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2013년

Posted at 2013. 12. 31. 00:13// Posted in 성찰

그 때 생각해도 지금 생각해도, 내가 포기해야 했던 혹은 포기한 것은 전혀 큰 것이 아니었고, 심지어 내가 뭘 포기한게 있기는 한 건가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조금쯤은 불편함을 무릅쓰겠다는 결정을 한 가장 근저에 자리한 것은 '부끄러움'이었다.

꿈을 쫓아가기라도 하면, 조금은 덜 부끄럽지 않을까. 당장 안부끄러워지는 것은 아니더라도 부끄러움을 조금은 덜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아마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생각이 아니었나 싶다.

몇 해 시간이 흘렀고, 나는 꿈을 쫓고 있다. 내 꿈 뒤에서 묵묵히 날 지원해주는 사람들 덕분에 그렇게 누군가에게 기생하여 꿈을 꾸고 있다. 그런데 어찌된 샘인지 하루 하루 부끄러움은 점점 더 깊어진다.

2013년이 저물어간다. 참 부끄러운 한 해다. 나에게든, 시대에게든. 
다음 해는 좀 덜 부끄러울 수 있을까. 어쩌면 덜 부끄러우려고 할 수록 더 부끄러워지는 것이 우리의 삶인게 아닐까. 그런 거라면 또 다음 해도, 그 다음 해도 나는 점점 더 부끄러워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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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들어간 사회복지 대학원에서 내가 공부하고 있는 세부전공은 '사회보장제도'이다. 이는 한국의 사회복지학과 영역의 대부분을 이루는 임상사회복지 - 아동복지, 노인복지, 장애인복지 등등 - 나 사회복지 행정 - 주로 전달체계 - 보다는 좀 더 거시적인 차원을 다루는 전공이며, 복지국가론보다는 조금 더 구체적인 전공이다. 물론 양자 모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어쨌든 사회보장제도를 공부하다보면, 이런 질문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사회보장제도는 불평등을 완화하는가?"


질문이 '빈곤을 완화하는가'가 된다면 좀 더 쉽게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있다. 빈곤 완화효과를 보여주는 연구야 차고 넘칠 정도니까.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회보장제도가 그 자체로써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대답은 좀 복잡하다. 대개 실질적으로 불평등을 완화시킨 '복지국가'는 애초에 시장소득 단계에서도 상당히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는 거시경제정책을 운영한 경우가 많고, 정치구조에서도 노동자 정당의 힘이 강하고 뭐 그런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사회보장제도'가 그 자체로 불평등을 완화시키는 '독립변수'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솔직히 확인하기 어렵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쉬라(1981)는 이 질문에 대해 사회보장제도가 사회경제적으로 상층에 속하는 집단으로부터 하층에 속하는 집단으로의 소득재분배의 정도는 미약하며, 사회보장제도의 소득이전 효과는 계급 내 소득이전 또는 삶의 주기에 따른 (시간적) 소득이전의 성격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실상 재분배효과가 미미하다는 사실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보장제도가 발달할 수 있는 전제조건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 변혁 없이 - 복지 따위로 - 노동자의 삶이 의미있는 정도로 나아질 수 없다고 보았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생각나기도 하고, 지배적 제도와 가치가 변하지 않는 한은 한 가지 구조의 개혁은 다른 구조의 변화로 부정된다고 봤던 데이비드 하비(1975)가 생각나기도 한다. 원인이 뭐가 되었든, '빈곤과 불평등'에 대한 관심으로 사회보장제도를 공부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우울한 이야기다.


자본주의의 전복...까지는 그렇다치고, 적어도 시장소득에서의 분배 변화 - 즉, 경제 영역의 변화 - 가 불평등 완화의 최소조건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한 진짜 독립변수는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해본다면, 그 답은 답을 하는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많이 다를 것 같다. 나의 경우는 '정치'라고 생각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 그리고 학문적인 개념을 좀 빌자면 - 권력자원이라고 생각한다(물론 권력자원 동원론은 유행이 좀 지났다. 하지만 그 후에 각광받은 제도주의 같은 개념에서도 권력자원은 중요하다. 권력자원의 효과가 제도에 의해 많이 다르게 나타나서 그렇지). 민주주의라는 조건을 무기로 했을 때, 현재의 구조에서 약자가 된 다수가 구조를 바꿀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무기는 결국 '쪽수' 아닐까. 물론 그 내부에서 - 산업사회에 비하면 비교도 안되게 - 다양한 요구와 입장을 조정하고 합의해서 최종적으로 '쪽수의 힘'을 살리는 것은 난망한 과제긴 하지만, 그래도 희망을 걸 데는 거기밖에 없지 않겠나. 그렇게 본다면 '쪽수'에 기반한 '정치'의 힘이 경제도 바꾸고, 복지도 바꿔서 1차 분배와 2차 분배에서의 분배정의를 개선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어느 정도로 어떻게 개선할지를 합의하는 일은 또 엄청난 과제긴 하겠지만.


