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금고갈의 공포마케팅

Posted at 2013. 1. 29. 09:56// Posted in 시사

며칠 전에 누나랑 저녁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국민연금 이야기가 나왔다. 큰누나가 전업주부가 되기 전 약 100개월간 국민연금을 냈는데 어쩌면 좋으냐고(국민연금수급자가 되는 최소조건이 기여기간 120개월을 채우는 것). 나는 임의가입해서 120개월을 채우라고 했고, 누나는 (남편 사망 시) 유족연금과 본인의 노령연금이 중복지급되지 않는 문제를 이야기했고, 나는 다시 국민연금의 급여 적절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남편 건강 잘 챙기면서 임의가입하는게 낫지 않겠냐고 했다.

그 와중에 오간 이야기 중에 예의 '기금고갈' 이야기도 나왔는데, 이 '기금고갈의 공포' 마케팅이 새삼 꽤 많이 퍼져있음을 느꼈다. 물론, 일단 적립방식으로 출발한 우리 국민연금의 기금고갈이 바람직한 일은 아니겠지만 공포에 사로잡힐 일은 아니다. 기금이 없어도 부과식(현재의 생산연령이 낸 보험료를 현재의 수급자에게 지급하는 방식)으로 지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처럼 기금 쌓아놓고 연금 지급하는 나라, 몇 안된다. 대부분 부과식으로 하지.

자꾸만 기금고갈 이야기가 나오는 데는 두 가지 의도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보험료를 올리거나 급여를 낮추기 위한 사전 밑밥. 다른 하나는 국민연금에 대한 신뢰성을 흔들어 사적 연금의 공간을 넓히려는 떡밥. 전자는 그래도 (저출산 고령화를 맞이하여 연금보험료율 조정 필요는 있을 수 있으니) 봐줄만한데 후자는 진짜 경계해야 한다. 상식적으로 대부분의 보험회사는 국가보다 부도날 확률이 높다(대한민국이 이제 그 정도는 된다). 따라서 부과방식의 지급까지 고려할 때, 국민연금은 대단히 안전한 연금이다. 실질적으로 가장 안전한 연금이라고 봐야지. 물론 소득대체율이 40%까지 조정된 것을 고려하면, 급여수준의 문제는 있긴 하겠지만.



이번 기초노령연금 도입과 관련해서 이루어진 논쟁만해도 그렇다. 보편적인 연금 성격의 기초노령연금은 일반조세에서 충당함이 옳은가, 사회보장기여금에서 충당함이 옳은가는 따져볼만한 문제지만, 여기에 붙은 '국민연금은 낸 만큼 가져가는 제도'(이건 국민연금의 소득재분배성을 무시)라든가 '국민연금 기금고갈 시기가 앞당겨진다'(이건 기금고갈 공포 마케팅에 근거)라는 논의들은 시작부터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사실 이번 인수위의 국민연금기금 충당설은 그것이 공약일 때는 전혀 논의되지 않다가 당선 후에 튀어나왔다는 점에서 내용을 떠나 절차적으로 잘못된 것이 맞다).

기금고갈 자체가 아무 문제없는 당연한 일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여기에 대해 지나친 공포를 심어주는 것은 그 의도가 의심스럽다는 말이다. 오히려 국민연금 기금 관련해서 논의가 필요한 부분은 이미 300조 이상 적립된 적립금을 어떻게 사용할까의 문제가 아닐까. 지금 모피아의 쌈짓돈이 되어 주가나 환률 떠받치기용 '도시락 폭탄'으로 쓰이는 것보다는 사회적 투자(예를 들면 청년연대은행 같은데 대부한다든가)에 사용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와 같은 문제 말이다. 설사 지금처럼 주식투자 위주로 쓰인다고 하더라도 어떤 기준에 미달하는 - 노동착취가 심하다든가, 환경기준을 위반한다든가 - 기업에는 투자하지 않는 것을 투자규정으로 삼는 것도 논의할만하다.


정리하자.

1) 자꾸 기금고갈 기금고갈하는데, 이거 공포 마케팅의 냄새가 난다.

2) 기금고갈론과 무관하게 국민연금은 안전하다. 어떤 사적연금보다.

