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에 관한 단상

Posted at 2014. 11. 24. 10:31// Posted in 기타

정치학이야 학부에서 수박 겉핥기로 주워들은게 전부고 그나마도 십몇년에서 이십년 전 이야기라 기억도 안나니까 아무런 전문적 근거는 없지만,


민주주의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완전하고, 항상 가장 좋은 대안을 낼 수 있고, 언제나 내가 옳고 니가 틀리다면 무슨 토론이 필요하고 투표가 필요하고 '가장 효율적인 의사결정'을 저해할 수많은 절차가 필요하겠는가. 그냥 실행만 효율적으로 하면 끝이지. 절대선과 절대악이 있는 세상이라면 무슨 놈의 민주주의야. 악마를 타도하고 지상낙원을 건설하면 그 뿐이지.


이 이야기를 뒤집으면 나보다 많이 배우고 존경받고 힘있고 돈많은 사람이라고 해도 틀릴 수 있다는 것도 되고, 아무리 형편없고 이상하고 편협해보이는 이야기에도 일말의 진실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된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인간이고 따라서 우리 모두는 옳을 수 있으며, 우리 모두는 틀릴 수 있다. 여기에서 민주주의가 시작된다는 말이다.


우리 모두 불완전하니까 입장을 갖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 불완전하니까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끼리 토론하고 논의하는 지극히 '비효율적인' 작업을 함께 하자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조금 더 나은 방안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더 좋은 방안이 나오지 않더라도 서로를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끝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에이 씨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은 실컷 했네'라고 생각할 수는 있지 않을까.


그래서 논의의 '규칙'이 중요하고, 그래서 민주주의에서 '과정'이 중요하고, '절차'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설사 당장의 어떤 사안에서는 그 규칙과 과정과 절차를 무시한 것이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지 몰라도, 계속해서 그렇 수는 없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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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퇴직연금 활성화 방안을 내놨다. 공적연금도 부족한데 뭔 사적연금이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래도 이미 존재하는 퇴직연금이니만큼 이를 제대로 운영되게 하여 노후보장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은 중요하다. 독일이나 스웨덴 같이 발전된 연금제도를 가진 국가에서도 기업연금은 중산층을 중심으로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고, 특히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이 많이 낮아진 우리의 상황에서 퇴직연금을 보완적인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은 필요한 조치다.


기사링크 : 정부, 사적연금 활성화 대책… 1년 미만 비정규직도 퇴직연금 가능


문제는 늘 그렇듯이 정부의 조치가 적절한가에 있다. 언론에 보도된 바를 토대로 정부이 '사적 연금 활성화 대책'의 핵심적인 내용을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 첫째, 2016년 300인 이상, 2017년 100∼299인, 2018년 30∼99인, 2019년 10∼29인, 2022년 1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해 단계적으로 퇴직연금 도입을 의무화

▶ 둘째, 근속기간 1년이 안 되는 비정규직 근로자들도 2016년부터 퇴직연금 대상에 포함 

▶ 셋째, 퇴직연금의 자산운용 규제 완화 : 현재 확정기여형(DC) 퇴직연금과 개인형퇴직연금제도(IRP)의 위험자산 보유 한도상승(40% --> 70%) 및 개별 위험자산에 대한 보유 한도 폐지


우선 퇴직연금 도입을 의무화 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기존의 퇴직금 제도가 일시금의 한계나 빈번한 중간정산 등으로 실질적인 노후보장 역할을 할 수 없었던 것은 퇴직연금으로의 전환이 의무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일시금에 대한 선호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질적인 노후보장 수단으로 역할하기 위해서는 연금화가 필수적이고, 이에 따라 퇴직연금 도입을 의무화하는 것은 필요한 조치다.