역설적으로 나는 사회보장제도의 가치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쪽수'의 힘이 살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이 싸움에 나서야 한다. 물론 과거처럼 하나의 의제를 놓고 다 같이 모여서 우르르 나가는 싸움이 될 수 있는 경우는 - 앞서 말한 요구와 입장의 다양성으로 - 많지 않겠지만,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미시적인 투쟁이 이루어지고 그 힘이 느슨하게라도 조직화될 때 '쪽수의 힘에 의한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지 않겠나. 그런데 그런 싸움에 나서려면 적어도, '내가 이 싸움에서 지더라도, 그래서 일터에서 쫓겨나거나, 여타의 불이익을 겪더라도 우리 가족이 굶어죽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먼저 동을 뜨지는 못하더라도 동을 뜬 사람에게 뜨겁게 호응할 수 있지 않을까.


전두환이 그렇게 때려 잡으려던 학생운동이 취직하기 힘들게 만들어놨더니 스스로 없어지더라는 농담이 그냥 농담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공포' 앞에 취약하다. 왜 사람이 이기적이 되는 두 가지 근원이 '탐욕'과 '공포'라고 하지 않나. 만약 사회보장제도가 밑바닥으로 떨어져도 죽지는 않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면, 그 공포는 완화되지 않을까. 그리고 공포가 완화된 사회에서 '쪽수의 힘'은 좀 더 잘 동원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사회보장제도의 정비 자체가 '쪽수의 힘'의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한 편으로 그 힘을 강화할 수 있는 도구이지 않을까.


그래서 난 어쩌면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최근들어 '사회투자론'으로 급격히 수렴되고 있는 복지국가론보다도 좀 더 전통적인 소득과 비용에 대한 경제적 보장으로서의 사회보장제도가 중요한 진보적 의제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그 사회보장제도가 자체로서 불평등을 완화하지 못하더라도,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에서 조금은 벗어나서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울 수 있게 만들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공부 열심히 해야 겠다. 그게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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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경비선택납부제

Posted at 2013. 5. 19. 21:36// Posted in 시사

대학원생 신분이다보니 학내 문제에 관심을 갖는 정도가 현저히 제한되어, 학부 때처럼 학내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문제나 논란의 배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부분적으로는 그와 같은 문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조직'이 없고(이건, 내가 다니는 대학원이 명목상 '전문대학원'이어서 더욱 그렇다), 학부생들과의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다보니(내가 워낙 뒤늦게 공부를 하고 있다보니 학부생들과의 나이/학번 차이가 후덜덜..) 주워들을만한 것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번 학기가 시작할 때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이른바 '자율경비선택납부제'의 등장이다. 이게 뭐냐하면, 과거에는 등록금 낼 때 자동으로 납부되게 되어 있던 학생회비, 교지 비용 등에 대한 납부여부를 개개의 학생들이 선택하도록 한 것이다. 더 무서운 것은, 선택을 안할 경우 디폴트값은(적어도 내가 다니는 대학원에 관한 한) 납부하지 않는다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이건 정확하지는 않다. 나는 '납부한다'를 선택해서 대학원 학생회비 - so called 원우회비 - 를 납부했기 때문에 확인해보지 못했다).

이게 무서운 것은 '납부자 개개인의 선택'을 빙자해서 자치조직을 효과적으로 와해시키는 카드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제도가 시행되자마자 연세춘추, 연세지, 그리고 연세대 총학생회에서 비명소리가 나고 있다.

학생회에서 학생들을 위해 하는 대부분의 활동은 '비배제성'을 가진다. 즉, 학생회가 예를 들어 학생들을 대표해서 학교와 협상을 해서 등록금 인상을 저지했다고 할 때, 그 혜택은 학생회비를 납부한 학생만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학생이 보게 된다. 따라서 적어도 부분적으로 '공공재'의 성격을 갖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샘이다. 이 경우 학생회비 납부를 개인의 선택에 맡기게 된다면, '합리적 행위자'의 선택은 당연히 학생회비를 안내는 것이다. 무임승차를 막을 수 없으니까. 이렇기 때문에 학생회비에 대해서 '개인의 선택권'을 존중하는 것은 맞지 않다. 세금 납부를 '개인의 선택'에 맡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미 한국 사회에서 '개인의 선택에 맡긴다'는 것은 누구도 정면으로 반박하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교리가 되어 있다. 아마도 그것이 이 '자율경비선택납부제'의 도입이 가능했던 논리가 아니었을까. 의사결정과정에 대해 내가 들은 바 없으니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문득 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자치조직을 매우 효율적으로 와해시켜갈 것으로 보이는 이 '자율경비선택납부'의 논리가 노동조합의 조합비 같은 영역으로 확대되어 나간다면 어떻게 될까.

이 제도는 교과부의 권고로 등장했고, 아마도 아직까지 연세대 외의 많은 대학으로 퍼지지는 않은 것 같다. 이게 더 효과를 가지기 전에 이 제도에 대한 전면적인 투쟁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들이 이 제도를 '전가의 보도'로 여기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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