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 김대중 자서전을 읽고

Posted at 2011. 1. 19. 17:02// Posted in 감상

  내가 올해 세 번째로 완독한 책 (두 권짜리니 권수로는 네 권이구나)은 '김대중 자서전'이다. 나는 본래 공정성에 대한 집착이 약간 있는 관계로 자서전은 잘 읽지 않는데 최근 몇 개월간 두 편의 자서전을 읽었다. 하나는 몇 개월 전에 읽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이다' 였고, 다른 하나는 이 책이다. 최근 서거한 두 분의 대통령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지만 이렇다 할 평전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자서전을 읽었다. 운명이다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이 책을 읽을 때도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읽으려고 노력했다. 하나는 이 사람에 대한 호(好)든 오(惡)든 선입견을 최대한 배제할 것, 또 하나는 자서전임을 감안하여 필터링하며 읽을 것. 이 두 자기를 놓치지 않아야 의미있는 독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대중 자서전'은 상당한 두께에 두 권으로 된 책이다. 1권은 출생부터 대통령 당선까지를, 2권은 대통령 시절과 퇴임 후를 다루고 있다. 두께에 지레 겁먹을 필요는 전혀 없는게 책장이 정말 쉽게 넘어간다. 소설책 - 중에서도 노벨문학상 수상작 같은 것 말고 베르나르 베르베르나 파블로 코엘류 류의 가벼운 소설책 - 읽는 속도와 거의 비슷하다. 더구나 한국 현대사에 대한 지식이 약간 있고, '국민의 정부' 시절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책 읽는 속도는 더더욱 탄력을 받게 된다.

  얇지 않은 책을 쭉 읽어가며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우리 현대사의 질곡이 이렇게 한 사람의 일생에 다 담겨 있을 수도 있구나.'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 시대를 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많든 적든 시대 상황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는 줄곧 역사를 만드는 사람의 위치에서 그 많은 사건들을 정면으로 맞이하며 참으로 고단한 삶을 살아온 경우다. 그에 대한 공과를 어떻게 평가하든, 그의 삶 전체에서 드러나는 역사를 대하는 정치인으로서의 진정성만큼은 누구에게나 커다란 울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우선 (이건 '운명이다'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보수언론의 강력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나는 보수언론이 제시하지 않는 Agenda도 많이 접하는 편이고, 그들이 보도하는 내용을 대체로 의심하며 살아온 편임에도, 보수언론이 그려 놓은 김대중/노무현의 모습에 의해 실제 그들을 정확하게 보지 못한 측면이 많았다. 언론에서 다루는 그들보다 그들의 자서전에 그려진 그들은 더 오른쪽에 있었고, 덜 부패했으며, 더 현실적이었다. 좋고 나쁨을 떠나 보수언론의 힘이 (나같은 사람에게조차) 인식을 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은 섬뜩하게 다가왔다. 이제 종편까지 선정되었으니 이들이 어디까지 갈까... 인터넷, SNS가 이들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그런 고민들이 꼬리를 잇게 된다.

   또 하나는 대통령의 힘이 생각보다는 훨씬 제한적이라는 부분이다. 물론 이건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여러 경로로 한 생각이었지만, 한국사회처럼 수구/보수 진영의 힘이 압도적으로 강한 사회에서 한 사람의 소수파 대통령의 - 더구나 5년 단임으로 그쳐야 하는(물론 요즘에는 왜 3년 단임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 역량이 사회 전체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은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제한적이다. 비단 대통령의 정적들 뿐 아니라 대통령의 주변 사람 조차도 때로는 집권자의 의도를 곡해하고 거부하는 일이 잦다. 그러니까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은 아닐 수 있다는 이야기다. 사실 이는 민주주의의 당연한 부분이고 장점이기도 한데, 어떤 경우에는 아쉬운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하긴 그렇기 때문에 더욱 시스템과 토대의 변화가 필요한 것일게다.

   마지막으로 '어떤 악정도 처음에는 선한 의도에서 출발한다.'는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김대중도 노무현도 신자유주의를 의도하지는 않았다. 다만 '세계화'는 필연이고 '지식사회/금융중심경제'는 나라의 발전을 위해 필수적이며, '복지'는 필요하지만 '생산적 복지' - 다른 말로 하면 사회투자국가론 - 가 21세기 형 복지의 대안이다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에 근거한 그들의 정책은 공기업 민영화, 생활의 금융화, 노동시장 유연화, 자본 이동의 자유화, 보편적 복지의 실종을 낳았고, 결국은 금융 부문의 취약성을 증가시키고 양극화를 심화시켰으며, 수많은 노동자의 삶을 피폐하게 했다. OECD 국가 중 가장 비정규직 비중이 높은 나라, '88만원 세대'라는 말로 대표되는 청년에게 희망이 없는 나라의 단초는 불행하게도 민주정부 10년에서 시작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것은 사실이고, 우리가 반MB 뿐 아니라 beyond 김대중/노무현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이제 반 년 가량이 지났다. 2011년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그에 대한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존재는 척박한 한국 정치에 소중한 자산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독재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은 민주화의 투사였으며, 한국경제가 가장 위급한 순간에 등판에서 위기를 넘긴 구원투수였고, 한반도에 평화의 싹을 심은 지도자였다. 그의 아쉬운 부분은 뒷 세대가 짊어지고 가야할 짐이지, 한 평생 치열하게 살았던 그를 비난해야 할 무엇을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가톨릭 신자였던 그가 생전에 바랐을 대로 천국에 갔다면, 고단했던 이승에서의 삶일랑 모두 잊고 편안히 쉬시길...