3) 기초노령연금 이야기를 하면서 (입장이 무엇이든) 연금기금고갈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4) 국민연금 기금 관련하여 중요한 부분은 오히려 이미 300조 이상 쌓인 국민연금기금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잘 투자하고 사용할까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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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기사링크 클릭

이재용씨 아들의 사회적 배려 전형 국제중 입학 관련, 제도상 문제가 없다는 사람도 있고, 욕을 하는 사람(나 같은)도 있고 해서... 잠시 정리해봤다.

우선 팩트를 정리해보자. 국제중학교에는 '사회적 배려 전형'이라는 것이 있다. 국제중 사배자 전형 대상자는 ‘경제적 배려 대상자’와 ‘비경제적 배려 대상자’로 나누어지며, 전자에는  기초생활 수급자, 한부모 가족 보호대상자(저소득), 차상위계층 등이 후자에는 한부모 가정 자녀, 소년소녀 가장, 조손가정 자녀, 북한이탈주민 자녀, 환경미화원의 자녀, 다자녀 가정 자녀 등이 포함된다. 삼성 이재용 부회장의 아들은 2009년 이 부회장의 이혼으로 ‘비경제적 배려 대상자’인 한부모 가정 자녀에 해당돼 사회적 배려 전형에 지원했다.

자, 그럼 이 팩트를 중심으로 한 번 살펴보자.

일단 사회적 배려 전형 중 비경제적 배려 대상자는 대상의 소득/재산과 무관한 조건을 보는 것이며, 따라서 이재용씨의 아들이라도 제도적으로 결격 사유는 없다. 적어도 제도와 절차에 관한 한 문제가 없다는 삼성측의 주장이 맞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 기사를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뱉은 욕설에 대해서는 사과하는 게 옳다. 내키지 않아도. 물론 그쪽에선 내가 사과하든 말든 관심도 없고 애초에 욕했는지 어쨌는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제도에는 '합목적성'이라는 것이 있다. 즉, 그 제도의 규정이 어떻더라도 운영자체가 그 제도를 수립한 목적에 맞에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배려 전형'의 목적은 무엇일까? 이는 그 이름에서 쉽게 알 수 있는 것처럼 사회적으로 배려가 필요한, 즉 배려가 없을 경우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모종의 손해를 볼 수 있는 대상자에 대한 '배려'를 하는 것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국제중학교가 일종의 '엘리트 교육'이라고 할 때 여기에 특례 입학을 시키는 것은 교육에 있어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일게다. 미국의 affirmative action처럼 일반적으로 성적 등에 의해서만 선발할 경우 국제중이라는 '엘리트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게 별도의 Quota를 배정함으로써 기회의 평등을 보완하고 해당 교육기관 내 학생들의 다양성을 얻는 것이 아마 그 목적이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과연 이재용씨의 아들이 여기에 맞는 사람인지는 의문이다. 누구도 그 사람이 '일반적인 경우에서 교육기회의 평등에서 손해를 볼'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삼성전자 측 관계자 말대로 “이혼한 부모의 자녀는 정서적으로 배려를 받아야 할 대상”일 것이다. 그러나 그 정서적 배려가 왜 엘리트 교육기관에의 특례입학인지는 납득이 잘 가지 않는다. 엘리트 교육기관에의 특례 입학이 '학생의 정서'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기회의 평등'을 위한 것인가? 전자라면 일반적인 공교육을 받는 학생은 '정서적으로 문제가 생긴다는' 이야기인가?

한겨레 기사에서 인용한 것처럼 교육학 전문가는 이 전형방식에 경제적/비경제적 구분이 생긴것은 애당처 경제적 배려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제도 개선 과정에서 경제적 배려 대상자는 증빙조건을 강화하고 선발 할당량을 부여했다. 동시에, 자사고·국제중의 사배자 전형 미달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시교육청이 부유층 자녀들이 섞여들 수 있도록 기준을 완화해 준 점도 있다. 재벌가 자녀의 사배자 전형 이용은 이 허점을 이용한 것인데, 이는 제도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리하자. 

1) 이재용씨 아들의 국제중 사회적 배려 전형 입학에 규정상 문제는 없다.

2) 그러나 제도의 합목적성에 맞지 않는다.

3) 따라서 학교측이 제도의 합목적성을 고려했다면(사회적 배려자 전형이 미달이 아니었던 한은) 지원을 했더라도  
    탈락시켰어야 한다. 물론 현실은 그 반대로 행동했을 확률이 매우 매우 매우 높다.