근속기간 1년 미만 근로자에 대한 퇴직연금 적용 또한 긍정적이다. 그 동안 많은 사업장에서 퇴직(연)금 적립 의무를 피하고자 11개월이 지나면 계약을 해지하는 방식으로 책임을 회피해왔다. 이 조치는 이와 같은 편법을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 한 가지 조치는 앞서 설명한 긍정적인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금번 정부안의 진짜 목적인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위험자산 운용 확대를 합법화함으로써 금융자본의 이해를 극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것이 퇴직연금 도입 의무화와 함께 이루어짐으로써 금융사들은 기금을 자유롭게 운영하며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막대한 자금을 얻게 되었고, 노동자들은 퇴직연금 가입에도 불구하고 더 불안정한 노후의 위험에 노출될 것이다.


노후보장을 위한 자금 운용의 핵심은 '안정성'에 있다. 물론 수익성 추구를 통해 자금이 늘어난다면 좋겠지만, 지나친 수익성의 추구는 반대로 노후보장을 위협하는 요소가 된다. 많은 나라에서 퇴직연금의 자산운용에 대해 여러 가지 제약을 가하고 있는 이유다.


예를 들어 퇴직연금이 잘 발달한 스위스의 경우 자금운용사에서 일정한 수익률을 보장하도록 함으로써 자산운용에 따른 불안정성을 노동자가 아닌 금융사가 감당하도록 하고 있으며, 영국은 사적연금의 확대 결과 노후소득이 극도로 불안정해지는 경험을 한 후 DB형(Defined Contribution: 기여가 아닌 급여가 고정되어 있는 연금) 기업연금의 비중을 높이는 방향으로 제도를 변경한 바 있다. 이와 같이 선진국의 경험은 수익률을 추구하여 불확실한 금융시장에 노후보장을 맡기는 방식이 갖는 위험성을 제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금번 정부의 활성화 방안은 '노후소득보장 강화'를 표면에 내새운 채 실제로는 금융자본의 먹거리를 늘리는 방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진정으로 노후소득보장을 강화하고 싶다면 우선적으로 공적연금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퇴직연금을 포함한 사적연금은 적정한 규제를 통해 안정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위험자산 투자에 대한 제한, 수수료율에 대한 제한, 스위스와 같은 일정한 수익률 보장, 투명성과 관련된 규제 등을 통해 자금을 운용하는 금융사에게 더 큰 책임성을 부여하고, 이를 통해 노후 소득의 안정성을 보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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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와 사람

Posted at 2014. 8. 26. 16:30// Posted in 시사

이번 세월호 특별법과 관련해서 수사권과 기소권을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는 시각과 국민기초생활보장법과 기초연금의 중복지급이 안된다고 보는 시각을 보면 일정한 논리적 공통성이 보인다. 그것은 어떤 제도나 체계의 논리적 타상성 및 일관성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에 집중한 나머지 그 뒤에 있는 사람과 삶의 중요성을 놓치고 있다는 부분이다.

(물론, 특히 세월호 특별법의 경우 -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특히 수사권의 경우 - 는 제도의 논리상으로도 크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대한 논의이므로 이 부분은 접고 이야기한다.)


제도를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제도의 논리적 일관성과 타당성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게 한 번 두 번 예외를 두고 무너지기 시작하면 여러 가지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물론이고, 잘못된 제도는 그 자체를 강화하게 되는 힘을 갖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고 제도 자체의 논리는 그 제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기초생활보장제도나 기초연금의 목적은 빈곤한 사람(혹은 빈곤해질 가능성이 높은 사람)의 삶을 보장하는 것이며, 법체계의 목적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 목적은 모두 사람들의 삶과 관련되어 있다. 그렇게 보면 좀 더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사람들의 삶이 아닐까. 제도의 논리는 그 목적을 달성하는 전제 하에서만 유의미하다.


물론 민주주의의 많은 부분은 과정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어떤 과정은 목적보다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의 민주적인 과정이 지켜지는 한에서 제도의 논리적 정합성은 사람의 삶에 우선하지 않는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들이 소설을 읽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개개인의 삶의 질적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 마사 누스바움의 메세지는, 국가와 제도를 다루는 사람들이 그 자체에 함몰된 나머지 사람들의 삶의 중요성을 놓칠 수 있는 위험을 지적한 것이 아닐까. 바로 지금 우리 사회의 '배운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모습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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