//

홍대 청소노동자

Posted at 2011. 1. 11. 14:51// Posted in 연대
한 사람의 몸이 어떤 상태인지 이야기하려면 지금 그 사람의 몸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을 조망해야 하는 것처럼 (나의 경우는 오랜 술사랑이 야기한 위염과 식도염이겠지...;;;), 한 사회가 어떤 상태인지 이야기하려면 그 사회에서 가장 소외되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조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11년의 대한민국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분들이 한 둘은 아니겠지만, 비정규직 청소노동자의 문제는 분명이 이 사회의 가장 어두운 부분 중 하나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링크는 이미 1월부터 진행중인 홍대 청소노동자 문제에 대한 기사)
아침에 출근해서 이런 뉴스보다 아시안컵 축구 뉴스를 먼저 찾아본 자신에게 잠시의 부끄러움을 느낀다. (바로 일을 시작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부끄러움은 정녕 없는 것이냐!!! -_-;;)

너무 늦게 하는 참가가 아니길...
혹시 동참을 원하시는 분은 첨부된 사진의 계좌 또는 물품을 <서울 마포구 상수동 72-1 홍익대학교 문헌관 1층 이재용 앞>으로 보내면 된다고 한다.

 

'연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능 학습지 노조 농성장 방문기  (0) 2011.11.25
쌍용차 해고 노동자 치유센터 '와락'  (0) 2011.10.20
//

인생의 회의 (2)

Posted at 2010. 11. 29. 18:44// Posted in 성찰
일제시대라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를 가장 잘 보낸 사람들은 당연히 독립투사들이다. 그 다음으로 잘 보낸 사람들을 꼽자면 만주에서 연해주에서, 혹은 한반도 안에서 일제의 핍박을 받으며 농사를 짓고, 그러면서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본능적으로 파악하여 밤이면 간혹 나타나는 독립투사들에게 밥이며, 옷이며, 돈이며, 잠자리를 없는 살림에도 싫은 소리 하지 않고 제공했던 아름다운 민초들이다.

제일 밑바닥에는 당연히 조선 총독부에서 적극적 친일을 한 자들이나 순사, 혹은 순사의 앞잡이, 이광수처럼 글과 지식으로 일제에 적극 협력한 자들, 친일 지주들이 있을 것이고, 그 바로 위에는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생존을 핑계로 소극적이나마 일제에 협력한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일제의 통치기관의 말단에서 근무한 자들이라든가, 적당히 일제에 협력하면서 부를 축적하고자 했던 상인들 같은 이들이 그쯤 되지 않을까. 그리고 아마도 상위 두 그룹과 하위 두 그룹 사이에는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계층이 있을 것이다. 주로 지식층이면서 자신의 지식을 당시의 체제 내에서 사용한다는 것이 일제에 간접적으로 부역한다는 것을 알고, 이를 거부한 상태로 농사를 짓거나 재산이 좀 있는 경우는 집에서 칩거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지는 못해도 친일도 못하겠다는 상태로 살았던 사람들이 여기에 속할 것 같다.

1) 독립투사
2) 독립투사의 협력자 그룹
3)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람
4) 소극적 부역자
5) 적극적 부역자

너무 도식적인 분류 같지만 사실 어느 시대든 이런 식의 분류는 가능하다. 즉, 체제와 맞서는 사람, 체제와 갈등하는 사람, 체제와 맞서지도 협력하지도 않는 사람, 체제에 협력하는 사람, 체제를 주도하는 사람이라는 구분은 어떤 체제에서든 가능하며, 체제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가정할 때 1~2는 정의로운 사람, 4~5는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 되며, 3는 중립적인 위치가 될 것이다. (사실 중립적인 위치가 가능할 지는 의문이다. 결국 어느 시점에서 2 또는 4로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지 않을까.)

이런 분류가 당대에도 가능할까?

가능할 것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의 체제가 정의로운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는 어렵다. 전적으로 정의롭지도, 전적으로 불의이지도 않다는 애매한 대답이 나오겠지? 그리고 현제의 체제를 기준으로 보면 (식민지와는 달리) '체제 내에서 개혁하려는 사람'도 분류에 포함시킬 수 있을 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개 이 그룹은 체제에 협력하기 마련이다.)

만약 현재의 시대를 '정의롭지 못하다'고 한다면, 단연 그 불의의 핵심에는 '자본'이 있을 것이다. 타인의 몫을 엄청나게 많이 차지하고 ('타인의 몫' 드립은 '인생의 회의(1)' 참조) 그걸로도 모자라서 신자유주의의 광풍하에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흔들어가며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자본은, 당대를 대표하는 '불의'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렇다면 그 불의에 대한 '소극적 부역자'는 누구일까? 혹시 자본의 (그것도 대한민국을 기준으로는 손에 꼽히는 거대 자본의) 이익을 위해 30여년 간 배운 지식과 기술을 열심히 활용하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이 아닐까?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보다는 어떻게 하면 좋은 직장에 들어갈까를 고민하고, 그 결과로 나름대로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는 나야말로 전형적인 '소극적 부역자'가 아닐까. 그리고 만약 자본에게 그 성실함을 인정받아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간다면, 그 때는 '적극적 부역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

나름대로 성실하게 학창시절을 보내고 그 결과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취직한 것이 결국은 불의에 대한 '부역' 이라니... 내 인생에 대한 회의가 심하게 몰려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성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수석  (0) 2012.03.30
교문  (0) 2012.03.19
퇴사의 이유  (3) 2011.03.24
正生加笑  (0) 2011.02.24
인생의 회의 (1)  (0) 2010.11.29
//