4) 지원한 측도 적어도 한국사회의 소위 지도층 인사로써 이런 편법은 자제했어야 맞다.

5) 물론 삼성에 이런 걸 기대하는 건 무리다. 법도 안지키는데 양심까지 바라면 쓰나. 있는 법만이라도 잘 지키길
    바라야지.

6) 궁극적으로는,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 제도를 유용하기 쉽게 만들어놓고 행위자가 양심껏 행동하길 바라는 건
    적어도 현재의 대한민국에는 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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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들 앞에서.

Posted at 2012. 12. 25. 22:27// Posted in 시사

추운 겨울이다. 너무 추운 겨울이다. 너무 추워서 춥다는 말 한마디 뱉어내기 힘든 겨울이다.

선거 결과를 보고 나도 절망감을 느꼈었다. 화도 나고, 억울하기도 했고, 누군가가 밉다는 생각도 했고, 요즘 흔히 쓰는 말로 '멘붕'을 겪었다. 하지만 그 이틀 후 회사의 손해배상소송에 시달리던 한 생명이 속절없이 지는 걸 보고 입을 다물었다.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힘내라는 말고, 죽지 말자는 말도, 참고 5년 견뎌보자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도 절실했다. 절실했다고 생각했다. 또 5년 지난 5년처럼 살 수는 없는거 아니냐고 생각했다. 그랬다. 절실한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내 목숨이 백척간두에 서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나에게,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거나 더 나은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선거 결과는 차갑게 말하면 '언짢음'이었을 것이다. 구리디 구린 꼴을 5년 더 봐야 한다는 것. 역사가 후퇴하는 꼴을 5년 더 봐야 한다는 것. 종종 내가 주변인에게 뱉은 '국적이 쪽팔린다.'는, 딱 그런 정도의 감정.

하지만 아니었다. 당장 그 결과에 목숨이 걸려 있다는, 그런 처절함은 아니었다. 따뜻한 방구석에 앉아 욕설을 내뱉을지언정, 차가운 밤공기에 몸을 던질 그런 처절한 절망감은 아니었다. 그래서 감히 아무 말도 뱉을 수가 없었다. 분노의 말도, 어설픈 힐링의 말도, 다짐의 말도....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그분들의 절실함을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었고, 공감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참으로 참담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한 것 없는 내가, 그 힘든 손 한 번 잡아드린적 없는 내가, 희망버스에 몸 한 번 실어보지 않은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감히 힘을 내라. 함께 가자. 용기를 내라. 절망하지 마라. 그런 말, 어찌 감히 내가 입에 담을 수 있으랴. 어찌 감히 내가 떠들 수 있으랴. 

그리고 세 목숨이 더 갔다. 더더욱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물론 그 모든 것이 선거 결과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의 자살률은, 김영삼 때도, 김대중 때도, 노무현 때도, 이명박 때도 쭉 올랐다. 멈추지 않고 계속 올랐다. 그러니 누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자살률이 달랐을 것이다. 그리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노조에 대한 손해배상소송이 급격히 늘어난 것은 이른바 '민주정부' 10년 동안이었고. 양극화가 심각해진 것도, 한진중공업 노조에서 처음 누군가 목숨을 끊었던 것도... 모두 그랬다. 하지만 지난 5년, 그 최악의 5년을 겪으며, 야당들의 약속을 들으며, 노동현장을 방문한 굵직한 야당 인사들을 보며, 그래도 정권이 바뀌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 통합을 말하던 당선자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네 개의 목숨이 지는 동안 아무 논평도, 아무 행동도 나오지 않는다. 기자와의 비공식적인 대화에서 그쪽 인사가 한 말은 고작 "여기서 편을 들어주면 임기 내내 끌려다닌다."는 말이었단다. 허. 세살 먹은 아이 달래는 중인가보다.

화가 난다. 정말 화가 많이 난다. 하지만, 나에게 화낼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분들께 찾아가 손 한 번 잡아드리지 못한 내가, 화낼 자격이 있는지 정말 모르겠다. 그래서 부끄럽다. 너무 부끄럽다. 나의 분노도, 슬픔도, 다짐도, 그 모든게 다 부끄럽다.

정말 춥다. 정말 너무 추운 계절이다. 그래서 뭐라도 해야 하는, 그런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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