실을 통해 검증되며, 따라서 현실에서 실패한 이론은 (원인이 무엇이든) 실패한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 말을 지금의 신자유주의에 그대로 돌려주고 싶습니다.

 사실 자기조정메커니즘에 의한 시장이라는 발상은 미시적으로, 즉 부분적으로는 가동할 지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이상태(理想態)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70년대 이후 좌우를 막론하고(영국과 미국의 좌파라 할 수 있는 노동당과 민주당 정부는 신자유주의의 대세를 고스란히 받아들였습니다.)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도 현실에서 일부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자기조정시장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자기조정시장의 이와 같은 본질적 한계는 일찍이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사상가 칼 폴라니에 의해 날카롭게 간파된 바 있습니다. 그는 인간, 자연, 화폐라는 절대로 상품일 수 없는 요소들을 상품화하는 것이 자기조정시장의 기본 전제이며, 이와 같은 시도는 그에 저항하는 사회의 이중운동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도저히 실현될 수 없는 적나라한 유토피아라고 설파한 바 있습니다.

 스미스의 사상의 출발점이 되는 전제는 인간에 대한 고찰에서 출발합니다. 그는 인간이 천성적으로교환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으며, 동시에 인간의 가장 중심적인 행동동기로 이기성(혹은, 순화해서 말하자면 합리성)을 제시했습니다. (물론 스미스의 인간관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습니다. 이기성 말고도 인간에게는 Sympathy, 즉 동감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경제활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행동동기는 Self-interest입니다. 인간 본성으로서의 동감(Sympathy)에 대해서는 그의 또 다른 저서 도덕감정론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귀결되는 인간본성의 이 두 전제는 그가 고고학과 인류학의 도움을 받아 인간성의 역사적 측면을 고찰한 결과로 나온 것이 아니고, 이미 형성된 시장을 바라보며 이럴 것이다.’라고 주장한 것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럴싸해 보이지만,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앞서 언급한 폴라니가 상세히 밝히고 있는 것처럼) 고고학과 문화인류학의 연구성과는 과거의 인간에게 교환 성향이나 지배적 행동동기로서의 이기성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스미스의 자기조정시장은 그 논의가 출발한 가장 근본 전제에서부터 의심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스미스의 아이디어를 몽땅 부정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시장에 수요-공급을 통한 가격결정이라는 자기조정 메커니즘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은 굉장히 날카로운 고찰이며, 이기적 행동동기가 공익적 결과를 낳는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지요. 하지만 이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자기조정 메커니즘이나 이기적 행동동기만큼 중요한 다른 것들이 인간에게는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나가며. 누군가 논어의 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왕조국가로 돌아가자고 한다면

  제 나름의 시각으로 스미스를 이해해보기도 하고, 그가 어떻게 오해되고 있는 지를 살펴보기도 하고, 그의 사상이 갖는 근본적인 한계라 할 수 있는 부분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이 긴 서평을 마치며 서두에서 생뚱 맞게 언급했던 논어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논어를 연구하다가 공자의 사상은 참으로 위대하고 깊이가 있으니 진정으로 우리 현실에 적용할 만하다. 그러니 우선 민주주의를 폐기하고 왕조국가로 돌아가자.’고 한다면 누구라도 뭐 이런 미친 사람이 있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공자의 사상이 위대하지 않고 깊이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우리 시대에 맞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어떤 위대한 사상이라도 그 사상이 펼쳐진 시대의 사회적, 역사적 환경을 고려하여 해석하고, 거기서 얻은 교훈을 현재에 적용할 때는 당시와 현재의 차이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스미스의 사상은 국왕이 금은의 형태로 국부를 독점하려 들었던 절대왕정의 이데올로기인 중상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기획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아이디어가 가진 의미와 교훈도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여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스미스의 사상이 고전적 자유주의니까 우파고 보수다라고 간단히 이야기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는 오히려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대항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그 고전적 자유주의가 초래한 세상이 얼마나 파괴적이고 비참한 모습을 보여줬었는지를 19~20세기의 역사를 거치며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에 대한 수정 작용으로 나타났던 사회의 모습이 복지국가 체제 하의 사회였으며, 그 때가 자본주의의 황금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체제가 한계에 봉착했을 때 그 반동으로 나타난 체제는 보다 발전된 형태의 무엇이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목격한 것은 고전적 자유주의 시즌2’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 결과는 아시다시피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와 1%를 위한 사회입니다.

 사실 스미스의 사상은 서구사회보다는 한국사회에서 훨씬 의미 깊을 지도 모릅니다. 한국사회의 재벌, 관료집단은 스미스가 그토록 비판했던 중상주의에 가까운 정책을 잘도 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스미스의 기획을 현 시대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공자의 아이디어를 적용하고자 왕조시대로 돌아가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스미스의 아이디어를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이해하고, 그 교훈을 현재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이 위대한 사상가의 업적을 제대로 기리는 일일 것입니다

    1%를 위한 자본주의에 저항한 미국민들의 시위는 전 세계인의 공감과 지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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